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화
처용이 터트린 기억의 고리에서 퍼져 나간 빛이 주변 일대를 감싸며 크고 넓게 퍼져 나갔다.
그 결과.
-파아! 스르륵! 스륵!
주변의 환경이 순식간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천마가 현실에 심상을 구현했을 때보다 더 빠르고 넓게 퍼지고 있었다.
-사아아……!
이윽고 나타난 환경은, 앙상하고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한 숲.
바로, 처용의 심상세계였다.
“단순히 심상을 현실에 구현한 정도가 아니라, 심상 세계 그 자체를 끌어왔다고?”
루비아와 대치하고 있던 검성이 확 변한 주변을 둘러보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현실에 심상을 구현한 게 아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초리로 처용의 심상세계를 둘러본 무록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심상이…… 저 녀석의 심상에 말려든 거지.”
검성의 말을 정정하는 듯한 무록의 목소리.
그녀는 심상을 다루는 능력만큼은 검성보다 더 뛰어났다.
그랬기에, 처용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이해했고.
“이게 가능할 줄은 몰랐지만…….”
검성보다도 더 경악하고 있었다.
“우리가 심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순간을 노린 것인가?”
무록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처용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 말에.
“그래야-.”
처용의 입이 열리며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모두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으니까.”
무록과 천마에게 ‘진실’을 전하기 위해 처용이 선택한 방법.
게다가 처용이 진실을 전달하기 위한 대상은 무록과 검성만이 아니었다.
“응?”
“……나도?”
무록, 검성과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
루나와 루비아가 의문을 드러냈다.
그리고.
“역시, 대마도사와 함께 이곳에 온 건, 그녀에게도 진실을 전하기 위함이었나?”
레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엘리스의 목소리.
그녀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마치, 의심만 하고 있다가, 지금 확신한 듯한 모습이었다.
“대마도사? 나를 말하는 거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의문을 품고 눈치를 보던 루비아가 처용과 레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야.”
-탁!
처용이 루비아를 바라보며 답함과 동시에 두 손을 합장하고는.
-탓! 파아아아!
합장한 두 손을 강하게 떼며, 손아귀에 모으던 빛을 터트렸다.
다시 한번 강렬한 빛의 파동이 크게 퍼지듯 요동치며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그 순간.
-스르르륵-!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땅과 나무가 검게 썩어 가며 지면에 녹아들었다.
이윽고 질척이는 석유가 짙게 뿌려진 검은 땅, 검은 대지가 나타났다.
마치, 멸망한 세계가 펼쳐진 듯한 모습.
동시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이 자리에 있던 두 사람.
루나와 레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검은 대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처용, 루비아, 무록, 검성, 네 사람뿐이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듯, 남은 네 사람이 침묵하며 경계 어린 눈빛을 보일 때.
-우우웅! 우웅!
주변을 에워싸는 엄청난 수의 게이트가 열렸고.
-크아아아!
-캬아아!
그 게이트 속에서 무수한 괴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들이미는 괴물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자.
“검성류 – 반월참.”
-스릉. 촤아아!
검성이 검을 크게 휘두르며 달려드는 괴물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고.
“천마신공 – 혜성반타!”
-탁! 후우-욱! 콰아아아!
무록이 자신의 몸보다 거대한 해머를 쥐고 괴물들을 크게 후려치며 멀리 날려 보냈다.
해머에 맞고 유성처럼 날아간 괴물들이 다른 괴물들을 밀치고 터트리며 지면에 처박혔다.
검성과 무록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괴물들을 일격에 쓸어버렸음에도.
-크아아!
-카아!
쓰러진 괴물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뒤에 있던 괴물들이 마구 달려들었다.
그 순간.
“라이트닝 볼텍스!”
-파지지직!
어느새, 허공 위로 떠 오른 루비아가 스테프를 하늘 위로 치켜들며 벼락을 내리쳤다.
-콰르릉! 콰릉! 파사사-!
강렬한 뇌전에 휘말린 괴물들이 새까만 숯덩이처럼 태워지며 즉사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며 싸우던 그들이 달려드는 괴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단합하는 듯한 모습.
남은 사람들이 힘을 합치며 괴물들과 맞서 싸우고 있을 때.
“파멸의 지옥염.”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이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고.
-화륵! 콰아아아!
검녹색의 화염이 강렬하게 이글거리며 루비아와 검성, 무록을 향해 쇄도했다.
세 사람이 기습적으로 쇄도해 오는 흑마법에 대비하려 할 때.
“항마의 화신-.”
-탓! 화아아!
처용이 검녹색 화염 앞으로 뛰쳐나가며 두 손을 합장했다.
항마의 화신이 나타나 주변에 파마의 신력을 퍼트림과 동시에.
“반탄신장!”
