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663화 (663/726)

#663화

잿빛 군도, 혹은 중립 구역이라고도 불리는 장소.

판데모니움, 삼천마 중 하나인 메피스토의 영역.

그곳은 지금,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짙게 일렁이고 있었다.

-절대! 군도 밖으로 벗어나지 마라! 메피스토 님의 명령이다!

스탈크를 포함한 스틸 데몬들은, 군도 내에 거주하는 악마들을 엄중하게 통제하고 있었으며.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지?

-크크, 궁금하면 저 밖으로 직접 나가 보든가?

잿빛 군도 내에 거주하는 악마들은 짜증, 혼란, 흥미 등 각기 다른 반응을 드러내고 있었다.

“……판데모니움이 쪼개지더니, 이렇게 되어 버렸던 건가?”

잿빛 군도에 다시 방문한 처용 역시, 당황스러움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시 찾은 잿빛 군도 내부의 모습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잿빛 군도의 외부에 있었다.

잿빛 군도에서 일정 영역 이상 벗어나면.

-쿠구구! 쿠구!

갈라진 땅 아래로 밑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지각 변동이 일어나 땅이 푹 꺼져 버린 듯한 모습.

비단 땅에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었다.

하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판데모니움에서 잿빛 군도만 뚝 떨어져 나와 동떨어진 세계로 변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처용은 이러한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판데모니움이 ‘던전화’가 되어 버렸었군.”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차원의 균열이 벌어지며 나타나는 현상인 게이트.

그 게이트 안에 펼쳐진 전혀 다른 세상과 환경.

게이트가 폭주하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난입하는 현상.

이것은.

완전히 멸망해 버린 세계의 일부가, 차원을 떠돌다 다른 세계에 이어 붙으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지구에 발생한 게이트를 통해 나타나는 새로운 세상들.

그 세상 하나하나가 바로, 멸망한 다른 세계의 일부분들이었다.

지구의 학자들과 헌터들은 이를 ‘던전화 현상’이라 불렀었다.

그 던전화 현상이 판데모니움에서 발생한 상황.

‘크타니드와의 싸움, 그리고 나타난 순환의 포식자…….’

처용은 어째서 판데모니움이 조각조각 쪼개졌는지, 짐작되는 이유를 속으로 읊조렸다.

“이게, 이전의 시간대보다 블랙 게이트가 이르게 발생한 이유였다.”

옆에 있던 레나가 처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대악마의 성역들도, 잿빛 군도처럼 나누어졌을 거다.”

“그래서 블랙 게이트가 그리도 많이 나타났었던 거였나.”

레나의 말에 처용이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발생했었던 블랙 게이트는 지금과 조금 달랐다.

그때는 악마들이 다른 세계를 침공하기 위해 판데모니움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열었던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지구를 포함한 다른 세계에 열렸던 블랙 게이트는 소수였다.

반면에, 지금은 그 배가 넘어가는 수의 블랙 게이트가 열린 상황.

회귀 전과는 다르게, 판데모니움의 영역들이 모두 던전화가 되어 버렸으니까.

“이건 내 생각인데…….”

레나가 잿빛 군도의 외부, 검은 우주처럼 변해 버린 외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판데모니움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던전화가 되어 버린 건, 놈이 무언가 조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차원이 흔들리고 그로 인해 세계가 무너지면, 그 세계는 멸망한다.

‘던전화’가 되어 버린 세계의 조각은, 정말 운 좋게 멸망을 피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나의 세계를 100%라 하면, 그 중 던전화가 되는 세계는 많아 봐야 10%였다.

조각난 세계의 일부만이 살아남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판데모니움은 핵이 부서지며 세계가 갈라져 무너졌음에도.

모든 대악마의 성역들이 멀쩡하게 던전화가 되어있었다.

본래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

그러나.

“마침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처용은 레나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판데모니움이 모두 무너지지 않고 던전화가 되어 살아남은 이유.

바로, 악의 종주가 무언가 조치했기 때문이었다.

처용과 레나는 이 가정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대화를 나누며 아무렇지도 않게 잿빛 군도 거리를 걸어가는 처용과 레나.

그럼에도, 주변의 악마들은 이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없는 이들처럼 지나쳐 가고 있었다.

처용의 경우는 이전처럼 동화경으로 제 모습을 숨기고 있었고.

레나의 경우는.

“악몽 속에서 건네준 걸 참 요긴하게도 쓰는군?”

“이게 쓸모가 많더라고 태룡사에 다시 가면, 몇 개 더 사야겠어.”

전에 처용에게서 받은 클로킹 로브에 악령을 덧씌워 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문제 없이 잿빛 군도 거리를 활보해 나간 끝에.

