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여래와 두 태초의 마수가 에스라 성운의 신격들을 가로막았을 때.
-콰르릉! 콰콰쾅!
처용은 손쉽게 황궁의 정문을 쳐부수며 내부로 진입했다.
-화아아……!
황궁 내부로 진입한 처용에게서 검붉은 기운이 풀리듯 흘러나오더니.
-촤라라라!
검붉은 갑옷과 도깨비 가면이 해제되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잠시, 수라와의 일체화, 일치단결을 해제한 것.
-그리 지치지 않아 보이는데?
수라가 놀라움과 의문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용은 생각보다 자신과의 연결을 오래 유지했음에도 지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대로 완전함을 유지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처용은, 잠시 일치단결을 해제한 상황.
“지금은,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까.”
처용은 그런 수라의 말에 답하며 황궁 내부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황궁 내부에 발을 들였음에도, 처용을 저지하려는 이가 없었다.
아니, 황궁을 지키는 거의 없었다.
이미 비상이 걸렸는지, 싸울 수 있는 인원들은 전부 전방으로 나간 듯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황궁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고 해도, 누가 처용의 앞길을 막을까?
단언컨대 처용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지금조차도.
“으, 으아아!”
“마신! 마신이다!”
처용을 마주치자마자 황궁에서 근무하는 모든 시종과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전력으로 도망쳤다.
처용은 구태여 그들을 추적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추적하여 시간을 낭비할 가치가 없었다.
모두가 처용을 피하며 도망친 덕분에.
-탓.
손쉽게 황궁 중심부인 대전에 발을 들일 수 있었으니까.
-끼이이-!
육중한 황궁 대전의 문이 열리자, 레드 카펫이 드넓게 펼쳐진 화려한 공동이 드러났다.
에스라 대륙의 다른 왕궁들보다도 더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대전.
하지만, 권위적인 황제와 황족들, 귀족들이 나열해 있어야 할 대전 안에는.
-지이잉.
-지잉.
천 제국에서 보았던 기계 장치들만이 나열해 있었다.
오만하고 권위적인 황제와 황족들이 있어야 할 제단 위에도.
고위 귀족들이 꼿꼿하게 서 있어야 할 좌·우 단상에도, 온통 기계 장치뿐이었다.
의자 형태의 기계 장치 위에는 당연히.
“…….”
“…….”
고개를 떨군 채 죽은 듯이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전을 둘러본 처용이 정면의 제단 위, 황제와 황족들이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기껏 공들여 육성한 황족들을, 성능 좋은 건전지로 만든 건가?”
이미 가망이 없어 보이는 아스터 제국의 황제와 황족들을 본 처용이 비웃음을 담아 읊조렸다.
아스터 제국의 시조는 아스터 첫 번째 신관의 자손들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간의 자손들.
그런 그들의 우월함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해 온 에스라 성운의 신격들.
그렇게 신들이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키운 인간들의 말로가.
고작, 신을 위해 질 좋은 생명력을 헌납하는 소모품 취급이었다.
처용의 읊조림대로, 신을 위해 일회용으로 사용되는 건전지.
얼마나 오랜 시간 정성을 들였든, 투자를 했든 상관없었다.
선천적 신격들, 특히 순혈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고작 이 정도 가치밖에 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신에 의해 길러져 온 질 좋은 가축들, 황족들의 말로를 지켜본 처용이 그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황족들이 앉아 있는 제단 뒤에는 그저 아스터를 상징하는 벽화 문양만 새겨져 있을 뿐.
하지만 처용이 벽에 새겨진 문양에 손을 대며 신력을 끌어 올리자.
-스스스!
벽 전체가 환하게 빛나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히! 허락할 수 없다!]
-쿠구구!
대전 전체를 크게 울리는 진동과 함께 아스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성역에 내가 내 발로 들어가겠다는데, 나를 막는다라?”
그런 아스터의 반응에, 처용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겉으로 드러난 아스터의 목소리에는 감히 자신의 성역에 침입하려는 처용에게 분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진짜 심정은 다름 아닌.
“그렇게 내가 무서웠나?”
바로, 처용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성운의 주신이, 자신의 성역에 인간이 침입하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성역은 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
신이 자신의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런 장소에 처용이 제 발로 가려는 상황.
처용에게 원한이 많은 아스터의 입장에서는 막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처용을 성역으로 끌어들여 처치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하계종 따위가 감히……! 내 성역을 더럽히게 만들 수 없다!]
아스터는 자신의 성역에 들어서려는 처용을 극도로 경계했다.
처용에게 분노와 증오를 내뿜고 있지만, 결코 성역에는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모습.
그 목소리에는, 옅은 두려움 말고도 조급함이 일렁이는 듯 보였다.
처용은 그런 아스터의 반응을 살피며 잠시 생각하고는.
