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화
처용이 독 지대 협곡에 발을 들이자, 들려온 티케의 목소리와 악마의 비명.
“……?”
독 지대 협곡에 도달한 처용이 티케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자.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꽈드득! 지이익-!
납작하고 긴 넝쿨을 쥐고 소리치는 티케와.
“이건 치료가 아닌- 크아악!”
티케가 쥔 넝쿨에, 꼬리와 다리가 묶인 바질리아 종족의 악마 하나가 고통을 내지르고 있었다.
자칫, 티케가 바질리아를 붙잡고 고문하는 듯 보였지만.
“제대로 낫고 싶으면 움직이지 말랬지?”
-휘리릭. 꽈아악!
티케는 전신에 상처가 난 바질리아에게 납작한 넝쿨을 붕대처럼 감아주고 있었다.
여신이 악마의 상처 치료를 돕는 신기한 광경.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속으로 실소를 삼키며 다가가자.
“……어?”
티케가 진호와 함께 온 처용을 바라보며 점점 눈이 크게 떠졌다.
처용 역시 티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모습이 눈에 더 확연히 들어왔다.
길었던 금발은 머리 뒤로 질끈 묶어 돌려 맸고 길었던 치마의 아랫단을 찢어 허벅지와 무릎에 묶은 모습.
마치, 오지에 낙오된 귀족 영애가 야생에 적응한 듯한 모습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달 동안 상당히 고생한 듯 보였다.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이질적인 티케의 모습에 처용이 뭐라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할 때.
“……으흑.”
티케가 돌연 울상을 짓더니.
“왜 이제야 왔어!”
-타탓!
처용에게 달려와 어깨를 붙잡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 나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그치!?”
“……이 야생 속에서 상당히 잘 적응한 것 같은데요?”
집으로 돌아가길 가길 기대하는 티케의 말에, 처용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올림포스 주신의 최측근으로서 나름 대접받으며 살아왔을 여신인 티케.
그녀가 이런 험한 곳에 떨어져 적응하고 있는 모습이 의외이면서 놀랍기도 했다.
그런 처용의 말에.
“너는 나를 뭐로 보는 거야.”
티케가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답하듯 말했다.
“내가 제우스 님 시녀였을 시절에 온갖 일을 다 해 봤거든?”
“그래서…… 이곳에서 악마들을 돌봐 주고 있었던 겁니까?”
처용이 티케의 말에 다시금 질문하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안드로말리우스의 권속 악마족인 바질리아 종족.
독 지대 협곡에 자리를 잡아 살아가는 이들로, 다른 악마족에 비해 세력과 힘이 약한 이들이었다.
그런 악한 악마족인 바질리아 중 일부가 심한 부상을 입은 듯한 보였다.
마치, 다른 악마들에게 습격이라도 받은 듯한 모습.
“……에효, 그럼 어쩌냐. 살아남으려고 다른 악마들 피해서 아등바등 사는 녀석들인데.”
티케가 그런 바질리아들을 둘러보며 한숨 어린 목소리로 답하자.
“의외네요.”
처용이 그런 티케를 향해 진심으로 의외라는 듯, 작게 놀랐다.
대부분의 선천적 신격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하등하게 여기는 성향이 있었으니까.
같은 신격이라도, 후천적 신격이라면 배척하고 깎아내리는 그들.
그런 그들에게 이종족들, 특히 악마족들이라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 아드리아랑 친하거든? 걔랑 같이 라미아들을 돌봐줄 때도 있었다고.”
티케가 라미아 족의 여왕인 메두사, 아드리아를 언급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선천적 신격들과는 다르게, 이종족에 대한 반감이나 거부감이 없다시피 한 신이었다.
라미아의 여왕인 메두사, 아드리아와 오랜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드리아한테 들었는데, 라미아랑 이 녀석들이 원래 하나의 부족이었다고 하더라?”
올림포스의 시조인 가이아.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드리아와 안드로말리우스.
