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화
무림 세계의 북부, 바위산과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한 첩첩산중.
산꼭대기에 만년설이 상시 쌓여 있는, 험한 산골 중턱에 자리한 시골 마을.
그곳은 다름 아닌, 암영단의 본부로 활용되는 장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골 마을은 위장.
그 아래 자리한 지하 동굴을 개조하여 만든 장소가 바로 암영단의 본거지였다.
레나가 이끄는 암영단은 이곳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거점을 두어 활동하는 중이었다.
“괜찮은 곳에 거점을 잡았네.”
암영단의 본거지 밖으로 나온 처용이 주변의 산맥을 둘러보며 말했다.
중원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에 자리한 산맥.
이곳은 처용이 나름 잘 알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었다.
회귀 전, 무림 세계에 자리 잡은 저항군의 거점이기도 한 장소였으니까.
적들의 눈을 피해 숨기 좋고 지하 동굴을 통해 은밀하게 각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엘리스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자이기에,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하는 듯 보였다.
“설산이라, 그렇다면 북해빙궁(北海氷宮)도 암영단에 합류한 건가?”
주변을 둘러보던 처용이 북쪽에 자리 잡은 세력 중 하나를 언급하며 묻자.
“천림맹에게 몰살당하기 전에, 다행히도 그들이 내가 내민 손을 잡았지.”
레나가 산맥 너머의 먼 북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무림 세력은 천림맹에 굴복하여 흡수되는 것으로, 그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레나가 언급한 북해빙궁 역시 마찬가지.
무림맹에 속해 있던 그들은 천림맹의 무차별적인 정복에 거세게 반대하자, 즉시 공격을 받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본보기를 당했다고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북해빙궁이 완전히 멸문(滅門)당하기 직전, 암영단이 개입하여 그들을 구해 냈다.
그렇게, 멸문의 위기에 처했던 일부 문파들이 암영단에 합류했다.
다만, 천림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암영단에 합류한 건 아니었다.
“소림이나, 화산도 우리가 내민 손을 잡았으면 좋으련만…… 쯧.”
레나가 서남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잇고는 혀를 찼다.
전 무림맹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던 거대 세가와 문파들.
그들은 천림맹에 의해, 봉문(封門)에 처했을 뿐, 아직 멸문당한 것은 아니었다.
“검성이 자비를 베푼 건가?”
처용이 그 이유를 짐작하며 레나에게 묻자.
“검성의 그 답답한 고집은, 천교의 신들도 꺾지 못했나 봐. 크크.”
레나가 작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무림맹의 잔재 세력이 아직 멸문당하지 않는 이유.
그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던 검성이, 그들의 멸문만큼은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봉문당한 이들을 찾아가 설득하고 있나 봐.”
검성은 봉문당한 이들을 주기적으로 찾아가 그들을 설득하는 상황이었다.
“천마신교에도 검성이 계속 찾아가는 것 같더라고.”
레나가 검성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자.
“하-아……!”
처용이 답답한 심정이 일렁이는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당장이라도 검성을 찾아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싶었지만.
“최대한…… 서둘러야겠네.”
조급한 심정을 억누르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읊조렸다.
검성을 단번에 설득하기 위한 기회가 오지 않았고 준비 또한 미흡했으니까.
답답한 심정을 몰아내듯, 재차 한숨을 내쉰 처용은.
“우선 태룡전의 열쇠로 연결은 해 놔야겠지.”
-우웅.
태룡전의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에스라 대륙과 태룡전을 연결했던 것처럼, 무림 또한 연결하려는 것.
“이곳에, 세 번째 성지를 세우는 건 어때?”
그 모습을 본 레나, 아니 엘리스가 처용에게 의견을 물었다.
지구의 태룡사는 태룡전과 직통으로 이어지는 첫 번째 성지.
그리고 처용이 에스라 대륙에 세운 아라한 왕궁은 태룡전의 두 번째 성지였다.
엘리스는 아라한 왕궁의 예시처럼, 무림 세계에 세 번째 성지를 세울 것을 권유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지를 세우면 눈에 확 띄어, 집중 공격을 받을 거다.”
처용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무림 세계와 태룡전을 연결하기만 할 뿐, 당장 성지를 세울 생각은 없었다.
암영단의 거점에 성지를 세우면, 이곳이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은밀하게 활동해야 하는 암영단의 특성상, 본거지의 노출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보다는…….”
처용이 서쪽 부근을 응시하며 읊조리자.
“미리 점찍어 둔 장소가 있구나?”
엘리스가 처용이 바라보는 장소를 응시하며 말했다.
동시에.
“혹시?”
처용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눈빛이 진지하게 변하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처용의 숙적이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처용의 생각을 잘 간파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엘리스의 읊조림에.
“네 생각이 맞아.”
처용은 입 밖으로 말하지 않은 엘리스의 생각이 맞다고 답하고는.
