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화
징벌의 선고가 풀리고 점차 복구되던 처용의 심상세계 마저 사라지자.
-스르륵.
처용이 나타난 곳은 태룡전이었다.
다시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온 것.
태룡전의 중심으로 돌아온 처용에게는.
“…….”
작은 체구의 어린 여아, 보살이 새근새근 잠든 채 안겨 있었다.
처용이 눈짓하자, 뒤에 있던 야타가 다가와 잠든 보살을 조심스럽게 넘겨받았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앞부분이 반쯤 깨진 알 안에 보살을 눕혔다.
보살을 알 안에 눕힌 아타가 뒤로 물러나자.
-우웅. 촤라라-!
알 옆에 있던 여래가 알에 신력을 주입했고 알 껍데기의 깨진 부분이 조금씩 재생되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알 안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는 듯한 보살의 모습을 처용이 바라볼 때.
[이제, 반성은 그만하는 것이 좋겠구나.]
알에 조심스럽게 신력을 주입하던 여래가 처용을 향해 말했다.
착잡함이 일렁이는 여래의 목소리에,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제로 깨어나셨던 겁니까?”
잠든 보살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여래가 침묵했고 아타 역시 고개를 숙이며 침묵했다.
“……전 반성할 자격도 없는 놈이었군요.”
처용이 얼굴을 쓸며 자책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그녀의 부탁이었다.]
황룡이 처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는, 더 안정을 취하고 재생을 이어 가야 했었던 보살이 깨어난 이유.
그 이유는 자해를 거듭하던 처용을 말리기 위해서였다.
알 속에 있던 보살이 황룡에게 제 의지를 전달했고 결국, 황룡이 재생 중이던 보살을 꺼내 준 것이었다.
처용이 황룡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며 침묵하자.
[네 덕분에, 자비의 대신은 ‘그들’의 운명에서 벗어났다.]
황룡이 중요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보살이 ‘그들’에게서 벗어났다는 말에 처용의 눈빛이 차분한 빛을 내었다.
황룡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대 또한, 그들이 정한 운명에서 벗어났다.]
황룡이 처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제 운명 또한, 놈들이 쥐고 있었다고요?”
처용이 황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처용의 운명.
이는, 지금까지 처용에게 벌어졌던 모든 일들, 즉 처용의 인생을 의미했으니까.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수호신의 길을 걸었던 회귀 전 자신.
시간이 돌아오고 복수자의 길을 건 현재의 자신.
그 일련의 과정에 있었던 모든 일들 모두를 의미했으니까.
그런 많은 의미가 담긴 처용의 질문에.
[……다행스러운 일이지.]
황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때.
-운명을 벗어나서 다행이라고?
-콰아아!
처용 주변으로 검붉은 신력이 휘몰아치듯 솟구치며 중성적인 목소리가 울렸고.
-슈르르륵.
검붉은 신력이 뭉치며 날카로운 느낌의 갑옷과 도깨비 가면이 형성되었다.
“수라.”
처용이 옆에 나타난 분노의 파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껏 신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던 녀석이 왜 지금 나타난 것이 의문이었다.
그런 의문과 경계심 어린 처용의 반응에.
“천찰, 새로운 관리자.”
분노의 파편, 수라는 처용을 무시하고 황룡을 노려보며 말했다.
“모든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방관한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
모든 것을 알고 있었냐는 수라의 말에 긍정하듯, 황룡이 눈을 감으며 침묵했다.
[……그대가 계승자에게 이름을 허락했다는 것은, 계승자와 타협을 한 것이로군.]
긍정의 의미를 담아 짧게 침묵하던 황룡이 눈을 지긋이 뜨고 수라를 바라보며 묻자.
“내가 계약을 하고 싶어서 한-! 젠장……!”
수라가 역정 어린 감정을 표출하다 말고 강한 침음을 내며 말을 끊었다.
불만이 가득 담긴 수라의 반응을 본 황룡은.
[나는 계승자의 운명에 개입할 수 없다.]
처음 수라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말했다.
[보현의 소멸, 계승자의 타락, 이 우주의 파멸…… 나에게는 수많은 운명이 보였었다.]
이 우주의 새로운 관리자가 된 황룡에게 보이는 미래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답이 정해져 있는 미래에 대한 정보가 절로 떠올랐다.
그 미래에 대한 정보의 중심에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처용.
처용을 중심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래의 일들에 대한 아주 많은 경우의 수.
그 미래들은, 처용이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수만 가지로 갈렸다.
마치, 점점 복잡하게 얽히며 뻗어 나가는 나뭇가지와 같았다.
그 복잡하고 넓게 뻗어 나가는 나뭇가지는 이내 한 지점에 뭉쳤고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나타냈다.
[그 끝에는 항상 ‘무한의 순환’으로 끝나지.]
바로, 무한의 순환.
