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루메오의 손을 잡은 성자에게서 기억과 정보가 흘러들어 왔다.
-놈들이 검은 문을 파괴하러 올 것이다.
-검은 문을 지키는 척하며, 놈들이 문을 파괴하도록 유도해라.
아스터 교단의 성녀, 라사벨이 받은 지령.
현재, 아스터 교단이 연합군을 상대로 그나마 힘겹게 버틴 이유가 바로 검은 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검은 문을 연합군이 파괴하도록 방치한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자가 계속 정신을 집중하며 진실을 파헤치자.
-검은 문이 파괴되는 순간, 성지 전체를 과부하시켜 이 세계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것이다.
그 명확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검은 문이 파괴되는 순간, 그 문을 유지하던 막대한 에너지가 터져 나간다.
그 에너지를 대신전과 황궁에 집중시켜 이 성지 전체를 과부하시킨다.
이 세계의 중심이기도 한 아스터 제국의 성지가 과부하되며 대폭발을 일으킨다면?
이 세계 전체가 갈기갈기 쪼개지며 파괴된다.
이내, 쪼개진 조각들이 거대한 폭발 속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이…… 아스터가 세운 마지막 함정이었다.
성자는 루메오를 통해 아스터가 세운 계획을 알아차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성운의 주신이라는 이가, 지금껏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싸워온 모든 이들을 희생시키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희생을 통해 이루려는 염원은 다름 아닌 이 세계의 완전한 파멸.
약해진 자신의 세력을 제물 삼아, 적들의 강성한 세력을 처치한다.
이는 너무나도 잔혹한 용병술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한 치의 서슴없이-!”
진실을 알아차린 성자가 거친 목소리로 분노를 드러내자.
“열 낼 필요 없어 성자. 원래 선천적 신격들이란 그런 족속들이니까.”
마찬가지로,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듯 보이는 레나가 답하듯 말했다.
“특히, 아스터처럼 무능한 머저리 새끼가 제 추종자를 아껴 줄 리가 없지.”
레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검은 문과 라사벨을 노려보며 말할 때.
“부탁입니다. 지금 검은 문을 부수면,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성자 앞에 무릎을 꿇은 루메오가 다시 한번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 검은 문을 부수게 된다면, 모든 것이 아스터의 계획대로 돌아갈 테니까.
성자가 적 성운의 신관, 루메오를 보며 고민 어린 침묵을 흘렸다.
루메오에게서 느껴지는 배신감과 두려움, 고민,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
항복하겠다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가 전한 사실 또한 진실이었다.
그렇다 하여, 적 성운의 신관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를 것인가?
이는 다른 문제였다.
-진실의 마나를 너무 맹신하지 마십시오. 성자.
처용이 성자의 고유 마나를 언급하며 했었던 말.
지금 진심을 보여도, 추후 변심을 보일지는 모른다는 것.
자신의 능력을 곧이곧대로 맹신하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그 때문에, 성자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아스터가 네 형제들을 제물로 만들어서 배신한 건가?”
레나가 루메오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렇군요. 당신은 예언자이니…… 알고 있었군요.”
그런 그녀의 말에 흠칫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루메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읊조렸다.
루메오 아스틴.
회개의 여신, 로메라의 신관.
아스틴은 아스터 제국 황족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었다.
현재 아스터 제국의 모든 황족은 아스터가 에너지를 뽑아내기 위해 희생시킨 상황.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스터 제국의 황족이었다.
루메오가 로메라의 신관이기에, 그저 에너지를 뽑아내어 일회용으로 쓰기엔 ‘조금’ 아까웠기에.
-아직 쓸모가 남았으니, 네 생명력은 뽑아내지 않겠다.
아스터와 로메라가 루메오를 살려 둔 것이었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든 황족이 일회용 에너지원으로 변한 순간.
-그토록 헌신한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루메오의 가슴 속에 있던, 신에 대한 충성심이 점점 갈라지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스터의 마지막 지령, 에스라 대륙을 파멸시키겠다는 명령이 하달되자.
그는 배신을 마음먹었다.
“루메오! 당장 신의 대리자인 내 처형을 받들어라!”
-쏴아아!
그 모습을 본 라사벨이 루메오를 향해 빛의 칼날을 쏘아 보냈다.
신관이 모시는 신을 배신하고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광경.
아스터 교단의 성녀이자, 신의 대리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다른 데 집중할 여력이 있었나 봐?”
-쐐엑! 차카캉!
호네아가 어둠의 칼날을 쏘아 보내며 라사벨이 쏘아 낸 빛의 칼날을 격추했고.
-후욱! 촤아아!
왼쪽의 검은 날개를 길고 크게 펼쳐 라사벨을 향해 내리쳤다.
어둠의 깃털이 모이며 압축된 날개가 거대한 칼날처럼 사선으로 그어지자.
-촤아-!
거대하고 기괴한 빛의 악령을 크게 베어 냈다.
-크아아!
가슴에 검은 상처가 길게 새겨진 악령이 비명을 토해 냈고.
“으으윽!”