“……여기다.”

조금 앞서 나간 레나가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메피스토의 성역…… 이렇게 가까이 와 본 건 또 처음이네.”

처용이 레나가 안내한 장소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둘이 도착한 장소는 잿빛 군도의 중심부.

바로 메피스토가 거주하는 그의 성역,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영주성이었다.

정확히는 영주성의 동쪽 구석 부분.

“이곳에…… 그대로 만들었으려나?”

레나, 아니 엘리스가 진지한 눈빛으로 영주성 담장 벽에 손을 대며 읊조리자.

-우웅. 지이잉.

잿빛의 벽면이 일렁이더니,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의 통로가 나타났다.

“메피스토 성역의 비밀 통로라…… 참 신기한 것도 다 알고 있네.”

처용이 비밀 통로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하자.

“내가 이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던 존재였으니까.”

엘리스가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복잡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답하고는.

-저벅.

통로 안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처용은 앞장서 나아가는 엘리스를 따라나섰고.

“으음, 마기로 운용하는 공간 마법이라…… 설계자가 만든 건가?”

잿빛과 어둠이 뒤섞여 일렁이는 통로와 엘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마기가 불규칙적으로 뒤엉키며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듯 보이는 통로 공간.

이곳은 메피스토를 따르는 고위 악마이자 설계자라 불리는 존재.

메르핀이 만든 마공간 중 하나였다.

그곳을 앞장서 나아가며, 흔들리는 공간을 안정시키는 엘리스의 모습까지.

마치, 그녀가 설계자의 마공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내게 공간 흑마법의 이론을 가르쳐 준 악마가 메르핀이었으니까.”

엘리스는 그런 처용의 물음에 답해 주듯 말했다.

학살의 마녀가 마기를 이용한 공간 마법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이유.

종국에는 ‘공간 정지’라는 권능까지 깨우치게 된 궁극적인 이유.

바로 메르핀에게 마공간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더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

“됐다. 이제 내성이다.”

앞서 나가던 엘리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 순간.

-스르륵.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잿빛과 어둠의 공간이 싹 사라지며 낡은 영주성의 내부가 드러났다.

이곳은 메피스토에게 허락을 받은 악마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

때문에.

“여기까지 무사히 잠입한 이상, 성공한 거나 다름이 없어.”

메피스토가 자리를 비운 이상, 이곳에서 마주칠 악마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미소를 지은 엘리스가 익숙하다는 듯 영주성 내부를 활보하며 나아갔고 그 뒤를 처용이 따라갔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영주가 있을 법한 넓은 대전.

메피스토가 주로 앉아 있는 옥좌가 자리한 장소였다.

“삼천마의 성역치곤 허름하네.”

“그야, 메피스토가 전대 삼천마인 아가레스를 죽이고 그에게서 빼앗은 곳이니까.”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감상을 이야기하자, 엘리스가 옥좌 위에 걸린 두개골을 보며 말했다.

“전대 삼천마…… 저 머리가 그건가?”

그런 엘리스의 말에 처용 역시 옥좌 위에 걸린 두개골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래, 강탈(强奪)의 대악마 아가레스. 메피스토가 샤네로 베어 버린 놈의 머리지.”

엘리스가 옥좌 위에 걸린 머리의 정체를 언급하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가레스의 머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시 응시한 엘리스는.

“뭐, 중요한 건 저게 아니고…… 이제 다 왔다.”

-저벅.

이내 관심을 거둔 듯, 시선을 돌리며 메피스토의 옥좌 뒤로 다가갔다.

-슥. 슥. 우우웅.

옥좌 뒤에 있는 벽면에 손을 더듬으며 은밀하게 어둠을 흘려보내자.

-지잉. 드르륵!

영주성 외곽에서 비밀 통로를 열 때처럼, 잿빛과 어둠이 일렁이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엘리스와 처용이 계단을 밟으며 나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끝에 도달했다.

계단 끝에 도달해 드러난 장소는 푸른 양초가 타오르는 작은 석실이었다.

그리고 그 석실 중앙 제단 위에는.

“…….”

길게 흐트러진 머리를 늘어뜨린 잿빛의 여성형 악마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두 손을 가슴 아랫부분에 모으고 정갈한 자세로 누워 있는 모습.

그런 잿빛 악마의 두 손 위에는.

-우우웅.

선명한 자줏빛을 빛내는 마괴 꽃이 얹어져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건 내가 설계자에게 넘긴 건데.”

처용이 정원에서 만들어 내어 설계자에게 넘겼던 마괴 꽃이었다.

그 자줏빛 마괴 꽃이.

-우우웅. 우웅.

