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9화
“시간이 되돌아왔다라…….”
눈을 감고 팔짱을 낀 무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악신들과의 전쟁에서 저항하던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들.
그 저항군 중,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생존자인 처용.
그런 처용마저, 더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순간, 시간이 되돌아왔다.
조금 전, 무록이 처용에게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은 이야기였다.
도저히 쉽게 믿기지 않는 말이었지만.
“믿기 힘들지만, 그것이 진실이고 또 납득이 되는구나.”
무록은 진지한 목소리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처용이 심상을 통해 ‘진실’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 납득한 무록이 작은 실소를 흘리고는.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된 거지? 암영단주, 아니 학살의 마녀.”
차가운 눈빛으로 레나, 학살의 마녀였던 악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본래 그녀는 악신들에게 힘을 보태며 세계 멸망에 이바지해야 하는 존재.
그런 그녀가 지금 왜 암영단주가 되어 악신들을 방해하고 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했으니까.”
레나는 그런 무록의 질문에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악신들의 종이 되어야 할 운명을 거부한 것.
“다시 생각해 봐도 이 상황이 조금 신기하긴 해…….”
그로 인해, 과거 숙적이었던 처용과 손을 잡았고 악신들과 대적하고 있었다.
“흐음? 그런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레나의 말에 무록이 침음을 흘리며 답하고는.
-탁. 파사삭.
단상 위에 놓인 젓가락을 들고 종이 접시 위에 쌓인 튀김 하나를 집어 먹었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튀김의 식감에 이어 육즙 가득한 풍미가 입안으로 확 퍼지자.
“이거 정말 맛있구나! 당장 천마전의 숙수(熟手)들에게 가져다주고 조리법을 배우라고 해야겠어.”
무록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호평을 쏟아냈다.
지금 있는 장소는 천마가 심상을 현실에 구현하여 만든 전각 내부.
처용은 이야기만 하기엔 지루할 듯하여, 간단한 요깃거리를 꺼내 놓았었다.
방금 무록이 집어먹은 탕수육을 포함해, 각종 튀김류 요리들이 단상 위에 놓여 있었다.
“레시피는 알려 드릴 수 있지만, 무림의 요리사들이 이걸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다른 세계의 지식이라 그런가? 무공이 아님에도 나의 흥미를 이끌 줄이야.”
처용이 무록의 말에 답해 주자, 무록이 단상 위에 놓인 튀김을 하나 더 집어 보이며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내가 네 녀석과 상당히 많은 교류가 있었나 보구나.”
신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심상을 통해 ‘진실’을 전달받은 후, 서로가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용은 무록에게 존중을 표하고 있었고 무록은 처용을 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많은 교류와 친분을 다진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랬었죠…….”
그런 무록의 말에 긍정한 처용이 잠시 말꼬리를 흐리고는.
“련 누님.”
회귀 전, 가끔 무록을 향해 부르던 호칭을 입에 담았다.
“……!”
그 말에 무록의 눈동자가 크게 떠짐과 동시에.
“……그런가.”
처용이 심상을 통해 전해 준 기억 중 하나가 확 선명해지며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님이라고 불러라. 내 특별히 허락해 주지.
시간이 돌아오기 전의 자신이 처용에게 했었던 말.
“마현, 녀석 이후로 더는 그 말을 들을 일이 결코 없다고 생각했거늘.”
그 말을 떠올린 무록이 작은 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그녀가 말하는 마현은 4대 천마로, 무록의 제자이자 현 천마인 중검천마의 조부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무록이 복잡한 미소를 보이고는 젓가락으로 집은 튀김을 하나 더 집어 먹을 때.
“……서약자.”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묵하고 있던 루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약자가 보여 준 과거에…… 내 모습은 없었어.”
처용이 심상세계를 통해 보여 준 진실.
회귀 전, 과거의 기억 속에는 루나의 모습이 없었다.
심지어.
-죽어라. 수호신!
뱀파이어들은 모두 악신들의 편에 서서 처용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고 있었고.
-밤의 마신님을 위해!
-군주님을 위해!
밤의 마신, 아스모데우스와 뱀파이어 군주 마르크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밤의 마신은 아스모데우스였고 뱀파이어 군주는 마르크…… 그렇다는 건…….”
