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화
-콰아아아-!!
판데모니움의 중심을 거세게 뒤흔드는 폭발 소리가 울렸고.
-쩌적! 쩌저적!
검은 우주 속에서 번져 나가던 균열들이 더욱 자잘해져 있었다.
우주 전체에 테러가 일어난 듯, 연쇄적으로 터지던 폭발이 멎자.
-촤아! 촤아아!
폭발의 중심지에서 격렬히 맞붙던 두 거인이 서로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섰다.
한 명은, 검은 갑주와 그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찢어진 눈, 입들이 드러난 존재, 악의 종주.
그와 대치하던 이는 검붉은 갑주의 거신, 격노의 화신을 조종하는 처용이었다.
“크. 크흐흐. 크하하하!”
작게 웃음을 흘린 처용이 점점 웃음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파사삭. 쩌적.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갑옷의 일부가 부서진 격노의 화신.
자잘한 균열이 일어난 태극천체일도.
거칠고 처절하게 이어지던 싸움의 결과였다.
그런 처용과 격렬히 맞붙어 싸우던 상대.
-파사삭……!
악의 종주 역시 말끔한 모습은 아니었다.
거의 대검이라 봐도 무방했던 파멸의 검이 절반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격노의 화신처럼 갑옷의 일부가 부서지고 금이 가며, 그 사이에 일렁이는 그림자들도 조금 줄어든 모습.
서로가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자잘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호각이라 할 수 있는 두 존재가 맞붙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정말…… 정말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잖아!”
웃음을 내지른 처용이 이내 미소를 싹 지우며 분노가 일렁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완전해진 나를 상대로 ‘불완전한’ 네가 이 정도의 힘을 보이다니!”
본신 상태인 악의 종주를 향해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처용.
그 말은……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악의 종주는 본래 격에 맞는 힘을 모두 회복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휘하 대악마와 악신들에게 조금씩 자신의 힘을 베풀어 주었던 그였다.
게다가, 악의 종주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중심축이었던 존재, 분노의 파편까지 사라졌었다.
그리고 처용과 예언자가 일으킨 각종 변수들까지.
여러 좋지 않은 상황들이 겹치는 바람에, 지금 악의 종주는 본래 격에 맞는 힘을 모두 회복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전력을 보인 것.
“이 우주는 구원받을 것이다.”
악의 종주는 자신을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처용의 말을 무시하듯 읊조리고는.
-콰아아아! 스르륵.
파멸의 힘을 강하게 내뿜어, 자신에게 새겨진 자잘한 상처들을 단번에 없애 보였다.
그런 악의 종주의 반응에.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고!”
-콰아아아!
처용 역시 강렬한 신력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악의 종주처럼 격노의 화신 역시 자잘한 상처가 회복되며 태극천체일도의 균열도 모두 사라졌다.
-스릉. 차카캉!
처용과 악의 종주가 다시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며 대치했고.
-탓! 타탓!
다시 격렬한 싸움을 잇듯,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태극천체일도와 파멸의 검이 서로 충돌하려는 순간.
“……음!?”
“……!”
-쿠구! 쿵!
처용과 악의 종주가 갑자기 멈칫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제 의지가 아닌,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몸이 멈춰진 듯한 모습.
“……그들은 아직 개입할 수 없다.”
악의 종주가 점점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이 담긴 목소리를 읊조렸다.
마치.
“어째서 ‘천칭’의 힘이?”
자신과 처용을 멈추게 만든 정체불명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한 모습.
그때.
-화아아!
처용과 악의 종주 사이에 연분홍빛이 번쩍이더니.
-사라락.
그 빛 속에서 선녀 옷을 입은 녹빛의 여신이 나타났다.
“……계승자.”
처용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여신은 다름 아닌 보살이었다.
“어째서…… 여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보살을 본 처용의 입에서 의문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이 몰아쳤지만,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하나였다.
태룡전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가?
무슨 수로 이곳에 강림한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설마?”
처용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읊조렸다.
보살이 이곳에 강림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방법을 통해 이곳에 왔다면?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강림해 처용 앞에 나타났을까?
처용은 그에 대한 답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허튼 수작이다!”
-우우웅! 차캉!
인상을 찌푸린 처용이 신력을 강하게 방출하며 구속을 풀어냈다.
동시에, 점점 가까워져 오는 보살을 향해 태극천체일도를 내리쳤다.
그러나 격노의 화신이 휘두르는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이 보살에게 닿으려는 찰나.
-탁!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방금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강제로 멈춘 것이 아니었다.
태극천체일도를 내리친 처용 본인이……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었다.
“……그럴 리가 없다.”
처용은 강하게 읊조리고는.
-우웅! 콰화아아!
주변에 퍼진 검붉은 신력을 모두 자신에게 빨아들이며 힘을 모았다.
거대한 격노의 화신 역시 검붉은 기운으로 분해되며 처용에게 빨려들어 왔고.