죽은 듯 누워 있는 악마에게 농밀한 마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마치,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양분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잠시 관찰한 처용은.

“엘리스. 설마 여기서 뭐 하나 훔쳐 와야 한다는 게……?”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엘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 메피스토가 제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걸 훔치러 온 거지.”

그 말에,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담아 답했다.

그리고.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건…… 막아야 하니까.”

복잡함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스륵.

제단 위에 누워있는 악마의 손 위에 얹어진 자줏빛 마괴 꽃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그때.

“……이런, 잠깐 모습을 숨기지.”

-스르륵!

엘리스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모습을 투명하게 감추었다.

-스륵!

처용 역시 동화경을 발동하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둘이 사라지고 3초 정도 지나자.

-우우웅.

석실 내부에 잿빛 공간이 열리더니.

“후-.”

셜계자, 메르핀이 나타나며 짧고 굵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역의 주인인 메피스토가 자리를 비웠기에, 그녀가 성역을 점검하는 듯한 모습.

잠시 주변을 살피듯 둘러본 메르핀은.

“……하나로는 부족했던 건가?”

제단 위의 여성형 악마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리고 여성형 악마의 손 위에 놓인 자줏빛 마괴 꽃을 살짝 건드린 순간.

“……어?”

메르핀이 무언가를 느낀 듯, 두 눈을 점점 크게 뜨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때.

“공간 정지.”

-피이이!

숨어 있던 엘리스가 공간 정지를 펼침과 동시에.

-촤라락! 촤락! 쿠궁!

검은 사슬을 소환하여 순식간에 메르핀을 휘감아 묶으며 구속했다.

“무슨!”

-화아아!

순간적인 기습에 당황한 메르핀이,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잿빛을 내뿜었다.

그녀의 능력인 마공간을 펼쳐 구속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파아……!

강렬하게 번쩍이던 잿빛이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내 마공간이…?”

메르핀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고.

“마공간은 펼치지 못할 거야. 메르핀.”

-스르륵.

그런 메르핀의 앞에 엘리스가 나타나며 말했다.

“이 주변의 ‘공간’은 이미 내가 장악했으니까.”

“……예언자-!”

이어지는 엘리스의 말과 그녀를 알아본 메르핀이 크게 소리치려는 순간.

-스륵. 차캉!

메르핀의 목에, 얇고 검은 줄이 채워졌고.

“……!”

갑자기 목소리가 턱 막힌 메르핀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듯, 입을 크게 들썩였다.

“돌발 상황이긴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녀석도 데려가야 해.”

메르핀을 붙잡은 엘리스가 처용을 바라보며 말하자.

“어째서?”

처용이 의문을 표하며 물었다.

본래 목표였던 제단 위의 악마는 그렇다 치지만, 메피스토의 측근 악마는 왜 살리려는 것인가?

처용은 그저 순전히 궁금했기에 물은 것이었다.

그런 처용의 물음에.

“인피니티 하이브에 묶여 영겁의 고통을 받던 날 풀어 준 게…… 이 녀석이니까.”

엘리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인피니티 하이브, 그건…….”

그런 엘리스의 대답에 처용이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그녀가 언급한 인피니티 하이브, 그 말은.

-상급 악마 양산화 계획…… 인피니티 하이브.

엘리스가 바알 앞에 제 정체를 드러낼 때, 그를 도발하며 한 말이었다.

그 당시, 바알이 아주 격한 반응을 보였었기에, 처용 또한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예언자의 명성을 마음껏 활용한 대가라고 치고, 나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

엘리스가 복잡한 심경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처용에게 도와달라 말하자.

“……대신, 제대로 설명해 줘야 할 거다.”

잠시 생각한 처용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어차피 네겐 인피티니 하이브에 대해 알리려고도 했으니까.”

순순히 협조해 주는 처용의 모습에 엘리스가 고맙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흑관.”

-스륵. 촤라라-!

제단 위에 누워 있는 잿빛의 여성형 악마를 향해 어둠을 내뿜으며 그 주변을 감쌌다.

검은 관이 형성되었고 이내 뚜껑이 닫히며 제단 위의 여성형 악마가 어둠 속에 사라졌다.

“……! ……!!”

그 모습을 메르핀이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지르자.

“넌……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야.”

-우웅. 촤라라!

엘리스가 메르핀을 향해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녀 역시 검은 관 안에 가두었다.

-툭.

모든 볼일을 마친 엘리스는 비어 버린 제단 위에, 검은 편지를 한 장 올려 두고는.

“메피스토가 오기 전에, 돌아가지.”

-스르륵.

-스륵.

처용과 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영주성을 빠져나갔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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