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화
소림사의 가장 거대한 전각.
“천교의 신들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악신들이었을 줄이야.”
그곳에서 모든 ‘진실’을 들은 소림방장, 신승이 인상을 거칠게 찌푸리며 읊조렸다.
그런 신승의 말에 공감하듯,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과 가주들도 어두운 표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땡중 녀석이, 내가 그리 설득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만…….”
소림사에 방문한 또 다른 인물.
처용이 게이트로 불러낸 레나가 신승을 노려보며 불만 어린 목소리를 읊조렸다.
“허허, 중이란 본래 빌어먹는 이들이지요. 암영단주.”
신승은 그런 레나의 불만 어린 목소리에 웃음으로 답하고는.
“아라한의 진인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제 그대 또한 믿겠습니다.”
처용을 눈짓하며 믿음 어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전까지는 암영단이라는 수상한 단체를 이끌며 미래를 예언하는 자를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라한의 진인인 처용을 돕는 자라면 달랐다.
그리고.
“그 악신들이…… 소림의 시조를 해한 이들일 줄은 몰랐군요.”
신승이 조금 전, 처용이 했었던 이야기 중 한 부분을 떠올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처용에게서 들은 ‘진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구와 에스라, 무림과는 다른 세계의 존재.
그 세계에서 천교가 벌인 잔혹한 짓거리들.
아니, 천교를 포함한 ‘악신’들이 무슨 짓을 벌여 왔는지 모두 들었다.
그들이 먼 과거의 인간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까지도.
마지막으로.
“검성께서는…… 속고 계셨던 것이로군요.”
주기적으로 소림사에 찾아와 천림맹에 합류하라 설득하는 자.
최강의 무림인이자, 신승이 개인적으로 존경하기도 하는 무림인.
검성에 대한 진실도 전해 들었다.
그저 간략하게 현재 상황과 진실을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천림맹주…… 그자가 남다른 욕망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감히 형제를 속일 줄은 몰랐군요.”
신승은 이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두 파악했다는 듯 말했다.
참담한 신승의 목소리에.
“검성 말고도 천교를 돕는 대악마도 문제다.”
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처용, 천림맹의 영토에 열린 블랙 게이트는…… 메피스토의 영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
메피스토를 언급하는 레나의 말에 처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에 그녀가 말했었던 천교를 돕는 삼천마.
레나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그는 메피스토로 밝혀졌다.
“삼천마…… 가장 강한 악마 중 하나였지요?”
신승이 기억났다는 듯 읊조리며 말했고.
“아직 ‘천마’가 남았는데…… 조금 더 서둘러야겠어.”
처용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른 삼천마는 몰라도 메피스토라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곧 검성이 이곳에 다시 찾아올 겁니다.”
“슬슬 다시 설득해 올 시기이기도 하니까요.”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과 가주들도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곧 검성이 설득을 위해 다시 찾아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용이 이곳에 방문한 것을 알고 신화에 오른 신승을 본다면?
검성이 봉문된 이들을 향해 검을 뽑아 들 수도 있었다.
그런 우려가 담긴 목소리가 울리자.
“……아라한의 진인께서는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기며 침묵한 신승이 처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검성께서 이곳을 찾아온다면, 제가 그를 저지하겠습니다.”
“당신이 신화경에 올랐다고 해도, 검성을 이길 순 없어.”
검성을 저지하겠다는 신승의 말에, 레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깨달음을 얻고 경지를 돌파한 신승은 신화경에 올랐다.
하지만, 신승이 아무리 신화경에 올랐어도, 검성을 이길 순 없었다.
“맞습니다. 암영단주. 검성께서는 신화경에 오른 지 어언 수십 년이 지났으니까요.”
신승 역시 레나의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은 신승보다도 더 먼저 신화경에 오르고 더 앞을 향해 나아간 무인.
반면에 신승은 이제 막 신화경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같은 신화경이라도 해도,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허나, 이 노승이 신화경에 오르면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신승은 검성을 저지할 방법이 있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성께서 아직 도사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셨다면…… 제가 저지할 수 있습니다.”
