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크크. 하하하하!”
악의 종주에게 옅은 상처를 낸 처용이 큰 환희를 터트렸다.
“소감이 어떤가? 조크! 야드였을 때조차도 상처 하나 입었던 적이 없었지 않나!”
“…….”
환희를 내뿜는 처용의 외침에 악의 종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침묵하고는.
“……초월, 그것도 나와 같은 경지인가?”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동시에.
-사라락.
어깨에 새겨진 옅은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아무리 네가 ‘계승자’를 얻었다 해도 이건 불가능할 텐데.”
악의 종주가 의문을 표했다.
본래 자신에게 속해 있던 태초신의 파편인 분노.
고작 파편에 불과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자신과 같은 격을 지닌 것이 의문이었다.
처용이 이 우주의 역대 계승자 중 최고이자 최강이라 해도.
그런 처용을 흡수하고 진화했다고 해도, 자신과 같은 격을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악의 종주가 의문을 표하자.
“계승자가 신명을 각성한 건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지만-.”
처용의 입에서 환희가 사라지고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승자의 격이 더 높아진 덕분에…… 나 역시 더 완전한 존재로 태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처용도, 분노의 파편도 아닌, 다른 새로운 존재로 칭하는 듯한 모습.
“네놈보다 더 드높은 존재로 말이다! 조크!”
-우웅! 샤아악!
처용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핏빛이 일렁이는 검붉은 도, 변질된 태극천체일도를 치켜들며 돌진했다.
“어림없는 소리.”
-우우웅!
그 모습을 본 악의 종주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하며 파멸의 검을 치켜들었다.
다시 한번 태극천체일도와 파멸의 검이 충돌하자.
-콰아아아! 파직! 파지직!
강렬한 충격파가 묵직하게 퍼져 나갔고 핏빛과 검붉은 빛의 전류가 거세게 튀었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기 위한 힘 싸움에 돌입했을 때.
“비탈길 베기.”
-차캉! 스르릉!
처용이 태극천체일도를 쥔 손목을 사선으로 비틀며 칼끝의 힘을 조금 뺐다.
-스르릉! 스릉!
파멸의 검이 사선으로 칼끝이 내려간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고.
-스스릉! 촤아-!
태극천체일도는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나가 악의 종주를 한 번 더 베었다.
악의 종주의 가슴 갑옷 부분에 핏빛의 자상이 새겨졌다.
처용이 한 번의 공격에 그치지 않고.
“낙뢰검 – 연쇄벼락.”
-콰르릉! 사아-악!
태극천체일도에 핏빛의 벼락을 휘감아 사선으로 내리고 올려 베며 연속 공격을 가했다.
-우웅. 차카캉!
악의 종주가 뒤늦게 파멸의 검을 치켜들고 크게 휘두르며 반격을 가했지만.
-파지직! 샥!
격노의 화신의 다리에 핏빛의 번개가 휘감기며 처용이 뒤로 물러났다.
악의 종주가 내지른 공격을 한 끗 차이로 피한 것.
반면에.
-쩍. 쩌적.
처용의 내지른 공격들은 모두 악의 종주에게 닿았고 그의 가슴과 어깨 부근에 자상을 새겼다.
“계승자가 진심으로 널 죽이고 싶었던 모양이야.”
잠시 뒤로 물러난 처용이 짙은 미소를 내비치며 말했다.
마치, 악의 종주에게 새겨진 자잘한 자상들이 마음에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완전한 존재가 된 처용과 악의 종주의 힘은 서로 호각이었다.
그러나 둘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이 모든 기술은…… 네놈을 처치하기 위해 계승자가 단련한 것들이니까!”
바로 전투 기술의 차이였다.
악의 종주는 본래 지닌 강력한 힘들을 방출하고 압축하여 내지르는 형태.
본래의 힘을 자연스럽게 다루는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공격이었다.
반면에 처용은 달랐다.
긴 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존재를 죽이기 위해 단련한 모든 기술.
다름 아닌, 악의 종주를 죽이기 위해 단련하고 연마해 왔던 힘들.
그 무와 투지의 경험들이 깊게 녹아들어 만들어진 다양한 무술들이 있었다.
이것이 악의 종주가 지니지 못한, 처용만이 지닌 힘이었다.
그간 단련한 모든 힘과 전투 기술들이, 완전한 존재로 재탄생한 처용에게도 모두 깃든 상황.
악의 종주보다 전투 기술의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서로의 힘이 호각인 상태에서 이 차이는 매우 유효하게 작용했다.