-우우웅. 파아-!
태룡전의 열쇠에 모인 황금빛을 넓게 퍼트렸다.
[태룡전의 열쇠가 ‘무림(武林)’ 차원을 인식합니다.]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성좌의 권역, 혹은 신의 가호가 짙은 장소에서는 해당 기능이 제한됩니다.]
이제 지구에서처럼 태룡전의 열쇠가 가진 기능을 무림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처용이 무림 세계와 태룡전을 연결하고 열쇠를 회수한 순간.
-우우웅.
돌연, 처용의 옆에 황금빛이 모이며 게이트가 열렸다.
“……?”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의문을 표했다.
자신은 태룡전의 열쇠로 게이트를 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처용이 평소 여는 게이트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게이트였다.
그 게이트가 꿈틀거리며 짧게 일렁이더니.
“앗? 나왔다.”
-스르륵.
작은 체구의 어린아이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튀어나왔다.
자연을 형상화한 듯한 녹음 빛 머리와 연꽃이 피어 있는 화관.
눈, 코, 입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귀여우면서도 온화한 인상의 여아.
“계승자. 안녕?”
게이트에서 나와 처용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아는 다름 아닌 보살이었다.
심지어.
-삐익…….
그녀의 품에는 곤란한 듯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작은 용, 유리아까지 안겨 있었다.
“……어떻게!?”
처용이 놀람과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보살은 자비의 대신, 시스템의 제약을 받는 성좌였다.
지금 있는 곳은 무림 대륙, 암영단의 본진.
이곳은 성지가 아니었기에, 신격이 강림할 수 없는 장소였다.
처용은 태룡전의 열쇠로 무림 대륙과 성역을 연결만 했을 뿐, 이곳을 성지로 만든 게 아니었다.
즉, 여긴 보살이 게이트를 통해 나올 수 없는 장소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게이트가 열렸고 보살이 지상에 직접 강림한 상황.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처용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보살에게 묻자.
“으음…… 밖의 세상 좀 보고 싶어서?”
보살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태룡전 밖에 나가고 싶어서, 지상에 가 보고 싶어서 나왔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담긴 대답.
보살이 해맑은 미소를 담아 진심을 말하자.
“그러니까…….”
처용이 이마를 부여잡으며 읊조리고는 이내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처용이 생각을 이을 때.
“……한처용, 전에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
처용처럼 황당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자비의 대신은…… 시스템의 제약을 받고 있지 않은데?”
“……그러고 보니!?”
엘리스의 말에 처용의 눈이 커지며 보살을 응시했다.
신이 지상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시스템의 제약.
보살은 그 시스템의 제약이 사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순환의 포식자에 의해 분해되던 보살에게 재생을 사용한 후.
보살이 다시 재생되어 어린아이의 모습이 된 이후로 시스템의 제약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가 시스템의 제약을 받고 있지 않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목소리.
“으음, 내가 재생되어 어려진 이후로, 시스템이 날 묶지 않더라고.”
지금 보살은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본연의 목소리를 그대로 내고 있었다.
그리고 재생된 이후로 시스템이 자신을 묶지 않았다는 보살의 말에.
‘내가 인과율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처용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속으로 읊조렸다.
우주가 보살에게 건,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그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순환의 포식자가 보살을 잡아가려 할 때, 그 운명을 처용이 모두 파괴했다.
그로 인해 보살을 제약하던 시스템의 법칙까지 끊어졌었다.
아마도, 그때 끊어진 시스템의 선이 아직 연결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처용, 이건 태초의 그릇을 품은 숙주로서 든 생각인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엘리스가 보살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시스템은, 자비의 대신에게 다시 제약을 걸지 않는 것 같다.”
“……일부러 다시 제약을 걸지 않고 있다?”
처용이 의문을 표하자.
“자비의 대신이 지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 판단한 거 같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엘리스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시스템이 신들에게 제약을 거는 이유는 지상에서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즉, 신이 고의로 지상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도록 조치한 제약이었다.
그 제약이 보살에게는 걸려 있지 않은 상황.
그렇다면, 시스템이 보살에게 다시 제약을 걸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시스템은 그녀가 지상에 해를 끼칠 만한 존재가 아니라 판단한 것이었다.
적어도 엘리스가 떠올릴 법한 합당한 이유는 이러했다.
엘리스가 말을 마치자.
-그 아이의 말이 맞을 거다.
처용의 머릿속으로 황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현이 시스템의 제약에 벗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행동의 제약까지 없었을 줄이야…….
아마, 방금 게이트를 통해 보살이 나간 것을 감지하고 처용에게 말을 걸어 온 것 같았다.
‘……문제는 없을까요?’
처용이 황룡의 말에 우려를 표하며 묻자.
-그 아이가 보현과 함께 있으니,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황룡이 유리아를 언급하며 잔잔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자비의 대신은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자비의 대신, 보살이 어떤 존재인지 상기시키는 듯한 황룡의 말이 이어졌다.
