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이 하계의 미물들 따위가……!]
아스터가 자신의 앞에 선 두 인간을 노려보며 분노를 읊조렸다.
한 명은 감히 신의 경지를 넘보는 변종.
또 다른 한 명은, 태초의 그릇을 품고 예언의 능력을 각성한 인간.
둘 다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될 힘과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인간은 오롯이 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하등한 존재들.
그런 하계종들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도 모자라, 이 세계의 지배자인 자신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니…… 감히 하계종들 따위가, 성운의 주신에게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아스터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읊조리자.
“용납이 안 되면 뭐 어쩔 건데?”
-스르릉.
처용이 멸절을 꺼내 아스터를 향해 겨누며 조소를 흘렸다.
“끽해 봐야 천존에게 허락받은 신법재판소를 모방하는 게 고작 아니야?”
카란디아의 일을 해결할 당시에 마주쳤던 아스터.
그 당시 아스터가 보였던 새하얀 신법재판소.
처용이 그때 아스터가 모방을 통해 보였던 신법재판소를 언급하며 말했다.
마치, 아스터가 어떻게 신법재판소를 모방할 수 있었는지 알고 있는 듯한 모습.
그 말에.
[……예언자, 이 하계종이 신의 비밀을!]
아스터가 처용의 옆에 있는 예언자, 레나를 노려보며 분노를 읊조렸다.
처용이 신법재판소의 모방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는 이유가 예언자 때문이라 생각했으니까.
아스터의 권능은 모방.
말 그대로 다른 신의 권능을 모방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가 다른 신의 권능을 모방하기 위해선, 권능의 본래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대상이 어떤 신이냐에 따라, 어떤 권능을 모방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가지각색으로 발현되는 권능.
예로 들면, 이전에 그가 모방했었던 권능인 신법재판소.
지금, 신법재판소의 주인은 신법의 대신인 여래였다.
당연히 여래가 아스터에게 신법재판소의 모방을 허락해 주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스터가 신법재판소를 거의 온전하게 모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귀한 순혈자에게는 자격이 있지.
바로, 전대 신법의 대신이자 천교의 주신이었던 신.
천존과의 거래를 통해 허락을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즉, 권능의 본래 주인에게 허락만 받는다면, 그 권능을 모방할 수 있다는 것.
악의 종주에게 힘까지 내려받은 그는 허락받은 권능을 거의 온전하게 모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용이 지상에서 보인 무력과 전에 상대했었던 경험을 되짚어 볼 때.
신법재판소만으로는 처용을 죽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하메라와 로메라 등, 다른 신들의 권능을 온전히 모방한다 해도, 처용을 없애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네놈이 아무리 변종이라고 하나!]
아스터가 자신감 가득한 고함을 내지르며 검붉은 기운이 섞인 하얀 신력을 내뿜었다.
그가 강한 믿음이 일렁이는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
왜냐하면, 아스터가 권능의 모방을 허락받은 이들 중에는.
[그분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힘을 구현할 수 있게 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느냐!]
악의 종주, 조크 – 크타니드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콰아아아!
아스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에 섞여 일렁이는 검붉은 기운.
파멸의 힘이 점점 더 짙어지며 아스터의 주변을 휘감았다.
이윽고.
-촤자자작! 철컥!
날카로운 느낌의 밝은 회색빛 갑옷 위에 가득한 검붉은 문자.
그 갑옷과 갑옷 사이에서 검붉은 기운이 그림자처럼 넘실거리며 휘날리는 모습.
마치, 악의 종주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네놈들을 파멸시켜 주마!]
-우웅!
모방한 파멸의 힘으로 악의 종주처럼 변한 아스터가 손아귀에 힘을 모으자.
-키이이잉!
검붉은 파멸의 힘이 짙게 일렁이는, 새하얀 칼날의 검이 형성되었다.
아스터가 두 손으로 쥔 파멸의 검을 크게 휘두르자.
-스릉. 콰아아아!
