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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642화 (642/726)

#642화

에스라 대륙의 명운을 결정하는 전쟁이 끝난 지 하루가 지나갔다.

악신에게 맞서 싸운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타락한 신과 그들을 따르는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연합군에 속해 있던 다른 왕국군들은 모두 돌아갔다.

보통 전쟁이 끝나면 정복한 지역의 패권을 나눠야 했지만.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스터 제국에 더 남지 않고 깔끔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

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분수에 맞게 행동한 것이었다.

아스터 제국의 수도를 임시로 관리하는 이들은 빛의 교단과 저스티스 길드.

두 길드는 제국이 완전히 멸망했어도, 그 땅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그대로 두었다.

시민들이 강제로 고향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또 사후 관리 차원에서도 그편이 수월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보다, 한 지역에 모아 관리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 길드의 관리와 통제에 나름 잘 따라 주고 있었다.

빛의 교단은 이 세계 사람들에게 있어 사제와 성기사라는 친숙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락한 천사들이 아닌, 진짜 천사들의 성운, 에덴의 길드인 저스티스 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스터 교단은 툭하면 이단 심판을 들먹이며 시민들을 공포로 지배하던 이들.

천사들 역시 이단을 저지른 이들을 자비 없이 심판하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반면에, 빛의 교단은 성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한 온정과 봉사를 추구하는 이들이었다.

저스티스 길드 역시 비슷한 성향이었다.

진실의 마나를 통해 퍼지는 성자의 진실함이 불안한 시민들을 안정시켰고 또.

-화아아! 화아!

에덴의 몇몇 천사들이 황룡의 도움을 받아 지상에 강림해 헌터들을 돕고 있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라리네의 부탁을 수락한 메타트론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희가 그 타락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라리네가 메타트론에게 부탁하며 했었던 말.

그 말에, 몇몇 천사들이 자진해서 강림하기도 했다.

에덴의 천사들은, 에스라 성운의 타천사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제국의 수도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사후 처리는 나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전쟁의 최전선에 섰던 길드의 헌터들도 제국에 잠시 남아 있었다.

가장 최전방에 서서 적들과 맞서 싸웠던 이들이니만큼, 그들에겐 크고 작은 부상이 많았다.

그들은 지금, 처용이 임시로 열어 둔 게이트를 통해 이곳으로 출장 왕진을 온 의사들.

이종국을 포함한, 태룡사의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에게 진찰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악영향을 끼치는 약의 기운은 다 없앴습니다.”

-우우웅.

성자가 자신의 앞에 일렬로 선 사람들을 향해 빛을 내뿜으며 말하자.

“아, 감사합니다. 성자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의 앞에 선 수십 명의 사람이 성자를 향해 연신 감사를 전하며 답했다.

치료가 필요한 이들은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헌터들만이 아니었다.

바로 생명력 추출 장치에 묶여 있던 시민들도 치료와 회복이 필요했다.

그들이 단순히 장치에 묶여 있던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아스터 교단은 그들에게서 효율적으로 생명력을 뽑아내기 위해,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저주를 걸었었다.

성자는 교단의 헌터들과 함께 시민들에게 걸린 저주의 해주와 마약 치료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제 네 차례란다.”

시민들의 자잘한 치료와 마약의 악영향을 모두 없앤 성자가 옆을 바라보며 말하자.

-저벅.

성자의 옆에 서 있던 아주 어린 여아.

6~7살 정도로 보이는 갈색과 백색이 고루 섞인 긴 머리의 소녀가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작은 소녀가 손을 앞으로 뻗자.

-스르륵.

짙은 갈색이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일순간 붉은빛으로 변했고.

-슈르륵. 슈화아아-!

시민들에게서 옅은 보랏빛의 기류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소녀의 손아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길함이 일렁이는 보랏빛 기류가 소녀의 손아귀에 모두 모인 순간.

-슈륵. 파아앗!

빛이 짧고 강렬하게 번쩍였고 보랏빛 기류를 모두 집어삼키며 사라졌다.

어린 소녀가 시민들에게 걸려 있던 ‘저주’를 모두 뽑아내 흡수하자.

“잘했다. 리사.”

-툭.

성자가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칭찬했다.

소녀는 성자의 칭찬에 웃거나 감사를 전하는 등의 감정을 보이지 않았고.

“…….”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마치, 자신은 성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만 했다는 듯한 모습.

그때.

“성자.”

처용이 성자에게 다가왔고.

“마침 잘되었습니다. 방금 치료하신 분들이 마지막이었거든요.”

성자는 그런 처용에게 마침 용건이 있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

처용이 성자 옆에 선 어린 소녀를 지긋이 응시하자.

