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화
메피스토의 일과 판데모니움의 영약 일을 처리한 처용은 다시 무림 세계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중요한 일은 한 가지.
“…….”
처용은 그 중요한 일을 위해, 눈을 감고 정갈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
게다가, 지금 처용이 있는 곳은 누군가가 쉽게 찾아오기 힘든 장소였다.
구름을 손에 쥘 수 있을 기분이 들 정도로,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바위산들.
산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일렁이는 안개.
바위를 뚫고 자란, 크고 작은 침엽수들의 모습까지.
처용은 그 험하면서도 영험한 분위기가 흐르는 바위산 중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가장 높은 바위산 위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윗부분을 베어 평평하게 만든 듯한 모습이었다.
멀리서 보면, 안개에 휩싸인 작은 연무장처럼 보이기도 하는 장소였다.
처용이 그 연무장 중심에 앉아 명상을 하던 도중.
-스르륵.
돌연,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착! 화아아-!
땅을 긁는 거친 소리와 함께 검성이 나타났고 뒤늦게 강풍이 몰아쳤다.
마치, 바람보다도 빠르게 질주하여 이곳에 온 듯한 모습.
그리고.
“뭐 그리 요란스럽게 나타나느냐? 검성.”
-착.
하늘 위에서 구름을 폭 뚫고 내려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면에 착지한 어린 소녀.
아니,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 무림의 절대 고수 중 한 명, 천마가 나타났다.
“……무록.”
검성은 약속 장소에 나타난 천마를 보며 인상을 써 보이고는.
-스릉! 촤아아-!
처용을 향해 검을 내지르며 쇄도했다.
-철컥. 차카캉!
멸절을 손에 쥔 처용이 검성을 향해 칼날을 세우며 그 공격을 막아 내자.
“신승과 장문인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검성이 처용을 노려보며 적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처용은 검성을 응시하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투귀맹진.”
-철컥. 화아아!
어느새 투창을 손에 쥔 무록이 강렬한 강기를 내뿜었고.
-투-콰아아!
처용과 검성을 향해 투창을 내던졌다.
붉은빛이 일렁이는 검은 강기가 휘몰아치며 투창이 쇄도하자.
-스륵.
처용이 왼쪽으로 다리를 박참과 동시에 고개를 틀어 투창을 피했고.
-스릉! 차카캉!
검성은 처용에게 세우던 칼날을 비스듬하게 틀어 무록의 투창을 빗겨 치듯 튕겨 냈다.
“무록! 이게 무슨 짓인가?”
검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록을 향해 따지듯 소리치자.
“나 또한 저 녀석에게 물어야 할 것들이 많다.”
무록은 그런 검성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하고는.
“네놈의 약속대로 ‘맹약의 장소’에 찾아왔느니라, 어떻게 이곳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처용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드높게 솟구친 바위산 중 가장 높은 장소.
이곳은 최초의 무림인들이라 알려진 역사 속 무인들이 세운 장소였다.
최초의 무인들이 이 세계의 규칙과 협의를 정하고 서로 맹세한 장소.
무림(武林)이 처음으로 선포되고 시작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현재 무림 세대의 최강이라고 불리는 두 무림인.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무록천마와 무림맹을 대표하는 검성.
무록과 검성이 서로 새로운 맹약을 약속한 장소이기도 했다.
바로, 두 무림의 최강자가 서로 결판을 내지 않는 한.
무림의 가장 거대한 두 세력, 천마신교와 무림맹은 대규모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는 약조였다.
이곳은 일 년에 두 번, 무록과 검성이 서로를 이기기 위해 비무를 치르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천마신교와 무림맹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천교라는 하늘의 신들이 나타나 무림맹을 치우고 천림맹을 세운 상황.
맹약은 깨지다시피 했고 천림맹이 전 무림을 장악해 가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검성의 고집과 망설임으로 인해, 그 속도가 조금이나마 더뎌진 것이었다.
