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0화
레나가 가장 앞장서 게이트 속으로 들어가고.
-우웅. 우우웅.
뒤이어 처용, 루나, 루비아의 순서로 게이트에 발을 들였다.
모두가 게이트 속에 발을 들이고 눈앞이 어두워지며 시야가 암전된 순간.
-스륵. 콰아아!
가장 앞에 선 레나가 선을 앞으로 뻗으며 마기를 내뿜었다.
마치, 공간 정지가 펼쳐지는 듯, 어둠 위로 새로운 어둠이 덧씌워졌고.
-스르르륵.
보랏빛이 어둠 속에서 피어나며 나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선을 그리며 퍼지던 보랏빛이 밝게 점멸하며 어둠을 몰아내자.
-파아아!
횃불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검고 어두운 지하실이 나타났다.
“……게이트를 조작해서 네 거점으로 온 건가?”
처용이 조금 전 레나가 했었던 행동과 작금 일어난 상황을 생각하며 읊조리자.
“암영단(暗影團) 본부에 온 걸 환영해.”
-저벅.
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답하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처용을 포함한 이들이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고.
“암영단이라, 섀도우 헌터들은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건가?”
처용이 앞서 나가는 레나를 향해 물었다.
암영단, 해석하자면 그림자 단체, 즉 섀도우 헌터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다른 세계들을 오가며 놈들을 방해하고 있었지.”
레나가 처용의 말에 답하듯,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처용이 에스라 대륙에서 날뛰는 동안, 레나와 엘리스는 무림 세계에 거점을 잡고 활동했었다.
그리고 섀도우 헌터들과 각기 다른 세계를 오가며 악신들의 계획을 방해했었다.
“어쩐지, 아스터를 도와주는 놈들이 많이 적었다고 생각하긴 했어.”
레나의 말에 처용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처용이 에스라 대륙에 도달하고 아스터 제국을 적대하며 화려하게 날뛸 때.
이상하게도, 아스터를 도와주는 악신들이 많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처용이 에스라 대륙에 나타난 순간, 대악마들과 천교, 순혈자들이 나타났어야 정상이었다.
아니면, 밤의 성채에서 나타났었던 악신들 정도의 전력이 아스터를 도왔어야 했었다.
하지만, 아스터를 도왔던 이들은 소수의 순혈자들뿐.
판데모니움의 악마들은 아스터를 직접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었다.
그 이유가.
“내가 바알을 좀 많이 빡치게 만들어 놨지. 놈이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말이야.”
레나, 정확히는 예언자인 엘리스가 바알을 주기적으로 도발하며 그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처용이 에스라 대륙에서 마음껏 날뛰었고 아스터를 빠르게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알을 열 받게 만든 건 나름 즐거웠지만, 상황이 그리 좋게 흘러가지만은 않았어.”
레나, 아니 엘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목소리를 내었다.
바알을 도발하여 그의 시선을 끈 것은 성공적이었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마라!
눈이 뒤집힌 바알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과격한 행보를 보여 왔다.
예언자를 잡기 위해서 가진 모든 수단과 방법을 활용한 결과.
“거의 모든 세계가 ‘검은 세계’가 되어 버렸다.”
엘리스가 드나들던 세계들이 하나둘 악마들에게 점령되었다.
“……어쩐지, 검은 문이 너무 빨리 나타났다 했었는데.”
이야기를 듣던 처용이 에스라 대륙에 나타났던 검은 문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아스터 교단이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소환한 검은 문.
그 검은 문이 바로 악마들이 점령한 세계이며, 엘리스가 차마 지키지 못한 세계였다.
“자잘한 세계들은 이미 모두 먹혔고 아마…… 여기 무림이 마지막일 거다.”
엘리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블랙 게이트를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처용과 함께 서둘러 이곳에 온 이유.
바로 이곳 무림 세계가 마지막 남은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지구, 에스라, 무림, 가장 거대한 세계들만 지킨다면-.”
“최후의 전쟁에서도 충분히 승산은 있다.”
처용의 읊조림에 엘리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잇듯 이야기했다.
엘리스의 말이 끝나자 일행들의 발걸음이 복도 끝에 도달했고.
-덜컥! 쿠르르-!
바위와 바위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앞을 가로막던 검은 벽이 좌·우로 벌어지며 열렸다.
문이 열리자, 검은 벽돌과 나무 벽, 기둥이 나열된 공동이 드러났고.
-샥.
레나의 앞에, 검은 옷과 검은 머리를 묶어 내린 작은 체형의 누군가가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단주(團主).”
밀정(密偵)과 같은 모습의 어려 보이는 여성이 레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잘 지내고 있었지? 차밍.”