라사벨 역시 영향을 받은 듯, 인상을 거칠게 찌푸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베드라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지만, 그는-.”
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더듬은 루메오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참회의 신관, 베드라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지만.
-우리의 작은 희생으로 저 막강한 이단자들을 모두 처치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는 오히려 신을 찬양하며 광기 어린 모습을 보였다.
베드라가 다른 신도, 신관들보다도 맹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이 자신을 희생시킨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기꺼이 따르는 자였다.
“아스틴 제국의 황자이자, 회개의 신관, 루메오. 제 모든 것을 걸고 항복할 것을 맹세합니다.”
루메오가 다시 한번 강하게 항복할 것을 이야기하자.
“이제 와 항복한다고 해서 그대들이 저지른 잘못이 사라질 줄 알았습니까?”
성자가 차가운 눈빛으로 루메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직접 에스라 대륙에 와 마주쳤던, 아스터 교단의 잔혹한 행위들.
눈앞에서 항복하겠다 말하는 신관은 그 아스터 교단의 수장 중 하나였다.
그간 저질러 온 아스터 교단의 온갖 잔혹한 짓거리에 직접 가담해 온 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죄는 죽음으로도 사할 수 없습니다.”
성자가 무거운 신성력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루메오를 쏘아보며 압박하듯 말하자.
“용서받을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루메오가 성자의 살의 어린 신성력을 느끼고 두려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검은 문을 파괴하지 않고 봉인하면, 이 대륙의 파멸을 잠시 저지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구걸하며 항복을 외치기보단, 현재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나마 살길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때.
[루메오!]
-파지지직!
루메오에게서 강렬한 벼락이 솟구치더니, 분노가 가득한 여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성좌인 회개의 여신, 로메라의 목소리였다.
[배신의 대가로, 천년 간 회개의 벼락을 맞을지어다!]
로메라의 목소리가 이어짐과 동시에.
-파지직! 스릉!
루메오의 손에 벼락이 뭉치며 샛노란 단도가 생겨났다.
동시에.
-파직! 후우욱!
두 손으로 잡은 단도의 칼날을 자신의 목으로 겨누고 강하게 내질렀다.
로메라가 신관인 루메오에게 강신하여 자결시키려는 것.
그 순간.
“옥죄어라.”
-우우웅! 후욱!
레나가 루메오에게 손을 뻗어 어둠을 내뿜자.
-쿵! 파지직! 파직!
자결하려던 루메오가 벼락의 칼날이 목 끝을 조금 찌른 채, 멈추었다.
동시에.
“세인트 저지먼트!”
-훅! 타앙!
성자가 오른손바닥에 신성력을 강하게 응축시킨 후, 루메오의 이마를 강하게 밀어 쳤다.
이마를 얻어맞은 여파로 루메오의 머리가 크게 젖혀지며 뒤로 나자빠졌고.
-파직! 파직! 파아아!
루메오에게서 벼락의 튀기더니, 그의 위로 벼락이 뭉쳐지며 여신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를 조종하던 회개의 여신, 강신한 로메라의 화신체였다.
“배신자는 알뜰하게 잘 써먹어 주마. 이 빌어먹을 쌍년아.”
레나가 신관과 분리된 로메라의 화신체를 향해 욕을 퍼붓고는.
“임팩트 데몬 라이트닝.”
-콰르르릉! 파사사-!
검은 벼락을 쏘아 보내, 로메라의 화신체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로메라의 화신체가 사라지며, 루메오에게 튀기던 회개의 번개 또한 사그라지자.
“……으헉!?”
루메오가 눈을 부릅뜨며 제 목을 어루만졌다.
신에 의해 육체의 제어를 잃고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
“가, 감사합니다.”
짧고 굵게 숨을 고른 루메오가 성자를 향해 감사를 전하자.
“당신을 살리고 싶어서 살린 줄 아십니까?”
성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메오는 성자의 분노와 질책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는.
“더, 더 늦기 전에 대신전의 결계를 부수고 안에서 농성하는 이들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스터의 마지막 수단을 어떻게 하면 저지할 수 있는지를 마저 이야기했다.
성자는 진실의 마나를 강하게 끌어 올리며 그 말의 진위 여부를 파악했고.
“루. 파에테르. 사르문…….”
-촤라락.
레나는 조금 전, 검은 문을 파괴할 때와는 다른 언어를 읊으며 네크로노미콘을 펼쳐 넘겼다.
-스륵. 스르륵.
거대한 검은 문에 보랏빛 기운이 일렁이더니, 곳곳에 금이 간 부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기껏 반 가까이 부순 검은 문을 고치려는 듯 보였지만.
“다크니스 바이러스 임펙션.”
-쩌저적! 쩌적!
균열에 스며든 보랏빛 기운은 갈라진 틈을 타고 검은 문 전체를 감싸며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좋지 않은 병에 걸려 병원균이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가는 듯한 모습.
종종 처용이 어둠 속성 마나로 결계를 오염시켜 장악할 때 사용하던 흑마법이었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균열이 검은 문에 골고루 퍼진 순간.