그런 둘에게서 파생된 종족인 라미아와 바질리아.
서로가 다른 세계로 갈라져 나아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 그들이었지만, 그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었다.
“다친 녀석들 돌봐 주는 것 정도야 뭐, 나한테 일도 아니었고.”
“그렇군요.”
처용이 티케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답할 때.
-콰아아아!
독 지대 협곡의 입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폭음이 울리더니.
“크윽! 이것들이 비겁하게!”
-파아아!
강렬하게 폭발하듯 터지는 마기와 함께 협곡의 숲 일부분이 날아가며 안드로말리우스가 나타났다.
전신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본래의 모습까지 개방한 상태.
그리고.
“안드로말리우스.”
“끈질기구나.”
안드로말리우스 앞에 다른 두 대악마가 나타나며 적대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한 명을 대낫을 쥐고 있는 말의 머리를 한 대악마 푸르카스.
다른 한 명은 사형집행자가 들 법한 외날 도끼를 든 염소 머리의 대악마.
판데모니움 서열 51위 발람이었다.
두 대악마가 자신들보다 서열이 한참 낮은 말석의 대악마를 상대로 연합하여 공격하는 모습.
-스릉! 스르릉!
푸르카스와 발람이 대낫과 도끼를 동시에 휘두르며 안드로말리우스를 공격하려 들자.
“정녕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냐!?”
-차카캉!
안드로말리우스가 손에 쥔 칼날들을 교차하며 그 공격을 막아 내며 소리쳤다.
본래, 판데모니움의 악마들은 서열 교체 혈전을 제외하고 서로 싸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서열이 높은 대악마가 하위 서열의 대악마를 이유 없이 공격하는 것 또한 금지였다.
악의 종주가 불필요한 분쟁과 싸움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명백한 명령 위반이었다.
그럼에도.
“네놈의 서열이 낮은 것을 탓해라.”
“약한 악마는 잡아먹힐 뿐.”
푸르카스와 발람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 내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아느냐!”
-쿠구구!
안드로말리우스는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두 대악마를 상대로 강렬한 마기를 내뿜으며 버티고 있었다.
본래라면, 푸르카스와 발람 둘 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이길 수 없는 대악마들.
그런 그들을 동시에 상대하며 버티고 있었다.
푸르카스와 발람은 생각보다 잘 버티는 안드로말리우스의 힘에 의문을 드러냈지만.
-쿠구구! 차카캉!
이내, 생각을 그만두고는 마기를 더 강하게 끌어 올리며 공격을 이었다.
서열이 높은 두 대악마가 동시에 공격하는 이상, 얼마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때.
-샥! 휘리릭!
안드로말리우스를 밀어붙이는 두 대악마 중 하나.
푸르카스의 뒤에 강한 바람이 몰아치며 진호가 나타났고.
“결전기 – 아머드 스케일(Armored Scale)!”
-촤라라락-! 차락!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발광하는 군청색의 긴 비늘 망토가 나타나 진호의 전신을 감쌌다.
동시에.
-스르릉! 차카캉!
진호가 두 쌍검을 사선으로 내리긋고 올려치며 푸르카스에게 기습 공격을 가했다.
-촤아!
“이! 네놈은!?”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등과 목 언저리가 베인 푸르카스가 황급히 대낫을 크게 휘두르며 진호를 쳐냈다.
안드로말리우스를 몰아붙이던 두 대악마 중 한 명이 진호의 기습을 받아 떨어져 나가자.
“오랜만이다. 안드로말리우스.”
-샥!
남은 두 대악마, 안드로말리우스와 발람 사이에 처용이 나타나며 차가운 목소리를 흘렸다.
“변종!?”
안드로말리우스가 처용을 보고 기겁을 내지르며 뒷걸음질 쳤고.
“저리 꺼져라!”
발람은 처용을 알아보지 못한 듯, 고함을 내지르며 도끼를 내리쳤다.