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 잘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친근함을 드러내는 듯한 웃음.
그런 레나의 웃음에, 차밍이라 불린 여성이 고개를 숙여 보였고.
“·…….”
차밍을 바라보는 처용의 눈동자에 복잡한 심경이 일렁였다.
“차밍, 곧 큰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모두에게 전해.”
“알겠습니다. 단주.”
-스르륵.
레나가 차밍을 향해 명령을 내리자, 차밍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네.”
차밍이 사라지자,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치, 차밍이라는 여성을 아는 듯한 분위기.
“네게 갔어야 할 인재를, 내가 가로챈 거나 다름없는데?”
레나, 아니 엘리스가 처용을 바라보며 묻자.
“상관없어.”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듯 말했다.
레나를 따르는 듯 보였던 차밍이라는 어린 여성.
그녀는 회귀 전, 처용이 무림 세계에서 만났던 인연 중 하나였다.
잠입, 잠행, 정보수집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인재이자, 저항군의 일원이었던 차밍.
그녀는 처용과 만나기 전, 온갖 참혹한 불행을 겪었었기에.
“불행한 삶을 반복하는 것보단 낫겠지, 네가 잘 챙겨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처용은 엘리스가 그런 차밍을 거둬들이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후후, 그런가?”
엘리스는 그런 처용의 대답에 작은 미소를 흘리고는.
-저벅.
“지금, 무림의 전황이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야.”
공동의 중앙에 놓은 단상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중앙 단상 위에는 홀로그램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다름 아닌 이 세계, 무림 세계의 지도.
“이런…… 벌써 ‘천림맹(天林盟)’이 무림의 70%를 장악했네.”
홀로그램 지도를 본 레나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말에, 처용이 홀로그램 지도를 유심히 보고는.
“천림맹이라고? 무림맹(武林盟)이 아니라?”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무림 세계를 대표하는 거대 세력 중 하나인 무림맹.
하지만, 홀로그램 지도 위에 표시된 거대한 세력의 이름은 무림맹이 아닌 천림맹이라 표기되어 있었다.
“그래, 이름만 들어봐도 무슨 상황인지 감이 오지?”
이번엔 레나가 아닌 엘리스가 진지한 눈빛으로 처용을 바라보며 말하자.
“……천교가 무림을 장악했군?”
짧게 생각한 처용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홀로그램 지도를 노려보며 답했다.
무림맹이 천림맹이라는 이름으로 뒤바뀌고 무림 세계를 빠르게 장악해 나가는 이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천교가 무림맹을 집어삼키고 그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소림, 남궁, 제갈, 화산, 무림의 모든 세가들까지 전부 천교에 먹힌 건가?”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엘리스에게 물었다.
무림이라 불리는 이 세계는 여러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세력이란, 문파, 세가, 파벌 등, 무림인(武林人)들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을 의미했다.
각 무림의 집단은, 지구의 헌터들을 대표하는 길드들과 비슷한 개념이라 볼 수 있었다.
그중 무림맹은 명맥 깊은 무림세가(武林勢家)들을 중심으로 중·소규모의 문파들이 모여 형성한 동맹이었다.
크고 작은 무림 단체들이 모여 규칙을 정하고 연합을 형성한 것이 바로 무림맹.
“소림을 포함한 몇몇 세가만이, 무림맹의 잔재를 잇고 있다.”
엘리스가 처용의 물음에, 무림맹의 현 상황을 이야기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무림맹을 구성하던 모든 문파가 천교에 복종을 맹세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천교를 따르지 않는 문파 모두 봉문(封門)당한 채 구금되어 있다는 거지.”
천교에 복종하지 않은 이들은 모두 몰락의 길을 걷는 상황이었다.
처용은 엘리스의 대답에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천마신교는?”
엘리스에게, 또 다른 무림 세력의 행방을 물었다.
천마신교(天魔神敎)라 불리는 세력.
무림 세계의 서쪽, 천산이라 불리는 지역에 자리 잡은 세력으로 항상 무림맹과 대적하는 세력이었다.
“천림맹에 맞서서 잘 싸우고 있지, 우리도 은밀하게 힘을 실어 주고 있지만…… 점점 밀리는 추세다.”
엘리스가 홀로그램 지도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지이잉.
홀로그램 지도가 서북쪽으로 이동하며 해당 지역이 확대되었다.
“……이런.”
지도를 바라본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렸다.
본래 천마신교는 서쪽을 중심으로 서북쪽, 남서쪽 일부가 그들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많이 달랐다.
남서쪽은 천림맹에게 완전히 밀려 장악당했고 서쪽도 1/3이나 영토를 빼앗겼다.