-촤라라락!
처용을 감싸며 검붉은 갑옷을 형성했다.
마치, 격노의 화신이 소형화되어 처용의 갑옷처럼 변한 모습.
이윽고.
-차카캉!
처용의 얼굴까지 감싸며 흉악한 미소를 짓는 도깨비 가면이 형성되었다.
-쿠구구!
격노의 화신을 다룰 때보다 더 격렬한 기운이 처용에게 뿜어져 나왔고.
“그럴 리가 없다!”
처용이 분노 어린 고함을 내지르며 발을 박차 앞으로 돌진했다.
-우드드득!
오른손 손날을 세우고 앞을 겨눈 채 팔을 굽힌 모습.
마치, 손으로 누군가를 꿰뚫어 죽을 듯한 기세였다.
그 손끝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스르륵.
옅은 바람처럼, 느리고 가볍게 내려오는 보살을 향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처용과 보살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고.
-우우웅! 콰아-!
처용의 손날에 검붉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이윽고 날카로운 갑옷이 감싼 처용의 손날이 앞으로 쏘아지려는 찰나.
-탁.
손을 앞으로 내지르려다 저지된 듯한 자세로 멈추었다.
-드득. 드드득!
처용이 손날을 세운 오른손을 부들부들 떨며 당장이라도 앞으로 내지를 듯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아니야.”
마치, 절대로 공격할 수 없는 대상을 마주한 듯, 손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스르륵.
지척까지 다가온 보살이 처용에게 손을 뻗자.
-사라라……!
처용의 주변을 폭풍처럼 휘감으며 몰아치던 검붉은 신력들이, 힘을 잃은 듯 내려앉았다.
아니, 다가오는 보살에게 길을 비켜 주듯, 위협적인 모습을 거두고 일제히 물러났다.
이윽고.
-사라락. 탓.
부드럽게 앞으로 뻗은 보살의 두 손이 처용의 얼굴에 닿았다.
보살이 두 손으로 처용의 얼굴 양옆을 부드럽게 잡고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계승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처용의 눈이 점점 커졌다.
보살의 입에서 흘러나온, 악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
그 말은, 처용이 보살에게서 직접 들은 그녀의 비밀과도 관련이 있었다.
-우주로부터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는 권능입니다.
바로 태초의 권능.
이 우주에서 오직 보살만이 지닌 권능이자, 옥황상제가 집요하게도 노리는 힘이었다.
문제는…….
-저 자신이 대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력한 권능이니만큼, ‘대가’가 있다는 것.
그에 관한 비밀을 들은 처용은.
-쓰지 마십시오. 절대로.
보살에게 그 권능을 절대로 쓰지 말라 신신당부했었고 보살 역시 쓸 생각이 없다 말했다.
확답을 받았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미안해요.”
보살은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기고 그 권능을 사용한 듯 보였다.
-우웅. 스르륵.
슬픔과 안타까움이 일렁이는 보살의 눈동자가 일순간 빛을 빛냈다.
그 빛을 처용이 마주하자.
-파사사……!
얼굴을 덮는 검붉은 도깨비 가면의 반쪽, 오른쪽 얼굴 부분이 부서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계승자와 그대가 한 ‘계약’을-.”
처용과 눈을 마주한 보살의 입에서 잔잔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노의 파편과 처용이 맺은 계약을 언급하는 보살의 말.
마치, 처용이 변하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아낸 듯 보였다.
이윽고.
“무(無)로 되돌리겠다.”
그 계약을 없던 것으로 되돌리겠다는 보살의 말이 이어졌다.
보살이 태초의 권능을 이용해 빈 소원.
그것은 다름 아닌, 처용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부디, 자신을 잃지 않기를, 스스로를 버리지 마십시오. 계승자.”
태초의 권능을 사용한 보살이 처용에게 구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전한 순간.
-쿠구구구!
우주 전체가 크게 울리며 무거운 진동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대가는…… 너 자신이다.
그 진동을 타고 낮고 강한 목소리가 울렸다.
말과 언어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가 아닌, 알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제 의지를 전달한 것 같았다.
마치, 이 우주 자체가 제 의지를 전한 듯한 모습.
대가를 언급하는 알 수 없는 존재의 말이 울리자.
-스스스.
처용과 가까이 있던 보살이 점점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그녀를 붙잡아 끌고 가는 듯한 모습.
보살은 제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듯, 처용을 향해 미소를 보이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이를 강하게 갈며 무거운 침음을 내고는.
“그렇다고 해서! 하나가 된 우리의 정신이 다시 나누어질 것 같았느냐!?”
와락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함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너는 헛되이 네 운명을 낭비한 것이다!”
보살이 태초의 권능을 빌어 소원을 빌었음에도, 처용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듯 보였다.
이미, 처용과 분노의 파편이 서로 융합되어 한 명의 완전한 존재가 되어 버린 상황.
