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화
처용이 악기를 든 악사 중 한 명.
비파를 든 젊은 여성 앞에 서서, 그녀를 향해 ‘천마’라 칭하자.
“검성과 비등한 싸움을 벌였다 하여, 나를 능멸하는 것이오!?”
중검천마가 처용을 노려보며 분노 어린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고는.
-쿠구구!
짙은 기운을 위협적으로 내뿜기 시작했다.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검고 강렬한 기운.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天魔)만이 지닌 천마신공(天魔神功) 특유의 기운이었다.
“호오……?”
처용은 그런 중검천마를 바라보며 작은 놀라움을 표했다.
주변의 무인들을 모두 압도할 만한 거대하고도 짙은 강기.
심지어 그 강기에는 신력도 은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대충 가늠해 봐도, 올림포스 길드장인 제시카보다 강해 보였다.
천마신교를 이끄는 교주다운 강함이었다.
하지만.
“허나, 신승보다는 약해 보이는구나.”
처용은 새로이 신화경에 오른 신승을 언급하며 읊조리고는.
-쿠우우-!
강기와 신력을 폭발시키듯 퍼트렸다.
그 결과, 중검천마의 기운과 처용의 기운이 맹렬하게 부딪치며 힘싸움을 벌였고.
-츠즈즈-!
이내, 중검천마의 기운이 눈에 띄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크읍-!”
-스릉! 우웅!
중검천마가 검을 뽑아 들고 칼날에 강기를 두르며 처용을 향해 겨누었다.
그 순간.
“……이대로 두다간, 천마전이 무너지겠구나.”
비파를 들고 고개를 숙인, 긴 흑발의 젊은 여인이 고운 목소리를 내며 말했고.
-띠리링. 띠딩~!
비파의 줄을 튕기며 귀를 맑게 울리는 음률을 퍼트렸다.
그 잔잔하고 무겁게 퍼지는 음악 소리에 맞춰.
-파아! 스르륵.
짙은 파동이 물결을 그리며 넓게 퍼졌다.
그러자.
-스스……!
맹렬하게 충돌하던 처용과 중검천마의 기운이 점점 가라앉았다.
서로 충돌하는 두 기운을 힘으로 누른 것이 아니었다.
넓고 잔잔하게 퍼지는 파동이 두 기운을 부드럽게 휘감아 넓게 퍼트려 상쇄한 것이었다.
천마전 내부를 무겁게 짓누르던 기운이 사라지자.
-스르륵.
비파를 든 젊은 여인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골반 너머까지 길게 늘어진 흑비단 같은 머리.
왜소한 몸집에 비해, 한 치수 크게 입은 듯 보이는 검은 도포.
그녀가 고개를 들자, 지구 기준으로, 중·고등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동안의 여린 얼굴이 드러났다.
주변의 다른 이들에 비해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소녀.
“아무래도…… 너희들이 상대할 자가 아닌 것 같구나.”
그 소녀가 연륜이 일렁이는 말투로 주변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여려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행동, 말투가 남성적이고 무게감이 느껴졌다.
일개 악사 소녀가 보일 리 없는 행동과 말투에, 중검천마나 다른 고위 교인들이 분노할 법도 했지만.
“…….”
-탓. 타탓.
천마전에 모인 고위 교인들과 무인들은 굳은 표정으로 즉시 물러났다.
그리고.
“비현, 너도 물러나거라.”
소녀가 중검천마의 본명을 언급하며 물러나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본래라면, 천마신교의 절대자이자 교주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 하오나…….”
중검천마는 연약해 보이는 소녀의 명령에 쩔쩔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집안의 큰 어르신을 대하는 듯,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하였다. 물러나거라.”
소녀가 중검천마를 향해 다시 한번 물러나라 명하자.
“알겠습니다. ‘무록천마(武錄天魔)’시여.”
중검천마가 소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그래, 재앙신이라 불리는 그대가 나를 찾았다지?”
소녀가 처용을 향해 붉은빛이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를 치켜뜨며 말했다.
“맞다. 무록천마.”
처용은 흥미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답했다.
