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678화 (678/726)

#678화

“참으로 실망이오. 형님.”

눈빛이 변한 천림맹주의 입에서 증오가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지녔어야 할 것들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 결국 내게 칼을 겨누기까지 하는 것이오?”

“지금이라도 이 작태를 멈추거라. 이런 부탁이라면 몇 번이고 계속해 주겠다.”

검성이 천림맹주의 말에, 간절함이 설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제발 멈춰다오.”

단 하나뿐인 형제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 주기를 원했지만.

“하늘의 신관이 명하노라.”

-쿠구구!

천림맹주는 검성의 설득을 무시하며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검게 변색된 기가 천림맹주의 손아귀에 일렁이며 주변에 파동을 퍼트렸다.

그 기운은 본래 천림맹주가 지닌 기(氣)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새로이 옥황상제의 신관이 되어 하사받은 신성력.

검은 별들이 지닌 검은 신력을 가공해 내려받은 힘.

두 힘이 천림맹주가 지닌 기와 섞여 새로이 재탄생한 힘이었다.

지금껏 숨겨 두었던 힘을 방출한 천림맹주가 보이지 않는 관을 쓰듯, 머리 위로 손을 얹자.

-슈르륵. 파아!

검게 변색된 기가 모여들며 황제가 쓸 법한 면류관이 나타났다.

옥황상제에게서 하사받은 성물, 천류관이었다.

천류관이 본래 지닌 권능은 바로 지배.

“하늘의 명을 따라라.”

천림맹주가 하늘 위로 왼손을 뻗으며 목소리에 신성력을 담아 명령을 내리자.

-으윽!

-크으!

천림맹의 무인들이 몸을 들썩이며 반응을 보이더니.

-으아아!

-죽여라!

광기로 가득한 눈빛을 번뜩이며 검성에게 달려들었다.

본래라면, 무림의 우상인 검성을 절대로 공격할 리가 없는 이들.

그러나 천림맹주의 명이 떨어지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일제히 검성을 향해 칼날을 내질렀다.

강제로 조종당하는 듯한 모습.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스릉. 차카캉!

그 모습을 본 검성이 다가오는 천림맹의 무인들을 밀쳐내고 날려 버리며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달려드는 무인들을 모두 베지 않고 몇몇은 뒤로 날리기만 하는 모습.

지금 검성에게 달려드는 무인들 대부분이.

“세가의 식솔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냔 말이다!”

검성이 속했던 세가, 남궁세가의 식솔들과 자제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세가의 가족이자 혈육인 이들이 앞장서 검성을 압박하는 모습.

검성은 항상 자신을 향해 동경을 표하며 미소를 짓던 이들을 베길 망설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 알량한 도의를 지키는 것이오? 참으로 볼썽사납습니다.”

천림맹주가 그런 검성의 모습을 보며 비웃음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세가의 식솔들마저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천림맹주의 태도에.

“도사는! 도의를 지키는 자다!”

검성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소리쳤다.

무림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의.

항상 검성이 추구하는 그만의 신념을 뜻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러한 검성의 신념인 도의는.

“그럼 끝까지 그 의미 없는 도의를 지키십시오.”

역설적이게도 그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천림맹주가 혐오하는 말이었다.

더 큰 대의 앞에선, 작은 도의쯤은 언제든 저버릴 수 있었다.

그가 지키고 이끌어야 할 무림인들 역시 대의를 위해선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천림맹주는 애초에 그런 가치관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새로이 태어날 무림, 천림(天林)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

자신을 믿고 따르던 세가의 식솔들이라 해도, 그들을 희생시키는 것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목숨을 바쳐 희생하라는 천림맹주의 단호한 명령에, 쓰러진 무인들이 재차 검성에게 달려들었다.

심지어.

“그렇군. 자비의 대신이라? 저것을 집중적으로 노려라.”

검성이 지키려는 듯한 소녀, 보살을 손짓하며 그녀를 노리라 명령했다.

그가 모시는 신인 옥황상제에게 보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듯한 모습.

재차 악의를 내뿜으며 달려드는 무인들의 모습에.

“……정녕, 무림의 도의를 저버렸구나.”

검성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아무리 세가의 식솔들이라 해도, 더는 망설임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검성의 칼날에 살심이 깃들고 짙은 강기가 일렁이며 움직이려는 순간.

“많이 곤란해 보이네.”

-샥!

검성의 앞에 레나가 나타남과 동시에.

“녹혈독마신공 – 독혈귀 안개비.”

-푸우! 슈우우-!

짙은 검녹색 물방울이 일렁이는 안개를 흩뿌렸다.

레나가 주변에 흩뿌린 안개가, 주변 일대에 빠르게 퍼져 나가자.

-크어……!

-엑……!

검성에게 달려들던 무인들이 돌연 제자리에서 멈추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레나가 검녹색 안개를 뒤집어쓴 무인들을 향해 손짓하며 명령을 내리자.