-후욱! 콰아아-!
오른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검녹색의 불길을 밀어 쳤다.
반탄신장에 의해 검녹색의 불덩어리가 반사되어 괴물들을 향해 되돌아가자.
-피잉. 콰아아-!
누군가가 되돌아가는 검녹색의 불덩어리 앞에 나타나 그 검은 화염을 터트려 없애 버렸다.
녹색 안개를 퍼트리는 자욱한 열기가 일렁였고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윽고.
-쿠구구!
조금 전까지 처용 옆에 서 있던 레나가 강렬한 마기를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편이었던 레나가, 괴물들을 도와 처용을 공격하려는 듯한 모습.
그녀의 모습 또한, 조금 전과는 달라진 점이 많았다.
붉었던 머리가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칙칙해졌고 등 뒤에는 두 쌍의 악마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마치, 대악마로 변한 듯한 모습.
“수호신.”
모습이 변한 레나가 처용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적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렸고.
“학살의 마녀.”
항마의 화신을 발현한 처용 역시 레나를 향해 적대감 가득한 목소리를 흘렸다.
“빌어먹을 수호신, 귀찮게 구는 네놈들까지.”
레나, 아니 학살의 마녀가 차가운 목소리를 잇자.
-우우웅!
괴물들을 쏟아 내는 게이트보다 더 거대하고 짙은 어둠이 일렁이는 게이트가 나타났다.
“오늘부로 모두 사라질지어다.”
학살의 마녀가 말을 끝낸 순간.
-스르륵! 콰아아!
주변을 짓누르는 강렬한 마기를 내뿜는 세 명의 대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내뿜으며 나타난 디아블로.
잿빛의 칼날을 빛내는 검, 샤네를 쥔 채 나타난 메피스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될지어다!”
-콰아아아!
거대하게 솟구치는 어둠과 함께 나타난 바알.
판데모니움을 지배하는 대악마 중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대악마, 삼천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큰 웃음을 내지른 디아블로가 검은 화염이 휘감긴 도끼를 내리치자.
“크으윽!”
-차카카캉!
백 자루의 검을 뭉쳐 디아블로의 공격을 막아 낸 무록이 인상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렸다.
-스르릉!
메피스토는 검성을 향해 샤네를 내리치며 달려들었고.
“크음!”
-차카캉!
검성이 쇄도하는 샤네의 칼날을 힘겹게 쳐내며 막아 냈다.
“어둠에 삼켜져라.”
“누구 마음대로!”
-콰아아! 파아!
루비아는 바알이 쏟아 내는 어둠의 파도를 향해 방어 마법을 발현하며 버티는 모습을 보였다.
삼천마 모두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전장에 난입한 상황.
괴물들을 상대로 수월하게 버티던 이들이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자잘한 상처가 생기고 점점 호흡이 가빠지는 듯한 모습.
각각 삼천마를 상대하며,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게다가.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쩌저적! 콰아아아!
학살의 마녀 옆에서 공간이 깨지듯 갈라지며 나타난 존재.
악의 종주, 조크 – 크타니드가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샥!
처용이 굳은 표정으로 점점 다가오는 악의 종주 앞을 가로막긴 했지만.
-콰아아!
“큭……!”
악의 종주가 쏟아 내는 파멸의 파도를 막으며 가까스로 버틸 뿐이었다.
결국, 처용의 코앞까지 다가온 악의 종주가 파멸의 검을 휘두르자.
-스르릉! 파창-창!
항마의 화신이 반토막 나며 처용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처용이 밀려난 순간.
-콰르릉! 콰지직!
옥황상제가 기습적으로 쏘아 낸 천벌에 무록의 가슴이 꿰뚫리며 쓰러졌고.
“마화련!”
검성이 그런 무록을 위기에서 구하려다가.
-샥! 촤아아!
스무 명의 검은 별들에게 기습을 당해 쓰러졌다.
“이젠, 끝이로구나.”
“이-!”
-콰아아! 파아-!
바알을 상대로 힘겹게 버티던 루비아 역시, 더 버티다가 못해 어둠 속에 삼켜지며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명.
-철컥.
만신창이가 된 채, 부러진 검을 쥐고 악의 종주에게 겨누고 있는 처용뿐이었다.
적들이 그런 처용의 주변을 포위하며 다가왔고.
“운명을 받아들여라.”
-스릉. 후우욱!
악의 종주가 처용의 앞으로 다가와 파멸의 검을 내리쳤다.
그 순간.
“……아니.”
-스르륵. 철컥.
처용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림과 동시에, 부러진 검이 사라지고 멸절이 나타나 손에 쥐어졌다.
동시에.
-까가강! 콰아-!
멸절을 위로 치켜올리며, 악의 종주가 내리친 파멸의 검을 막아 내었다.