“이제 대답해라. 네놈이 말하려는 진실이 무엇이냐!”
-콰아아! 스르륵!
무록이 처용을 노려보며 물음과 동시에 강렬한 기운을 내뿜었다.
강기가 모여들며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고 천마강림이 발현되었다.
-쿠우우!
무록이 소환한 천마의 의지가 처용을 향해 긴 창을 내지르며 쇄도하자.
“천마강림.”
-콰아아!
그런 처용을 지키듯, 처용의 천마가 나타나 검을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휘둘렀다.
-차카캉!
무록의 천마가 내지른 창이, 처용의 천마가 휘두른 검에 맞아 튕겨 나갔다.
“……천마강림? 무록,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 모습을 본 검성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무록에게 물었다.
지금 처용이 소환한 천마의 의지는 누가 봐도 ‘여성’의 모습.
이곳 무림 역사상 나타났던 천마 중, 여성 천마는 단 한 명, 무록뿐이었다.
검성 역시 천마신공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의문을 던진 것.
“그건 내가 저 녀석에게 너무나도 묻고 싶은 말이다.”
무록이 답답한 심정을 드러내듯,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처용이 천마신공을 알고 있는가?
게다가 처용이 지닌 천마의 의지가 왜 ‘무록’의 모습인가?
이는 무록 본인이 너무나도 알고 싶고, 풀고 싶은 의문이었다.
그리고.
“무록의 천마신공까지?”
그 의문을 느낀 것은 검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다시 묻지, 어떻게 검성류를 쓸 수 있는 거냐?”
처용이 어떻게 검성류를 완벽하게 쓸 수 있는 것인가?
검성류는 검성의 모든 인생이 담겨 완성된 그만의 검술.
그 누구도 함부로 따라 할 수 없는 최강의 검술이었다.
그런 검성류를 고작 사특한 수법으로 완벽하게 흉내 내는 것이 가능한가?
처용과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말 수십만 번을 생각하며 고민했지만.
“검성류는 사특한 주술이나 이능 따위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답은, 항상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누구냐? 너는.”
“누구냐? 너는.”
무록과 검성이 처용을 향해 동시에 다시 물었다.
처용은 제 정체를 묻는 두 무림인의 물음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내 대답을…… 그리 쉽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지이잉.
왼손을 들고 손아귀에 빛무리를 형성하며 말했다.
쉽게 말해 주지 않겠다는 처용의 말에 검성과 천마가 인상을 찌푸렸고.
-스릉!
가장 먼저, 검성이 처용에게 칼끝을 겨누며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피이이! 슈르르륵-!
귀를 긁는 듯한 소음이 울리고 무형의 파동이 물결치듯 퍼지며 주변 일대를 감쌌다.
순식간에 퍼진 파동이 주변 일대를 감싸자, 주변 환경이 점점 옅어지며 백색으로 변해 갔다.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가 펼쳐진 듯한 모습.
주변의 환경이 변하자.
“또 무슨 사특한 수를-!”
-스릉! 촤아아-!
검성이 처용에게 검을 내지르며 쇄도했다.
강기가 일렁이는 칼날이 처용에게 닿으려는 순간.
“엘리멘탈 실드.”
-피이잉.
처용의 앞에 무지갯빛이 일렁이는 반투명한 벽이 나타났고.
-까가강! 콰직!
검성이 내지른 칼날이 1/4정도 박힌 채 저지되었다.
그 모습을 본 검성이 잠시 흠칫한 순간.
“라이트닝 리플렉트.”
-후욱. 탓!
처용과 검성 사이에 루비아가 손을 뻗으며 나타났다.
루비아의 입에서 시동어가 흘러나오자.
-지잉! 파지지직!
검성이 꿰뚫은 반투명한 무지갯빛 벽이 샛노랗게 변하며 강렬한 전류를 퍼트렸다.
전류가 크게 퍼지며 칼날을 타고 검성을 덮치기 직전.