-크르르!

-크륵!

검붉게 번들거렸던 그들의 눈동자가 녹빛으로 변하더니, 레나의 명령을 따라 움직였다.

“자비의 대신에게 접근하는 놈들을 저지해라.”

재차 명령을 내리는 레나의 목소리에.

-척! 스르릉!

검성과 보살을 향해 접근해 오던 무인들.

천림맹주가 보낸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레나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뭘 한 것이냐?”

방금 일어난 이변을 본 검성이 레나를 향해 묻자.

“뭐긴, 저 빌어먹을 놈의 지배를 내가 더 강한 지배로 강탈했지.”

-우우웅.

레나가 손아귀를 들어 검녹색의 기운을 넘실넘실 내뿜으며 답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다름 아닌.

“기대하라고. 너희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무림공적의 힘은, 나의 것이 되었으니까.”

무림 역사상 최악의 악인이라 기록된 무림공적.

독마(毒魔)의 무공, 녹혈독마신공(綠血毒魔神功)의 기운이었다.

이전, 처용이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사용했었던 힘의 원류.

녹혈독마신공은 혈액에 깃든 다양한 맹독을 시전자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다루는 독공(毒功)이었다.

독마의 힘을 얻은 레나가 사용한 기술은 독혈귀 안개비.

독 안개에 닿은 인간의 육체와 신경을 감염시키는 기술이었다.

본래는, 맹독 안개에 감염된 이들을 녹이고 고통을 주는 기술.

하지만, 레나는 독마의 기술을 그대로 발현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섞어 재정립했다.

레나가 지닌 어둠과 악령을 다루는 힘, 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독마의 무공.

두 가지 힘이 합쳐진 결과.

“현경의 무인은 무리지만, 화경 초입에 든 녀석 정도는 충분히 조종할 수 있다.”

독 안개에 감염된 이들에게 악령을 빙의시켜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지금, 주변에 은은하게 일렁이는 독 안개.

그 안개 속에는.

-캬아아.

-키이!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형체, 레나가 소환한 악령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크아아!

-크륵!?

천림맹주의 명령에 의해 검성에게 달려드는 무인들이 독 안개에 감염되고 있었다.

감염된 무인들은 모두 레나의 악령이 스며들었고.

-척! 철컥!

같은 천림맹의 무인들을 향해 칼날을 돌려 치켜세웠다.

다만, 독에 감염된 이들을 무한정 조종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레나가 직접 조종하여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들은 백여 명 정도.

그 외에 감염된 이들은, 육체를 마비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당장, 내가 도울 수 있는 조치는 이것뿐이야. 더 나은 걸 바라지 마라. 검성.”

레나의 입에서 엘리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녀석을 믿은 자비의 대신을 배신할 생각은 안 하리라 믿는다.”

“……고맙다는 말부터 하도록 하지.”

짧게 침묵한 검성이 엘리스의 말에 고맙다고 답했다.

그리고.

-스릉. 저벅.

망설임이 사라진 눈빛으로 칼자루를 강하게 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래 도와줄 수 없어, 저기 무시무시한 녀석이 날 쫓아오고 있거든.”

그 모습을 본 엘리스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오래 도울 수 없다고 말했다.

엘리스가 잠시 시선을 돌린 방향에는.

[어딜 도망치느냐!]

-콰아아아!

강렬한 어둠을 사방에 내뿜으며 분노를 포효하는 대악마.

바알이 엘리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본신의 힘을 개방한 그라면, 순식간에 엘리스의 지척에 도달할 법했지만.

[쉬이 지나갈 순 없을 것이오.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

-차캉! 쿠구구!

바알을 향해 황금빛 용이 휘감긴 언월도를 겨누며 신력을 내뿜는 무신.

태무신이 그의 발걸음을 저지하고 있었다.

[방해하지 마라!]

-콰아아!

바알이 눈앞을 가로막는 태무신을 향해 어둠의 폭포를 쏟아 내었지만.

-스릉! 촤아아-!

태무신이 언월도를 아래에서 위로 크게 휘두르며 황금빛 초승달을 그려 내자.

-촤아아-!

바알이 쏟아 내는 어둠의 폭포가 반으로 갈라지며 주변에 흩어졌다.

동시에.

[내리쳐라! 묠니르!]

-콰르르릉!

뒤이어 무림 세계에 강림한 천둥의 신, 토르가 바알을 향해 벼락처럼 달려들며 묠니르를 내리찍었다.

그 외에도.

[티라루인.]

[죽어라! 대악마!]

토르를 따라 무림 세계에 강림한 대천사.

미카엘과 우리엘이 토르의 뒤를 따라 바알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날파리 같은 것들이-!]

-쿵! 콰아아아!

바알이 땅을 강하게 밟으며 소리치자, 그의 발밑이 갈라지며 어둠이 화산처럼 뿜어져 나왔다.

