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1화
-샤아-악! 탓!
우거진 숲속에서 부는 재빠른 바람 소리가 잠시 멎자.
-샥! 툭.
두껍고 길게 자라난 나무 뒤로 작은 체구의 인영이 나타나 등을 기댔다.
“후, 따돌린 건가……?”
마치, 누군가에게 추적당하듯, 가뿐 숨을 몰아쉬며 읊조리는 검은 머리의 어린 소녀.
불안한 표정을 내비친 소녀가 옷자락을 움켜쥐고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볼 때.
“……흡!”
-샥!
돌연, 소녀가 눈을 크게 뜨며 다급하게 몸을 숙였다.
동시에.
-우웅. 사가각!
소녀의 머리 위로 반투명한 푸른 칼날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쇄도해 지나갔고.
-쩌적! 쿠구구-쿵!
두꺼운 나무가 사선으로 잘려 나가며 소녀의 옆으로 떨어져 육중한 소음을 울렸다.
“이런!”
-샤라락. 탓!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소녀가 재빨리 발을 박차 한 줄기 바람으로 변하며 달려 나갔다.
하지만.
-샥! 샤샥!
다수의 인영이 소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났다.
인상을 찌푸린 소녀가 발걸음을 돌려 뒤로 달아나려 했지만.
“어딜 가시나?”
“망할 년, 드디어 잡았구나.”
-탓. 스릉.
그런 소녀의 뒤로 피가 묻은 장검을 쥔 사내들이 나타났다.
불과 조금 전, 살아 있는 무언가를 벤 듯, 아직 식지 않은 핏줄기가 칼날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모습.
그 모습을 본 소녀가 침음을 삼키며 두려움과 경계심을 보일 때.
“신을 모시는 도사의 이름으로, 네 진짜 정체를 밝히겠노라!”
소녀를 포위한 남자 중 한 명.
오른손에 석장을 쥔 도사가 소녀를 향해 소리치며 왼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파지직. 파직!
석장에서 퍼져 나온 얇고 새하얀 전류가 넓게 퍼지자.
-스르륵.
소녀의 겉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조금 변화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나타난 여우를 연상케 하는 길고 날카로운 귀 한 쌍.
긴 치마폭 아래로는 털이 풍성하게 자라난 네 개의 검은 꼬리가 드러났다.
구미호(九尾狐).
여우가 신성한 정기를 쌓아 후천적으로 진화하여 탄생하는 종족으로 알려진 신수였다.
남자들에게서 도망치는 소녀의 정체가 바로 그 구미호.
다만,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완전한 구미호가 아닌, 네 개의 꼬리.
아직 미성숙한 구미호였다.
“혹시나 했는데, 운이 좋군!”
“이년 애미랑 같이 맹(盟)에 넘기면 큰돈을 받겠어. 크흐흐.”
-스릉.
소녀를 잡으러 온 듯 보이는 남자들이 탐욕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손에 든 칼날을 치켜세웠다.
-화르륵! 화륵!
그 모습을 본 소녀가 표정을 굳히고는 반투명하고 밝은 기운을 내뿜으며 주변에 불꽃을 만들어 내었다.
옅은 푸른 빛으로 타오르며 허공을 부유하는 불길.
구미호들만이 다루는 화염, 여우불이었다.
“비켜!”
-화르르륵!
소녀가 석장을 든 도사를 향해 여우불을 쏘아 보내며 돌진했다.
한 곳에 공격을 집중하여 포위를 돌파하고 도망가려는 듯 보였다.
그때.
-착. 차차착.
다수의 부적이 나타나 소녀에게 달라붙었다.
동시에.
“봉진(封陳)!”
“봉진(封陳)!”
네 명의 도사들이 추가로 나타나 소녀를 향해 석장을 겨누며 소리치자.
-화륵…….
주변에 몰아치던 여우불이 단번에 꺼지며 사그라졌고.
“아악!”
-파지직!
소녀가 몸을 휘감는 전류에 의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더 날뛰면 곤란하니, 다리를 잘라 버리는 게 좋겠군.”
-스르릉.
주변을 포위한 무인 중 한 명이 소녀에게 다가가 칼날을 치켜들었다.
그 칼날이 소녀의 가녀린 다리를 향해 내리치려는 순간.
“어-?”
-피이이!
칼을 치켜든 무인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의문 어린 목소리를 토해 냈고.
-촤아아! 후두둑.
석장을 든 다섯 명의 도사들도 일제히 머리가 날아가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무슨 일이-!?”
“적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변에 무인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소백, 맞지?”
-샥.
바닥에 주저앉은 구미호 소녀의 앞으로 누군가가 나타나며 말했다.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는.
“네, 네에…….”
처용과 시선을 마주치며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처용에게서 거스를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으니까.
마치, 상위 신수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 구미호 소녀, 소백이 처용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대답할 때.
“암영단인가?”