“……네 친구들과 연락이 되지 않나 봐?”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용은 아스터 제국의 결계를 부수고 황궁까지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그런 처용의 앞길을 가로막는 이들은 모두 아스터 교단의 병사들과 에스라 성운의 신격들이 전부였다.
그들과 동맹인 이들, 판데모니움의 악마들과 마인들, 다른 순혈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의 성채에서 벌어졌던 전쟁처럼, 대악마와 순혈자들의 세력들이 나타났어야 했다.
그들은 모두 에스라 성운과 동맹인 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에스라 성운과 동맹인 이들의 모습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
즉.
“병신 새끼, 네 친구들한테 버림받았냐?”
아스터는 그의 동맹들에게 버림받은 것 같았다.
선천적 신격들, 특히 순혈자들은 오만하고 이기적인 존재들.
그 추악하고 이기적인 오만함은, 인간에게만 보이는 특징이 아니었다.
순혈자인 로키가 같은 순혈자인 가브리엘을 거침없이 버렸으니까.
제 세력과 힘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동맹인 아스터를 버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너도 옥황상제처럼 네 집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옮기려고?”
아스터 역시 에스라 대륙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었다.
처용의 머릿속에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지금 아스터는 다른 동맹 없이 혼자라는 것.
“네놈이 얼마나 무능하고 멍청하면, 악의 종주도 너를 버렸을까. 크크.”
악의 종주조차도, 지금 아스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에스라 성운은 지금, 처용이 홀로 황궁에 쳐들어온 것조차도 저지할 수 없었던 상황.
게다가, 사방에서는 연합군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성지쟁탈전까지 선포되어, 성운의 신격들까지 전쟁에 개입해 올 것이다.
에스라 성운과 아스터 교단의 저력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로 인해, 홀로 고립된 상황.
지금 아스터는 완전히 구석에 몰렸다고 볼 수 있었다.
“문 열여 이 새끼야. 손님 받아라.”
-스릉. 카가강!
처용이 멸절을 두 손으로 쥐고 강하게 앞으로 내지르며 말했다.
-파지직! 파직! 쿠구구-!
검붉은 전류와 새하얀 전류가 사방으로 튀며 불꽃을 터트렸다.
그 충격이 퍼진 탓인지, 황궁 전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놈은 절대 성역에 들어설 수 없다!]
-우우웅!
성역의 입구에서 흐르는 신력이 더욱 견고해지며, 아스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떻게든 처용이 성역에 들어서려는 것만큼은, 막으려는 모습.
그런 아스터에게 맞서, 처용 역시 신력을 내뿜으며 계속 성역의 입구를 부수려 시도했다.
당장, 성역의 입구를 부수고 돌입하기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어디, 네 성지가 완전히 쓸려 나갈 때까지, 줄다리기를 해 보자고.”
처용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지금 아스터가 문을 잠그고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스터 제국, 그의 성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스터 제국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중이었고 성지가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처용은 아스터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이곳에서 그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나의 세력이 쉽게 밀려날 것 같으냐!]
아스터가 이를 갈며 소리치자.
“이봐, 아스터. 내가 볼 땐 말이야.”
처용이 차가운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문을 강제로 따 버리기 전에, 네 졸개들이 먼저 파멸을 맞이할 거다.”
싸늘한 목소리로 아스터의 세력이 파멸하리라는 것을 예고한 처용은.
-우우웅! 쿠구!
멸절에 더 강한 신력과 강기를 부여하며 성역의 문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
처용이 아스터의 성역 입구를 강제로 부수며 그의 시선을 붙잡을 때.
-쿠구! 콰르르-!
아스터 제국 곳곳에서 폭음이 울리며 함성과 괴성이 울렸다.
연합군의 거침없는 진격에, 아스터 제국은 그들을 저지하지 못하고 계속 밀려났다.
각 도시와 마을들이 순식간에 점령되고 이내, 제국의 중심지, 수도만이 남았다.
아스터 제국의 국경선만큼이나, 견고한 성벽이 수도의 진입로를 막고 있었지만.
-무너진 지점이 있다!
-진입로를 확보해!
그마저도, 가장 먼저 수도에 돌입한 처용이 성벽의 관문을 모조리 파괴해 버린 직후.
게다가, 수도의 내부에서는.
[혈선! 법칙을 거스른 하계종 따위가!]
[할 줄 아는 것이 비난밖에 없느냐?]
에스라 성운의 신격들과 여래를 포함한 태초의 마수들이 격돌하고 있었다.
이미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격전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외부를 제대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연합군은 거의 무혈입성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손쉽게 수도 내에 진입했다.
다만, 각 도시에서 후퇴한 아스터 제국의 병력들이 수도로 모였기에.
-저 이교도들을 막아라!
-신의 이름으로!