이 우주의 완전한 파멸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이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
하지만.
[허나, 내가 보았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 수많은 운명 중에서도-.]
황룡이 보았던, 단 하나의 결말만을 위해 나아가던 수많은 과정들.
무한의 순환이라는 결과만을 위해 뻗어 나간 운명 중에서도.
[지금의 이 모습은 없었다.]
지금, 황룡이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용, 분노의 파편인 수라, 보살, 이 셋이 모두 살아 있는 운명은 없었다.
특히, 운명의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황룡이 가장 많이 보았던 광경은 바로.
[자비의 대신이 생존하는 운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보살의 소멸이었다.
때문에, 보살이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선택을 할 때, 황룡은 보살의 소멸을 확신하고 슬퍼했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결과만을 위한 운명이 아닌, 새로운 운명이 생겨났다.]
소멸을 맞이하는 운명밖에 없던 보살이 살아났다.
아니, 처용이 보살의 운명을 비틀어 그녀를 구해 냈다.
무한의 순환이라는 결과를 위한 운명이 아닌, 처용 스스로가 개척한 자신만의 운명이었다.
황룡이 잠시 눈을 감으며 침묵하고는.
[……새로이 태어난 내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처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황룡이 입을 열며 목소리를 이으려는 순간.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처용은 황룡이 하려는 말을 알고 있다는 듯, 그와 같은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 처용이 종종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황룡은 처용이 자신이 하려는 말을 알아채고 똑같이 말하자,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수라를 바라봤다.
[그대는 이제 계승자와 완전하게 엮였고 시스템과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어지는 황룡의 말에, 처용 역시 수라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지금, 처용 옆에 나타난 수라, 분노의 파편은.
“…….”
황룡이나 여래처럼, 시스템을 통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즉, 시스템의 제약이 사라진 셈.
정확히 말하자면.
“시스템 대신, 내가 네 제약이 된 것이군.”
분노의 파편, 수라는 처용과 계약을 맺었고 처용에게 속하게 된 것.
즐거움의 파편인 조커가 시스템의 제약 없이 하워드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았다.
처용은 조커의 경우를 떠올리며,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승님.”
여래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아타와 같이 살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처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여래가 말했다.
“제가 보살님의 힘을 받고 태어난 만큼, 보살님 역시 부작용은 없을 겁니다.”
아타 역시,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재생 도중, 보살의 영향을 받고 새로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보살 역시 아타의 재생을 부작용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재생을 중간에 멈추고 다시 알에 들어갔음에도,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네 할 일을 하거라. 보살님은 걱정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스승님.”
여래의 말에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반성 같은 짓거리는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분노의 파편, 수라가 질린 목소리로 처용을 향해 말했다.
“이제, 반성 같은 걸 할 시간 따윈 없을 거야.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런 수라의 말에 처용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가자, 그 망할 ‘정해진 운명’을 짓밟아 버리러.”
-우우웅.
처용이 정해진 운명을 부수러 가자는 말과 함께 게이트를 열자.
“…….”
-스르륵.
수라가 말없이 눈을 감고는 검붉은 기류로 변하며 처용에게 깃들었다.
***
-우우웅.
처용이 다시 나타난 곳은, 태룡사 상단에 있는 보물전, 루돌프의 대장간 앞이었다.
-여긴 왜 온 거냐?
수라가 처용에게 묻자.
“준비는 철저히 해야지.”
처용이 그 말에 답하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적들을 상대로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
심지어,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은 악의 종주만이 아니었다.
그 무시무시한 악의 종주조차도, 절대 죽일 수 없다고 단정 지은 존재.
보살을 필연적인 소멸의 운명으로 몰아넣은 존재.
그들이 새로운 ‘적’이었다.
언제 다시 그들을 마주할지 모르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지만.
“같은 실수를 막으려면…….”
기본적인 전투 준비와 장비 점검은 언제나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원칙을 항상 지켜온 덕분에, 판데모니움의 중심, 악의 제전에 홀로 떨어졌을 때도 살아남았었으니까.
그리고.
“……검.”
처용이 한숨을 내쉬며 짧게 읊조렸다.
주력으로 사용하던 무기인 역천의 절이 부러졌으니까.
주 무기가 검이니만큼, 역천의 절에 버금가는 새로운 무구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루돌프에게 새로운 무구의 제작을 의뢰할 생각이었다.
처용이 대장간 안에 들어서자.
“이제야 오는 겐가?”
안에 있던 루돌프가 처용을 보며 말했다.
마치, 처용을 계속 기다렸다는 듯, 핀잔과 구박이 일렁이는 듯한 목소리.
“사정이 있었-.”
그런 루돌프의 독촉 어린 목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한 순간.
“……너는!?”
하던 말조차 끊을 정도로 처용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검은색과 붉은색, 금색이 적절히 섞인 갑옷과 머리에 씌워진 치우 가면.