“네놈이 말한 파멸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처용이 악의 종주와 시선을 마주하며 낮은 목소리를 흘렸고.
“이미 운명은 변했다.”
-차카캉! 촤아!
파멸의 검을 밀쳐 낸 후, 멸절로 원을 그리듯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쩌적! 촤아아-!
검은 선이 가로로 그어지며 세상이 반으로 나뉘었다.
주변을 포위한 적들이, 그 검은 선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고.
“난 많은 것을 지켜 냈고 넌 많은 것을 잃었다.”
-피이!
검은 선의 중앙에 얇은 금빛의 선이 그어지며, 세상이 또 한 번 갈라졌다.
그 얇은 금빛의 선에서 빛이 터지듯 점멸하자.
-파사사사-!
주변을 포위한 모든 적들이 먼지처럼 흩날리며 사그라졌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스릉.
처용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악의 종주에게 멸절을 겨누며 읊조리고는.
-촤아아!
칼날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며, 점점 사그라지는 악의 종주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그 순간.
-쩌저저적! 파창! 차창-!
반으로 갈라진 세계가 점점 깨지듯 갈라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계가 무너지며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이 도래했다.
그때.
-파아아!
처용이 그어 낸 금빛의 선이 나타나 빛을 퍼트렸고.
-차차창!
다시 한번 세상이 깨지며, 주변을 에워싼 어둠이 모두 사그라졌다.
처용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곳은 바로 무록과 검성을 기다리던 맹약의 봉우리 중심이었다.
그리고.
“…….”
“…….”
그런 처용의 주변에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불과 방금, 세계가 무너지기 전 악마들과 악신들에게 당했던 무록과 검성, 루비아.
사라졌던 루나와 대악마들의 편에 서서 처용과 맞서던 레나까지.
그들 모두가 원래 있던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잠시 긴 침묵이 이어지고…….
“……진정 파멸의 미래를 본 자는-.”
가장 먼저 무록의 입이 열렸다.
“암영단주가 아니라…… 네 녀석이었구나.”
마치, 깨달았다는 듯한 무록의 목소리가 울리자.
“……믿을 수 없다.”
검성의 입이 열리며 작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다. 이건…… 이 환상은-!”
자신이 본 광경, 아니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을 환상이라 표현하는 검성의 말에.
“환상이 아니다. 이 우매한 도사 녀석아.”
무록이 진지한 목소리로 검성의 말을 부정했다.
“믿기는 힘들어도 사실을 부정하지는 마라, 저 녀석이 전달한 심상은 거짓이 아니다.”
신화경의 경지, 심상을 다루는 능력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자부하는 무록.
그런 그녀였기에.
“서로의 심상이 공유된 상태에서는 오직 진실만을 전할 수 있느니라.”
처용이 보여 준 ‘진실’에 거짓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심상세계란 그 대상이 지닌 신념과 마음, 정신이 규합되어 구현된 마음속 세계였다.
스스로의 마음이 구현된 세계였기에, 심상세계 자체가 거짓 없는 진실의 마음이었다.
무록은 이러한 심상 세계의 구조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자.
“우리가 심상을 구현할 순간을 노린 건, ‘진실’을 전하기 위함이었군?”
이 때문에, 처용이 어떤 방법으로 ‘진실’을 전한 것인지 곧장 깨달은 것이었다.
게다가, 처용이 보여 준 ‘기억’은 악의 종주에게 맞서는 기억만 전달된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술과 지식을 공유하며 함께 수련하는 기억.
전장에서 죽어 간 동료를 보며 슬퍼했던 기억.
하나둘, 악신들에게 점령되어가는 세계를 보며 절망하던 기억.
가장 가까운 이가 죽었을 때, 느꼈던 심정까지.
처용이 가진, 과거의 모든 기억과 경험들이 심상으로 구현되어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전달되었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거짓 없이 심상세계를 통해 보여 준 것.
처용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한 ‘진실’의 정체였다.
“이 두 아가씨도 몰랐었나 보군?”
무록이 처용 옆에 있는 두 사람.
“…….”
“…….”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고 있는 루나와 루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무록이 작은 실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처용이 진실을 전하려던 대상은, 자신과 검성만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무록은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을 정리하고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더 있다.”
감았던 눈을 뜨고 처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동시에.
-짝. 후우우!
짧게 박수를 치고 강기를 퍼트리며 자신의 심상을 현실에 구현했다.
찬 바람이 불고 안개가 일렁이던 드높은 봉우리가 사라졌고.
-스르륵.
이내, 천마전과 비슷한 분위기의 전각 내부로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우리에게 진실을 전하러 온 것이니, 당연히 내 의문에도 답해 주겠지?”
당당하게 자신의 의문에 답해 달라는 무록의 요구에.
“기꺼이.”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