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화
“내가 지금껏 쌓아 온 모든 것을 걸겠다.”
처용이 진심을 담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림과 동시에.
-우드득! 위이이-!
심장, 왼쪽 가슴 부근을 강하게 쥐며 힘을 끌어모았다.
파마, 징벌자의 신력과 강기, 다룰 수 있는 모든 속성 마나 등.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끌어모아 한 곳에 집중시켰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 우주 전체가 파멸한다 해도.”
멍한 표정을 지으며 점점 멀어지는 보살을 바라본 처용이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저지르려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그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저지할 수만 있다면.
“우주가 망가지든, 법칙이 망가지든 상관없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반쯤 놓은 듯, 눈의 초점이 사라진 처용이, 심장에 힘을 극한까지 끌어모았을 때.
“……최후의 희생.”
다시 한번 권능의 이름을 읊조렸다.
-위이이-!
심장에 끌어모은 힘들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요동쳤다.
그때.
-야 이! 미친 새끼야!
분노가 가득한 중성적인 목소리가 크게 울렸고.
-콰아아아!
심장에 모이던 힘 중 하나.
검붉은 신력, 징벌자의 힘이 저항하듯 거세게 요동치며, 처용 주변을 휘감았다.
마치, 지금 처용이 저지르려는 행동을 저지하려는 듯한 모습.
-당장 멈춰어어어!
한 번 더, 분노의 파편이 내지르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고.
-후우욱! 으드드!
검붉은 신력들이 처용에게 달라붙으며 빛을 점멸했다.
그러자.
-스스스……!
처용의 심장 부근으로 빨려 들어가는 에너지가 조금 더뎌졌다.
하지만.
-스스…… 콰아아!
잠시였을 뿐, 다시 처용의 심장을 향해 모든 에너지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쿠구! 스르륵!
검붉은 에너지, 징벌자의 신력까지 처용에게 빨려 들어갔다.
신력을 통제하는 분노의 파편에게서 벗어나 처용에게 향하는 모습.
결국.
-이 미친놈이! 당장 멈춰! 멈추라니까!
분노의 파편이 경악 어린 외침을 내지르고는.
-피이이!
주변 일대를 잿빛으로 만들며 다시 한번 시간을 멈추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용과 자신의 사고를 극한으로 가속시킨 것이었다.
사고가 가속되며 주변이 잿빛으로 변하고 모든 것이 멈추자.
-스르르. 화아아!
주변의 환경이 일렁이듯 변하며 처용의 심상세계가 펼쳐졌다.
그리고.
-스르륵.
날카로운 느낌의 검붉은 갑옷, 얼굴에 흉악한 도깨비 가면을 쓴 존재.
분노의 파편이 처용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처용이 격노의 화신을 흡수하고 보였던 모습과 같은 모습.
“……이런!”
처용 앞에 모습을 드러낸 분노의 파편이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처용이 펼친 심상세계는.
-콰지지직! 콰직! 콰직!
하늘 높이 솟구쳐 자라나 있던, 앙상하고 두꺼운 나무들이 모두 부러지며 쓰러지고 있었다.
찢어지고 부러진 나무의 파편들과 바위들, 흙더미들이 요동치며 폭풍처럼 마구잡이로 휘몰아쳤다.
마치, 심상세계에 종말이 도래한 듯한 모습.
그 중심지에 서 있는 처용과 분노의 파편.
“이런 멍청한 놈이! 이대로 모든 것을 끝장내 버릴 생각이냐!?”
분노의 파편이 손을 크게 펼치고 주변의 환경, 심상세계를 가리키며 처용을 향해 소리쳤다.
처용의 심상세계 안에 자라난 드높은 나무들.
그 나무들은 처용이 쌓아 온 인생이자, 그의 신념, 의지 등을 상징했다.
본래, 푸른 잎이 가득했던 거대한 나무의 이파리가 다 떨어져 앙상해진 이유.
그 이유는 수호신의 마음가짐을 완전히 저버리고 복수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번 변했던 나무가.
-와지직! 콰직! 우드드-!
이제는 모조리 부러지고 찢겨 나가며 폭풍 속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스스로가 가진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당장 멈춰!”
분노의 파편이 기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처용을 저지하지 못하면,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다.
분노의 파편도 처용이 발동하려는 최후의 희생에 포함된 상황.
이대로 처용을 방치하면, 강렬한 폭발의 재료로 활용되어 사이좋게 폭사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런 운명을 맞이하려고 지금껏 때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당장 심장에서 손 떼! 멈추란 말이다!”
분노의 파편이 다급함과 경악을 담아 명령하듯 소리치자.
“단 하나뿐인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새끼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 명령하는 거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 채, 최후의 희생에 집중하고 있던 처용이 입을 열었다.
약속을 어겼다는 처용의 말이 울리자.