무록(武錄).
모든 무기와 병장기술을 기록하고 연마하는 자라 하여 붙여진 별호.
눈앞에 있는 긴 검은 머리의 어린 소녀가 바로 처용이 찾던 무록천마였다.
회귀 전, 치명상을 입고 죽어 가던 그녀는.
-자네가 천마의 이름을 이어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어 주게나.
처용에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라며 천마신공의 마지막 구결을 알려 주었던 이였다.
검성, 대마도사와 더불어 처용에게 다양한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이자 친구인 존재.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었던 이를 마주한 처용이 속으로 반가움 어린 미소를 지었다.
검성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신화경에 오른, 무림의 절대고수 중 한 명.
그녀의 겉모습이 검성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반로환동(返老還童)’ 때문이었다.
신화경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겪는 현상인 환골탈태.
그 환골탈태의 현상이 조금 강하게 발현되어, 나이가 어려지는 것이 바로 반로환동이었다.
“어떻게 나를 정확하게 알고 찾아왔지?”
무록천마가 처용을 응시하며 물었다.
무림에 널리 알려진 천마는 바로 자신의 후대인 중검천마였다.
그 윗세대의 천마이자, 천마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자신은 잊혀 가는 존재였다.
이제 무록에 대해 아는 자는 천마신교 내에서도 고위 교인들뿐.
무림맹에서도 극소수 장문인들과 가주들, 그리고 검성만이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천림맹의 본거지를 박살 낸 재앙신이 자신을 알고 찾아왔다?
무록천마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의문을 표하자.
“궁금한가? 무록천마 아니-.”
처용은 그런 무록천마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마화련.’
전음으로 무록천마의 본명을 언급했다.
“……!”
순간 경악한 무록천마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무록천마라는 별호도 잊혀 가는 세상.
당연히 그녀의 본명을 아는 자는 이제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아랫세대의 천마인 중검천마조차도 그녀의 본명을 알지 못했으니까.
아니, 무림에서 그녀의 본명을 아는 자는 이제 단 한 명뿐이라 봐도 무방했다.
바로.
‘검성…… 그 녀석이 싸움 도중에 떠벌리고 다녔을 리는 없고.’
그녀의 숙적인 검성이었다.
무록천마가 검성을 떠올리며 속으로 읊조리고는.
“……그 칼잡이 도사 녀석과 호각으로 겨루었더군? 심지어 놈의 검술을 모방해서.”
이내, 검성과 처용이 호각으로 맞서 싸우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검성은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숙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그 검성과 ‘검술’로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
아니, 검성의 검술을 완벽하게 모방하여 오히려 그를 압박했다.
그랬기에.
“그렇다면, 나의 무공도 모방할 수 있을까?”
-스스스. 쿠구구!
무록천마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짙은 기운을 내뿜었다.
그 짙은 미소 속에는 처용을 향해 솟구치는 투지와 호승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투지를 내뿜으며 미소를 보이는 무록천마의 모습에.
“한번, 시험해 보든가.”
처용이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그 순간.
-짝! 후우-욱!
무록천마가 손에 들고 있던 비파를 허공에 띄우고는 박수를 한 번 치며 짙은 기운을 퍼트렸다.
그 기운이 무록천마와 처용을 중심으로 파동처럼 넓게 퍼져 나가자.
-후욱! 촤라라라-!
파동에 닿은 지면과 주변 환경이 꿈틀거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치, 주변 일대가 벽돌처럼 갈라지고 뒷면으로 뒤집히며 새로운 환경이 형성되는 듯한 모습.
이내, 천마전의 내부가 사라지고 마르고 갈라진 땅이 나타나자.
-촤라라! 차캉! 쿵! 쿠구궁!
그 위로 온갖 종류의 무수한 병장기들이 쏟아져 지면에 내리꽂혔다.
“심상(心象) – 천무고(千武庫).”
-스르륵. 우웅.
무록천마가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강기를 운용하자.
-스릉! 스르릉! 우우웅!
지면에 꽂힌 수천의 무기들 중 일부가 허공의 떠올라 천마의 뒤로 나열되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팔괘 – 태극천체진.”
