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화
중원에 검은 벽이 나타나고 하루가 지났을 시점.
천마신교의 동쪽, 중원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장소에서는.
-검진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저 괴물들을 몰아내라!
도복을 입은 무인들이 나무 목책을 방패 삼아 분투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다가오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끝을 날카롭게 다듬은 나무 목책 너머에서는.
-캬아아!
-크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세우며 돌진해 오는 검은 괴물들이 가득했다.
-콰직! 콰지직!
두꺼운 나무 목책 따위는 단번에 부러뜨리고 으스러뜨리는, 평범한 인간은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
판데모니움의 마기를 흡수해 더욱 흉포해지고 강해진 몬스터, 마수들이었다.
눈앞의 인간들을 모조리 찢어발길 기세로 덤벼드는 마수들이었지만.
-막아라!
-버텨야 한다!
그런 괴물들과 맞서는 인간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무공을 단련한 무인들이었다.
-금강방진(金剛防陳) 합장!
-금강방진(金剛防陳) 합장!
황갈색의 승려복을 입은 무승(武僧)들이 일렬로 서고는 동시에 손을 뻗자.
-타아앙! 타앙!
무승들의 손바닥에서 압축되어 뻗어 나간 기(氣)가 돌진해 오는 마수들을 크게 밀어 내었다.
마수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고 발이 엉키며 나자빠진 순간.
-지금이다!
-반드시 머리부터 쳐라!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라!
천마신교를 상징하는 검붉은 도복을 입은 무인들이 검을 빼 들고 마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 외에 화산, 청성 등 각 문파를 상징하는 도복을 입은 무인들도 가세했다.
각기 다른 소속의 무인들이 서로의 장점을 살려 마수들을 몰아내는 모습.
-촤아아!
무인들이 힘을 합친 결과 마지막 마수의 머리가 베어지며 모두 처치되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이겼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전에.
-캬아아!
-크아!
또다시, 마수 떼가 나타나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인들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지친 숨을 고르며 다시 진형을 갖추었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마수들을 보며 무인들이 대비를 갖출 때.
-크롸라아아!
주변 일대를 묵직하게 울리는 거대한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고.
-후우우욱!
산등성이 너머로 붉은빛의 거대한 무언가가 날개를 크게 펼치며 날아올랐다.
산 위로 떠 오른 태양처럼, 강렬한 열기를 내뿜으며 나타난 존재는 다름 아닌 드래곤.
-콰아아! 화르르륵-!
래드 드래곤이 마수 위를 날아오르며 열기가 가득한 브레스를 내뿜자.
-화르륵! 화륵!
-크에에-!
달려오던 마수들이 화염 속에 휘감겨 불타오르며 괴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인페르노 웨이브!”
래드 드래곤의 목 위에 타고 있던 이가, 손을 치켜들며 소리치자.
-화륵! 콰콰콰-콰쾅!
불타오르는 땅이 한 번 더 크게 불타오르며 화염의 파도를 만들어 내었다.
그 강렬한 불길이 거칠게 휘몰아치며 마수들을 재차 불태웠고.
-파사사……!
결국, 화염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 마수들이 잿더미가 되며 사그라졌다.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린 괴물들을 본 무인들이 멍한 표정을 내비칠 때.
“그럼, 수고하세요!”
드래곤에 타고 있던 헌터, 현아가 무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도움에 감사드리오! 현아 소저.”
그 모습을 본 소림사의 무승 중 한 명이 현아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감사를 전했다.
현아를 알아본 몇몇 무인들도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전했고.
“마티, 이번엔 북쪽으로.”
[알았다고.]
-후우욱!
그 인사를 받은 현아와 레드 드래곤, 마티네아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며 사라졌다.
천마신교의 동쪽을 습격한 마수들이 모두 정리되자.
“허허, 타 세계의 용이라니.”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천마신교의 거점.
주변이 훤히 보이는 산꼭대기의 전각 위에서, 전방을 바라보는 신승이 헛웃음을 흘렸다.
“무림 또한, 그저 넓은 우물에 불과했다라…… 요즘 들어 새삼 깨닫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교주.”
“나 또한 공감하는 바요. 소림방장.”
이어지는 신승의 말에 옆에 있던 천마신교의 교주, 중검천마가 답했다.
“서로 적이었던 우리가. 이렇게 같은 선상에 있으니 말이오.”
“거대하고 사악한 적 앞에서 도의로 하나가 되는 법이지요.”
중검천마의 말에, 신승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소림사를 주축으로 전 무림맹의 잔재를 잇고 있는 문파들.
그런 무림맹과 적대 관계였던 천마신교.
하나의 적을 앞에 두고 그들은 서로 손을 잡았다.
그 적은 바로 악신들의 성운인 천교와 그들에게 충성하는 천림맹이었다.
다만, 천림맹을 제외한 무림의 모든 세력이 손을 잡았다 하여, 천림맹을 이길 수 없었다.