다시 둘이 격돌한 지금조차도.
-샥!
처용은 악의 종주가 내지르는 모든 공격을 회피하는 반면.
-사각! 차카캉!
악의 종주는 자잘하게 처용의 공격에 맞아 피해를 받고 있었다.
치명상까지는 아니지만, 작은 피해들이 점차 누적되고 있는 모습.
명백히, 악의 종주가 처용에게 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가?”
-파아아!
악의 종주가 파멸의 힘을 강하게 방출하여 처용을 밀어내고는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불리해진 상태임에도, 다급함 같은 감정은 전혀 없는 모습.
“전투 기술의 우위인가? 인정하지.”
오히려,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된 처용을 보며 납득이 되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허나, 네놈과 내가 경험한 ‘시간’은 다르다. 그 세월 동안 축적해 온 힘.”
-쿠구구구!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파멸의 힘을 방출하며 말을 이었다.
방금까지는 가볍게 힘을 방출했다면, 지금은 ‘진심’을 보이는 듯한 모습.
“그 넘어설 수 없는 차이를, 고작 전투 기술로 메꿀 수 있겠는가?”
악의 종주와 처용이 지닌 차이점은 바로 전투 기술의 유무.
그러나, 악의 종주 역시 처용이 지니지 못한 유일한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영겁이라 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 동안 축적해 온 힘이었다.
서로의 힘과 격은 호각이라 할 수 있었지만.
“네 정체가 분노이든, 계승자이든, 다른 무엇이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영겁의 시간 동안 축적해 온, 방대한 에너지만큼은, 악의 종주가 우위였다.
제아무리 서로가 호각이어도, 힘의 총량은 악의 종주가 우위인 샘.
악의 종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파멸의 힘이,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더 짙어졌다.
동시에.
-사라락.
처용이 악의 종주에게 새긴 자잘한 상처들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유효했다고 보이던 타격들이 한순간에 없어진 상황.
악의 종주가 다시 우세를 보이는 듯했지만.
“크, 크크크!”
처용은 그런 악의 종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계승자는 고작 수십 년의 세월로 신들의 콧대를 모조리 꺾어 버렸지.”
영겁의 시간 동안 축적해 온 악의 종주의 힘.
처용은 그 힘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미 영겁의 시간을 살아온, ‘신’이라는 존재들이, 처용에게 무참히 패배했었으니까.
제아무리 넘어설 수 없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하찮은 세월의 차이 따위, 기꺼이 넘어 주마!”
-콰아아아!
처용은 강렬한 투지와 힘을 내뿜으며 악의 종주를 처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윽고.
-후우우! 콰아아아!
악의 종주가 파멸의 검에 강렬한 힘을 휘감아 내리치며 처용에게 돌진했고.
“극 - 단절!”
-우웅! 스르릉!
처용 역시 태극천체일도에 강렬한 힘을 휘감아 발도하며 악의 종주에게 달려들었다.
파멸의 검과 태극천체일도가 재차 격돌하자.
-차카캉! 콰아아아!
강렬한 폭발이 터져 나가며 판데모니움 중심부가 강하게 흔들렸다.
게다가.
-쩌적! 쩌저적!
악의 종주와 처용이 퍼트리는 힘 때문인지, 검은 우주에 점점 붉은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격렬한 싸움의 여파에 의해, 점점 판데모니움 중심부가 망가지는 듯한 광경.
“이대로면, 이 우주 전체에 영향이 갈 것이다.”
빠르게 주변을 살핀 악의 종주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하자.
“내가 원하는 바다!”
처용은 오히려 좋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이 우주를 한번 엉망으로 만들 필요가 있으니까!”
“위험성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가?”
그런 처용의 말에 악의 종주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력한 두 존재의 격돌로 인해, 판데모니움 중심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영향이 판데모니움에서 뻗어 나가 시스템의 방벽까지 두들겼다.
그로 인해, 이 우주에 속한 모든 세계가 뒤흔들리며 이 싸움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놈들이 개입할 명분이 될 수 있다.”
무한의 순환을 관장하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개입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은 우주의 파멸과 재생을 관장하는 이들.
이 우주 전체가 완전히 무너져 소멸할 위기에 처한다면, 그들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무한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우주의 소멸은, 용납하지 않는 이들이었으니까.
“크, 크크크. 놈들은 개입하고 싶어도 개입 못 해.”
처용은 악의 종주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이 우주가 조금 망가질 뿐이지, 수명이 다해 ‘멸망’하는 건 아니니까!”