마치, 대장간 안에 전시된 것처럼 서 있는 골렘.
그것은 다름 아닌.
“역천의 절?”
부러진 줄 알았던 자신의 무구, 역천의 절이 골렘으로 형상화한 모습이었다.
“일주일 전에, 갑자기 저 녀석이 만신창이가 된 채 나타났었다고. 얼마나 놀랐는지…….”
루돌프가 그런 처용을 보며,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일주일 전, 골렘으로 형상화한 역천의 절이 루돌프의 대장간 안에 나타났었다.
문제는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라, 거의 반파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는 점.
그리고.
-철크럭. 철컥.
그런 역천의 절이, 대장간 안에 보관된 주괴들을 깎고 부수며 자신의 몸에 끼워 넣고 있었다.
마치, 망가진 몸을 스스로 수리하려는 듯한 모습.
루돌프는 그런 역천의 절을 보고는.
“저것 혼자 끙끙대는 모습을 어떻게 그냥 지켜보겠나? 내가 꼼꼼하게 손봐 줬지.”
파손되고 부서진 부분을 수리해 주고 완전히 망가진 곳은 새로 제작해 주는 등, 수리를 도와주었다.
그렇게 루돌프는 칼의 형태와 골렘의 형태를 반복하며 변하는 역천의 절을 수리했고.
“저 녀석 덕분에, 미리 제련해 둔 태초의 조각을 반 가까이 써 버렸어, 덕분에…… 잘 고쳐지긴 했지.”
역천의 절을 완벽하게 수리하는 데 성공했다.
아니, 기존보다 더 강화되었다.
겉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전보다도 훨씬 묵직하고 강해져 있었으니까.
처용이 역천의 절에게 다가가자.
-미안하다. 주인.
역천의 절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하고 슬픈 감정이 서린, 미안하다는 말.
-내가 부러지는 바람에…… 적을 이기지 못했다.
역천의 절은 자신이 부러졌기에, 처용이 적을 이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아를 가진 무기로써,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한 역천의 절.
그는 상대와의 싸움 도중, 스스로가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다.
그랬기에.
-다시는…… 다시는 내가 부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주인인 처용에게 다짐하듯 강하게 말했다.
-맹세한다.
앞으로 자신이 부러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역천의 절의 맹세에.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처용이 주먹을 강하게 쥐고는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무기가 부서지는 건, 그 무기가 약하기에 부서진다는 인식이 대중적이었다.
하지만, 처용은 그런 대중적인 인식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싸움에 있어, 사용하는 무기의 질이 중요한 건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파트너가 부러졌다는 건, 사용자인 내가 약했었다는 것이니까.”
전투 도중에 무기가 부서졌다는 건, 사용자가 그 무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역천의 절은 명도 중의 명도라 할 수 있는 뛰어난 무구.
그런 역천의 절이 전투 도중에 부러졌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처용이 악의 종주에 비해 압도적으로 약했으니까.
상대보다 약했기에, 상당한 무리를 했고 그 결과 역천의 절에 많은 부담이 실렸다.
그 부담이 가중되고 지속된 결과 역천의 절이 부러진 것.
상대인 악의 종주가 너무나도 강한 탓도 있었지만, 처용이 무리했다는 점도 컸다.
“앞으로, 네가 부러지는 일을 결코 없을 거다.”
역천이 절이 맹세했던 것처럼, 처용 역시 맹세하듯 강하게 말했다.
무구와 무인이 서로에게 다짐하듯, 자신의 마음을 전하자.
-스르르.
골렘의 모습이었던 역천의 절이 점차 사라지며 한 자루의 도가 나타났다.
검붉은 물결무늬 사이로 작은 금빛이 일렁이는 검은 칼날이 예리한 빛을 빛내고 있었다.
이전보다도 더욱 강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탁. 스르릉.
처용이 칼자루를 쥐고 날을 세우며 치켜들자.
-우우웅.
역천의 절에게서 더욱 강하고 묵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처용은 새롭게 변해 이전보다도 강해진 역천의 절을 잠시 바라보고는.
“이젠, 역천의 절이라기엔 그 이름이 좀 약하게 느껴지네.”
역천의 절을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그리고 짧게 생각하듯 침묵한 후.
“멸절(滅絶). 새로 다시 태어난 네 이름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 자신의 무구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그 순간.
-치지직! 치이!
도신에 새겨진 절(切)이라는 문자 위로 멸(滅)이라는 문자가 새로 새겨졌다.
동시에.
-우웅! 화아아!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무구, 멸절에게서 강렬한 강기와 신력이 흘러나왔다.
처용이 멸절에 신력을 두른 것이 아닌, 멸절 스스로가 신력을 내뿜는 상황.
오롯이 처용만의 신물, 멸천의 신의 ‘첫 번째 신물’의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