신의 도움을 받고 괴물들까지 부리는 천림맹의 힘은 막강했으니까.
반면에, 천마신교를 제외한 다른 무림 세력들은, 장기간의 봉문으로 인해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들이 힘을 모아 봤자, 천림맹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라한의 진인께서 우리를 도우시니, 아직 이 무림에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신승은 희망 어린 목소리로 미소를 담아 말했다.
무림에 크나큰 위기를 불러일으키려는 악신들의 성운인 천교.
그들과 싸우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도와주러 온 이들이 있었다.
“부디, 이 무림의 위기 앞에서만큼은, 서로를 향한 원한은 잊고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갑시다.”
신승이 중검천마와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을 둘러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우리 역시 원한을 접어 두고 함께 하겠소.”
“소림방장의 의견에 동의하오.”
중검천마가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장문인들 역시 신승의 의견에 동의했다.
***
중원을 감싸는 검은 장벽이 생겨난 이후 나타난 마수들.
마수들은 중원을 제외한 각 지역에 퍼져 땅을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학살해 나갔다.
다행히, 천마신교와 소림사를 주축으로 하는 무인들이 나서서 마수들과 맞서 싸웠고.
처용을 따라 무림 세계로 온 헌터들의 도움까지 더해져 마수들을 수월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더 지나가고 처용이 예고한 이틀째 되는 날.
-우우웅.
천마전의 앞에 황금빛 게이트가 열리고 다수의 사람이 걸어 나왔다.
지구의 각 길드에서 차출한 정예 헌터들.
진호를 포함한 스피릿 팀의 헌터들.
에스라 대륙, 아나샤가 직접 선정하여 파견한 아라한 왕국의 기사단.
그리고.
“여! 우리도 왔다고.”
처용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드러내는 연아와 연화까지.
각 세계에서 지원을 온 이들이 추가로 무림 세계에 도착했다.
“보아하니, 꽤 성과가 있었나 봐?”
처용이 무림 세계로 온 연화와 연아를 보며 묻자.
“나중에 보고 놀라지나 말라고.”
연아가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우리 역시, 신명의 단서를 쥐었으니까.”
연화가 오른손을 들고 주먹을 강하게 쥐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처용은 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잠시 응시하고는.
“무엇을 얻었지?”
진지한 목소리로 무엇을 얻었는지를 물었다.
얼핏 들으면, 정확한 답을 추릴 수 없는 추상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심해(深海).”
“해상(海上).”
둘은 처용의 질문을 이해했다는 듯, 진지한 분위기로 답했다.
연아는 심해(深海).
연화는 해상(海上).
둘이 답한 대답은 두 사람이 걷는 아라한의 길이자 각자가 선택한 운명이었다.
차후 신명을 얻게 된다면, 그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택.
“좋은 길이네,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처용은 두 사람이 선택한 운명, 아라한의 길을 좋은 판단이라 평가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쯤 되니, 조금은 이해가 된다고 해야 할까?”
둘은 어째서 처용이 좋은 선택이라 말했는지 이해가 된다는 듯 말했다.
연화는 해전무신의 신관, 연아는 카투라의 신관.
둘 다 바다와 관련된 신격의 신관이니만큼, 수(水) 속성과 아주 친숙한 이들.
그와 관련된 아라한의 길을 걷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가야 할 아라한의 길을 찾았다 함은.
-우우웅.
신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처용은 연화와 연아에게서 은은하게 일렁이는 신력을 감지하며 미소를 짓고는.
“그래도, 절대 무리하지 마. 이번엔 진짜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으니까.”
앞으로 벌어질 법한 일을 경고하며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아.”
“이제 나름 사릴 줄 안다고.”
처용의 당부에 연화와 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많은 전투 경험이 쌓인 둘은 스스로가 지닌 전력과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무모하게 제 목숨을 저버릴 리가 없었다.
특히.
“그 삼천마, 메피스토였나? 두 번 다시 정면 승부는 안 할 거야.”
연아는 태룡사 습격 당시 마주했었던 삼천마, 메피스토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절대 죽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메피스토의 일격을 한번 허용한 순간, 정말 죽을 듯이 아팠으니까.
동시에,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그로 인해, 아무리 불사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무적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배운 게 있어서 다행이네.”
처용은 그런 연아의 말을 듣고 긍정적인 변화라 생각하며 말하고는.
“슬슬, 우리도 준비하지.”
뒤에 있던 루비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림을 돕기 위해, 각 세계에서 차출된 지원군이 다 도착한 상황.
그 외에,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다른 준비도 대부분 마친 상황이었다.
이제,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옥황상제의 계획이 실현될 것이고 악의 종주가 이곳에 직접 강림한다.
그런 상황만큼은 반드시 저지해야 했다.
‘검성…….’
아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긴 했지만.
“……가지.”