작금 싸움의 여파로 우주가 조금 망가질 순 있었다.
하지만, 수명이 끝나거나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무한의 순환을 관장하는 존재들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
“이대로, 내가 모든 것을 거머쥘 것이다!”
“……더는 안 되겠군.”
광기를 보이는 처용의 말에 악의 종주가 낮게 읊조리고는.
“더 이상 손속을 두지 않겠다.”
-지이잉! 쿠구구구!
파멸의 검의 크기를 두 배로 키우며, 조금 전보다도 더 거대하고 묵직한 파멸의 힘을 내뿜었다.
“건방 떨지 마라. 조크.”
-쿠구구!
처용 역시, 전력을 드러내는 악의 종주에 맞서 더 거대한 힘을 내뿜었고.
“나 역시, 아직 전력이 아니니까!”
-스르릉!
악의 종주를 향해 태극천체일도를 강하게 내리치며 돌진했다.
그런 처용에 맞서, 악의 종주 역시 파멸의 검을 들어 올리며 맞섰다.
더욱 거대해진 두 존재가 서로 충돌하자.
-쿠구구구! 쩌적! 쩌저적!
판데모니움 중심부가 강렬하게 흔들렸고 핏빛의 균열들이 더욱 크게 번져 나갔다.
***
분노의 파편과 하나가 된 처용이 알 수 없는 새로운 존재로 변질되자.
-파직! 쿠구구!
태룡전 전체에 검붉은 전류가 튀며 흔들렸다.
마치, 성역이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는 듯한 광경.
“이……런!”
-우우웅!
관철의 조정자를 든 미륵이 흔들리는 성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력을 내뿜으며 침음을 흘렸다.
-우우웅!
황룡 역시 황금빛의 신력을 넓게 퍼트리며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리고.
-주르륵.
보살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해 받고 영향을 받은 모습.
게다가.
-파지직. 파직.
검붉은 전류가 그녀 주변을 감싸며 위협적으로 튀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여래가 보살에게 손을 뻗으며 검붉은 번개를 걷어 내려 할 때.
“괜찮습니다.”
멍한 표정의 보살에게서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를 공격하려 했었다면, 진작 제게 해를 가했겠지요.”
-스르륵.
보살이 작은 슬픔이 담긴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으로 검붉은 전류를 쓸 듯,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파직. 파지직.
검붉은 전류가 보살의 손을 미끄러지듯 흐르며 지나갔다.
그녀의 말대로 검붉은 전류는 겉에 맴돌기만 할 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여래가 복잡한 눈빛을 비추며 침묵했다.
태룡전에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여래가 답답한 마음을 삼키듯, 눈살을 찌푸리듯 눈을 감았을 때.
“젠장! 급하게 소환 마법진을 가동해 보려 했는데…… 불가능해!”
-스르륵!
니알라가 다급한 표정으로 태룡전에 나타나며 말했다.
급하게 처용을 판데모니움에서 탈출시키려 했는데, 그 시도가 실패해 버린 것.
“천찰! 정녕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니알라가 황룡을 바라보며 묻자.
“…….”
황룡이 어두운 표정을 내비치며 침묵했다.
그때.
-저벅. 우우웅.
멍하니 서 있던 보살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가며 은은하게 신력을 내뿜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멍한 눈빛을 보이던 보살의 눈동자가 다시 빛을 발하자.
“결국……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오? 자비의 대신.”
침묵하던 황룡이 보살을 내려다보며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짙은 안타까움이 일렁이는 황룡의 목소리에.
“지금이야말로, 제 운명을…… 선택할 때인 것 같습니다.”
보살이 잔잔한 목소리로 답하듯 입을 열었다.
“저 또한……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자이니까요.”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힘.
그 말이 보살의 입에서 언급된 순간.
“……!”
여래가 저도 모르게 손아귀를 꿈틀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보살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듯한 모습.
지금부터 보살이 행할 행동을 저지하려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대에게 운명을 선택할 힘이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보살이 여래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묻자.
“……스승님과 같은 선택을…… 하겠지요!”
-으드득!
여래가 꿈틀거리던 손아귀를 강하게 쥐며 읊조리듯 답했다.
저도 모르게 행하려던 행동을 가까스로 참고 저지하는 듯한 모습.
“이 이기적인 스승을 이해해 주어서…… 고맙군요.”
보살은 그런 여래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하고는.
“……우주로부터 부여받은 태초의 권능을 사용하겠다.”
이내, 하늘 위, 우주를 올려다보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