파멸의 힘이 전방을 크게 휩쓸며 쏘아져 나갔다.
“항마의 화신.”
처용은 즉시 항마의 화신을 불러내고는.
“반탄십육장!”
-스르륵. 촤라락!
열여섯 개의 반탄신장을 소환해 앞으로 세웠다.
하지만.
-콰쾅! 촤자자-!
파멸의 힘을 잠시 저지했을 뿐, 반탄신장들이 갈라지며 빠르게 사그라졌다.
-탓! 후욱!
반탄신장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 처용과 레나가 뒤로 물러나며 파멸의 힘을 피해 냈고.
“명환삼십이장!”
-촤라락. 후우욱!
처용은 즉시 서른두 개의 새하얀 손들을 만들어 아스터를 향해 쏘아 보냈다.
[네놈의 하찮은 권능 따위!]
-우웅. 촤아아!
아스터가 다가오는 새하얀 손들을 향해 파멸의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한 번 검격이 그어질 때마다.
-촤아! 파사사……!
명환의 힘이 서린 손들이 서너 개씩 잘려 나가며 사그라졌다.
“……놀랍네. 크타니드의 분신체 하고 거의 비슷한 정도의 힘이야.”
처용이 악의 종주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한 아스터를 보며 읊조리고는.
“물러나서 기회를 엿봐, 지금의 넌 저걸 정면으로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레나를 향해 물러날 것을 권고했다.
아스터가 모방한 파멸의 힘은 악의 종주가 발휘하는 파멸의 힘에 비해 약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파멸’의 힘 그 자체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항마의 화신이 만들어 내는 반탄신장조차,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상황.
비록 모방이라고 해도, 그 위력은 진짜였다.
처용 자신이면 몰라도, 레나에게는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힘.
그러나.
“지금의 내가 너보다 약한 건 인정하지, 하지만 말이야-.”
레나의 입에서 엘리스의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러나라는 처용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겠다는 듯한 분위기.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봐?”
-스스스……!
엘리스가 짙은 마기를 내뿜으며 말을 잇고는.
-콰아아아!
칠흑같이 어두운 마기로 스스로를 감싸기 시작했다.
“……너?”
처용이 레나에게서 흘러나오는 짙은 마기를 느끼며 놀라움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레나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마기는 그저 평범한 마기가 아닌, 강마기.
스피릿 팀의 헌터들이 발휘하는 강기보다 높은 수준의 마기였다.
냉정하게 비교하자면, 스피릿 팀에서 가장 강한 헌터인 진호와 백호보다도 더 짙은 기운.
하지만, 지금 레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강마기가 아니었다.
-쿠구구구!
보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저릿한 감각이 전해지는 마기.
대악마들이 보일 법한, 짙은 어둠의 신력이었다.
그것도 하위 대악마가 아닌, 상위 서열의 대악마들이 보일 법한 아주 짙은 기운.
“마신의 형상.”
-파아아!
레나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림과 동시에, 어둠이 걷히고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붉은 머리가 끄트머리로 향할수록 칠흑처럼 어둡게 변하며 흩날렸고.
머리 위로 검고 삐죽한 형태의 날카로운 한 쌍의 뿔이 자라나 있었다.
붉은 문양이 수놓아진 검은 로브와 그 아래 드러난 두 손과 발에 검은 비늘이 갑옷처럼 돋아난 모습.
-후우욱!
등 뒤로 크게 펼쳐진 세 쌍의 검은 악마 날개까지.
마치, 발록으로 변한 집행자처럼 판데모니움의 악마로 변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넌 ‘학살의 마녀’였지.”
처용이 변화한 레나의 모습을 보며, 방금 그녀의 말에 대답하듯 읊조렸다.
대악마처럼 변한 레나의 모습은, 반신의 경지에 접어든 그녀가 전력을 드러낼 때 보이던 모습이었다.
“전성기의 힘을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지만, 저 버러지를 보고 도망칠 정도는 아니야.”