-차캉! 촤아아!
검성이 강기를 크게 피우며 눈앞의 벽을 베어 버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네 녀석은!?”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적, 루비아를 알아보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천교의 성지를 초토화한 정체불명의 침입자.
-네 칼 놀림이 아무리 대단해도, ‘준비된 대마법사’가 발현한 마법을 막을 순 없어.
검성은 그 당시, 성지에 운석을 떨구며 비웃음을 던지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최강의 검사라 불린다지? 내가 우리 세계에서 최강의 마법사라 불리거든?”
루비아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검성을 향해 호승심 어린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검술과 마법,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 주마.”
처용의 옆에 루비아가 나타나자.
“천마신공 – 칼날비.”
-우우웅. 스르릉! 스릉!
무록이 강기를 뭉쳐 형성한 열 자루의 검을 처용에게 쏘아 보냈다.
짙은 강기가 일렁이는 칼날이 쇄도하는데도, 처용과 루비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록의 칼날이 지척에 다가온 순간.
-슈르륵! 슈화아아!
처용의 앞에 핏빛의 소용돌이가 일렁이며 휘몰아치더니.
“블러드 웨펀.”
-스릉. 차카카캉-!
그곳에서 루나가 나타나 핏빛으로 빛나는 열 자루의 검을 쏘아 보냈다.
천마가 쏘아 보낸 검과 루나가 쏘아 보낸 검이 서로 충돌하며 튕겨 나갔다.
루비아와 루나가 검성과 천마를 저지하듯 나타났고.
“시간만 벌면 되는 건가? 한처용.”
-스르륵.
마지막으로 처용의 옆에 공간이 일렁이며 레나가 나타났다.
“역시, 네놈들은 파멸을 예언하는 자와 한패였구나.”
-철컥!
레나, 암영단주의 모습을 본 검성이 적대감 어린 목소리로 읊조림과 동시에, 발도 자세를 취했다.
검성의 칼집에 강기가 모여들며 강하게 압축되었고.
“검성류 – 검의 울음.”
-샥! 우우웅!
칼날이 발도 되며 묵직하고 예리한 강기가 짙게 퍼졌다.
“다크 할로우(Dark Hollow).”
-우웅. 슈화아아!
그 모습을 본 루비아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며 어둠 속성 마나를 강하게 압축시켰다.
루비아의 앞에서 점점 강하게 압축되어 가는 어둠이 작은 블랙홀을 형성했고.
-슈르르륵!
검성이 퍼트리는 강기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블랙홀 속에 빨려들어 간 검성의 강기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폭발할 듯 들썩인 순간.
“프레셔 샷(Pressure Shot)!”
-탁!
루비아가 손가락을 튕기며 한 지점에 압축된 불안정한 에너지를 전방으로 크게 퍼트렸다.
적이 퍼트린 기운을 블랙홀로 빨아들인 후, 적을 향해 터트리는 마법이었다.
루비아의 반격에 순간 흠칫한 검성은.
“검성류 – 수면 베기.”
-촤아! 까가강-!
칼날을 낮고 비스듬하게 베어 되돌아오는 강기의 파편으로 모조리 하늘로 튕겨 냈다.
검성이 재차 루비아에게 가로막혔을 때.
“인간이 아닌, 처음 보는 요괴로구나.”
무록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루나를 노려보며 흥미와 호승심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천마신공-.”
-우웅! 스르륵.
또다시 무록의 강기가 뭉치며 천마의 의지 곁으로 다수의 무기가 형성되었고,
“이기어검(以氣馭劍) - 백검식(百劍式)!”
백 개의 장검이 루나를 향해 칼날을 세우며 쇄도했다.
“혈옥 – 블러드 웨펀.”
-슈화아아! 스르릉!
혈옥의 힘을 일부분 끌어 올린 루나가 핏빛으로 빛나는 백 개의 칼날을 형성해 천마와 맞섰다.