지금 루나가 직접 겪는 현재와는 너무나도 다른 과거였다.
그 말인 즉.
“나도…… 군주님도 모두 죽고…… 우리 일족들은 모두 악신들의 노예가 되었었구나.”
회귀 전, 뱀파이어들은 모두 아스모데우스와 마르크의 충직한 노예이자 병사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내가 뱀파이어들의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유였어.”
처용이 그런 루나의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동안 루나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이제야 이해가 돼.”
처용의 대답에 루나가 복잡함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동시에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처용과 처음 피의 서약을 나눌 때.
-나 역시 목적이 있기에 너희를 도와주는 거야.
어째서 그가 마르크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제나 후작을 왜 마르크의 심복이라 확신하듯 말했는지.
뱀파이어들의 전투 습성에 대해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었는지.
왜 뱀파이어들의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했는지.
그동안 머릿속에 은은하게 일렁이던 이 모든 의문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그야 처용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죽었었구나.”
루나가 침울하고 착잡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오죽하면, 지금 그녀가 느끼는 복잡한 마음 때문에, 평소 좋아하던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루나의 입에서 한숨과 침음이 흘러나올 때.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이유도 이해가 되네.”
루비아 역시, 납득이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용이 루비아의 복잡한 가정사와 드래곤들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이유.
회귀 전, 처용이 루비아 본인에게 직접 들었고 그와 관련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었기 때문이었다.
또 처용이 드래곤 슬레이어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이유와.
“유르티나 님이…….”
왜 그들을 죽일 듯이 증오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내가 말했잖아. 무슨 짓을 당해도 싼 놈들이라고.”
“……그래, 멸종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놈들이었네.”
증오가 일렁이는 처용의 말에,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이 되었다는 듯 답했다.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절대로……!”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같은 비극을 반복할 수 없다는 진심 어린 목소리.
그 말에, 루나와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무록과 레나 역시 같은 의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검성.”
처용이 아직도 고민과 복잡한 심정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침묵하고 있는 한 사람.
검성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나는…….”
그 말에, 검성이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같은 말을 읊조리는 검성의 말에.
“크크, 혼란스럽겠지. 네 녀석이 받들어 모시던 하늘의 신들이 악신들이었으니까.”
무록이 조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 천하의 검성이 그리 안목이 짧을 줄이야.”
“그리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비웃음 짓는 무록의 말에 검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뭐가 아니냐? 네 동생 놈이 천교의 충직한 개새끼가 된 거?”
무록의 웃음 어린 목소리에 싸늘한 감정과 눈빛이 섞여 흘러나왔다.
그 말에, 검성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불편한 침음이 흘러나오자.
“사실, 그날 끝장을 보려다가 말았습니다.”
처용이 그런 검성을 지긋이 응시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교의 제례 때문에…… 보살님께서 다치실 뻔했거든요.”
“자비의…… 대신께서?”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무록이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드러내고는.
“……하늘문으로 보였던 그 작은 여아가 설마?”
이내, 기억이 났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네, 사정이 있어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처용이 복잡한 심경으로 읊조리듯 대답했다.
그 말에.
“……그렇군.”
-탁!
무록이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단상 위로 강하게 치듯 내려놓고는.
“이 빌어먹을 도사 녀석이, 네가 드디어 정신이 나가 버렸구나!”
검성을 강하게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자비의 대신을 천교 놈들한테 갖다 바쳐? 그러고도 네 주둥이로 도의(道義)라는 말을 담은 것이냐!?”
무록의 입에서 검성을 향한 진심 어림 혐오감과 질책이 쏟아져 나오자.
“나는……!”
검성의 입에서 억울함이 일렁이는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무언가 변명을 내뱉고 싶었지만.
“……제길.”
이내, 검성이 고개를 숙이며 침음을 흘렸다.
검성은 천림맹을 돕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벌인 짓에 대한 책임도 있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든, 직접 저지른 일이 아니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검성은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성격이 못되었으니까.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 검성을 쏘아보듯 노려보던 천마가 강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으음, 기왕 이렇게 된 거, 나 좀 도와주겠어? 무록천마.”
조용히 대화를 듣던 레나가 무록을 바라보며 부탁하듯 입을 열었다.
무록이 눈동자만 움직여 레나를 바라보자.