-스륵.
엘리스가 검은 비늘이 돋아난 오른손을 아스터를 향해 들어 올리며 말하고는.
“공간 정지.”
-피이이!
짙은 어둠의 파동을 넓게 퍼트리며, ‘공간 정지’를 사용했다.
아스터를 향해 공격을 퍼붓던 명환의 신장들.
다가오는 새하얀 손들을 파멸의 검으로 베어 내는 아스터.
부서진 신장을 다시 만들어 내어 쏘아 보내는 처용의 모습까지.
주변의 모든 것이 사진을 찍은 것처럼, 살짝 흑색으로 변하며 멈추었다.
회귀 전, 학살의 마녀라는 이명으로 불리던, 반신의 경지에 접어든 마인.
엘리스가 깨우친 권능인 ‘공간 정지’였다.
물론.
“…….”
공간 정지를 사용한 엘리스 역시, 살짝 흑색으로 변했고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우우웅!
그녀의 체내에 일렁이는 짙은 마기가 앞으로 뻗은 오른 손바닥에 모여들었고.
-스륵. 스르륵! 우웅!
손바닥 위로 마법진을 그려 내며 마기를 강하게 압축시켰다.
엘리스가 준비를 마치자.
-피이이!
넓게 퍼진 어둠의 파동이 다시 레나에게로 모여들었다.
이내, 공간 정지가 풀리며 멈추었던 이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려는 순간.
-지잉! 지이잉! 지잉-!
아스터의 주변으로 천 개의 작은 검보랏빛 마법진들이 그를 감싸며 나타났다.
[무슨-?]
갑작스럽게 주변을 포위하듯 나타난 마법진을 본 아스터가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방금, 시야와 감각이 차단되고 주변이 완전히 암전되었었다.
짧은 시간 이변이 발생한 후, 다시 시야와 감각이 돌아왔다.
그리고 천 개의 마법진이 나타나 주변을 포위한 상황이었다.
아스터가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
“다크니스 싸우전드 버스트(Darkness Thousand Burst).”
레나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흑마법의 시동어가 울렸다.
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키잉! 콰아아아아-! 콰쾅!
아스터의 주변을 포위한 천 개의 마법진이 환한 보랏빛을 빛내더니, 이내 대폭발을 일으켰다.
[이 간악한 하계종이!]
-파아아!
분노를 내지른 아스터가 파멸의 힘을 퍼트리며 주변에서 타오르는 폭발을 힘으로 잠재웠다.
동시에.
[무슨 하찮은 수작을 부린 것이냐!]
-탓! 스르릉!
발을 박차 레나를 향해 돌진하며 파멸의 검을 강하게 내질렀다.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파멸의 칼날 끝이 순식간에 쇄도하며 나아갔다.
레나가 바로 반응하여 피하기엔, 늦은 듯한 상황.
하지만.
“공간 정지.”
-피이이!
다시 검은 마기의 파동이 크게 퍼지며 주변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레나의 눈앞에는 파멸의 검을 강하게 내질러 오는 아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아스터의 모습을 본 엘리스가 비틀린 미소를 짓고는.
-우우웅.
다리에 짙은 마기를 응축시키며, 다시 한번 손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준비를 마친 엘리스가 공간 정지를 해제하자.
-스릉! 콰아아!
아스터가 강하게 내지른 파멸의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쇄도했다.
칼날 바로 앞에 있던 레나를 꿰뚫어 찢어 버린 듯 보였으나.
-샤삭.
레나의 모습은 마치 신기루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파멸의 검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이게 도대체?]
아스터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읊조린 순간.
-지잉! 지이이잉-!
다시 한번 아스터의 주변으로 천 개의 검보랏빛 마법진이 나타나 빛을 발광했다.
곧 일어날 폭발에 아스터가 대비하려 하기도 전에.
-콰아아아! 콰쾅! 쿠콰콰-!
주변을 빼곡하게 포위한 마법진들이 일제히 대폭발을 일으켰다.