-파직! 콰르릉!
처용은 마음을 다잡고 한 줄기의 벼락으로 변하며 하늘로 쇄도했다.
-우웅. 스르륵.
루비아 역시 마나로 몸을 감싸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처용의 뒤를 따랐다.
처용과 루비아가 다시 나타난 곳은 바로 천마신교와 중원의 경계선.
-우우웅!
반투명한 검은 장벽, 마기의 벽이 펼쳐진 곳과 가까운 장소였다.
“왔나?”
미리 그 장소에 있었던 듯 보이는 레나가 마기의 장벽을 노려본 채, 처용에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최고의 미끼께서 바알을 밖으로 꿰어 낼 차례야.”
처용이 레나, 정확히는 그녀 안에 있는 엘리스를 향해 물었다.
짧은 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 상황.
지금부터는 엘리스의 몫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런 처용의 물음에 엘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혹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
그럼에도.
-저벅.
엘리스는 마음을 다잡은 듯, 앞으로 한 발 나아가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스르르륵. 우웅!
그녀의 손아귀로부터 뻗어 나간 어둠이 마기의 장벽에 닿자.
-스륵. 우우웅.
마기의 장벽에 엘리스의 어둠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마기의 장벽과 엘리스가 서로 연결된 듯한 모습.
준비를 마친 엘리스가 짧게 심호흡하고는.
“안녕 바알?”
마기의 장벽 너머에 있을 존재.
정확히는 악의 제전 중심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을 존재.
“거대한 어둠께서 열렬히 나를 원하나 봐? 짝사랑에 빠진 인간도 그렇게 구애하지는 않는다고.”
바알을 향해 메시지를 전하듯,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게 들인 노력이 가상하니까. 내가 데이트 한 번쯤은 해 줄까 하는데. 어때?”
자신에게 집착을 보이는 바알을 도발하듯, 혹은 유혹하듯 손짓하며 말을 잇는 엘리스.
“이리 나와서, 나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지.”
엘리스가 씨익 미소를 짓고 손을 까닥이며 말을 마치자.
“바알을 도발하기엔 조금 약한 거 아닌-.”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엘리스는 바알을 끌어내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거나 한 게 아닌, 그저 말로 도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무리 바알이 엘리스에게 집착한다고 해도, 고작 이 정도 도발에 걸려들까? 싶었으니까.
그러나, 처용의 부정적인 생각과 의견이 무색하게도.
-쾅-!!
검은 장벽 너머에서 무언가가 강렬하게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스르륵! 스륵!
반투명하게 안쪽이 조금 비쳤던 검은 장벽이 확 짙어졌다.
이젠, 빛 한점 보이지 않는 칠흑의 장벽이 된 모습.
마기의 장벽에 변화가 생기고 그곳에서 일렁이던 마기가 확 짙어진 순간.
-쾅! 쾅! 콰드드-득!
검은 손톱이 돋보이는 창백한 악마의 두 손이 장벽을 뚫으며 나타났다.
악마의 손은 꿰뚫고 나온 장벽의 부서진 부분을 강하게 쥐더니.
-쿠구구! 쿠구! 쩌저적!
마기의 장벽을 좌·우로 찢으며 벌리기 시작했다.
검은 벽을 세로로 쪼개며 문을 열 듯, 열어젖히려는 듯한 모습.
이윽고 찢어진 마기의 장벽이 어느 정도 벌어지자.
[네…… 이…… 년……!]
-콰아아아!
새까만 이빨을 아득바득 갈며 광기와 집착 어린 표정을 내비치는 대악마.
창백한 바알의 얼굴이 찢어진 균열 너머로 나타났고 그 눈동자가 정확하게 레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알이 무시무시한 집착과 광기 어린 마기를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내자.
“……허.”
처용이 짧은 헛웃음을 흘리며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바알은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게 무엇이든 강하게 집착하는 녀석이다.”
엘리스는 어째서 바알이 자신의 도발에 걸려들었는지, 짐작하는 듯 이야기했다.
바알의 입장에서, 엘리스는 그토록 잡고 싶은 존재.
당장이라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싶은, 세상의 단 하나뿐인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보물을 손에 쥐기란 쉽지 않았고 매번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가기만 했다.
그런 단 하나뿐인 보물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났다?
당연히.
[내 앞에 제 발로 나타난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마!]
-쿠구구구!
강한 집착과 소유욕을 지닌 대악마는 눈앞에 나타난 보석을 제 손에 쥐기 위해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런, 강렬한 집착을 보이는 바알의 모습에.
“내가 이렇게나 매력적인 사람이야.”
엘리스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고.
“……그래, 악마한테 인기 많아서 좋겠다.”
처용이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그리고.
“균열이 완전히 벌어지면, 판데모니움의 악마들이 쳐들어오겠군.”
진지한 눈빛으로 바알과 그 뒤에 도사리는 악마들의 기척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