안드로말리우스와 달리, 처용과 직접적으로 마주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용은 도끼를 내리치는 발람을 차갑게 바라보며 멸절을 꺼내 쥐고는.
-스릉. 까가강!
머리 위로 멸절을 치켜올리며 발람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내었다.
그 모습을 본 발람이 의문과 경악을 드러냈다.
고작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는 존재가 대악마의 공격을 한 손으로 막아 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처용을 모습과 겉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기운을 느끼고는.
“서, 설마?”
이내, 처용의 정체를 눈치챈 듯 읊조렸다.
그 순간.
“태극천체일도 - 단절.”
-지이잉. 사각!
처용이 멸절에 강기와 신력을 압축하여 태극천체일도를 소환하고는 발람을 사선으로 강하게 베었다.
검은 선과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금빛 선이 얇게 그어졌고.
-사각! 촤아아!
그 선이 발람의 도끼와 육체를 세로로 갈라 버리며 신력과 강기를 퍼트렸다.
처용이 내지른 단 한 번의 반격을 버티지 못한 발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며 고꾸라졌다.
동시에.
-쏴아아!
처용이 내지른 단절, 압축된 강기와 신력이 앞으로 쇄도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다른 대악마.
“크허억!?”
-촤아!
푸르카스를 크게 베며 지나갔다.
발람을 단번에 처치함과 동시에, 그 뒤에 있던 푸르카스까지 노린 것.
푸르카스가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당해 몸을 휘청이며 괴성을 지르자.
“폭풍을 가르는 칼날.”
그런 그를 상대하고 있던 진호가 강하게 쥔 쌍검 날에 강기를 압축하고는.
“이십연격!”
-촤자자자자!
푸르카스의 전신을 난도질하며 칼날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푸르카스를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선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그어졌고.
“크-!”
-툭!
전신이 깊게 그어지며 치명상을 입은 푸르카스가 대낫을 떨구며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차캉! 촤아아!
양손의 쌍검을 어깨 옆으로 교차한 진호가 가위를 치듯 강하게 내지르자.
-촤아아!
푸르카스의 머리가 잘려 나가며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처용이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앞의 대악마를 완전히 끝장내 버린 것.
“내가 다음에는 머리를 가져간다고 말했지?”
-차캉! 스릉!
바닥에 떨어진 푸르카스의 머리를 응시하며 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독 지대 협곡을 습격한 두 대악마가 죽임을 당하자.
-대, 대악마들께서 당하셨다!
-도망쳐!
바질리아 종족을 제외한 다른 악마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쳤고.
-우웅. 우우웅.
조금 떨어진 곳에 생성된 검은 게이트 속으로 몸을 던지며 사라졌다.
“쪼개진 판데모니움이 다른 세계하고만 연결된 게 아니었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독 지대 협곡 외곽에 열린 몇 개의 블랙 게이트.
그곳을 통해 습격해 온 다른 악마의 군세들과 안드로말리우스를 공격한 상위 서열의 악마들까지.
대충 상황을 짐작해 볼 때, 판데모니움에서 큰 혼란이 벌어진 것 같았다.
아마도.
‘판데모니움이 던전화가 된 이후, 크타니드의 통제가 되지 않는 건가?’
판데모니움이 갈가리 쪼개진 영향으로 각 지역이 단절된 상황.
그 틈을 노려, 다른 악마들이 보다 약한 세력의 악마들을 습격해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듯 보였다.
본래 그들의 삶은 약육강식이었으니까.
안드로말리우스가 말석의 대악마이니만큼, 그와 그의 세력이 우선적으로 노려진 것 같았다.
다만.
“뭐지? 그동안 다른 대악마를 잡아먹기라도 했나? 상당히 강해졌는데?”
처용이 의문 어린 목소리로 안드로말리우스를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말석의 대악마가 그보다 20위나 높은 대악마 둘을 상대로 버텼다?
나름 잘 싸우는 안드로말리우스의 직접 눈으로 봤기에, 조금 의문이었다.
