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화
에스라 대륙의 전쟁이 끝나고 블랙 게이트가 막 발생했을 당시.
“크으…… 윽!”
머리를 울리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고 침음하던 진호가 조금씩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동시에.
‘갑자기 나타난 검은 게이트…….’
자신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었는지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등 뒤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은 게이트.
그 게이트에 말려 들어간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고 나선으로 휘몰아치는 어둠 속에 갇혔던 기억이 났다.
바다 회오리 중심에 빠진 것처럼, 이리저리 휘말렸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
정신을 차린 진호가 눈을 번쩍 뜨며 주변을 살폈다.
검은 게이트 속으로 빨려들기 직전.
-탁!
도와주려는 듯, 티케가 손을 뻗어 진호를 잡아 주었었다.
문제는.
-어?
그런 티케도 검은 게이트 안으로 같이 빨려 들어왔다는 점이 문제였다.
진호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고는.
“……하.”
바로 옆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여신, 티케를 보며 안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주변의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쏴아아-.
보랏빛으로 빛나는 굵은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그 아래 형성된 깊은 웅덩이.
독기가 느껴지는 은은한 보랏빛 안개와 본 적이 없는 식물들이 보였다.
코를 탁 쏘는 독기가 느껴졌지만, 진호는 극한의 수련을 받은 헌터.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칠 만한 독이 아니었다.
나름 신격인 티케 역시 독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 진호와 티케는 폭포의 물줄기가 퍼지는 웅덩이의 외곽 뭍에 있었다.
폭포에 떨어져 정신을 잃은 사람이 물살에 떠밀려 온 것 같은 모습.
아니.
‘물살에 떠밀려 왔다기엔, 너무 안전한 장소 아닌가?’
보통, 운 좋게 폭포에 떨어져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에 반쯤 잠겨 있어야 정상이었다.
반면에 진호와 티케는 물살이 치는 곳에서 다섯 보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진호와 티케를 구해, 뭍으로 옮겨 준 듯한 모습.
진호가 폭포가 떨어지는 물줄기와 그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할 때.
“정신을 차렸나?”
진호의 뒤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소리.
그럼에도 시스템을 통해 그 말의 뜻이 해석되는 목소리.
게다가 진호에게 있어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진호가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뒤를 휙 돌아보자.
“신기하군, 나약한 생물인 인간은 그 물에 닿는 것만으로도 녹아 없어질 텐데.”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리자드맨과 비슷한 형태의 보랏빛 악마.
코브라를 연상케 하는 머리가 진호를 지긋이 응시하며 말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판데모니움의 대악마 중 하나인 안드로말리우스, 그의 수족인 베무스였다.
수련탑에서 안드로말리우스와 싸울 당시, 진호와 매번 맞붙었던 악마.
“베무스!?”
-탁. 우웅!
예상치 못한 적과의 조우에 화들짝 놀란 진호가 가슴 윗부분을 두드리며 마나를 주입했다.
-지잉.
목에 걸린 아티팩트가 짧게 점멸하며 반응을 보였고.
-촤라라락!
진호의 몸 위로 짙은 잿빛의 슈트가 생겨나며 입혀졌다.
동시에.
-우웅. 차카캉!
두 손에 그가 주력으로 다루는 쌍검이 나타나 잡혔다.
헌터들의 연말정산 당일, 혁수가 카투라의 허물로 만들었다며 선보였던 아티팩트.
그 아티팩트의 완성품으로, 스피릿 팀의 헌터들에게는 모두 하나씩 지급된 물건이었다.
카투라의 허물이 가공된 슈트와 무기, 소모품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아공간 기능도 내장되어 있었다.
“본신 상태라고? 도대체 뭐냐?”
순식간에 무장을 갖춘 진호가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베무스에게 소리치자.
“나야말로 묻고 싶다. 왜 독사의 폭포 한가운데에 너희들이 나타난 것인지.”
베무스가 역으로 의문을 담아 되물었다.
“아무리 인간들이 우매하다고는 하나, 구해 준 이에게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인가?”
“네가 우리를 구했다고?”
이어지는 베무스의 말에 진호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누군가가 쓰러진 자신과 티케를 구해 준 듯 보였던 조금 전 상황.
폭포 한가운데에 진호와 티케가 나타났다는 베무스의 증언과 그가 구해 주었다는 말까지.
“……왜 우릴 구한 거냐?”
생각을 잇던 진호가 베무스에게 묻자.
“나도…… 모르겠군.”
베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읊조리듯 말했다.
“적이었던 내가 너희들을 왜 구했을까? 그저 변덕이었던 것인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한 베무스의 말이 이어졌고.
“아니면…… 독 지대 협곡이 이러한 꼴로 변해 버렸기 때문인가?”
