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4화
-화르륵.
푸른 화로에 불이 켜지며 순혈 의회가 열림과 동시에.
-스르륵. 스륵.
열 개의 좌석이 나타나며 그 위로 로브를 뒤집어쓴 순혈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필 이런 바쁜 시기에, 왜 순혈 의회 소집을 요청한 것인가?”
순혈 의장인 Ⅰ, 옥황상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불편한 목소리를 내었다.
“엥? 영감탱이가 순혈 의회를 소집한 게 아니었어?”
그런 옥황상제의 말에 순혈자 Ⅵ, 로키가 의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 세계에 변종이 나타났길래, 똥줄 타서 우리를 소집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크으음……! 그 변종이 나타난 건 맞지만, 짐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니라.”
이어지는 로키의 말에 옥황상제가 불편함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흠…… 정말로? 천교의 성지가 개박살났다고 우리 감찰관께서 말해 주시던데?”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느니라!”
로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고개를 기울이며 사실을 언급하자, 옥황상제가 고함을 내질렀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노인네가 목청도 좋아 참…….”
분노 어린 옥황상제의 고함에 로키가 귀가 아프다는 듯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비며 읊조렸다.
그리고.
“Ⅵ이 걱정을 표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의장.”
순혈자 Ⅳ, 페르세포네가 옥황상제와 로키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승의 난동으로 시간은 벌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에 불과하니까.”
“이제, 그쪽에서 뭘 해 줘야 한다고.”
걱정 어린 페르세포네의 말에, 순혈자 Ⅷ, 아프로디테가 의견을 더했다.
아직, 신계의 신들은 저승에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
하지만, 전대 관리자인 관철의 대신을 주축으로 각 성운의 성좌들이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승의 반란이 진압되는 것은, 솔직히 시간문제였다.
성운의 시선을 저승에 집중시키는 동안, 옥황상제와 판데모니움 측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그보다도, 의장이 아니라면 누가 순혈 의회 소집을 요청한 건가?”
순혈자 Ⅹ, 콘슈로 위장한 오시리스가 다른 순혈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다른 순혈자들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순혈 의회 소집을 요청한 건, Ⅸ다.”
옥황상제가 순혈 의회 소집을 요청한 순혈자가 누구인지 말하자.
“Ⅸ?”
“……무슨 이유로?”
로키와 페르세포네를 포함한 다른 순혈자들이 의문을 표했다.
Ⅸ는 최근 순혈 의회의 일원이 된 순혈자, 헤라클레스였으니까.
그런 순혈자들의 반응에, 헤라클레스, 아니 헤라클레스로 위장한 자.
“……내가 순혈 의회 소집을 요청한 게 그리도 놀라운 일인가?”
처용이 다른 순혈자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처용의 말에.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올림포스 감옥에 갇힌 하계종들이나 처리해 주는 게 어때?”
순혈자 Ⅶ, 아르테미스가 처용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 아르테미스의 반응에 처용이 코웃음을 치고는.
“Ⅷ가 네 신관이었던 인간에게 섣불리 접근했다가 어떻게 되었더라?”
낮은 목소리로 Ⅷ를 눈짓하며 말했다.
“위험한 짓을 남에게 떠넘기는 개 버릇은 여전하군. Ⅶ.”
“으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조금 열 받네?”
아프로디테가 처용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말했고.
“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그게 차라리 더 도움 될 것 같으니까.”
처용이 경멸 어린 목소리로 아르테미스를 힐난했다.
“죽고 싶냐!”
-탕!
아르테미스가 처용의 도발에 분노를 담아 소리치며 팔걸이를 내리쳤다.
순혈자들끼리의 감정싸움이 점점 길어지자.
“그만!”
옥황상제가 멈추라는 듯, 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왜, 순혈 의회를 소집한 건가? Ⅸ.”
처용을 노려보며 순혈 의회를 소집한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옥황상제의 물음에 처용이 곧장 대답했다.
“첫 번째는 Ⅵ과 Ⅳ이 말한 ‘걱정’ 때문이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다간, 다 같이 망할 것 같으니까.”
첫 번째 이유는 앞서 페르세포네와 아프로디테가 언급한 대로, 정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판데모니움의 대악마 중 일부가 우리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다름 아닌, 대악마가 배신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처용의 말이 울리자.
“뭐라!?”
옥황상제가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드러냈고.