그런 처용의 의문에.
“네, 네놈들 때문이다! 허구한 날, 나를 소환해 끊임없이 싸워대는 바람에-!”
안드로말리우스가 울분 섞인 심정을 담아 소리쳤다.
갑자기 본래의 힘이 강해진 안드로말리우스.
그 의문은 당사자인 안드로말리우스가 가장 먼저 생각했었다.
본래의 모습을 개방하지 않고도 록탄을 해치웠을 때부터 줄곧 의문을 품어 왔었으니까.
그런 의문을 쭉 품어 오다가.
-……설마?
머지않아, 본인 스스로가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헌터들이 자신을 불러내 사냥할 때마다 성장하듯, 자신 또한 본래의 힘이 조금씩 늘어났다는 것.
항상 당하면서도, 헌터들의 공격에 두 번 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결과 전투 지식이 쌓였고.
심지어 꾸준히 반복하기까지 했다.
-이런 젠장!
안드로말리우스는 자신이 맞으면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격분했었다.
“……설마, 수련탑의 혜택을 받았다고?”
그런 안드로말리우스의 말에 처용이 헛웃음을 지으며 읊조렸다.
안드로말리우스의 힘이 강해진 궁극적인 이유.
그 이유는 그도 수련탑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수련탑은 그 누구든 노력만 한다면, 강해질 수 있도록 돕는 시설이니까.
본의가 아니라고 해도, 안드로말리우스 또한, 수련탑에서 분투했기에 그 혜택을 받은 것이었다.
“내게 원한이 많을 텐데?”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보이며 묻자.
“크윽…….”
안드로말리우스가 침음을 흘렸다.
처용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
게다가.
-한처용이 그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 말인즉, 놈과 어느 정도 대등하게 싸웠다는 말이겠지?
디아블로가 안드로말리우스에게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처용이 악의 종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에스라 대륙의 주신을 소멸시켰다.
심지어 눈앞에서 서열이 높은 두 대악마를 순식간에 처치하는 모습까지.
아무리 본신 상태의 안드로말리우스라 해도, 지금의 처용을 이길 수 없었다.
“디아블로가 조크 – 크타니드를 배신하려 한다고?”
처용이 그런 안드로말리우스를 잠시 응시하고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나, 나 역시 자세한 건 모른다. 아니 솔직히 말하지, 더 깊게 알고 싶지 않았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 처용이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안드로말리우스를 강하게 노려보며 원하는 것을 물었다.
그런 처용의 질문에.
“독 지대 협곡 일족들의 생존.”
안드로말리우스는 망설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지금껏 대악마 말석의 자리를 지킨 궁극적인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
대답을 들은 처용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하듯 읊조릴 때.
[나 좀 그쪽으로 보내 주지 않을래?]
처용의 머릿속으로 니알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니알라의 요청에 처용이 소리 없는 의문을 표하고는.
-우우웅.
그녀의 부탁대로 태룡전의 열쇠를 사용해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으음~ 나온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오랜만에 온 것처럼 느껴지네.”
처용이 연 황금빛 게이트 속에서, 니알라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안녕? 안드로말리우스.”
니알라가 안드로말리우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전하자.
“아, 알레인 공…….”
안드로말리우스가 움츠러든 목소리로 읊조렸다.
처용과 니알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보는 안드로말리우스의 모습에.
“전에 약속한 게 있었지? 이것도 인연이니 내 한 번은 너를 도와주겠다고.”
-저벅.
니알라가 안드로말리우스 앞으로 다가가며 조금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속여서 나름 미안한 기분도 있으니,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도와주마.”
“……?”
진심으로 도와주겠다는 니알라의 말에, 안드로말리우스가 눈치를 보며 소리 없는 의문을 표했다.
“나한테 맡겨 주지 않을래? 대악마는 대악마가 맡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말을 마친 니알라가 처용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맡겨 달라 말하자.
“……알겠습니다.”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