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처용과 레나가 막 잿빛 군도 안에 들어섰을 시점.
-저벅.
정갈한 도복을 입고 한 자루의 검을 찬 검성이 복잡한 표정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중원 서남쪽의 산, 바로 소림사로 향하는 산길이었다.
소림사를 포함한, 전 무림맹의 핵심 문파들.
그들은 아직도.
-무(武)와 협의(俠義)을 버리고 신을 섬길 순 없소.
천림맹을 따르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검성이 소림사로 향하는 이유는 설득을 위해서였다.
게다가.
-재앙신이…… 소림사에 갔었다고 하옵니다.
천림맹의 정보통을 통해 들려온 소식.
천교의 성지를 쑥대밭으로 만든 재앙신이 소림사에 갔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강력하고 악한 존재가 소림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는 상황.
이 때문에, 복잡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윽고 소림사의 간판이 보이는 사찰 앞에 도달했다.
그러자.
“어서 오시오. 검성.”
미리 소림사의 입구에서 검성을 기다리고 있었던 소림방장, 신승이 인사를 건넸다.
검성은 그 인사를 받아주듯, 입을 열려다가.
“……!”
흠칫한 표정을 지으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신승은 소림사의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소림방장의 자리를 지켜온 이.
그만큼 그의 나이는 지긋했다.
겉모습만 보면, 천림맹주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 노승의 모습이 변한 것이, 놀라웠나 봅니다?”
전성기 시절의 젊었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이든 노인의 목소리가 아닌, 젊고 강인한 목소리를 내었고.
-우우웅.
그에게서 느껴지던 중후한 기운 또한 더욱 맑고 정갈함이 느껴졌다.
아니, 단순히 기운이 맑아진 것만이 아니었다.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신승”
검성은 신승이 신화경에 도달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환골탈태를 하여 변화한 겉모습에 더불어 신승에게서 ‘신력’이 느껴졌으니까.
“아라한의 진인께서, 이 노승에게 깨달음을 주신 덕분이지요.”
신승이 검성의 읊조림에 답하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한의 진인……?”
검성은 그런 신승의 말에 의문을 표하고는.
“……재앙신!”
이내, 표정을 굳히며 신승이 말한 이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천교의 악신들이, 그분을 재앙신이라고 말해 주었소?”
그런 검성의 반응에, 신승의 목소리가 가라앉았고.
“참으로 안타깝소. 무림의 상징이었던 그대가 악신들의 종이 되었을 줄이야.”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를 악신이라 지칭하는 것인가. 소림방장! 그가 우리의 성지에 저지른 짓을 모르는가!?”
검성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재앙신이 천교의 성지에서 벌인 짓.
그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고 성지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검성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런 처용의, 재앙신의 잔혹함과 악함을 알리듯 소리친 검성은.
“놈이 이곳에서 무슨 짓을 벌인 것인가!”
-스릉.
재앙신이 소림사에 와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를 물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검성의 모습을 본 신승은.
“……아라한의 진인께서는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지요.”
검성이 말하는 재앙신, 처용이 자신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고 답했다.
동시에.
-스륵. 우우웅!
두 손을 부드럽게 합장하며 짙은 기운을 내뿜었다.
“신승인 그대가…… 재앙신과 손을 잡을 줄이야.”
검성이 신승을 노려보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스릉. 차카캉!
칼날에 강기를 덧씌우며 신승을 향해 내질렀다.
위협적인 강기가 날을 세우며 신승에게 쏘아지려는 순간.
“백팔신장(百八神掌).”
-우웅! 파아아!
두 손을 합장하던 신승이 읊조리며, 모으던 기운을 강하게 퍼트렸다.
은은한 금빛이 일렁이는 신승의 흙빛 강기가 서로 뭉치기 시작했고.
-스르륵. 스륵.
이내, 신승의 등 뒤로 모여들며 백팔(百八) 개의 팔이 형성되었다.
백팔신장(百八神掌).
지금껏 신승이 수련해 온 모든 무공과 처용이 복원한 소림의 비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형성된, 오직 신승만의 새로운 무공이자, 심상이었다.
“이십장(二十掌) – 곡(曲)”
-탓. 타탓!
백팔신장을 펼친 신승이 오른손바닥을 펴고 왼손 주먹 아랫부분을 맞대며 수인을 맺자.
-스륵. 후우욱!
신승의 뒤에 펼쳐진 스무 개의 손이 나선을 그리며 앞으로 휘둘러졌다.
스무 개의 손이 그려 내는 부드러운 곡선과 검성이 내지른 검이 충돌했고.
-까가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성이 내지른 칼날이 위로 튕겨 나갔다.
