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더욱 강해진 파트너, 멸절을 챙기고 다른 무구들을 점검한 처용은.
-우우웅.
게이트를 열고 곧장 에스라 대륙으로 향했다.
본래 계획은, 아스터 제국을 지키는 결계의 근원인 동방 제국을 조사하고 결계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물론, 적들의 함정에 빠져 파란만장한 일을 겪었지만, 동방 제국이 무너졌다는 게 중요했다.
적들의 결계를 유지해 줄 생명력 공급장치가 망가진 셈이니까.
이제, 에스라 대륙을 좀먹는 쓰레기들을 모조리 치워 버릴 일만 남았다.
아라한 왕국 2층에 나타난 처용이 왕궁 앞으로 나아가자.
“이번엔 좀 늦었네?”
-파아.
루비아가 공간을 열고 처용 앞에 나타났다.
마치, 처용이 오는 것을 감지하고 바로 나타난 듯 보였다.
“아주 복잡한 사고들이 연달아 터져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들었어.”
처용의 대답에 루비아가 답하고는 처용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마나가 일렁이는 루비아의 손을 처용이 잡자.
-우웅. 파아아!
주변의 공간이 뒤틀리며 처용과 루비아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우웅. 탓.
아라한 왕궁에서 사라진 처용과 루비아가 공간을 열고 다시 나타나자.
“……슈르메 왕국, 올림포스 주둔지인가?”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며 읊조렸다.
루비아가 자신을 데려간 곳은 바로 올림포스 길드가 에스라 대륙에 자리 잡은 장소였다.
정확히는 슈르메 왕국에 세워진 올림포스 신전 앞 광장.
루비아가 처용을 데리고 이곳에 나타나자.
“돌아왔군요.”
신전 앞에 있던 올림포스 길드장, 제시카가 처용을 향해 반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안녕?”
그런 그녀 앞에 앉아 있던 검은 로브의 여성이 처용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로브의 머리 후드를 벗었기에,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난 모습.
처용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성은 다름 아닌 레나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레나를 본 처용이, 잠시 멈칫하고는 의문을 표했다.
지금껏 제 모습을 숨기고 활동해 왔던 레나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상황.
의문과 의아함이 담긴 처용의 물음에.
“내가 여기 오면 안 된다는 법이 있나?”
-호로록.
레나가 단상 위에 놓여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햇볕 아래에 펼쳐진 간이 그늘막과 단상.
그 위에 놓인 다과와 커피를 놓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
제 모습을 숨겨야 하는 비밀스러운 인물과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적어도 올림포스 주신은, 날 강제로 잡아가려 하지는 않을 거 아냐?”
아테나가 자신을 강제로 잡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어린 레나의 말이 이어졌다.
그 말에 처용이 납득이 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아테나가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처용은 에스라 대륙에 나타난 예언자를 잠시 응시하고는.
“그래서, 여기엔 왜 온 거냐? 레나.”
이곳에 왜 왔는지를 물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 말, ‘레나’라는 그녀의 이름을 조금 강조한 듯한 처용의 목소리가 울리자.
“칫, 역시 너한테는 안 통하네.”
레나는 그런 처용의 질문에 일렁이는 말투를 듣고 혀를 차며 말했다.
지금 처용 앞에 나타난 그녀는 미래의 기억과 경험을 지닌 레나, 엘리스가 아니었다.
현재 시대에 있는 진짜 레나였다.
“아예 공개적으로 네 정체를 밝힐 생각인가?”
처용이 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레나의 반응을 봐서,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조금 더 명확히 말하자면.
진짜 ‘예언자’, 엘리스에 대해서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처용의 우려 어린 질문에.
“이미 성자한테 엘리스를 들켰어, 도대체 왜 이렇게 빨리 강해진 건데?”
레나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에스라 대륙에 레나가 나타나고 길드의 헌터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당신이 ‘진짜 예언자’로군요.
진실의 마나를 각성한 성자가, 레나를 보며 말했었다.
정확히는 레나의 안에 깃들어 있는 또 하나의 인격.
미래의 기억을 가진 레나, 엘리스를 알아보았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엘리스와 레나는 오히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았다.
“네가 전에 말했었지? 우리가 성운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고.”
레나가 이전 처용이 했었던 말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놈들이 내 눈치를 봐야겠지.
태룡전에 엘리스가 찾아왔을 때, 처용이 그녀를 향해 했었던 말.
그 당시 처용은 태초신을 임명할 수 있는 계승자의 권한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말했었다.
태초신의 임명권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숨기기보단,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눈치를 봐야 하는 이들은, 자신이 아닌 성운과 성좌들이라고 말했었다.
그 당시 엘리스는 과거와 달라진 처용의 행동을 인정하고 공감했었다.
때문에.