“다크니크 그레이트 씰(Darkness Great Seal)!”
레나가 검은 문을 향해 왼손을 뻗으며 강하게 움켜쥐었다.
-쿠궁! 우우웅!
검은 문이 충격을 받은 듯 한 번 강하게 흔들렸고 보랏빛의 안개에 서서히 휩싸였다.
“임시 봉인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레나는 검은 문의 임시 봉인을 마치며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한처용. 문제가 생겼다.’
-띠링.
태초의 그릇에 새겨진 기능.
시스템의 알림을 조작하여 처용을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
“신의…… 위대하신 신의 대업만큼은!”
-화아! 콰화아아!
호네아와 맞서고 있던 라사벨이 소리를 내지르며 강렬한 빛을 내뿜었고.
-쿵! 후우우-!
거대한 악령과 함께 위로 뛰어올라 앞으로 쇄도했다.
“어딜.”
-후욱! 촤자자자-!
그 모습을 본 호네아가 검은 날개를 크고 넓게 펼치며 강하게 휘둘렀다.
검은 날개가 거대한 검은 칼날로 변하며 앞으로 돌진하는 라사벨을 휩쓸었다.
본래라면, 빛의 방패를 만들어 막아 내거나, 피해야 했지만.
-촤아아! 촤아! 후우욱!
라사벨과 악령은 검은 칼날이 몸을 찢어 내는 것을 무시하고 앞으로 계속 돌진해 나갔다.
예상치 못한 라사벨의 행동에.
“무슨?”
-훅! 타탓!
호네아가 발을 박차 옆으로 물러나며 돌진해 오는 라사벨을 피했다.
이윽고 무작정 돌진해 나가던 라사벨이 발을 멈춘 곳은, 다름 아닌 검은 문의 중심.
-푸화아아!
검은 문과 충돌하다시피 한 라사벨과 악령이 새하얀 점토처럼 철퍽이며 퍼지더니.
-슈르르륵!
검은 문을 감싸며 크게 퍼져나갔다.
“모두 돌아오세요!”
-화아아!
카란디아가 검은 문 앞에서 괴물들을 막아 내던 불사의 기사단을 포용하며 후퇴시켰다.
그리고.
-꾸르륵. 꿀럭.
검은 문을 감싼 새하얀 점토가 꿀렁거리며 점점 줄어들더니.
-슈르륵! 탓.
검은 문이 사라지며 라사벨이 나타났다.
하지만.
“으웨엑! 으에엑-!”
-푸확. 푸르륵! 꾸륵!
라사벨이 허리를 크게 굽힌 채, 하얗고 질척한 점토를 토해 내며 고통을 호소했다.
-캬아아! 크아!
그녀의 뒤에 나타난 거대 악령 역시, 무언가 문제가 생긴 듯, 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몸부림쳤다.
게다가.
-스르륵. 스륵.
둘의 새하얀 피부 위로 검은 실핏줄이 점점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주르륵. 주륵. 치이이-!
이젠 새하얀 점토와 더불어 코와 입에서 검은 피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년이…….”
그런 라사벨의 모습을 본 레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네년의 ‘고립’이라도 검은 문을 온전히 삼킬 순 없다.”
라사벨의 권능은 대상을 가두는 빛인 고립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 상당한 무리를 하여 검은 문을 강제로 고립 안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삼킬 수 없는 물건을 강제로 삼킨 결과.
“크웨에-! 으웩!”
-툭! 주르륵!
이젠 정말로 죽을 듯, 온몸을 뒤틀며 검은 피와 하얀 점토를 쏟아 내고 있었다.
뒤의 악령도 살점이 터져 나가 검은 피를 내뿜는 상황.
당장이라도 죽을 듯 보였다.
그러나.
“신이시여…… 신이시여! 당신의! 당신만의 성녀가! 지금 가고 있습니다!”
라사벨은 삐걱이는 발걸음으로 몸을 강제로 일으키고는.
-쿵! 콰아아아!
발을 강하게 박차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그녀와 연결된 악령 역시 기괴한 날개를 여러 장 형성해 펴더니 같이 날아올랐다.
-후욱! 화아아!
그 모습을 본 호네아가 검은 날개를 펼치며 즉시 추적에 나섰고.
“당신은, 이 제단에 묶인 영혼들을 마저 해방시켜.”
레나는 점점 멀어지는 라사벨과 호네아를 바라보며 성자를 향해 말했다.
“괜찮은 겁니까?”
성자가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레나를 향해 궁금한 듯 물었다.
작금 일어난 일은, 기존의 계획과 어긋난 돌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레나는 당황하는 모습 없이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괜찮아. 놈들이 아무리 발악한대도-.”
레나, 정확히는 그녀 안에 깃든 엘리스가 성자를 향해 말을 이었다.
“초월의 경지에 접어든 한처용이라면, 놈들을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엘리스는 처용을 향한 믿음을 보이는 말을 잇고는.
[……상황은 알았다. 나한테 맡겨.]
조금 전, 처용을 향해 보냈던 시스템 메시지에 대한 답변.
그 답변을 본 엘리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