“검성은 아직 검귀(劍鬼)가 되지는 않았죠.”
처용이 그런 신승의 말에 답하듯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승.”
“믿고 맡겨 주십시오. 아라한의 진인이시여.”
부탁한다는 처용의 말에 신승이 두 손을 합장해 보이며 답했고.
“저희 역시 돕겠습니다.”
“봉문을 부수고 남은 문파들을 규합하겠습니다.”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과 세가의 가주들도 처용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들은 이제 봉문으로 인한 절망이나 한탄이 아닌, 희망이 일렁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봉문 당했던 문파들은 이제 원만하게 협조해 줄 거다.”
소림사를 나온 처용이 옆에 있는 레나를 바라보며 말하자.
“이야~ 네가 오자마자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네.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야.”
레나, 아니 엘리스가 처용을 향해 진심 어린 감탄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레나에게 깃들고 지구를 막 벗어나 다른 세계에서 악신들을 상대할 때.
그 대부분의 시간을 거의 ‘무림’ 세계에서 보냈었다.
지구와 에스라 대륙의 멸망을 저지하고 미래를 바꾼 처용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하려고 했었으니까.
섀도우 헌터들과 함께 도움이 되는 인물들을 찾아 규합하고 제3의 세력을 형성했다.
동시에, 온갖 방법으로 악신들과 악마들을 농락하며 그들의 계획을 망쳐놓았었다.
하지만, 처용이 했던 것처럼, 세계 그 자체를 구하는 것만큼은 쉽지 않았다.
다른 세계들은 모두 악신들에게 점령당해 ‘검은 세계’로 변했고 이제 무림만이 남은 상황.
다행히 처용이 무림 세계에 도달하자마자, 골치 아팠던 일들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고 있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
“천마도, 이렇게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건가?”
엘리스가 무슨 수를 써도 설득하지 못한 인물 중 한 명.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마를 언급하며 처용에게 묻자.
“다 방법과 계획이 있다.”
처용이 서북쪽을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메피스토를 해결할 준비를 마쳐야 한다.”
“걱정은 말고 악마는 악마 전문가에게 맡겨.”
메피스토를 언급하는 처용의 말에 엘리스가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돌아오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도록 하지.”
“좋아.”
자신감 가득한 엘리스의 말에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탓!
서북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처용이 가고자 하는 장소가 소림사와 멀지 않았기에.
-샥!
얼마 지나지 않아, 처용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곳에는.
-천림맹의 이름으로!
-저 사악한 악도들을 모조리 죽여라!
산골 촌락의 입구로 보이는 장소에서, 백 단위의 무인들이 서로 칼을 맞대며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한쪽은 천림맹을 상징하는 도복을 입은 무인들.
그 반대편은.
-더 밀리지 마라!
-반드시 이곳을 사수한다!
붉은 문양이 그려진 검은 도복을 입은 무리들.
무림 세계에서 천마신교라 불리는 세력에 속한 무인들이었다.
천림맹이 무림맹이었을 시기부터, 그들의 숙적으로 여겨 왔던 세력인 천마신교.
그런 그들이 천림맹의 무인들을 상대로 열세 어린 싸움을 벌이며 힘겹게 분투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주변 상황을 잠시 지켜보던 처용은.
-콰르릉! 콰쾅!
다리에 벼락을 휘감으며 전장 한복판에 강림했다.
처용이 벼락과 함께 전장 중심에 등장하자, 전투를 벌이던 무인들의 시선이 한순간 집중되었다.
그리고.
-우웅. 쿠구구!
처용이 주변에 무거운 강기를 흩뿌리며 날카로운 눈빛을 치켜뜨자.
“……재, 재, 재앙신!”
“왜 여기에-!?”
천림맹의 무인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경악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조금 전까지 칼을 겨누던, 천마신교를 향한 악의와 투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공포에 잠식된 모습.
처용은 그런 천림맹의 무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슥 훑어보고는.
“……비켜.”
무거운 목소리로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결과.
-샥! 샤샥!
