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3화
마을을 점거하고 사람들을 학살했던 천림맹의 무인들과 천 제국의 관군들이 처용에게 몰살당한 직후.
-탓.
처용이 소백과 함께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외부에 목책과 성벽을 쌓아 올린 대규모 진지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큰 전쟁을 앞두고 최전방에 진군한 대규모의 군대가 자리 잡은 듯한 모습.
각 막사의 위에는, 천림맹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적어도 만 명 단위의 무인들과 병사들이 주둔할 법한 주둔지.
그 주둔지 앞에 처용이 모습을 드러냈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적진 한복판을 향해 제 발로 나아가는 무모한 모습.
본래라면, 주둔지 안에 있던 모든 무인이 일제히 처용에게 달려들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도망쳐라!
-성지로 가야 한다! 모두 흩어져라!
소란스러운 주둔지 안에서는 무인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마치, 바퀴벌레 집을 들춘 것처럼, 주둔지 밖을 향해 사방으로 뛰쳐나가는 모습.
처용이 이곳에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주둔지를 버리고 도망칠 준비를 한 듯 보였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오죽하면.
-제물로 잡은 놈들은 어찌-?
-그냥 버려!
주둔지 안에 붙잡아 놓은 사람들조차 버리고 모두 제 몸뚱이만 챙겨 달아나고 있었다.
이미 처용이 오기도 전에, 반 이상의 무인들과 병사들이 도망친 상황.
“흐음?”
처용은 자신을 마주한 이들이 기겁하며 달아나는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고는.
-저벅. 저벅.
느긋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며 주둔지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굳이 도망치는 무인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거나, 그들을 추적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저기…….”
처용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온 소백이 의문이 일렁이는 목소리를 읊조리자.
“흩어져 도망가는 잔챙이들을 잡아서 뭐 해.”
그런 소백의 의문에 처용이 답해 주듯, 입을 열었다.
“바퀴벌레를 잡으려면, 큰 집에 모두 몰아 놓고 단번에 불태워 버려야지.”
“……아.”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소백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미 지원군이 와서 뒷정리 중이기도 하니, 굳이 나설 필요는 없지.”
처용이 주변으로 넓게 감각을 확장해보며 읊조렸다.
-크아아!
-으악!
지금 처용의 감각을 통해 전해져 오는 무인들의 비명.
섀도우 헌터들, 무림에서 암영단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외부를 포위한 채, 천림맹을 공격 중이었다.
이미 도망치는 잔당들을 암영단이 처리 중이었기에, 처용은 굳이 나서지 않았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처용의 발걸음이 중앙에 도달하자.
-파지직! 파직!
청색과 검은색의 기둥이 철창처럼 넓게 나열된 장소가 나타났다.
마치, 무언가를 가두기 위한 감옥처럼 보이는 장소.
“천년한철, 판테라움으로 만든 감옥인가?”
처용이 눈앞에 보이는 감옥이자 봉인을 훑어보며 읊조릴 때.
“오랜만이군요. 역천군주.”
-스르륵.
검은 모자와 하얀 가면을 쓴 화려한 연미복의 남성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며 말했다.
이곳, 무림 세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극배우와 같은 모습.
“잭키 찬?”
처용은 자신의 이명을 부르며 나타난 이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레나가 해결사를 보내 준다던 게, 설마 당신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단장이라는 이명을 지닌 섀도우 헌터, 잭키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저희가 여길 점령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었는데…….”
주변의 광경을 둘러보며 황당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있는 곳은 천림맹의 주요 거점 중 하나.
엄청난 수의 병력과 강력한 무림의 고수들이 상시 주둔하는 요새였다.
암영단이 수시로 공격했었지만, 결코 함락할 수 없었던 장소.
이곳을 공격한 이유는 천림맹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파지직. 파직.
강렬한 전류가 옅게 흐르는 봉인, 감옥과도 같은 장소.
이곳에 갇힌 이들, 곧 천림맹의 제물이 될 이들을 빼내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천림맹에게 있어 제물이 중요한 만큼, 이 요새의 방어가 너무 견고했었다.
기회를 엿보며 재차 공격을 준비하던 와중, 천림맹에게 역습까지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렇게 천림맹의 습격을 막던 도중.
-해결사를 데리고 왔다.
잠시 다른 세계로 향했다가 돌아온 레나가 전달한 전음.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데려온 해결사는 다름 아닌 역천군주, 처용이었다.
심지어, 처용은 이곳에 오자마자.
“칠성 장군을 처치하고, 여길 하루아침에 쓸어버리게 될 줄이야.”
천림맹의 주요 전력 중 하나와 최정예 무인들.
그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던 천림맹의 중요 주둔지의 점령까지.
이 모든 것은 레나가 데려온 해결사, 처용이 나타나 단번에 해결해 버렸다.