상대의 공격에 맞춰 대응하며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모습.
“그래, 평범한 요괴가 아니라 이거로구나.”
루나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직감한 무록이 진지한 눈빛을 보이며 읊조리고는.
-짝! 후우-욱!
박수를 한 번 치며 짙은 강기의 파동을 넓게 퍼트렸다.
-후욱! 촤라라라-!
파동에 닿은 지면과 주변 환경이, 벽돌처럼 갈라지고 뒤집히며 새로운 환경이 형성되었고.
-촤라라! 차캉! 쿵! 쿠구궁!
그 위로 온갖 종류의 무수한 병장기들이 쏟아져 지면에 내리꽂혔다.
“심상(心象) – 천무고(千武庫).”
스스로의 심상을 해방해 현실에 구현한 천마가 손짓하자.
-스릉! 스르릉! 우우웅!
지면에 꽂힌 수천의 무기가 허공에 떠올랐다.
동시에.
“심상(心象) – 무상일검(無想一劍).”
-스르릉. 우웅!
루비아의 반격을 하늘로 튕겨 보낸 검성이, 검을 양손으로 쥐며 읊조렸다.
검성에게서 잔잔하고 무거운 강기가 흘러나오며 그를 감쌌고.
-스르르륵.
그의 검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스륵. 사라락.
검성이 허공을 쥔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려 가볍게 내리쳤다.
보이지 않는 검을 쥐고 루비아를 향해 휘두른 듯한 모습.
겉으로 볼 때, 그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처럼 보였지만.
“……!”
루비아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소리 없는 경악을 드러내고는.
-우웅! 샥!
급하게 방어막을 펼치며 고개를 틀었다.
직감적으로 위험한 무언가를 느끼고 방어와 회피에 나선 듯 보였다.
그러나.
-사각! 촤아아!
무려, 8써클의 대마법사가 발현한 실드가 단번에 잘려 나갔고.
-착! 주륵.
루비아의 왼쪽 머리카락 일부가 잘리며 뺨에 옅은 상처가 생겨났다.
“이걸 피했다고?”
그 모습을 본 검성 역시 경악 어린 목소리를 흘리며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내지른 공격은, 피하고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으니까.
“……무섭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으면 목이 잘렸겠어.”
그런 검성이 내지른,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을 전력으로 방어한 루비아가 긴장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적당히 하려 했는데,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웅. 쾅!
아공간에서 천체가 회전하는 마법 지팡이를 소환해 땅을 찍으며 말했다.
-파지지직! 우우웅!
루비아에게서 강렬한 마나가 솟구쳤고 등 뒤에 스파크가 몰아치며 고리가 형성되었다.
모두 합쳐 아홉 개의 고리.
얼마 전, 그녀가 도달한 새로운 경지.
그 누구도 도달한 적이 없다고 알려진, ‘9써클’에 도달했다는 증거였다.
심상을 현실에 펼친 천마와 검성.
혈옥을 드러낸 루나와 9써클의 힘을 개방한 루비아.
그들이 전력을 드러내자, 결계가 덧씌워진 주변 일대가 거칠게 진동했다.
“지금이지 않나? 한처용.”
결계를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태던 레나가 처용을 바라보며 묻자.
“그래, 이 순간만을 기다렸지.”
처용이 왼손 위에 뭉쳐 든 빛을 응시하며 답했다.
-스르륵. 스륵.
둥글게 뭉쳐 있던 빛이 점점 늘어나듯 길어지더니, 시작점과 끝이 연결되며 고리를 형성했다.
“기억의 고리.”
처용의 왼손에 형성된 빛의 고리는 다름 아닌 기억의 고리였다.
그리고.
-우드득! 파아-!
그 기억의 고리를 강하게 쥐어 터트림과 동시에.
“심상구현(心象具現) – 세계구축(世界構築).”
자신의 심상(心象)을 끌어올려 현실에 구현하기 시작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