“내가 무슨 약속을 어겼다는 거냐! 계속 싸웠다면 조크를 집어삼키고 우리가 더 완전해졌을 것이다!”
분노의 파편이 목소리에 분노를 한가득 담아 소리치듯 말했다.
완전한 존재로 재탄생한 처용은 악의 종주와 거의 호각으로 맞서 싸우긴 했었다.
하지만, 악의 종주는 아직 본래의 격에 맞는 힘을 모두 회복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대로 계속 싸움을 이어 나갔으면 분명히 이겼으리라 자신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보살이 개입했고 태초의 권능을 사용했다.
제아무리 태초의 권능이라 할지라도 완전한 존재가 된 처용이 다시 나누어질 리가 없었다.
보살의 희생은 헛수고였다.
그러나…… 보살이 순환의 포식자에게 잡혀가려는 순간.
희미해지며 사라져 가던 처용의 의식이, 불타오르듯 확 깨어났다.
동시에, 완전한 존재가 되어 융합되었던 두 정신이 다시 분리되었다.
분노의 파편은……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약속을! 계약을 위반한 적이 없다!”
약속을 어겼다는 처용의 말에, 분노의 파편이 강하게 반박하듯 말하자.
“아니, 넌 ‘계약’을 위반했다.”
처용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명히 말했지? 같은 비극을 반복하게 만들지 말라고.”
“……!”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분노의 파편이 눈을 크게 떴다.
-난,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 비극이 반복되면, 이 계약은 끝이다.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처용과 계약을 맺을 당시 처용이 내건 단 하나의 조건.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단 한마디의 말.
분노의 파편은 그 말을 다시 듣는 순간.
“……제길, 그렇게 된 것이었나?”
모든 상황이 이해된다는 듯, 읊조렸다.
완전한 존재가 된 처용이 다시 둘로 분리된 이유.
태초의 권능이라 할지라도, 분리될 리가 없는 완전한 존재가 다시 둘로 나누어진 이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망할 놈의 트라우마! 이 나약한 녀석이!”
처용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고작 인간의 나약한 기억 때문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 어이가 없었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제길……!”
분노의 파편은 역설적이게도 처용의 트라우마를 인정하듯 침음을 흘렸다.
왜냐하면, 완전한 존재가 된 처용이 보살을 공격하려 하는 순간.
-탁.
마치, 절대로 공격할 수 없는 대상을 마주한 듯, 몸이 저절로 멈추었으니까.
그 당시 의식을 지배하는 주체가 분노의 파편이었음에도, 보살을 공격하지 못했다.
즉, 분노의 파편이 보살을 공격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처용이 분노의 파편에게 영향을 받은 것처럼.
분노의 파편 역시…… 처용에게 영향을 받았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처용이 보살을 공격할 수 없는 것처럼, 분노의 파편 역시 그녀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던져 죽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해도 자비의 대신을 구할 수는 없다!”
이를 강하게 갈던 분노의 파편이 현실을 이야기하며 소리쳤다.
처용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최후의 희생을 발동하여 순환의 포식자를 죽일 생각이었다.
아니, 보살을 구할 생각인 듯 보였다.
분노의 파편이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이 짓거리야말로 개죽음이란 말이다!”
분노의 파편은 자신의 목숨을 헛되이 던지려는 처용을 향해 분노를 내지르며 소리쳤다.
그러자.
“상관없어.”
처용의 입에서 아무 감정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분노의 파편이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든.
최후의 희생이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정말로 상관이 없다는 듯한 모습.
심지어 처용은.
“혹시 알아? 내가 죽으면 다시 시간이 돌아갈지.”
현실성이 전혀 없는 터무니없는 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놈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분노의 파편이 이마를 부여잡으며 헛숨을 들이켜고는 처용을 향해 소리쳤다.
처용이 한 말은 현실성이 전혀 없는 말이었다.
아니, 처용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내 짐작이지만, 이 우주의 시간을 돌린 건-!”
분노의 파편은 어떤 존재가 시간을 돌렸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처용이 정말로 자폭하여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시간이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제로였다.
분노의 파편이 자신의 짐작을 말하려 할 때.
“상관없다고 말했다.”
처용은 그 말을 끊으며 감정 없는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살님을 구하든 구할 수 없든,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볼 거다.”
분노의 파편이 무슨 말을 하든, 최후의 희생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
초점과 빛이 사라진 처용의 눈동자와 멍한 목소리.
“이! 이이……!”
처용의 상태를 살핀 분노의 파편이 기가 막힌 듯 헛숨을 들이켰다.
지금 처용은 반복되는 트라우마를 다시 마주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끝내 버린다는 선택을 해 버린 것이었다.
진심으로…….
그 강렬한 진심이, 분노의 파편에게 아주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동시에 같이 가니 외롭진 않겠네, 함께 폭사하자.”