보살이 시스템의 제약 없이 지상을 활보하는 상황.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시스템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온전한 신격이 지상에 강림한 것이었다.
재생되어 어려진 그녀가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적어도 대신급 신격인 보살이 지상에서 위협을 받을 만한 일은 적었다.
그리고 설사 자비의 대신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일어난다 해도.
처용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황룡의 말을 들은 처용이 상황을 정리하듯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보살님이 걱정되어 따라 나온 거였구나.”
보살의 품에 안겨 있는 유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삑.
그 말에 긍정하듯,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내었다.
유리아가 보살의 품에 안겨 게이트 밖으로 나온 이유.
지상으로 나가려는 보살이 걱정되어 함께 따라 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그냥 둘만 두기엔 안심이 안 되는데…….’
처용이 보살과 유리아를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보살과 유리아, 둘 다 지상에서 위협을 받을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고는 언제 어디서 불시에 터질지 모른다.
처용에게 있어 보살과 유리아는 둘 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존재들.
만일에 대비한 보험 정도는 갖추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처용이 생각을 이을 때.
-쿠구! 쿠르르-!
돌연, 하늘이 울리고 구름이 나선으로 휘몰아치는 이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 위를 노려보았고.
“아아, 슬슬 놈들이 시작할 때였나?”
레나는 현재 상황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하늘 관문으로 무엇을 하려는 거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처용이 레나에게 물었다.
나선으로 휘몰아치는 구름과 그 나선의 중심에 뭉치는 반투명한 기운.
현재 하늘 위에서 일어나는 이변은 다름 아닌 옥황상제의 권능, 하늘 관문이 형성되는 현상이었다.
“놈들이 말하는 신성한 제물 의식을 생중계하는 거지, 하늘 관문을 무슨 뉴스처럼 활용하더라고.”
레나의 말이 이어진 순간.
-슈르르륵.
구름의 중심이 확 벌어지더니, 제단과 같은 광경이 나타났다.
이전 천교가 지구에서 벌인 제례와 비슷한 광경.
다만, 그 당시의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제물이라는 게…… 어린아이들을 말한 거였나?”
하늘 위에 비추어지는 제단 위에는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묶여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아이들을 산 제물로 바치려는 듯한 모습.
그 모습을 무림 세계 전체에 알려 주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함인가?”
“천교 놈들의 생각이야 뻔하지 뭐.”
하늘을 바라본 처용이 한심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레나가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저걸 해킹해서 위치를 역추적할 순 없나? 아니면, 저 문을 통해 침입한다거나?”
잠시 생각한 처용이 레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묻자.
“이미 여러 방면으로 시도해 봤다. 모두 실패했지.”
레나가 아닌, 엘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천교가 하늘 관문을 통해, 무림 세계 전체에 공개적으로 보여 주는 제례.
“아까 말했다시피, 누군가가 저 안에서 문을 열어 주거나 하지 않는 이상, 저기에 바로 갈 순 없어.”
엘리스가 갖은 수를 다 써 봤지만, 천교의 제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조금 전 처용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쯧, 당장은 구경하는 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군.”
당장 방법이 없는 건 처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하늘 위에 열린 것은, 그저 특정 공간을 보여 주기 위한 ‘거울’일 뿐.
누군가가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아니었다.
물론, 당장 방법이 없다고 하여 구경만 할 처용이 아니었다.
“……시도는 해 볼까?”
무언가 단서라도 알아보기 위해, 신력을 내뿜으며 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역천을 사용해 인과율을 비틀든, 파천을 사용해 거울을 부수든, 무엇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그 순간.
-스륵.
하늘 관문 너머로 보이는 제단 위에서 한 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계승자.
처용을 똑바로 응시하며 손을 흔들었다.
밝은 미소를 지으며 처용을 부르는 아이는 다름 아닌 보살.
“뭔!?”
그 모습을 본 처용이 눈을 크게 뜨며 옆을 바라봤지만, 옆에 있어야 할 보살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당황한 처용이 다시 하늘 관문을 응시했을 때.
-이 아이들 좀 구해 줄래?
보살이 처용을 향해 부탁하듯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스르륵.
처용의 눈앞에 금빛이 일렁이는 연꽃잎이 나풀거리며 나타났다.
그 연꽃잎을 처용이 손을 뻗어 쥐자.
-……치직!
하늘 관문과 이어지는 얇은 선 하나가 처용의 눈에 보였다.
처용은 눈에 보이는 그 선이 정확히 무엇인지 인지한 알아챈 순간.
“일치단결(一致團結)!”
-쿠구구! 콰드드득!
즉시, 수라와의 일체화를 발동하며 초월자로 변했다.
동시에.
-파지직! 콰르르릉-!!
한 줄기의 강렬한 검붉은 벼락으로 변하며 하늘 관문을 향해 솟구쳤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