그들은 결사항전을 각오한 듯, 연합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크아아!
-캬아!
대신전의 뒤편에 열린 검은 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까지 뛰쳐나와 연합군과 격돌했다.
순식간에 불어나는 머릿수로 인해, 연합군의 진격이 잠시 저지되었다.
“검은 문이 사라질 때까지! 피해를 최소화하고 수비 대형을 유지한다!”
최전방에 선 헌터들과 괴물들을 막아 내던 제시카가 크게 소리치고는.
‘믿겠습니다. 성자.’
검은 문을 처리하기 위해 별동대로 나선 이들 중 하나.
성자를 떠올리며 속으로 읊조렸다.
***
아스터 제국의 대신전 뒤편, 그곳에는.
-쿠구구구!
하늘과 땅을 잇는 검은 기둥, 괴물들을 무한히 쏟아 내는 두 개의 검은 문이 자리해 있었다.
거대하고 드넓은 왼쪽 문에 비해, 오른쪽 문은 한참이나 작은 모습.
이전, 처용과 루비아에 의해 마탑의 세력이 무너지며 생긴 결과였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저 잔악무도한 침략자들을 벌할 기회가.”
검은 문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 세워진 제단.
그 위에 선 아스터 교단의 성녀, 라사벨이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때.
-우우웅.
검은 문이 진동하며 파동을 한 번 퍼트리고는.
-스르륵…….
넘실넘실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사그라졌다.
동시에.
-스륵. 쿵!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던 검은 괴물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검은 문 외벽에 가로막혀 나오지 못하는 모습.
시스템의 장벽을 뚫고 멸망한 세계와 연결된 검은 문의 통로는 계속 열어 두기엔 힘들었다.
일정 시간 괴물들을 쏟아 내면, 잠시 문이 닫히며 휴식기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짧은 휴식기가 지나면, 다시 통로가 개방되며 괴물들을 쏟아 낼 수 있었다.
라사벨은 이곳에서 검은 문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중이었다.
그때.
-화아아!
라사벨의 앞에 빛이 번쩍이더니.
-저벅.
성자가 나타났다.
라사벨의 앞에 나타난 성자가 검은 문과 라사벨, 제단을 번갈아 보더니.
“……!”
강렬한 혐오감이 담긴 눈빛으로 라사벨을 노려보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혐오감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성자와 라사벨이 서 있는 제단.
그 제단은…….
끓는 금속에 살아 있는 생명을 녹여 주조한 제단이었다.
제단 속에서 울려 퍼지는 생명의 고통과 절규, 공포가, 진실의 마나를 통해 생생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제단에 묶여 구속된 생명들, 그들의 영혼들은 모두 라사벨에게 묶여 통제당하고 있었다.
그 제단에서 흘러나온 힘을 이용해 검은 문을 제어하는 듯 보였다.
“아아, 성자님. 마음에 드시나요? 신을 위해 기꺼이 제 몸을 헌신한 신도들이랍니다.”
라사벨은 성자가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알고 있다는 듯,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탁. 탁.
신의 강욕에 의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어 만들어진 제단.
라사벨이 그 제단을 발로 두들기며 아름답다 말하자.
“이런…… 미친!”
결국, 역겨움을 참다못한 성자의 입에서 이를 가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속으로는 냉정해져야 한다.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차분해져야 한다고 계속 되새겼다.
하지만.
-으아아!
-아악!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참혹한 광경.
영혼들이 끓는 금속의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고통을 내지르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들끓었다.
분노하는 성자의 모습을 본 라사벨이 황홀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우웅. 탓!
새하얀 빛이 일렁이는 손가락을 튕기며 그 빛을 터트렸다.
그러자.
-캬아아!
-크아아!
검은 문의 잠금이 서서히 풀리며 괴물들이 문 너머로 팔과 다리를 뻗었다.
곧 문이 열리고 엄청난 수의 괴물들이 다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때.
“흐음, 검은 문인가? 이거 정말 오랜만에 보네?”
성자의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고.
-쿠궁! 촤르르륵!
검은 문이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 흔들림과 동시에, 검은 사슬이 나타나 검은 문의 입구를 막았다.
-철컹! 철크럭! 철컥!
검은 사슬에 의해 입구가 막히자, 괴물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무슨?”
라사벨이 검은 문을 보며 당황을 표하고는 성자의 뒤에 나타난 여성을 노려봤다.
-우웅. 촤라라-.
보랏빛 문자가 나열된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고 있는 검은 책을 든 붉은 머리의 여성.
“그 책…… 설마 넌!?”
라사벨이 레나의 얼굴과 검은 책을 알아보며 눈을 크게 뜨자.
“왜? ‘예언자’가 직접 여기에 나타날 줄은 예상 못 했나 봐?”
레나, 아니 엘리스가 라사벨을 노려보며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