“……!”

그 시선을 받은 소녀가 성자의 옷깃을 잡으며 그의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성자는 처용과 자신의 뒤로 물러난 소녀를 번갈아 보고는.

“당장 큰 문제는 없습니다.”

처용을 보며 작은 소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금 전, 시민들의 저주를 빨아들여 빛 속에 가둔 소녀.

그녀는 다름 아닌 아스터 교단의 성녀이자, 악신 아스터가 만든 인간 병기, 라사벨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리사는…… 라사벨이었을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라사벨이라는 인간 병기가 되기 이전의 아스터의 신관이었던 어린 소녀 리사였다.

성자의 교화를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은 그녀는 더 이상 라사벨이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만, 제가 알려 주었습니다. 본인이 어떤 존재였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탁.

성자가 리사의 머리에 손을 얹고 복잡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리사는 악신에게 이용당해 인간 병기가 된 불쌍한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라사벨이 되어 저지른 악행을 정당화할 순 없었다.

이 때문에, 리사를 거둬들이고 그녀가 저지른 악행의 그 이상만큼 세상에 봉사할 것을 강제했다.

이것이…… ‘교화’의 힘을 각성한 성자가 리사에게 내리는 징벌이었다.

다행인 부분은, 리사가 성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따른다는 점.

라사벨이었을 시절의 광기와 집착, 잔혹함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성자가 처용에게 라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을 때.

“제가 계속 지켜봤는데, 큰 문제는 없어 보였어요.”

빛의 교단의 성녀, 호네아가 다가오며 말했다.

어둠이나 혼돈의 형태가 아닌, 본래의 형태, 새하얀 머리를 늘어뜨린 백색의 모습.

그녀 역시 빛의 힘으로 사람들의 치료를 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륵.

따스한 빛이 일렁이는 호네아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차가운 빛을 띠었다.

그 시린 눈동자가 향하는 대상은 바로 리사.

그런 호네아의 시선에 성자가 소리 없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고.

“불만이 많아 보이는군요.”

처용은 호네아를 향해 작은 미소를 드러내며,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는 듯 물었다.

“화가 나요. 아~주 답답하기도 하고.”

호네아가 처용의 말에 답하듯, 작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녀 역시 리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바.

이 때문에, 리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에스라 대륙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쟁에서까지도, 라사벨과 맞서 싸웠던 것이 그녀였으니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성자를 향해 집착과 광기를 보이던 적.

성자가 그런 그녀를 구원하고 교화시키는 현재 상황이,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사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들은 호네아만이 아니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적의 어린 시선을 보였으니까.

혹여나, 성자에게 해를 끼치진 않는지, 라사벨이었을 시절의 광기와 잔혹함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지 등.

대놓고 말하거나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만 않을 뿐, 성자를 향한 걱정과 리사를 향한 적의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내 오라버니는 ‘성자’님인데.”

호네아는 리사를 향한 따가운 시선을 거두고 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성자 옆에 붙어 있는 리사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름 납득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를 이해해 주어서 고맙구나. 호네아.”

호네아의 말에 성자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할 때.

“당신은 빛의 신 밑에만 있기엔,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이야. 성자.”

-저벅.

누군가가 다가와 처용 옆에 서며 성자를 향해 말했다.

성좌인 빛의 신보다 그의 신관인 성자를 높이는 말.

야훼를 모시는 빛의 교단에 있어 신성모독이자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본인이 복 받은 성좌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말을 잇는 붉은 머리의 여성, 예언자라 불리는 레나를 향해 질책을 쏟아 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동감한다.”

처용이 그런 레나의 말, 아니, 레나를 통해 엘리스가 한 말을 이해한다는 듯 동의를 표했다.

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두 사람의 말에, 모두가 복잡한 심경을 보일 때.

“사람들의 치료를 도와준 건가? 하워드.”

처용이 레나의 뒤를 따라 다가온 하얀 가운의 의사, 하워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단은, 저도 의사니까요.”

하워드가 처용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직도 당신이 ‘조커’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그런 하워드를 본 호네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조커는 닥터 화이트가 아니라…….”

성자가 호네아의 말을 정정하듯 읊조리며 말을 이었다.

마치, 하워드와 조커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듯한 목소리.

성자는 진실의 마나로 레나의 안에 있는 엘리스의 정체조차도 간파해 냈었다.

그 진실의 마나가 당연히 하워드에게도 향했었고.

-하이. Bro?

하워드의 안에 있던 조커는 진실의 마나로 자신과 접촉해 오는 성자를 향해 미소로 응답했었다.

‘그러고 보니…….’

조커를 생각한 성자가 처용을 응시하며 생각을 이었다.