고개를 들고 하늘 위를 바라보며 읊조리듯 답했다.
“……이건?”
그런 베무스의 말에, 진호가 잠시 하늘을 응시하더니, 이내 눈이 점점 커졌다.
보랏빛 구름이 일렁이는 하늘의 끄트머리가 갈라지며 검은 우주가 드러난 모습.
마치, 세계의 일부분이 깨져 나간 듯 보였다.
그리고 진호는 이러한 현상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가끔 던전의 ‘끝’에 도달했을 때.
진호 또한 던전이 이론적으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판데모니움이 던전이었다고?”
눈으로 보이는 광경에, 진호가 혼란스러워하며 읊조리자.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갑자기…… 판데모니움이 무너지며 이렇게 변해 버렸지.”
베무스가 갈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묻지, 왜 우리를 구한 거냐?”
진호가 그런 베무스를 노려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악마가 그저 변덕으로 인간을 구했다고? 그럴 리가 없지.”
“…….”
무언가 목적이 있으리라 확신하는 진호의 말에, 베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호의 말이 맞는 듯, 혹은 그냥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
“목적이라…….”
베무스의 입이 열리며 그 대답이 흘러나오려는 순간.
“……이런!”
돌연, 눈살을 확 찌푸리며 베무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인간, 아니 이진호, 네가 은혜를 아는 전사가 맞다면, 그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기를 바라지.”
-탓!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서 어디론가 급히 질주해 나갔다.
“대답은 해 주고 가야 할 거 아냐!”
순식간에 사라지는 베무스를 향해 소리친 진호는 그를 따라나서려다 잠시 멈칫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는 티케.
진호는 그런 그녀를 잠깐 살피고는.
-타앗!
이내 베무스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바위 산맥을 뛰어넘고 우거진 숲을 해치며 베무스를 추적해 나갔다.
쭉 달려 나가자, 진호의 감각에 다수의 기척과 베무스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이윽고 진호의 발걸음이 멈추고.
-차카캉! 콰쾅!
전투가 일어난 듯한 소음과 폭음이 울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짚과 나뭇가지를 쌓아 만든 듯 보이는 움집들이 모인 마을.
리자드맨과 비슷한 외형을 지닌 악마족, 바질리아 종족의 거주지였다.
그곳에서는.
-캬아아!
-케헥!
거주지의 주민들로 보이는 바질리아 종족의 악마들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쿵! 콰쾅!
-크하하!
그들보다 거대하고 우람한 덩치를 지닌 악마들이 바질리아 종족을 공격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바질리아 종족은 다른 악마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고 소수만이 다른 악마와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차카캉!
양손에 낫칼을 든 베무스가 가장 앞에 서서 악마들의 공격을 받아치고 있었다.
“정녕, 판데모니움의 규칙을 위반하려는 것인가?”
베무스가 눈앞의 악마들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이것이 본래 판데모니움의 규칙이었다!”
-후우욱!
역삼각형 근육질의 황소 머리를 한 거대한 덩치의 악마가 베무스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스릉! 휘리릭!
베무스가 양손의 낫칼을 사선으로 휘두르며 공격을 피해 낸 후.
-촤라! 사가각!
낫칼로 나선을 그리며 악마의 팔을 난도질했다.
-까가강! 까강! 촤아!
강철을 갈고리로 긁는 듯한 굉음이 울렸고.
“성가신-!”
-후욱! 콰아!
황소 악마가 핏물이 튄 두꺼운 팔을 크게 후려치듯 휘두르며 소리쳤다.
-슥! 촤아!
그 육중한 공격을 민첩하게 피해 낸 베무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낫칼을 고쳐 잡았다.
그때.
“후워어어!”
베무스의 뒤에서 또 다른 황소 악마가 나타나 우악스러운 오른손을 내뻗으며 기습했다.
그 모습을 본 베무스가 양손에 쥔 낫칼을 교차하며 공격에 대비하려는 순간.
“폭풍을 가르는 칼날!”
-샥! 스르릉!
황소 악마의 뒤에서 쌍검을 쥔 이진호가 칼날을 교차하며 나타났다.
“허리케인 블레이드!”
-휘리릭! 촤자자자-작!
진호가 팽이처럼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황소 악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날을 휘두르며 훑고 지나갔다.
-탓!
진호의 발이 땅에 닿자.
-촤아! 촤아아! 푸화!
단단한 근육질로 가득한 황소 악마의 전신에 깊은 자상이 새겨졌고.
“쿠헤엑!?”
전신에서 피를 뿜은 황소 악마가 괴성을 내지르며 무릎을 꿇고 고꾸라졌다.
“뭐냐!”
“……인간? 어떻게 된 거냐!?”
그 모습을 본, 바질리아 종족을 습격한 악마들이 경악을 드러냈고.