“이, 이런 미친 새끼가아아-!”
사이좋게 같이 폭사하자는 처용의 멍한 목소리에 분노의 파편이 경악을 내질렀다.
이대로…… 이대로 둔다면, 정말 처용은 스스로를 폭발시킬 것이다.
“당장 멈춰!”
-탁!
분노의 파편은 제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처용의 오른손을 붙잡고는.
“자비의 대신을…… 구할 방법이 있다.”
깊고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자살하려 하는 처용을 말리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번뜩하고 떠오른 생각.
추후 ‘보험’으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단 하나의 수단을 떠올렸다.
그러나.
“…….”
처용은 분노의 파편이 한 말이 들리지 않은 듯, 계속 최후의 희생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장 멈추라니까! 보현을 구할 방법이 있다고!!”
분노의 파편이 목청을 한껏 드높이며 강하게 소리치듯 말하자.
“……말해.”
처용에게서 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처용은 심장에서 손을 떼지 않고 최후의 희생에 계속 집중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분노의 파편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는.
“재생석.”
자신이 생각한 단 하나의 수단이 무엇인지 말했다.
“…….”
처용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계속 멍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하자.
“그 개미가 가진 고유의 능력 말이다! 그걸 이용해 보현을 ‘재생(再生)’시키는 거다!”
-탓! 후욱!
분노의 파편이 잘 들으라는 듯, 처용의 멱살을 잡으며 크게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처용은.
-스륵.
초점이 없던 눈동자에 빛이 조금 일렁였다.
그리고.
“재생석…… 여왕개미를 잡고 나온 레전더리 스킬석.”
재생석이 무엇인지 기억이 났다는 듯 읊조렸다.
처용의 휘하에 들어온 신수이자, 이종족인 하이 앤트리스 퀸 아타.
그녀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 전에는, 개미들이 나오는 던전의 보스 몬스터인 여왕개미였다.
그 여왕개미가 가진 고유의 능력이 바로 재생.
그것은 다친 상처를 회복하는 의미의 재생이 아니었다.
새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의 ‘재생(再生)’이었다.
그 당시 처용에게 사냥당한 여왕개미는 그 존재와 영혼이 숨겨 둔 알에 깃들었었다.
처용은 그 알을 태룡전으로 가져왔고 여러 우연과 기연이 이어져 ‘아타’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 그걸 이용하는 것이다!”
분노의 파편은 처용이 반응을 보이자, 안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걸로? 무슨 수로?”
처용은 분노의 파편을 강하게 노려보며 의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재생이 어떤 능력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재생으로 어떻게 보살을 구한단 말인가?
“자비의 대신은 지금 순환의 포식자에게 붙잡혀 ‘분해’되고 있다.”
분노의 파편이 현재 상황을 이야기했다.
순환의 포식자에게 끌려가고 있는 그녀는 지금 단순히 잡혀가기만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스스스…….
점점 육체가 희미해지며 ‘분해’되고 있었다.
마치 순환의 포식자가 우주를 잡아먹어 분해하는 것처럼.
설사, 처용이 최후의 희생으로 순환의 포식자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해도, 분해를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이 순환의 포식자를 저지한다 해도, 보살을 구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재생을 사용한다면, 그녀의 분해를 막을 수 있었다.
“분해되는 보현을 재생으로 붙잡는다. 동시에-.”
분노의 파편이 처용과 눈을 마주하며 말을 잇자.
“순환의 포식자가 보살님에게 건 ‘부당한 계약’을 끊어 버린다.”
그 눈빛을 마주한 처용이 분노의 파편이 한 말을 잇듯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마치, 분노의 파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아냈다는 듯한 모습.
정확히 말하자면, 둘은 서로 연결된 존재였기에, 생각이 공유된 것이었다.
멍했던 처용의 눈빛과 목소리가 점점 원래대로 돌아오자.
“그래, 그거다.”
분노의 파편이 안도 어린 미소를 내 지었다.
그리고.
“내 말 잘 들어라. 한처용.”
경고 어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순간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아니 무엇 하나라도 변수가 발생하는 순간-!”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실수가 발생한다면, 약간의 변수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보현도 구하지 못하고 너도, 나도 모두…… 끝장날 것이다!”
모든 게, 끝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네놈을 도와주지. 그러니…… 너도 정신 똑바로 차려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처용은 우려를 표하는 분노의 파편의 말에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이번에야말로 똑바로 해라, 수틀리면-.”
-우우웅.
아주 오랜 시간, 태룡전의 보물전 가장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스킬석.
“최후의 희생으로 모든 걸 날려 버리고 내 손으로 다 끝장내 버릴 테니까.”
재생석을 꺼내 쥐며 분노의 파편을 향해, 경고하듯 말을 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