“죽여라!”
-스릉! 스르릉!
주변을 포위한 무인들이 처용에게 칼과 검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우웅. 스릉!
칼날에 일렁이는 반투명한 기류.
지구에서는 마나, 에스라 대륙에서는 오러, 무림 세계에서는 기(氣)라 불리는 기운.
기가 둘린 날카로운 칼날이 각각 처용의 목과 심장 등, 급소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처용은 칼날이 쇄도해 오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피하-!”
구미호 소녀, 소백이 처용을 향해 소리친 순간, 다수의 칼날이 처용에게 닿았다.
본래 연약한 인간의 신체라면, 칼날에 의해 몸이 찢겨 나가야 정상.
그러나.
-까강! 끼기긱!
처용의 목과 심장 등에 닿은 칼날은 육체의 피부를 파고들지 못하고 저지되었다.
칼날이 목을 내리쳤음에도 멀쩡한 처용의 모습에.
“무슨 사특한 술수를-!”
무인들이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일류(一流) 무인들에, 한 놈은 절정(絶頂)에 오른 녀석인가?”
처용은 뒤로 물러나는 무인들의 수준을 단번에 파악하고는.
-우웅. 사아악!
손날에 강기를 둘러 가볍게 두 번 휘둘렀다.
그저 귀찮게 구는 날벌레를 치우는 듯한 손짓.
하지만, 그 손짓 한 번에.
-촤아! 푸화악!
주변을 포위한 무인들이, 보이지 않는 칼날에 베인 듯,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호오? 꼴에 절정이라고 살아남은 건가?”
처용이 잘린 왼팔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으며 쓰러진 무인 한 명을 응시하며 말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 한 명의 무인.
“이 괴물 자식! 천림맹의 진짜 고수들이 네놈을 처단할 것이다!”
-탁!
그가 목에 걸린 목패를 뜯어 강하게 쥐어 보이고는 처용을 향해 소리쳤다.
-파아아!
목패에서 밝은 빛이 터지며 살아남은 무인을 감싸려는 때.
“가서 옥황상제한테 전해라.”
처용이 도망치려는 무인을 지긋이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스터의 모가지 옆에 네놈 목을 장식해 줄 것이라고.”
천교의 주신, 옥황상제를 향한 처용의 선전포고를 마지막으로.
-피이이!
목패의 빛이 무인을 완전히 감싸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처용은 살아남은 무인이 도망치도록 일부러 놓아주고는.
“소백, 붙잡힌 사람들이 어디에 있나?”
아직 주저앉아 있는 소녀, 소백을 향해 물었다.
그 말에 소백이 멍한 심정을 떨쳐 내듯, 고개를 한 번 흔들고는.
“……구할 수 없어요. 놈들이 제물로 바치기 위해 본거지로 이송 중이라고…….”
이내 어두운 표정과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
처용이 그런 소백을 내려다보며 다시 묻자.
“못 구해요! 그곳에는 관군들에, 화경(化境)의 고수들까지 있단 말이에요!”
소백이 어째서 붙잡힌 이들을 구할 수 없는지를 이야기하며 소리쳤다.
이 무림 세계에 지존으로 자리 잡은 세력, 천림맹의 정예 무인들과 천교에 복속된 제국의 관군들까지.
무인들로 구성된 군대라 봐도 무방한 세력이 사람들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강성한 세력을 뚫고 사람들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큭, 고작 화경?”
처용은 소백의 말에 코웃음을 쳐 보였다.
화경(化境)의 경지에 접어든 무인.
헌터로 비교하자면 200레벨에 접어든 이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구에서는 스피릿 팀의 일원들, 전원 강기를 다룰 수 있는 헌터들이 바로 화경의 경지였다.
그랬기에.
“미안한데, 화경의 무인 백 명이 있다 해도, 날 막을 순 없다.”
고작 200레벨에 들어선 헌터들만으로는 처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용은 스피릿 팀의 헌터들 전원이 덤벼도 이길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녀석을 안내해 줘. 소백.
소백의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단주님?”
암영단주, 레나의 목소리에 여우를 연상케 하는 소백의 귀가 펄럭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나보다 강한 녀석이다. 내가 괜히 ‘해결사’라고 말한 게 아니야.
“……그렇군요.”
소백이 레나의 말에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할 때.
“일부러 나를 이 녀석한테 보낸 건가?”
처용이 소백에게 말을 걸어오는 레나를 향해 전음을 보내며 물었다.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하잖아?
그러자, 레나가 아닌 엘리스가 처용의 말에 답했다.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하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
처용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듯.
“좋아, 네 뜻대로 어울려 주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린 구미호 소백.
그녀 역시 회귀 전, 저항군의 일원이었다.
차밍과 같은 케이스로 저항군에 합류하기 전, 온갖 불행을 겪었던 소녀.
그 불행 중 하나가 바로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이 적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귀 전과는 달랐다.