“나도 엘리스도 굳이 성운의 눈치를 보거나 피할 필요가 없지.”
레나와 엘리스 역시 더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쁘지 않네.”
처용은 그런 레나의 말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제시카.”
레나를 향한 의문과 질문을 잠시 멈추고 제시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대화가 아니었으니까.
“천 제국이 멸망했는데, 결계가 그대로 있군?”
처용이 먼 곳에 보이는, 아스터 제국을 보호하는 결계를 보며 물었다.
아스터 제국을 감싸는 결계의 근원, 천 제국은 무너졌다.
그런데, 왜 아직도 결계가 남아 있는 것인가?
“기계 장치의 여신님께서 분석하신 결과, 그간 저장해 둔 에너지를 쓰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제시카가 처용의 질문에 즉각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천 제국에서 생산하는 에너지 공장은 파괴되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곳에서 빨아들인 방대한 에너지가 아스터 제국에 남아있었다.
게다가, 천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
“천 제국이 멸망할 때, 그곳의 방대한 에너지가 한꺼번에 중앙으로 몰려들었었습니다.”
그곳에 저장된 거대한 에너지가 아스터 제국으로 향했다.
즉, 축적된 에너지가 모두 소모되지 않는 한, 결계는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면 알아서 사라지긴 할 거야, 놈들이 축적한 자원이 무한한 건 아니니까.”
레나가 먼 곳에 보이는 결계를 거슬린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굳이 기다릴 필요 없어.”
처용이 싸늘한 눈빛으로 결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길드에 알려, ‘전면전’을 준비하라고. 결계는 내가 직접 부순다.”
결계를 힘으로 부수겠으니, 전면전을 준비하라는 처용의 말에.
“아무리 너 같은 괴물이라도 저 결계는-.”
레나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만류하듯 말했다.
그리고 레나의 말이 잠시 끊기고는.
“……잠깐, 너 설마?”
-스르륵.
순간, 레나에게서 마기가 옅게 일렁이며, 조금 더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겉으로는 차분한 듯 말했지만, 그 목소리 안에는 놀라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부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엘리스.”
처용은 레나를 통해 목소리를 낸 존재, 엘리스를 알아보며 답하고는.
“모든 길드가 공격 준비를 마치는 대로, 저 결계를 박살 내 버리겠다.”
-탓.
뒤를 돌아 아스터 제국의 결계 앞으로 걸어 나갔다.
***
처용이 전면전의 준비를 요청하자.
-올림포스는 즉각 중앙으로!
-파라오 길드는 남서쪽의 최전방으로!
에스라 대륙에 자리를 잡은 모든 길드가 즉각 준비를 마치고 전투를 준비했다.
애초에, 대부분의 길드가 상시 전투를 준비하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상황.
전면전의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게다가 길드뿐만 아니라, 아라한 왕국 또한 최전방의 병력들을 움직여 전면전을 준비했다.
아라한 왕국과 협력하는 다른 왕국돌 또한 마찬가지.
아스터 제국과 맞서는 모든 이들이 빠르게 최전방으로 소집되었다.
마치, 모든 이들이 손을 잡고 아스터 제국을 포위한 듯한 모습.
그리고.
“…….”
아스터 제국을 보호하는 결계의 가장 앞에 처용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용님.”
아라한 왕국의 여왕, 아나샤가 처용에게 다가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역시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전투하려는 듯, 무장을 단단히 갖추고 있었다.
“모두 준비를 마쳤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아나샤의 말.
그 말인즉, 아라한 왕국을 포함한 모든 왕국, 길드들이 전투 준비를 모두 마쳤다는 말이었다.
처용이 전면전 준비를 요청하고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난 것이었다.
“북부에는 드래곤, 서쪽에는 커맨더, 그리고…….”
아나샤가 각 지역에 누가 있는지, 어떤 이들이 맡고 있는지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정리하자면, 아스터 교단과 적대하는 이들이 각자 역할을 나눠 사방을 포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용은 아나샤가 말해 주는 설명을 들으며 눈앞에 넓게 펼쳐진 결계를 응시했다.
아나샤가 이야기를 마치자.
“확실하게 부술 수 있는 거야?”
-탓.
처용의 뒤로 레나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제시카와 성자, 라진 등, 각 길드의 길드장들도 다가왔다.
모두 처용의 전면전 요청에 의해 휘하 헌터들을 소집하고 이곳에 모인 이들.
그들 모두가 처용을 향해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처용의 요청이었기에, 전면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직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상황.
특히, 아스터 교단을 보호하는 결계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내용이 궁금했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결계를 노려보던 처용이 뒤를 돌아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결계를 부수고 신호를 올리면, 그때 놈들을 쓸어버리면 됩니다.”
처용이 결계를 부수고 가장 먼저 진입한다.