“내가 직접 온 이상, 천림맹이 파멸하는 건 시간 문제다.”
-저벅.
처용은 황당한 듯 읊조리는 단장의 말에 답하듯 말하고는 결계 앞으로 다가갔다.
“하아, 성가신 봉인입니다. 쉽게 풀 수 없겠군요.”
잭키가 눈앞에 있는 천림맹의 감옥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려, 천년한철과 판테라움으로 만들어진 봉인.
이 봉인을 강제로 풀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우웅. 스르륵.
처용이 봉인을 향해 손을 뻗으며 신력과 강기를 내뿜었다.
-파지직! 파직!
봉인이 처용의 힘에 저항하듯, 강렬한 전류를 튀기자.
“아무리 역천군주라 해도, 이걸 힘으로 부술 순-.”
잭키가 우려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처용이라 해도, 쉽게 부술 순 없어 보였으니까.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안에 갇힌 이들이 다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 낭비다.”
처용은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비틀어라. 역천.”
-우웅! 스르륵!
인과율을 뒤집는 권능, 역천의 힘으로 봉인 전체를 뒤덮었다.
강렬하게 튀기던 전류가, 역천에 제압당해 잠잠해진 순간.
“쳐부숴라. 파천.”
-으드드!
처용이 앞으로 뻗은 손아귀를 강하게 틀어쥐며 비틀었다.
처용의 신력이 순간적으로 강력한 압박을 가하며 봉인을 짓눌렀고.
-우드드! 우득! 파창! 창-!
견고하고 거대한 봉인 전체가 순식간에 우그러지고 깨져 나가며 부서졌다.
봉인이 깔끔하게 깨져 나가자.
-스르륵.
창살 안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창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동물원의 우리처럼 철제 감옥이 일렬로 쭉 나열된 듯한 모습.
“평범한 철창과 다름없어졌으니, 그냥 문 부수고 사람들 구해.”
-저벅.
봉인을 간단하게 부순 처용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며 말하자.
“……단장, 저분은 도대체?”
소백이 단장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 지금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네.”
잭키가 소백의 질문에 짧게 생각하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답하고는.
“갇힌 사람들 모두 옮기고 쓸 만한 것들을 모두 털어 봅시다.”
-탁! 스르륵.
왼손에 지팡이를 소환해 땅을 찍으며 그림자를 넓게 퍼트렸다.
잭키를 중심으로 퍼진 그림자 속에서 하얀 가면을 쓴 섀도우 헌터들이 나타났다.
섀도우 헌터들이 창살을 부수고 내부 수색을 시작했을 때.
“네 어머니는 저 안쪽에 있다.”
앞으로 걸어 나가며 점점 멀어지는 처용에게서 소백을 향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에, 소백이 서둘러 앞서 나간 처용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달려온 소백이 처용의 뒤에 바짝 붙었고.
-저벅.
처용은 길게 나열된 감옥 안쪽에서 느껴지는 신수의 기운을 향해 계속 걸어 나갔다.
이윽고 처용의 발걸음이 멈춘 곳 앞에 다른 감옥보다도 넓은 감옥이 나타났다.
다만, 창살은 없고 천년한철로 이루어진 제단이 자리해 있었다.
그 제단 위에는.
-철크럭! 철컥!
누군가가 새까만 판테라움 사슬에 묶여 구속되어 있었다.
사슬에 묶인 아홉 개의 새하얀 꼬리와 긴 머리, 여우를 연상케 하는 길고 삐죽한 귀.
소백과 같은 구미호, 다만 그녀처럼 미성숙한 구미호가 아닌, 완전한 구미호였다.
신수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강력한 신수.
그런 구미호가.
-철크럭!
천림맹의 감옥에 붙잡혀 있었다.
구미호는 소백과 처용을 보고 발버둥 치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듯 보였지만.
“……!”
입에 물린 재갈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
소백이 그런 구미호를 향해 모친이라 부르며 달려 나가려는 때.
“멈춰, 함정이다.”
-탁.
처용이 그런 소백의 뒷덜미를 잡아채 붙잡았다.
함정이라는 처용의 말에, 소백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
묶여 있는 구미호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처용의 말대로 오지 말라고 하는 듯한 모습.
“……열 보 뒤로 물러나라. 소백.”
구미호의 주변을 살핀 처용이 잠시 침음을 흘리고는, 소백을 향해 물러나라 말했다.
소백은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처용이 구미호를 향해 한 발 다가가 그녀를 살폈다.
판테라움 사슬에 묶인 구미호의 가슴에는.
-지이잉.
반투명한 푸른 검이 꽂혀, 강기를 넘실넘실 내뿜고 있었다.
그 강기를 잠시 살핀 처용이 다시 앞으로 다가가자, 구미호가 오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처용이 그 무언의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다가간 순간.