“가자, 네 가족들이랑 사람들 구하러.”
처용이 소백의 팔을 잡아 일으켜 주며 말하고는.
“천교의 신이 강림해 있다 해도, 날 막진 못할 거다.”
이내, 적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먼 방향을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숲과 산을 개간하여 형성한 시골 마을과 같은 장소.
평화로운 분위기였던 산골 마을 곳곳에는 불길이 타오르며 연기를 피워 내고 있었고.
-아아악!
-으악!
곳곳에는 사람들의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검에 베인 듯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죽은 사람들과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은 대부분 이 마을과 인근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샅샅이 수색해서 전부 잡아라!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고 강제로 잡아가는 듯 보이는 무인들과 창을 쥔 관군들.
피가 묻은 칼과 창, 같은 소속임을 드러내듯, 정갈하게 맞춰 입은 도복과 군복.
그런 그들의 옷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구름과 번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천림맹(天林盟)과 천 제국을 지배하는 성운, ‘천교(天敎)’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이렇게 많은 악도(惡徒)들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천림맹 소속의 무인들은 중, 눈에 확 띄는 화려한 비단옷의 무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의 시체와 끌려가는 이들을 향한 혐오 어린 시선.
다른 천림맹의 무인들과 천 제국의 관군들 역시, 사람들을 향한 혐오 어린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혐오만이 아니라, 벌레와 짐승을 보듯, 사람이 아닌 하찮은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때.
“칠성(七星) 장군!”
근처에 있던 무인 중 한 명이 화려한 옷의 무인을 장군이라 부르며 다가왔다.
동시에.
“어흐윽!”
-툭!
그를 뒤따라 온 무인들이 장군의 앞에 한 노인을 내던졌다.
“네가 이 악도들의 촌장인가?”
화려한 옷의 무인, 칠성 장군이라 불리는 무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
그가 바닥에 내팽개쳐진 노인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묻자.
“위, 위대한 하늘을 섬기는 십성(十星) 중 한 명이시여…….”
-쿵!
노인이 장군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땅에 머리를 박으며 입을 열었다.
십성(十星), 위대한 하늘을 섬기는 열 개의 별.
천림맹에서 단 열 명만이 존재하는 최강의 무인이자, 최고 권력자 열 명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세계에 있어서, 절대로 거슬러서는 아니 될 존재들.
그런 열 명 중의 한 명이 바로 앞에 있는 칠성 장군이었다.
“아아…… 악도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이 누추한 곳에 사는 저희가 어찌 천림의 뜻을……!”
-쿵! 쿵!
칠성 장군 앞에 끌려 온 촌장이 재차 머리를 박으며 비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칠성 장군이 작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내가 악도라 말했거늘, 감히 내 말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인가?”
-콰지직!
바닥에 엎드린 촌장의 손을 짓밟아 뭉개며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으, 으! 으어어-!”
촌장이 짓밟히는 오른손을 붙잡으며 고통에 발버둥 치자.
“감히 어딜 만지는 것이냐!”
-퍽! 빠가각!
칠성 장군이 그런 촌장의 머리를 걷어찼다.
연약한 노인의 몸뚱이는 단련된 무인의 발길질을 버티지 못하고 뭉개졌다.
촌장을 죽인 칠성 장군이 더럽다는 듯, 발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늙어 빠진 악도는 필요 없다! 하늘에 바치기 적당한 놈들만 살려서 잡아 둬라!”
무인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스릉! 스르릉! 촤아아!
그 명령을 들은 이들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칼날을 내질렀다.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짖음 속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하자.
“……불순물을 없애니, 제물들의 질이 좀 좋아졌군.”
잔혹한 명령을 내린 칠성 장군이 그 참혹한 광경을 둘러보며 미소를 짓고는.
“그 요괴 새끼를 잡으러 간 놈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냐?”
이내, 미소를 지우며 싸늘한 목소리로 주변의 무인들을 향해 물었다.
“고, 곧 소식이 올 것입니다.”
“금방 잡아 올 겁니다.”
그 목소리에 무인들이 침음을 삼키며 대답한 순간.
“뭐야? 기껏 살려 준 새끼가 아직도 소식을 못 전한 건가?”
-샥.
칠성 장군과 무인들의 앞에 처용이 나타나며 말했다.
그리고.
“치, 칠성 장군!?”
처용과 함께 나타난 소녀, 소백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칠성 장군을 보며 경악을 내질렀다.
그런 소백의 반응에, 처용이 칠성 장군을 바라봤고.
“……크, 크크크. 이야 이거 운이 좋은데?”
번들거리는 눈빛을 치켜뜨며 미소를 지었다.
처용이 미소를 지은 이유는 다름 아닌.
“반갑다. 불 도깨비의 새로운 신관.”
칠성 장군에게서 느껴지는 가공된 신의 기운, 나타의 신성력 때문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