적들의 방어선을 무너뜨린 처용이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아주 간단명료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곧 드러날 놈들을 타 세계의 제국이 아니라 ‘던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처용이 싸늘한 눈빛으로 결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곧 드러날 적들의 제국, 아스터 제국을 국가가 아닌 토벌할 던전으로 여기라는 것.
“지금부터 S급 던전, 아스터 제국의 섬멸을 시작합니다.”
-저벅.
처용이 아스터 제국의 토벌 시작을 알리고는 뒤를 돌아 결계를 향해 나아갔다.
“모두 준비하라!”
아나샤가 작은 수정구 모양의 통신기를 들어 명령하듯 말하자.
-쿠구구! 쿠구!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라한 왕국의 진형 최전방에서 거대한 골렘들이 나타났다.
모두 강철의 정령들과 계약한 왕실 기사단의 일원들.
건렌스 나이츠들이 강철의 힘을 개방하여 거대한 골렘의 형태로 변한 것이었다.
제시카를 포함한 다른 길드장들 역시 휘하 헌터들에게 전투 준비를 알렸다.
모두가 돌입할 준비를 마쳤을 때.
-저벅. 우우웅!
결계 앞으로 다가간 처용은, 검붉은 빛이 일렁이는 금빛 신력을 내뿜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징벌의 시간이다. 수라.”
누군가를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스스스.
처용의 말에, 겉으로 뿜어져 나오는 신력이 뭉치며 반투명한 인영을 형성했다.
날카로운 느낌의 검붉은 갑옷과 흉악한 도깨비 가면.
-나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나?
처용의 위에 반투명한 형상으로 나타난 수라가 처용에게 묻자.
“못 할 것 같나?”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수리에게 되물었다.
자신감이 일렁이는 처용의 목소리에.
-크흐흐,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지.
수라가 옅은 미소를 내뱉고는 처용에게 깃들었다.
동시에, 처용이 신력과 강기를 강하게 끌어 올렸다.
-콰아아!
멸천의 신명, 징벌자의 힘, 처용이 지닌 신력과 강기, 각 속성의 힘까지.
처용이 다룰 수 있는 모든 힘이 폭풍처럼 강렬하게 몰아쳤다.
그 힘들이 모두 처용을 감싸며 단단하게 뭉쳐 들었을 때.
“일치단결(一致團結).”
-일치단결(一致團結).
처용과 수라가 동시에 두 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콰아! 촤라라-락!
강렬하게 요동치는 기운이 큰 파동을 한번 내뿜더니, 이내 처용을 감싸며 검붉은 갑옷을 형성했다.
날카로운 느낌의 검붉은 갑옷 위로 금빛의 선들이 추가로 이어졌고.
-촤라락. 철컥!
처용의 얼굴에 흉악한 도깨비 가면이 형성되며 씌워졌다.
처용이 눈을 뜨자.
-지이잉.
금빛의 안광이 검붉은 도깨비 가면 사이로 발광했다.
-콰아아! 쿠구구!
처용의 겉모습이 변하자, 강렬한 기운이 요동치며 주변 일대를 파괴했다.
그저 겉으로 뿜어지는 기운만으로 주변의 환경이 파괴되는 상황.
-스스스.
처용이 요동치는 기운을 안정시키며 심호흡을 하자.
-쿠구…….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기운이 빠르게 안정되었다.
날뛰는 힘을 안정시킨 처용은.
-우웅. 스르릉.
신물로 각성한 자신의 무구, 멸절을 꺼내 양손으로 쥐었다.
“태극천체일도 – .”
-우우웅.
처용이 멸절에 힘을 부여하며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스릉. 지이잉!
검붉은 칼날이 칠흑처럼 어둡게 변했고 그 칠흑 안에 금빛의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금빛의 별들이 빛을 발광하며 그 힘이 칼날에 압축된 순간.
“천지멸절.”
-탓. 샤아악!
처용이 위로 들어 올렸던 태극천체일도를 아래로 부드럽게 내리쳤다.
그러자.
-피이. 콰아아아-!
귀를 울리는 짧고 강한 이명이 울림과 동시에, 하늘과 땅을 잇는 칠흑의 선이 그어졌고.
-키이잉!
날카로운 소리가 뒤이어 울리며 칠흑의 선 사이로 금빛의 얇은 선이 그어졌다.
그 금빛의 선에 의해 칠흑의 선이 좌·우로 벌어진 순간.
-차카캉!
아스터 제국을 보호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결계가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리고.
“모조리 파멸해라.”
-스릉. 사가각!
처용이 아래로 내리친 태극천체일도를 고쳐 쥐며 가로로 부드럽게 베자.
-파차창! 차캉! 콰아아-!
반으로 갈라진 거대한 결계가 가로로 잘려 나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