“독마의 무덤에 들어가고 싶은데?”
작은 미소를 지은 레나의 입에서 부탁이 흘러나왔다.
“독마? 그 독마를 말하는 건가?”
인상을 찌푸린 무록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림공적(武林公敵) 독마(毒魔).
그의 무덤은 중원의 서북쪽에 자리해 있었다.
독마의 무덤으로 향하는 입구는 천마신교의 고위 교인들에 의해, 비밀리에 지켜지고 있었다.
본래, 무덤을 발굴하고 그의 시체와 유산을 모두 없애려 했었다.
하지만, 그 안의 위험한 기관들과 온갖 독극물들로 인해,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비밀스럽게 입구만 지키는 상황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무록이 적대감과 경계심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레나에게 물었다.
회귀 전, 악신들이 그 독마의 무덤을 악용하여 무림에 끔찍한 재앙을 일으켰었으니까.
그런 무록의 반응에.
“독마를 부활시켰던 아스모데우스는 한처용이 죽여 버렸지.”
레나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귀 전, 독마를 부활시켜 병기로 부린 장본인은 아스모데우스였다.
물론, 처용이 아스모데우스를 소멸시켰기에, 그녀가 독마를 부활시킬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하지만, 색욕악신보다 더 악독한 자가 눈앞에 있잖아?”
독마를 병기로 부활시켜 악용할 수 있는 자는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그 당시에 아스모데우스를 도왔던 S급 마인.
학살의 마녀, 그 당사자가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학살의 마녀가, 색욕악신보다 한 수 위라고 내 감히 평가하지.”
레나의 말에,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레나가 어떤 의도로 독마를 언급했는지 눈치챘다는 듯한 모습.
무록이 그런 처용과 레나를 번갈아 응시하더니.
“……기꺼이 개방하지, 무엇이든 가져가라.”
이내, 그녀 역시 눈치챘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독마의 무덤을 레나에게 개방하겠다는 무록의 말에.
“무록!”
검성이 기겁하듯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저 빌어먹을 천교의 신들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면, 내 기꺼이 인륜을 저버린 마귀가 되어 주리라.”
무록이 그런 검성을 강하게 노려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강렬한 증오와 분노가 일렁이는 무록의 말에, 검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런 검성의 모습은 본 무록이 답답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남궁서존은 갱생이 불가능하다. 내 확실하게 말해 주마.”
어째서 검성이 이토록 답답하게 구는지.
그 원인이 되는 존재인 검성의 동생, 천림맹주의 본명을 언급하며 말했다.
“함부로 단정하지 마라. 무록.”
무록의 말에, 검성이 주먹을 강하게 쥐며 부정하듯 답했다.
그때.
“종말의 막바지까지 발버둥 치며 홀로 살아남은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검성과 천마의 대화를 듣던 처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고는.
“세상에는 갱생 자체가 불가능한 쓰레기들이 있다는 것을.”
-탁! 드르륵.
단상 위에 칙칙한 색으로 일렁이는 구슬을 올리고 검성 앞으로 굴리며 말을 이었다.
한 손에 탁 잡히는 야구공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구체.
처용이 천교의 성역을 습격했을 때, 루나가 훔쳐 온 물건 중 하나였다.
“이건?”
-탁.
검성이 자신의 앞으로 굴러온 구체를 집어 들어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옥황상제가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력을 강제로 뽑아내 만든 겁니다.”
처용이 검성에게 내민 구체가 무엇인지 알려 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생명을 뭉쳐 만든 환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사람을 죽여서 만든 영약이라, 천교 놈들이 할 법한 짓이군.”
무록이 처용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 잘하는 짓이다. 검성. 이딴 짓거리나 돕고 자빠졌으니.”
“…….”
질책 어린 무록의 목소리에, 검성의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드리웠다.
“천림맹주가 진정 새로운 무림을 만드는 것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처용이 검성을 응시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그 진실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고집을 부린다면…… 그땐, 당신과 나는 영원히 적이 되는 겁니다.”
선언하듯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실을 전했음에도, 검성이 답답한 고집을 부린다?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세계가 멸망하면, 무림도 없습니다. 내 말 명심하십시오. 검성.”
경고를 담은 처용의 목소리에.
“…….”
검성이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