-스르륵. 차캉!
구미호의 가슴에 박혀 있던 반투명한 칼이 저절로 뽑혀 나오며 처용 앞에 섰다.
강기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검이 처용에게 칼날을 겨누며 앞을 가로막았고.
-스르륵. 스륵.
그 칼의 칼자루에 누군가의 손과 팔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내.
-스륵. 파아아!
강렬한 강기를 퍼트리며 반투명한 형상의 누군가가 나타났다.
정갈한 도복을 입고 처용에게 칼을 겨누는 누군가의 모습.
‘……검성.’
-스릉.
처용이 그 형상을 노려보며 멸천을 뽑아 들었다.
앞을 가로막는 반투명한 형상은 다름 아닌 검성의 형상.
아니.
‘심상(心狀)을 남겨 둔 건가?’
검성이 남겨 둔 그의 심상이었다.
간단하게 말해, 심상을 현실에 구현하여 형성한 분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분신의 역할은 다름 아닌.
-철컥. 스릉!
구미호를 구하려는 그녀의 동료를 척살하는 것으로 보였다.
-검성류-.
검성의 심상이 자세를 낮추며 발도를 준비하자.
“검성류-.”
-착.
처용 역시 멸절을 쥐고 자세를 낮추며 발도를 준비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같은 자세를 취한 순간.
-참혼(斬魂) 베기.
“참혼(斬魂) 베기.”
-스릉. 차카캉!
동시에 발도하며 칼날을 내질렀다.
처용과 검성의 심상 사이에 얇은 두 개의 선이 그어졌고.
-까강!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간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참혼(斬魂) 베기.
베는 대상의 영혼과 정신을 베어 버리는 검술.
서로가 서로에게 같은 공격을 내지른 결과, 서로의 공격이 상쇄되었고 공간이 갈라진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검성의 심상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드러낸 순간.
-키이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공간을 가르는 얇은 선이 하나 더 그어졌다.
“영검(影劍) – 이단 베기.”
-철컥.
처용이 칼집에 멸천을 집어넣으며 읊조리자.
-쩌적. 촤아아-!
검성의 심상이 사선으로 베어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영검(影劍).
강기로 검의 그림자를 형성하여 같은 공격을 반복하는 검술.
간단하게 말해, 강기로 칼날 주변에 또 다른 분신 칼날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었다.
처용은 한 번만 공격하는 척하며, 그 뒤에 그림자 칼날을 섞어 한 번 더 공격한 것이었다.
첫 번째 공격이 서로 충돌하며 상쇄된 순간.
-촤아-!
그 뒤에 숨은 두 번째 공격이 검성의 심상을 베어 낸 것이었다.
-……내가 직접 찾아갈 것이다.
흩어지며 사그라지는 검성의 심상이 처용을 노려보며 말하자.
“……기다리지.”
처용은 그런 검성의 심상을 똑바로 마주하며 미소를 흘렸다.
마지막 함정이었던 검성의 심상마저 완전히 사라지자.
-우득! 콰드드-득!
처용이 구미호를 구속한 판테라움 사슬을 손으로 잡아 뜯으며 부숴 버렸다.
붙잡혀 있던 구미호가 풀려나고 입을 막던 재갈마저 떨어지자.
“아아…….”
구미호의 입에서 해방감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툭.
뒤에 있던 소백이 달려와 구미호의 품에 안겨들었다.
“……다행이다. 백아.”
구미호가 다시 마주한 제 자식을 마주 안아 주며 안도 어린 표정을 내비쳤다.
처용은 다시 상봉한 두 모녀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짓고는.
“소월향, 맞나?”
막 구속에서 풀려난 구미호의 이름을 불렀다.
회귀 전에는 마주하지 못했던 소백의 모친.
정확히 말하자면, 처용이 한발 늦는 바람에 그녀를 구하지 못했었다.
물론, 현재는 회귀 전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고 무사히 그녀를 구해 냈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방금 그자, 검성이 널 잡은 건가?”
회귀 전, 소백, 처용과 같은 저항군의 일원이었던 검성이 소백의 어머니를 붙잡았다는 점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처용의 물음에 구미호, 월향이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물인가 뭔가 하는 이유로?”
이어지는 처용의 질문, 검성이 왜 구미호를 붙잡았는지 짐작되는 이유를 묻자.
“맞습니다.”
월향이 재차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런 월향의 대답에, 처용이 인상을 찌푸렸다.
회귀 전, 저항군의 일원이자 동료였던 검성.
그는 같은 동료인 소백의 어머니를 공격하고 천림맹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 붙잡아 가두었다.
처용은 다시 한번 동료가 되리라 생각했던 이의 변절(變節)을 직접 확인하자.
“이 자식이……!”
-으드드!
주먹을 강하게 쥐며 짜증 어린 목소리를 읊조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