“대악마가…… 도대체 왜?”
“그분을 배신했다고?”
순혈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모든 순혈자가 경악과 의문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일 때.
“이런…….”
단 한 명의 순혈자, 대악마의 서열 한자리를 차지한 로키가 침음을 흘렸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군. 짐작하고 있었던 건가? Ⅵ.”
그 모습을 본 처용이 로키의 심경을 파악하듯, 묻자.
“하아…… 이런, 이런…… 쯧쯧.”
로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감찰관 나으리께서 몇몇 대악마들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하긴 했는데…….”
“정녕 대악마가 배신한 것이 확실한 것이냐?”
이어지는 로키의 말을 들은 옥황상제가 처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악마가 배신한 게 확실하냐는 옥황상제의 물음에.
“니알라 – 크타니드가 나태의 대악마를 회유했다. 내가 헤르메스를 통해 직접 확인한 사실이지.”
처용이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안개의 대악마 알레인…… 우리 감찰관 나으리가 이 사실을 알면, 뒷목 좀 잡겠는데.”
로키가 니알라가 대악마였을 시절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마를 짚었다.
항상 웃음기와 장난 어린 목소리로 가볍게 행동하던 로키.
그런 그가 나름 진지한 목소리로 심각한 듯, 읊조리고 있었다.
현재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의장, 상황이 이러하니, 그대가 어떻게 변종과 성운들을 상대할지 들어봐야겠다.”
중요한 소식을 전한 처용이 옥황상제를 바라보며 말하자, 다른 순혈자들도 옥황상제를 응시했다.
하지만.
“…….”
옥황상제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열지 않고 침묵했다.
“……다 같이 사이좋게 멸망하자는 건가?”
처용이 그런 옥황상제를 향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웃기는군, 같은 고귀한 자들도 그저 수단을 달성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었나.”
“헛소리!”
비아냥대듯, 이어지는 처용의 목소리에 옥황상제가 반발하듯 강하게 소리쳤다.
그때.
“으음,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서둘러야겠는데? 늙다리.”
심각한 표정으로 읊조리던 로키가 옥황상제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마치 옥황상제가 준비한 계획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로키의 말에.
“크흠, 서두를 필요 없다. 계획은 코앞으로 다가왔느니라.”
옥황상제가 불편한 침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지구에서 실패한 그 의식 말인가?”
처용이 옥황상제의 대답에 무언가를 떠올린 듯, 물었다.
“그것보다 더 크다. 문이 완전히 열리면…… 그분께서 직접 하계에 강림하실 테니까!”
고개를 저은 옥황상제가 자신이 준비 중인 계획이 무언인지 조금 더 명확히 이야기했다.
시스템의 균열을 부수는 천교의 제례.
그 제례를 더 크게 발전시켜 시스템의 장벽을 부수고 악의 종주를 직접 강림시키는 것.
이것이 옥황상제의 계획이었다.
“……그런가?”
“그분께서 직접 강림하신다면, 끝이군.”
순혈자들이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위대한 존재께서 직접 강림하신다라, 놈들이 방해하지 못하게 막아야겠군.”
처용 역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동시에.
‘그렇단 말이지?’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
순혈 의회가 끝나자.
“……알아냈다.”
처용이 감았던 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악의 종주를 이 땅에 직접 강림시킬 생각이더군.”
마침, 처용을 기다리고 있던 레나를 바라보며 알아낸 정보를 이야기했다.
“지구에는 이미 소식이 전해졌을 테고.”
처용이 이야기한 정보를 들은 레나가 입을 열었다.
순혈 의회에 잠입해 있는 간자는 처용만이 아니었다.
바로 스스로의 정체를 콘슈로 속이고 있는 오시리스도 있었다.
아마, 오시리스는 순혈 의회가 끝나자마자, 처용이 알아낸 정보를 라와 황룡에게 전했으리라 생각했다.
적들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알아냈고 이제 잘 대처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
그러나.
“후, 계획을 알아낸 건 좋은데, 문제가 있다.”
레나의 입에서 답답한 한숨이 흘러나오더니, 엘리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문제?”
“……후, 밖으로 나가지. 직접 보는 게 빠를 거야.”
-샥.
처용의 물음에 엘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스르륵.
그런 그녀를 따라 처용 역시 지금 있는 장소, 천마전 밖으로 향했다.
둘이 다시 나타난 장소는, 천마전의 지붕 기와 위.