무구 단조에 비유하자면, 처용, 분노의 파편이라는 강편을 녹여 하나의 강력한 무구를 만든 것과 같았다.
그 무구를 구성하는 두 개의 강편을 다시 온전하게 나눌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태초의 권능이라고 해도, 이미 하나가 되어 버린 처용은 다시 온전하게 나누어지기 힘들었다.
“이제 너는 산산이 분해되고 재구축되어! 그들만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이다!”
처용이 점점 멀어지는 보살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다.
마치, 헛된 희생을 한 보살에게 분노를 내지르는 듯한 모습.
“죽는 것만도 못한 처지가-!”
이제 곧, 보살에게 일어날 ‘비극’을 언급하며 분노 어린 말이 이어지려는 순간.
“……누가 죽어?”
내지르던 말을 끊은 처용이 떨리는 목소리를 토해 냈고.
-탁!
얼굴에 남아 붙어 있는 검붉은 도깨비 가면의 반쪽, 왼쪽 반 가면을 왼손으로 붙잡아 움켜쥐었다.
“누가…… 죽는다고?”
처용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읊조리고는.
-콰직. 콰직. 파드드득!
손아귀에 힘을 주어 가면을 뜯어 내고 강하게 쥐어 부수었다.
그때.
-쩌저적! 파창! 차카캉!
핏빛의 실금이 번지던 어두운 세계.
판데모니움의 중심부 외곽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유리처럼 공간 외곽이 깨지자.
-후우우-!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이 드러났다.
별이 사라진 우주 공간과도 같은 모습.
그리고.
-쿠구구구!
그 칠흑의 우주 속에서 판데모니움의 중심부를 지켜보는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상반신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옅게 빛나는 모습.
그 검은 실루엣 안에는, 우주에 있어야 할 별빛들이 박혀 반짝였다.
얼굴 부분에는 새하얀 블랙홀이 휘몰아치며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마치, 칠흑처럼 검은 마네킹에 별빛을 박아 넣고 얼굴에는 하얀 소용돌이를 그린 듯한 모습.
게다가 그 크기는, 거의 행성에 버금가는 정도.
아니, 처용은 하늘 위에 나타난 미지의 존재가 행성보다도 더 거대하다 느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미지의 존재는, 우주 위에서 판데모니움을 내려다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판데모니움의 중심부에 모습을 드러내자.
“순환의 포식자…….”
악의 종주가 하늘 위에 나타난 미지의 존재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하늘 위에 나타난 미지의 존재는 다름 아닌, ‘순환의 포식자’라 불리는 존재였다.
수명이 다 되어 가는 우주를 먹어치우는 존재들.
그런 순환의 포식자가 고개를 살짝 내려 보살을 바라보고는.
-대가를 받겠다.
-쿠구구!
무겁고 웅장한 파동과 함께 목소리를 내며 보살에게 손을 뻗었다.
우주 공간을 걸어 다닐 법한, 형용할 수 없는 크기의 거인이 보살을 잡아채려는 듯한 모습.
그 압도적이면서도 두려움이 절로 느껴지는 광경에.
“……웃기지 마라.”
처용은 하늘 위로 시선을 고정한 체, 멍한 눈빛으로 읊조리듯 말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보살을 잡아가려는 순환의 포식자에게 적대감과 증오,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여 하늘 위로 향하려는 보살을 저지해야 했다.
동시에 순환의 포식자를 향해 공격을 퍼부어야만 했다.
그러나.
‘죽일 수…… 없는 존재.’
처용은 하늘 위에 나타난 형용할 수 없는 존재.
순환의 포식자를 마주한 순간, 그가 어떤 존재인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우주를 순환시키고 관리하는 이들.
세계를 구성하는 우주보다도 한 차원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들.
그들은 ‘죽음’이나 ‘파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악의 종주가 왜 순환의 포식자를 ‘파멸’시킬 수 없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
처용은 죽일 수 없는 존재라 하여, 이대로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우주를 파멸시킬 수 있는 악의 종주조차도 그들을 죽일 수 없다면?
이 우주 전체를 파멸시키고도 남는,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처용은 그러한 힘을 발휘할 법한 한 가지 수단을 떠올렸다.
“최후의 희생.”
처용이 결심한 듯, 강한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탁! 우우웅!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 심장을 움켜쥐며 신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아니, 신력만이 아닌.
선인의 육체.
파마의 신력.
징벌자의 신력.
지금껏 얻은 모든 권능들.
육체에 깃든 마나와 온갖 속성들.
숱한 싸움을 거치며 얻은 전투 기술들.
기억과 경험.
.
.
마지막으로…… 멸천의 신명까지.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끌어모았다.
처용은 그 모든 것들을 한 지점에 끌어모은 후.
‘이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내겠다.’
최후의 희생으로 모조리 터트릴 생각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