하워드 안에 있는 조커를 마주했을 때, 성자가 받았던 이질적인 느낌.

이전에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호오? 내 존재를 느꼈다고?

다름 아닌, 처용에게서.

아직도 예언자와 조커, 처용 안에 있는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연관은 있다고 생각했다.

성자가 레나와 처용, 하워드를 바라보며 생각을 이을 때.

“조사는 끝났다. 한처용.”

레나가 처용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빠른데?”

처용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서둘러야 할 만한 일들이었으니까.”

레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판데모니움도 판데모니움이지만, 곧 열릴 ‘무림’도…… 문제가 많아.”

판데모니움에 이어, 처용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계 중 하나, 무림이라는 말이 나오자.

“후…… 가지.”

처용이 깊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고는 뒤돌아 앞장서 나아갔다.

***

에스라 대륙의 전쟁이 끝난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이 전쟁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이가 아라한 왕국의 왕궁으로 모였다.

그들을 불러모은 이는 다름 아닌 예언자.

“일주일 뒤, 에스라 대륙이 안정되는 순간, 세계 곳곳에 블랙 게이트들이 나타날 거야.”

그녀는 만 하루 동안 자신이 알아낸 정보들을 길드에 알렸다.

바로, 아스터 제국 수도에 나타난 블랙 게이트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블랙 게이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 게이트들은 모두 판데모니움의 각 권역, 대악마의 성역과 이어져 있고.”

갈기갈기 찢어진 판데모니움의 각 지역이 던전의 형태로 나타난 게이트였다.

레나의 입에서 블랙 게이트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오자.

“대악마의 성역이라니…….”

“난이도는 S급 던전 이상이군요.”

커맨더와 제시카 등, 각 헌터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블랙 게이트는 판데모니움 대악마의 성역과 연결된 던전.

게다가, 그 던전은 하나가 아니었다.

레나는 일주일 뒤, 에스라 대륙이 안정되는 순간,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했으니까.

그 말은 즉, 지구에도 대악마의 성역과 연결된 게이트가 나타난다는 말이었다.

“미래의 WHU는 그걸 데스(Death)급 던전이라고 불렀다.”

레나가 헌터들의 반응을 보며 말을 이었다.

블랙 게이트의 난이도는 S급 던전을 초월한다.

그 안은 무려 대악마의 성역.

“시스템의 제약은 받지만, 무려 본신 상태의 대악마가 있을 테니까.”

해당 성역의 주인인 대악마가 거주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심각한 문제는 또 있었다.

“재수 없으면, 72개의 블랙 게이트가 에스라 대륙과 지구에 무작위로 나타나겠지.”

판데모니움을 나눈 대악마의 권역은 무려 72개가 된다.

즉, 최대 72개나 되는 블랙 게이트가 에스라 대륙과 지구에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나타난 블랙 게이트가, 어떤 성역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블랙 게이트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곳이 어느 대악마의 성역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제국 수도에 열린 블랙 게이트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진호 헌터가 떨어진 장소와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군.”

이어지는 레나의 말에 처용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동시에.

“……만약, 재수가 없으면-.”

머릿속으로 최악의 가정을 생각하며 읊조렸다.

그러자.

“삼천마의 성역과 연결된 블랙 게이트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처용의 불길한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레나가 말을 이었다.

처용과 레나의 입에서 최악의 가정이 흘러나오자.

“이런 미친!”

“그걸 무슨 수로 공략해!?”

헌터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경악을 내비쳤다.

하필이면, 공략해야 하는 블랙 게이트가 삼천마의 성역이다?

삼천마는 신계의 유명한 전투 성좌 여럿이 달려들어도 이기지 못했던 존재들.

그들은 헌터들의 힘만으로 공략이 불가능한 존재들이었다.

“삼천마의 게이트가 폭주라도 한다면…….”

커맨더가 또 다른 불길한 가정을 읊조리자.

“안에 있는 삼천마가 밖으로 기어 나오겠지.”

레나가 그 가정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헌터들, 각 왕국의 대표들, 아나샤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을 내비칠 때.

“한처용, 너는 무엇을 우선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레나가 처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택?”

“그래, 블랙 게이트를 맡을지 아니면…….”

처용이 묻자, 레나는 처용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곧 나타날, 대악마의 성역과 연결된 블랙 게이트를 맡을 것이냐?

아니면.

“같은 시기에 나타날, 무림 세계와 연결될 게이트로 향할지를.”

불랙 게이트와 같은 시기에 출몰할 월드급 게이트.

무림 세계로 향할 것이냐였다.

레나가 두 가지 선택지를 이야기하자.

“이런…….”

처용의 눈빛에 고민이 일렁였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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