주변 일대를 휘감고 모조리 파괴하는 강렬한 어둠에.

[크흠.]

-스릉. 촤아!

태무신이 언월도를 앞으로 치켜세우고 쏟아지는 어둠을 가르며 뒤로 밀려났다.

바알의 힘을 상쇄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긴 했지만, 완전히 막아 내지는 못한 모습.

다른 이들 역시, 끝없이 솟구치는 어둠의 힘을 온전히 막아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다시 바알이 엘리스를 향해 전진하려는 순간.

-쾅! 쾅! 콰쾅!

바알의 주변으로 5미터 크기의 검은 비석이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어딜 그리 급하게 가?]

-스르륵.

지면에 퍼진 어둠 속에서 니알라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니알라가 주변에 떨어진 비석을 향해 손짓하자.

-스스스……!

그 주변에 일렁이며 퍼지는 바알의 어둠이 점점 흩어지며 힘을 잃어 갔다.

[……네년! 이 권능은!?]

바알이 검은 비석에 일렁이는 권능, 벨페고르의 권능인 나태를 알아보며 읊조리자.

[이번에도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 많거든? 많이 즐겨 주라고.]

니알라가 바알을 향해 도발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태무신과 다른 성좌들, 마지막엔 니알라까지.

엘리스를 향해 나아가려는 발걸음이 계속 저지되자.

[크아아-!]

바알에게서 분노를 가득 담은 포효가 뿜어져 나왔다.

그 영향인지.

-쿠구구!

바알이 쏟아 내는 어둠의 힘이 두 배, 세 배로 증폭되며 더욱 거대해졌다.

그와 연결된 판데모니움의 성역, 악의 제전에서 더욱 강한 힘을 끌어온 결과였다.

[이것 참, 무섭네.]

그 모습을 본 니알라가 긴장감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아무리 많은 준비를 갖추었다고 해도, 상대는 판데모니움의 절대자.

주신급 성좌 여럿이 달려들어도 저지하기 힘든 최강의 대악마였다.

“아무리 성좌 여럿이 달려들어도, 악의 제전에서 직접 힘을 끌어오는 바알을 저지하기엔 부족할 거야.”

레나 역시,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바알을 보며 긴장감을 보였다.

적들의 계획을 망치기 위해, 스스로가 미끼를 자처하여 바알을 자극한 상황.

천교의 계획을 망친 것은 좋았지만, 현재 상황이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력의 거대한 축을 담당했어야 할 처용은 디아블로의 결계에 갇혀 있었다.

디아블로 역시 바알과 같은 삼천마.

처용이 언제 그의 결계를 부수고 나올지는 미지수였다.

성좌들이 무림 세계에 강림하여 힘을 보태 주고는 있지만, 대악마들을 상대로 전력은 비등한 상황.

그 외에도, 천림맹과 마수에 맞서는 무림인들과 그들을 돕는 헌터들.

각지에서 벌어지는 힘 싸움 역시 서로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개개인의 강함은 지구의 헌터들이 압도적이라고 해도, 천림맹과 마수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질과 양의 싸움.

어느 한쪽의 승산을 딱 잘라 단정 짓기엔 힘든 정황이었다.

사실…… 현재 상황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쿠구구! 쿠구구구-!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듯, 무림 세계 전체가 불길하게 진동하는 현상.

바알이 내뿜는 어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닌, 다른 불길한 무언가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느낌이었다.

레나, 아니 학살의 마녀였던 엘리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

“조크 – 크타니드. 놈이 이 무림 세계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다.”

다름 아닌, 악의 종주가 무림 세계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천교가 강제로 집행한 제례 때문인 듯 보였다.

속으로는 급하게 진행한 제례이니만큼, 실패하기를 기원했지만.

‘바람대로 될 리가 없지.’

레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운’이 따라 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마.

‘뱀파이어들이 성공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바알이 펼친 마기의 장막이 거둬진 순간, 은밀하게 움직인 이들.

천교의 제례를 방해하기 위해, 루나를 포함한 소수 정예들이 천림맹의 본거지로 잠입한 상태였다.

레나는 그들을 믿기로 하고 현재 상황에 집중하기로 마음먹고는.

“검성, 이번에도 망설이면, 내가 네놈을 강시로 만들어 버릴 거야.”

검성을 향해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짙은 우려가 일렁이는 레나의 말에.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저벅.

검성이 앞으로 한 발 나아가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엔 더 이상 망설임 따위 없었다.

“오너라, 서존아.”

-스릉.

앞으로 나아간 검성이 천림맹주를 향해 검 끝을 겨누며 말했다.

“네가 일으키는 이 재앙을…… 내 손으로 끝내주겠다.”

“끝나는 것은 네놈이다!”

검성의 말에 본색을 드러낸 천림맹주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소리치고는.

-스릉. 쿠구구!

검을 뽑고 검게 변색된 기운을 크게 휘감으며 검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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