천림맹의 무인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벌어지며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처절하게 이어지던 전투가 순식간에 끝나자,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내비쳤다.
동시에.
-재앙신, 분명 재앙신이라고.
-천림맹의 성지를 부순 그……!
전장에 난입한 처용을 향해 공포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처용은 그런 그들을 향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다가가고는.
“천마를 만나러 왔다.”
-저벅.
그들을 지나쳐 나가며 단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천마신교는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천산(天山) 위로 향하는 처용을 저지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당장, 교주님께 이 사실을 알리거라.”
무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무인이 휘하 무인들에게 명령하듯 속삭였고.
“예.”
-샤샥!
그 명령을 받은 무인들이 바람처럼 사라지며 천산 위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처용은 빠르게 발을 놀리며 앞서 나아가는 무인들을 응시하고는.
-저벅.
산책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계속 천산 위를 향해 나아갔다.
도중에 천마신교의 다른 무인들과도 마주쳤지만.
“……!”
그들은 경계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기만 할 뿐, 처용의 앞을 막거나 저지하지 않았다.
마치, 미리 명령을 전달받은 듯한 모습.
이윽고 방해를 받지 않고 쭉 나아간 처용의 발걸음이, 산의 중턱에 세워진 관문을 지나쳤고.
-저벅.
검은 기와가 나열된 모습이 인상적인, 거대한 전각 앞에 도달했다.
바로, 천마신교의 주인이 거주하는 천마전(天魔殿)이었다.
처용이 본당의 앞, 거대한 정문 앞에 도달하자.
-끼이이!
손대지 않았는데도, 문이 저절로 열렸다.
열린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간 처용이 바닥에 깔린 검은 비단을 따라 쭉 나아가자.
-끼이이.
내부에 자리한 문이 한 번 더 열리며, 검고 붉은 분위기의 대전이 드러났다.
“나를 찾으러 왔다고 들었소.”
그 대전의 정면, 가장 높은 제단 위에 선 강인한 인상의 남자.
붉은 문양이 그려진 검은 비단 도포를 갖춰 입은 이.
“내가 천마신교의 교주, 중검천마(重劍天魔)요.”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이곳 천산의 주인인 천마가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저벅.
처용은 계단을 밟고 올라 넓은 제단 위에 서며, 천마를 마주했다.
본래, 이곳에 방문하는 이들은 천마를 향해 부복하며 예의를 갖춰야 했지만.
“…….”
“…….”
이곳의 주인인 천마도, 주변에 자리한 천마신교의 고위급 교인(敎人)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처용은.
-스르르!
제 기운을 감추지 않고 보란 듯, 방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상황.
천마와 그를 따르는 무인들은, 모두 긴장감과 경각심을 보이고 있었다.
처용은 그런 이들을 한번 쭉 훑어보고는.
“……내가 찾는 천마는 ‘5대 천마’ 그대가 아니다.”
-파아아……!
주변에 방출하는 제 기운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처용이 눈앞에 보이는 천마신교의 교주, 중검천마를 향해 ‘5대’라 칭하자.
“……!”
중검천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며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몇몇 경지가 높은 천마신교의 무인들 역시 경악을 내비쳤다.
처용은 그런 그들의 반응을 한번 살피고는.
-저벅.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돌려 제단의 구석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에는 천마신교의 본당에서 천마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樂士)들이 자리해 있었다.
악사들은 점점 다가오는 처용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내비쳤다.
처용은 그런 악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쭉 지나쳤고.
-탁.
이내, 비파를 들고 앉아 있는 긴 검은 머리의 여인 앞에 섰다.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비파를 쥐고 있는 무표정의 젊은 여성.
“난…… 당신을 찾으러 왔다. ‘3대 천마’ 아니-.”
처용이 비파를 든 여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천마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중 한 명에게 ‘3대 천마’라 칭하는 처용의 말.
그 말에 경악한 중검천마의 눈이 거의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리고.
“무록(武錄).”
처용의 입에서 ‘무록(武錄)’이라는 말이 이어지자.
-스르륵.
비파를 든 여성의 감긴 눈이 떠지며 붉은빛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