검성은 찌르기가 튕겨 나간 즉시.
“검성류 – 반월참(半月斬).”
-철컥. 스릉!
튕겨 나간 힘에 거스르지 않고 한 바퀴 부드럽게 회전하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검성의 강기가 씌워진 칼날이 반월(半月)을 형성하며 신승을 향해 쇄도하자.
“백팔장 – 반탄의 원.”
-짝!
신승이 두 손을 합장하며, 백팔 개의 손을 주변으로 퍼트렸다.
-타앙! 까가강-!
서른 개의 손이 손바닥을 펼치며 검성이 쏘아 보낸 반월을 잡아채 저지했다.
그러자.
-스릉! 차카캉!
재차, 검성이 검에 강기를 덧씌우며 신승을 향해 빠른 속도로 휘둘렀고.
-스르륵! 타앙! 차캉!
신승을 지키는 백팔 개의 손들이 검성의 강기를 막아 내고 튕겨 내며 방어에 나섰다.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질 때.
“……묻겠소. 검성.”
검성의 공격을 막아 낸 신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눈에는 정녕 내가 사악한 것에 홀린 타락자가 된 것처럼 보이오?”
“…….”
신승의 진지한 말에, 검성은 답하지 않았다.
“이 노승이 제 신념을 악에게 바쳐 파계한 중으로 보이냔 말이오.”
그럼에도 신승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신화경에 오르고 환골탈태를 한 자신이 진정 타락자로 보이는가?
지금 자신이 펼치는 무공이 정녕 사악한 존재에게 힘을 내려받고 펼치는 무공인가?
신승은 검성과 무공을 겨루며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신들이 정해 준 판단이 아닌, 그대가 스스로 내린 판단을 말해 보시오!”
-타아앙-!
강한 목소리로 검성을 향해 외친 신승이 백팔 개의 손바닥을 동시에 밀어 치며 검성을 밀어냈다.
그러자.
“검성류 - 오의.”
-스릉. 철컥!
검성이 날카로운 눈빛을 치켜뜨며,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발도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본 신승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백팔신장 - 오의.”
-짝!
두 손을 강하게 합장하며 강기를 끌어 올렸다.
“단절.”
-철컥. 촤아-!
검성이 발도하며, 공간을 가르는 검성류의 비기가 발현된 순간.
“평온(平穩).”
신승이 강하게 합장한 두 손을 떼며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맞대고 수인을 맺었다.
-데엥-! 우우웅!
깊은 산속의 사찰에서 울릴 법한 묵직하고 맑은 종소리가 신승을 중심으로 울려 퍼졌다.
그 무거운 울림을 타고 신승의 강기가 짙게 퍼져 나갔다.
공간을 가르는 검성의 칼날과 묵직한 신승의 강기가 서로 충돌했고.
-콰쾅! 사가-!
잠시 힘 싸움을 벌이더니, 검성의 칼날이 신승의 강기를 가르며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신승은 검성의 칼날이 점점 다가오는데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리를 지켰다.
이윽고 검성의 칼날이 신승의 목에 닿기 직전.
-탁!
그 자리에서 딱 멈추었다.
위협적인 칼날이 목 바로 옆에서 멈추었음에도.
“…….”
신승은 평온한 눈빛으로 검성을 응시하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검성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던 듯한 모습.
“……제길-!”
손아귀에 힘을 주고 칼날을 떨던 검성은.
-철컥!
인상을 거칠게 찌푸리며 신승의 목에 겨누던 검을 내렸다.
“다행히도…… 아직, 그대는 검귀가 되지 않았구려.”
그런 검성의 모습에, 신승이 작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라한의 진인께서 그대와 천마에게 약조한 것이 있다 들었소.”
-저벅.
뒤돌아 소림사의 사찰을 향해 돌아가며 말을 이었다.
“그날, 그대가 직접 진실을 마주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길 바라오.”
말을 마친 신승의 발걸음이 소림사의 정문을 넘었고.
-끼이이! 쿵!
사찰의 문이 굳게 닫히며 소음을 내었다.
이제 더 이상 나눌 대화는 없다는 듯한 모습.
그런 신승의 태도에.
“……하.”
검성이 의문과 복잡한 심경이 일렁이는 한숨을 내뱉었다.
***
처용과 엘리스가 잿빛 군도에서 태룡전으로 돌아왔고.
[……잿빛 도시에서 뭘 훔치겠다고 하더니, 악마를 훔쳐 올 줄이야.]
둘이 훔쳐 온 것들을 본 니알라가 황당하다는 듯 읊조렸다.