“……검성은?”
침음을 흘리며 지도와 상황을 관찰한 처용이 지도에 붉게 표시된 부분, 천림맹의 영역을 노려보며 묻자.
“천림맹의…… 사냥개가 됐다.”
엘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회귀 전, 처용의 절친한 친구이자 든든한 동료였던 이.
악마들과 악신들에게 거침없이 검을 내지르던 그는 지금, 천교를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능하면 검성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크크, 검성도 한 고집 하는 사람이지.”
이어지는 엘리스의 말에, 처용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하아, 지금의 나라고 해도, 검성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건 불가능해.”
엘리스가 답답함 심경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무림에 자리 잡으면서 검성을 회유하려 했었다.
하지만.
-네가 종말을 예언하는 자구나.
검성은 무림, 아니 천림맹의 적으로 공표된 엘리스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엘리스가 무력으로 검성을 제압하려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그야, 검성이니까.”
처용은 엘리스의 답답한 심경이 이해가 된다는 듯, 말했다.
검성(劍聖), 저항군들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불렀던 검술의 지존.
회귀 전, 학살의 마녀조차도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대가 바로 검성이었다.
그 당시, 그녀의 입장에서 처용만큼이나 성가셨던 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한처용, 검성만큼은 네가 맡아 줘야 한다.”
엘리스가 처용을 이곳에 부른 궁극적인 이유 중 하나.
아니, 처용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언급하자.
“둘 다 나한테 맡겨.”
처용은 검성 하나가 아닌, 다른 인물을 더한 듯, 둘 다 자신에게 맡기라고 답했다.
얼핏 들으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역시, 네가 대마도사와 같이 이곳에 온 이유가.”
엘리스는 처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는 듯, 읊조렸다.
그리고 처용의 뒤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
회귀 전, 대마도사라 불리던 마법의 최강자, 루비아를 잠시 응시하고는.
“처음부터 ‘검성’과 ‘천마’ 모두…….”
오직 처용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이었다.
“검성이…… 요정들을 잡아가고 티타니아를 공격했더라고.”
처용은 그런 엘리스의 말에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가 검성을 용병으로 다룰까…… 어떤 새끼일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한 명밖에 없겠지.”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엘리스가 알았다는 듯, 처용의 말을 이었다.
“무림맹주 아니, 지금은 천림맹주.”
누가 검성의 눈을 가리고 그를 조종했는가?
엘리스가 그 범인의 정체를 말하자.
“그래, 그 새끼밖에 없지.”
그런 엘리스의 대답이 맞는다는 듯, 처용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긍정했다.
그리고.
“한처용, 너도 알겠지만. 천림맹주는 검성의-.”
“나도 알아. 그래서, 네 제안대로 너와 함께 이곳에 온 거다.”
답답한 심정이 담긴 우려를 표하는 엘리스의 말에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듯 말을 이었다.
“……흐흐, 그런가? 이제야 좀 뭐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처용의 진지한 대답에 엘리스가 후련한 심정이 담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때.
“아까부터 좀 궁금했는데 말이야.”
뒤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들 중 한 명.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몇몇 부분은 이해가 잘 안 되거든?”
루비아가 처용과 엘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녀 옆에 있는 루나 역시 같은 심정이라는 듯, 의문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용은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곧 알게 될 거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순간.
“이런……!”
엘리스가 돌연 눈을 감더니, 인상을 확 일그러뜨리며 침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단주! 다수의 거점이 습격을 받았습니다. 블레스터와 단장이 항전 중이지만…….”
-스르륵.
벽의 어둠이 일렁이더니, 차밍이 나타나 엘리스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엘리스가 상황을 살피려는 듯, 재빨리 홀로그램 지도를 두들겼다.
홀로그램 지도가 서쪽을 벗어나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했고.
-삑. 삐빅.
작은 경고음과 함께 붉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새로운 지형 지도가 나타났다.
“후우, 우리 좀 도와주겠어?”
엘리스가 처용과 루비아, 루나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하자.
“어떻게 도와줄까?”
처용이 그런 엘리스의 도움 요청을 들어주겠다는 듯 물었다.
엘리스는 홀로그램 지도를 다시 살피며, 계획을 세우듯 짧게 생각하고는.
“……그냥, 방해하는 놈들 다 박살을 내 버려.”
이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처용을 바라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부탁이야.”
간단명료한 엘리스의 부탁에 처용이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자.
“조금만 버티라고 전해, 곧…… 그곳에 ‘해결사’가 갈 테니까.”
엘리스 역시 홀로그램 지도를 응시하며, 천림맹과 싸우고 있을 이들을 향해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