[이까짓-!]
아스터가 다시 한번 파멸의 힘을 주변에 펼쳐 마기의 폭발을 걷어 냈다.
두 번의 폭발을 직격으로 맞았음에도, 갑옷에 자잘한 스크래치만 났을 뿐, 큰 피해는 없어 보였다.
그때.
-위이이잉! 위잉! 위잉-!
아스터의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빛을 내는 수천 개의 속성 구체들이 나타나더니.
“엘리멘탈 미티어 버스트.”
-피이! 콰콰콰콰콰-!
온갖 속성들이 각자의 개성을 강하게 뽐내며 가지각색의 폭발을 일으켰다.
앞서 마기가 압축된 두 번의 폭발에 이어, 속성이 압축된 세 번째 폭발.
[크으-!]
연쇄 폭발의 위력에 휘말린 아스터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하? 한처용. 너 설마…….”
그 모습을 본 엘리스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게 되네?”
어느새, 레나의 옆에 나타난 처용이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공간 정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마지막 속성에 의한 대폭발은 다름 아닌 처용이 발휘한 공격.
심지어, 마녀가 사용한 권능인 공간 정지를 이용한 공격이었다.
처용은 학살의 마녀와 수십, 수백 번의 전투를 치러왔던 이.
그렇기에, 마녀가 발휘하는 공간 정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그 공간 정지에 맞설 수단이 ‘방어’ 외엔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처용은 회귀 전과는 달랐다.
“공간 정지, 이거 아주 사기적인데?”
처용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공간 정지가 펼쳐지면, 시전자를 포함해 주변의 모든 것이 멈춘다.
하지만, 체내에 있는 에너지만큼은 움직일 수 있었다.
처용이 악몽 속에서 엘리스를 처음 마주하고 공간 정지에 갇혔을 때.
-우우웅.
강기를 육체 겉이 둘러 호신강기를 발현했었으니까.
시전자인 엘리스 역시, 체내의 마기를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공간 정지에 갇힌 다른 이들은 주변을 볼 수 없는 반면에, 시전자인 엘리스는 주변을 볼 수 있었다.
즉, 그녀만큼은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
멈춰진 공간 속에서 엄청난 수의 마법진을 만들어 놓은 후, 주변을 보며 마법을 발현할 장소의 좌표를 미리 설정한다.
이윽고 공간 정지가 풀리는 순간, 미리 설정한 좌표로 준비한 모든 마법진을 발현시킨다.
이것이 엘리스가 공간 정지를 활용해 발휘하는 공격이었다.
멈춰진 공간 속에서도 유일하게 주변을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공격 방법.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피하기 힘든 공격 역시 손쉽게 회피할 수 있었다.
공간 정지를 펼쳐 놓고 정교한 이동 마법진을 만든 후, 발현하면 되었으니까.
다만.
“……인과율을 조작하는 네 권능만 할까.”
엘리스가 기가 막힌 듯한 목소리로 처용의 말에 답하며 말했다.
공간 정지에 갇히면, 처용 또한 감각이 차단되어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체내의 에너지를 움직여 정교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처용의 권능 중 하나인 역천은, 인과율을 조작하는 힘.
그 역천을 이용해, 처용 역시 마녀처럼 공간 정지 속에서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공간 정지 안에서 받는 영향을, 시전자인 마녀처럼 적용되도록 조작한 것이었다.
엘리스는 기가 막힌 헛숨을 내뱉고는.
“처음에 보였던 그 힘은 언제 쓸 거냐?”
다시 전투에 집중하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터 제국의 결계와 방어선을 단번에 부숴 버렸던 검붉은 힘.
엘리스조차 전율하도록 만든, 그 강력한 힘을 언제 사용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제 곧, 지금 막 계산이 끝났거든.”
처용은 엘리스의 질문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처용의 미소를 본 엘리스는.
“설마…… 저 녀석의 ‘모방’을 가질 생각이냐?”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점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