잿빛 군도에서 처용과 엘리스가 훔쳐 온 것은 두 개.
하나는.
-…….
니알라가 만든 검보랏빛 침구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잿빛의 여성.
다른 하나는.
[……! ……!!]
-철크럭! 철컥!
엘리스가 소환한 검은 사슬에 묶여 발버둥 치는 악마, 메르핀이었다.
[오랜만이야. 그치?]
니알라가 몸부림치는 메르핀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이자.
[……!]
메르핀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
니알라의 뒤, 푹신한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벨페고르를 보며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두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며 니알라와 벨페고르를 번갈아 응시하는 메르핀의 시선에.
[아, 벨페고르도 얼마 전에 이쪽으로 왔어, 편하게 잘 수 있다면서 아주 좋아하던데?]
니알라가 밝은 미소를 보이며 벨페고르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말에 메르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와 고개를 떨었다.
니알라는 메르핀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는.
[내가 볼 땐, 메르핀은 덤으로 잡아 온 것 같고…… 이쪽이 진짜 ‘협상 카드’인가 보네?]
침구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잿빛의 여성형 악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로 이들과 가까웠었나 봐? 메피스토가 그토록 숨기던 비밀까지 알고 있고 말이야.]
“네, 아주…… 가까웠었죠.”
그런 니알라의 말에, 엘리스가 복잡함이 일렁이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강탈의 대악마 아가레스…… 나도 그 녀석 진짜 싫어했었는데.]
니알라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리듯 말했다.
침구 위에 누워있는 잿빛의 악마가 누구인지, 어떠한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은 아는 듯한 모습.
“제가 받은 은혜가 있으니, 갚을 생각입니다.”
그런 니알라의 말에, 엘리스가 복잡한 눈빛으로 말하며 메르핀과 침구 위의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메피스토의 혈연인가?”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처용이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메피스토와 비슷한 외형을 지닌 두 악마.
침구 위에 누워있는 악마는 처용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메르핀 역시 회귀 전, 잿빛 도시를 습격했을 때, 딱 한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 이들이 가진 개인적인 사정은 하나도 몰랐다.
[이 아이의 이름은 클레핀, 메피스토의 연인이라고 해야 할까?]
“메르핀은 클레핀의 동생이고.”
니알라가 침구 위에 누워 있는 여성이 누구인지, 엘리스가 메르핀의 정체를 이야기했다.
그때.
“계승자.”
“……보살 님?”
돌연 옆에서 들려오는 보살의 목소리에, 처용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느새, 니알라의 성역에 들어왔는지, 유리아를 안고 있는 보살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몸속에…… 무언가가 있어.”
보살이 침구 위에 누워 있는 잿빛의 여성 악마, 클레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러자.
“이 악마 안에요?”
처용이 의문을 표했고.
[……!]
-으드드-!
메르핀이 눈을 크게 뜨며 몸부림쳤다.
“해칠 의도는 없어, 걱정하지 마.”
그런 메르핀의 모습을 본 보살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안심하라는 듯 말하고는.
“유리아, 나랑 같이 이걸 끄집어내 볼까?”
클레핀을 바라보며 유리아를 향해 말했다.
-삐익.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한 순간.
-우우웅.
보살과 유리아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이 클레핀에게 깃들었고.
-스르륵. 탁!
그 기운이 밧줄처럼 엮이며 뭉쳐 들더니, 보살과 유리아의 손에 잡혔다.
품에 안긴 유리아와 함께 굵은 밧줄을 양손으로 잡아챈 듯한 모습.
금빛과 연분홍빛이 엮인 밧줄은 클레핀과 이어져 있었다.
마치, 그녀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밧줄이 연결한 듯 보였다.
“하나, 둘…….”
보살이 준비 운동을 하듯, 손을 앞뒤로 들썩이더니.
“세에에-엣!”
-후우-욱!
유리아와 함께 밧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 결과.
[……크아아아!]
-화아아!
클레핀의 몸속에서 반투명한 무언가가 괴성을 내지르며 튀어나왔다.
엄니가 길고 날카롭게 자란, 흉악한 사자의 머리와 거친 갈기.
날카로운 손톱과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상체.
그리고…… 머리 위에 돋아난 거대한 한 쌍의 뿔까지.
[누가 감히 나의 것에 손을 대는 것이냐!?]
-후욱- 탁!
악마로 보이는 듯한, 반투명한 형체가 보살을 향해 우악스러운 손아귀를 뻗으며 분노를 드러낸 순간.
“뭐야? 이 잡귀는?”
-쐐에-엑! 콱! 콰드득!
처용이 즉시 왼손을 뻗어 악마의 목을 틀어쥐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