-우웅. 스르릉! 스릉!
결전기를 발동하고 스무 개의 무기를 불러내 주변에 띄웠다.
“고작 스무 개인가?”
무록천마가 처용 주변에 떠오른 무구들을 보며 말하자.
“일당백이라는 말은 알고 있겠지? 무록천마.”
처용이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도발하듯 답했다.
“하, 이 건방진 것!”
-스릉! 탓!
무록천마가 오른손에 검 한 자루를 불러내 쥐며 처용에게 달려들자.
-우웅. 촤아아-!
주변에 떠오른 무수한 병장기들이 그녀를 따라 쇄도했다.
그 모습을 본 처용 역시 오른손에 멸절을 쥐고는 스무 개의 병장기를 앞으로 쏘아 보냈다.
-차카카-캉! 차캉! 콰쾅!
천무고와 태극천체진이 허공에서 격렬히 충돌했을 때.
-스릉!
무록천마가 손에 쥔 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두르며 내리쳤다.
-차캉. 스르릉!
처용은 내리쳐오는 무록천마의 검을 향해 아래에서 위로 멸절을 올려쳤다.
두 칼날이 서로 충돌한 순간.
-까가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천마가 쥔 검이 부러졌다.
하지만, 천마는 당황하지 않고 한 발 물러난 후.
“보통 칼이 아니구나!”
-스릉! 탁!
검자루를 버리고 주변에 있던 양날 도끼를 불러와 양손으로 쥐었다.
동시에.
“천마신공 - 만근격!”
-후우욱!
허리를 크게 틀고 회전력을 실으며 처용을 향해 도끼를 가로로 휘둘렀다.
처용은 태극천체진으로 불러낸 무구 중 하나, 차륜 도끼를 왼손으로 쥐고는.
“천마신공 – 만근격.”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크게 휘두르며 받아쳤다.
같은 무공이 실린 육중한 도끼날이 서로 충돌한 결과.
-콰쾅! 까가강-!
귀를 울리는 굉음이 터지며 처용과 무록천마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역시, 매섭네.’
무록천마와 짧게 충돌한 처용이 그녀를 응시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저 가녀려 보이는 팔로 휘두른 공격 하나하나가 상당히 무거웠다.
사실, 무록천마는 검성보다 무공의 위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 어떤 무기를 들고 무공을 발현해도, 검 한 자루를 든 검성의 검성류를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록천마는 검성과 호각으로 겨룰 수 있는 인물.
그 이유는 그녀가 검성보다 더 강한 심상세계를 지녔기 때문에.
즉, 강력한 ‘심상 구현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루비아가 펼치는 공간 결계보다도 정교해 보이는 이 공간은, 현실에 구현한 그녀의 심상이었다.
자신의 심상을 현실에 덧씌워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능력.
신화경에 도달한 이들 중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지닌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이능(異能)이었다.
얼핏 보면, 마법을 부린다고 착각할 정도.
‘역시, 대단하네.’
처용이 오랜만에 다시 보는 무록천마의 심상구현을 보며 속으로 읊조릴 때.
“허, 참으로 신기한 사술이구나!”
무록천마 역시 자신의 무공을 그대로 따라 한 처용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흥미를 표했다.
동시에.
-스르릉. 탁!
손에 쥔 양날 도끼를 버리고 투창을 불러내 쥐며 치켜들었다.
“천마신공 - 투귀맹진!”
-투-콰아앙!
강기가 서린 투창이 상어의 형상을 취하며 처용에게 쏘아졌고.
“천마신공 – 투귀맹진.”
-파-아앙!
처용 역시 미리 쥐고 있던 투창을 천마를 향해 내던졌다.
-콰콰쾅-!
두 투창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강렬한 강기의 폭발을 일으킨 순간.
“천마신공 – 오의.”
-스르릉. 쿠구구!
무록천마가 양손으로 검을 쥐며 강렬한 강기를 내뿜었다.
그 모습을 본 처용 역시.
“천마신공 – 오의.”
-스릉.