“흐음? 아스터 놈이 만든 결계랑 비슷한데…… 마기로 되어 있군?”
처용이 지붕에 올라서 주변을 둘러보자마자,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바로 천산을 기준으로 동쪽, 중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지금.
-지이잉.
하늘 높이 솟구친 반투명한 검은 벽이 솟구쳐 있었다.
에스라 대륙에서 아스터 교단이 펼쳤던 백색의 결계와 비슷한 모습.
다만, 생명력을 뽑아 만든 그들의 결계와는 다르게, 짙은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간 천교 놈들이 착취한 생명력을 바알이 악의 제전에 바쳐 펼친 거다.”
엘리스는 중원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검은 결계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서두를 필요 없다. 계획은 코앞으로 다가왔느니라.
순혈 의회에서 옥황상제가 했었던 말.
예상하기로는 처용이 전한 소식을 듣고 준비 중이던 일을 서두른 듯 보였다.
“다가가는 것은 물론이고 저대로 방치한다면, 저 넓은 지역이 고스란히 검은 대지로 변할 거다.”
“으음…… 내가 힘으로 부숴야 하나?”
이어지는 엘리스의 설명에, 처용이 잠시 생각하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처용은 아스터가 생명력을 끌어모아 펼친 결계도 단번에 갈라 부수었었다.
그때처럼, 눈앞의 결계 역시, 힘으로 부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네가 부술 순 있겠지, 단번에 다시 복구된다는 점이 문제겠지만…….”
엘리스가 처용의 말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처용의 힘이라면, 앞을 가로막는 결계를 단번에 부술 수 있어 보였다.
문제는 결계를 부순다 해도, 순식간에 복구된다는 점이었다.
“바알을 소멸시키거나, 악의 제전을 완전히 박살 내거나 해야 해.”
“……저걸 무력화할 다른 방법이 있나?”
그 질문에 침음을 흘리며 잠시 생각하던 앨리스는.
“저걸 해제하려면, 음…… 마기를 공급하고 있는 바알을 밖으로 끌어내면 될 거야.”
막 떠올린 방법을 이야기했다.
천교가 그동안 모은 생명력과 바알의 거대한 마기.
두 에너지가 악의 제전에 모여 합쳐지며 만들어진 결계가 바로 중원에 펼쳐진 결계였다.
그 결계의 힘을 약하게 만들거나, 무력화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결계를 유지하는 강력하고 거대한 마기의 주인.
바알을 밖으로 끌어내어 결계 유지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바알을 밖으로 나오게 만드느냐가 문제지.”
악에 제전에 있을 바알을 어떻게 밖으로 유인해 불러내느냐였다.
엘리스의 말에 처용 역시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바알을 확실하게 밖으로 끌어낼 방법…….”
“바알을 강하게 자극할 만한 무언가라…….”
처용과 엘리스가 읊조림과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마치, 서로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고 그 생각을 확인하는 듯한 모습.
“바알을 자극할 만한 확실한 ‘미끼’가 있는데?”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처용의 말에,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말이야.”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방금 처용이 한 말, 바알을 자극할 확실한 미끼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가 자극을 받아 둥지 밖으로 뛰쳐나올 만한 미끼.
바알이 유일하게 집착하는 존재.
미끼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지금껏 미끼가 벌인 짓이 있는데, 덥석 물고도 남으리라 생각한다.”
“……젠장.”
학살의 마녀가 되었어야 할 운명이었던 인간과 한때 학살의 마녀였던 인간.
레나·엘리스였다.
처용과 엘리스가 서로의 생각이 같다는 것을 확인했고.
“전면전이 일어날 수도 있어.”
엘리스가 앞으로 있을 위험성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옥황상제의 계획은 무림 세계를 감싸는 시스템의 장막을 완전히 부수는 것.
그로 인해 악의 종주와 악신들을 한꺼번에 강림시켜 이 세계를 집어삼키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결계가 사라지는 순간, 무림 세계의 존폐를 결정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저 안이 검은 대지로 변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검은 결계를 응시한 처용이 엘리스를 향해 묻자.
“길면 일주일, 짧으면 나흘 정도?”
엘리스가 대충 자신이 짐작한 시간을 이야기했다.
대답을 들은 처용이 잠시 생각에 잠기며 침묵하고는.
“……최소 이틀,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겠군.”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후 입을 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