“흠?”
마을을 습격한 악마들을 저지하던 베무스도 의문을 드러냈다.
“이거 이거, 반격하는 그 칼솜씨가 무서운 거였지-.”
폭풍 같은 연속 공격을 쏟아부어 악마를 처치한 진호가 베무스를 향해 말하고는.
“공격력은 형편없잖아? 악마 양반.”
-스릉!
다른 황소 악마를 향해 칼끝을 겨누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하는 거냐?”
베무스가 의문을 표하자.
“뭐긴, 난 은혜를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 아니라는 거지!”
-스릉! 타앗!
진호는 가장 덩치가 큰 다른 황소 악마에게 쌍검을 굳게 쥐고 달려들며 답했다.
마을을 습격한 가장 강한 악마 중 하나를 진호가 처리하고 가세한 덕분에.
“제길!”
“하위 종족들 따위가!”
-우웅. 우우웅.
점차 밀려나던 악마들이 검은 게이트 속으로 몸을 던지며 도망쳤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순간.
“이제 다시 묻지, 왜 우리를 구한 거냐?”
-철컥.
진호가 베무스에게 칼을 겨누며 물었다.
아까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이은 것.
“말석의 대악마가 무슨 명령이라도 내렸나?”
“…….”
질문을 잇는 진호의 말에, 베무스가 잠시 침묵하고는.
“……안드로말리우스 님은 지금 안 계신다. 그리고 그건 내 독단이었다.”
진호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 주었다.
갑자기 독 지대 협곡에 나타난 진호와 티케를 구한 건 베무스의 독단이었다는 대답.
그 대답에, 진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릴 때.
“내가 너희를 구한 건…… 어쩌면 ‘보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무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어째서 진호와 티케를 구했는지에 대한 진심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안드로말리우스 님은…… 디아블로 님과 함께 위대한 존재를 배반할 생각이시다.”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진호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이었다.
안드로말리우스를 따르는 바질리아 종족 중에서 베무스만 알고 있는 사실.
“지금 판데모니움은…….”
베무스의 입에서 이야기가 계속되자.
“……!”
그 대답을 들은 진호는 커다래진 눈으로 소리 없이 경악했다.
***
“……그렇게 된 거야.”
진호가 다시 마주한 처용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알아냈는지에 대해 모두 이야기하자.
“무사했다니 다행이군요.”
처용은 그런 진호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다행이라는 말을 전했다.
아무리 극한의 훈련을 받은 진호라 해도, 판데모니움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가 무사한 것만 해도, 나름 다행이었다.
게다가.
“지구에서는 며칠 안 됐었는데, 두 달이었다니…….”
지구에서는 진호가 블랙 게이트 속으로 사라진 지 고작 며칠.
반면에, 진호가 판데모니움에서 보낸 시간은 무려 두 달이었다.
간혹 발생하는 던전 안과 밖에서의 시간 흐름이 달라지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진호와 티케는 생각보다 판데모니움 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것.
그리고.
“그보다도…… 디아블로와 안드로말리우스가…….”
처용이 진호가 전해 준 말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듯, 읊조렸다.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진호가 처용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안드로말리우스 님은…… 디아블로 님과 함께 위대한 존재를 배반할 생각이시다.
베무스가 전해 준 사실, 대악마들이 악의 종주를 배신하려 한다는 말.
대악마는 모두 충직하게 악의 종주의 명령을 따르는 존재들.
그들이 왜 악의 종주를 배신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용 역시 얼마 전까지는 대악마들이 악의 종주에게 열렬히 충성하는 이들이라 생각했었다.
다만.
“모든 대악마가 악의 종주에게 충성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지금 저희 성역에…….”
전 안개의 대악마였던 알레인과 벨페고르의 배신.
메피스토 역시, 엘리스와의 거래를 받아들였기에, 악의 종주를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로 인해 처용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악마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조금 옅어져 있었다.
하지만, 앞서 악의 종주를 배신한 대악마들은 각각의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군요.”
안드로말리우스와 디아블로는 배신의 명분과 이유를 모른다는 것.
그것이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나도 그래, 베무스 그 양반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서 더 말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
진호 역시 처용의 의문에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그래도 말이야…….”
진지한 목소리로 처용에게 말꼬리를 흐리며 말을 이었다.
“네, 은혜를 받았으니, 협상 정도는 응해 보죠.”
처용은 진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 대답하고는.
-탓! 타탓!
진호와 함께 던전이 되어 버린 판데모니움의 성역 중 하나, 독 지대 협곡으로 향했다.
이윽고 협곡의 입구, 바질리아 종족의 악마들이 사는 마을에 도달한 순간.
“어디서 엄살이야!?”
높은 톤을 자랑하는 여신, 티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으아악!”
동시에 악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