두 손으로 멸절을 쥐고 칼날을 앞으로 겨누며 칼날에 강기를 압축시켰다.
이윽고 거칠게 휘몰아치는 강기가 각 두 칼날에 극한으로 압축된 순간.
“백귀야행.”
“백귀야행.”
-스릉! 캬아아아-! 크아-!
처용과 무록천마가 서로를 향해 칼날을 내리그으며 백귀들을 쏘아 보냈다.
강기와 신력으로 만들어진 백귀들이 서로 충돌하며 동족상잔(同族相殘)을 이을 때.
“천마신공 – 천마강림.”
무록천마가 처용을 향해 칼끝을 겨누며 천마강림을 사용했다.
-쿠우우! 스릉!
강기와 신력이 무록천마 주변에 모이며 천마의 의지가 형성되었고.
“천마신공…… 특히, 천마강림은 검성의 무공과 다르다.”
자신감 어린 미소를 보이며 처용을 향해 말했다.
천마강림은 병장기를 다루는 천마신공의 다른 무공과는 확연히 다른 무공이었다.
특정 조건이 없으면, 절대로 익힐 수 없고 쓸 수도 없는 무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천마신공 – 천마강림.”
처용이 작은 미소를 내비치며 천마강림을 사용하자.
-스르륵! 쿠우우!
강기와 신력이 모여 반투명한 인영이 형성되었다.
그 모습을 본 무록천마가 커다래진 눈으로 경악을 드러냈고.
“……누구냐? 네놈에게 천마강림을 전수한 이가!”
이내, 분노를 드러내며 처용에게 물었다.
그런, 무록천마의 분노에 반응하듯.
-우우웅! 파아아-!
그녀의 위에 떠오른 천마의 의지가 점점 선명해지며 뚜렷한 형상을 내비쳤다.
우람한 덩치와 탄탄한 근육이 돋보이는 남자의 형상.
바로, 무록천마에게 천마신공을 하사해 준, 2대 천마의 형상이었다.
이처럼, 천마신공은 전대 천마를 통해서만 그 구결이 전승되는 무공.
단순히 사특한 이능으로 모방한다고 해서,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네 전수자(傳受子)의 모습을 드러내라!”
무록천마가 처용을 향해 칼끝을 겨누며 소리쳤다.
그녀는 역대 천마 중 누군가가 천마신공의 구결을 외부로 유출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선, 처용이 천마신공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게 말이 안 되었으니까.
그런 무록천마의 외침에 처용이 작은 미소를 보이고는.
“천마강림 – 진체(眞體).”
-우우웅. 파아아-!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천마의 의지에 강기와 신력을 불어넣었다.
무록천마가 소환한 천마의 의지가 그랬듯, 처용이 소환한 천마의 의지 역시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처용 위에 떠 오른 천마의 의지가 제 진짜 모습을 드러내자.
“……뭐라고?”
떨리는 눈동자로, 무록천마가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흩날리는 긴 흑발과 펄럭이는 검은 도포.
날카롭게 가라앉은 눈빛이 돋보이는 안광.
무록천마가 소환한 천마의 의지보다 왜소해 보이는 어린 여인의 체형.
처용이 형성한 천마의 의지, 그 진짜 모습은 다름 아닌.
“네게 천마신공을 전수한 자가…… 나였……다고?”
무록천마, 자신의 모습이었다.
“……진실을 알고 싶나? 무록천마, 마화련.”
처용이 당황스러워하는 무록천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실이라고?”
무록천마가 처용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이틀 뒤, ‘맹약의 장소’로 찾아와라.”
-스르릉. 촤아-!
처용이 멸절을 크게 휘둘러 무록천마가 구현한 심상세계, 천무고를 반으로 갈라 부수며 말을 이었다.
-쿠구구! 쿠구-!
반으로 갈라진 무록천마의 천무고가 점차 흔들리며 무너질 때.
“그곳에서 모든 ‘진실’을 알려 주겠다.”
-우우웅.
마지막 말을 전한 처용이 황금빛 게이트를 열고 그 안으로 걸어가며 사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