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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622화 (622/726)

#622화

세상이 잿빛으로 변하며 모두 멈추었다.

쓰러진 처용도, 악의 종주도.

주변에 휘몰아치는 파멸의 힘도, 부서져 사그라지는 황금빛들도.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잿빛만이 가득해진 세계 속에서.

-스르륵.

처용에게 검붉은 신력이 흘러나와 그의 앞에 뭉쳤다.

이윽고 처용과 비슷한 크기의 사람 형상으로 변했고.

-말하지 않았나?

그 형상이 처용을 향해 붉은 입을 찢어 보이며 목소리를 내었다.

마치, 검붉은 마네킹의 눈코입이 찢어져 핏빛을 비추는 모습.

-너는 절대로 조크를 이길 수 없다고…….

분노의 파편이 미소를 머금으며 목소리를 흘린 순간.

-스르르……!

잿빛으로 변한 주변의 환경이 일렁이더니.

-화아아!

이내, 앙상한 나무들이 드높게 자라나 있는 환경이 나타났다.

그리고.

-탓.

어느새, 잿빛이 씻겨 나간 듯, 멀쩡해진 처용이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밟으며 내려왔다.

심상세계를 펼친 처용이 고개를 들어 분노의 파편을 노려보고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포기하고 이대로 주저앉아 울기라도 할까?”

-그만한 격차를 느꼈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건가?

분노의 파편이 처용의 말에 대답하듯 묻자.

“조크 – 크타니드의 형제라고 그놈이랑 똑같이 지껄이지 마라. 짜증 나니까.”

처용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읊조리듯 말했다.

왜 포기하지 않는 것인가?

악의 종주가 버릇처럼 처용을 향해 내뱉는 말이었다.

분노의 파편이 악의 종주와 똑같은 말을 하자 짜증과 분노가 솟구친 것.

-그럼 어쩔 거지? 힘으로는 놈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런 처용의 반응에 분노의 파편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그것이…… ‘진실’이야.

순식간에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며 낮고 강하게 말을 이었다.

-진실을 외면할 생각인가?

“현실을 외면하면, 뭐가 달라지나?”

이어지는 분노의 파편의 말에, 처용이 잘 알고 있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노의 파편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

“피할 수 없으니까 끝까지 싸우는 거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처용이 분노와 투지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다 죽겠다는 처용의 말.

그 말에, 분노의 파편이 작은 실소를 지었다.

“어떤 방법을 쓰든 놈을 처치한다. 무엇을 이용하든 놈을 처치한다!”

처용은 그런 분노의 파편의 반응을 무시하고 할 말을 계속했다.

“이게 내 방식이자…… 내 방법이다.”

-…….

진심이 가득한 처용의 말에 실소를 짓던 분노의 파편이 진지한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놈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계승자.

분노의 파편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용이 진심전력을 발휘했음에도.

분노의 파편의 도움까지 받아 맹공격을 가했음에도.

악의 종주는 조금의 부상도 없이 처용의 공격들을 가볍게 쳐내었다.

반면에 처용은 악의 종주의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런 강력한 존재인 악의 종주를 이길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

분노의 파편이 ‘유일한’ 방법을 언급하자.

“뭐, 너한테 모든 것을 넘기라고?”

처용이 분노의 파편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고작 그딴 걸로 놈을 이길 수 있었으면, 진작에 놈을 이기고도 남았어.”

마치, 분노의 파편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처용과 분노의 파편은 서로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자 자아라고 지칭할 수 있는 존재.

게다가 심상세계 안에서 서로 진심 어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분노의 파편이 처용의 심정과 진심을 아는 것처럼, 처용 역시 분노의 파편에게서 그의 생각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방금 분노의 파편이 언급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

그 말 역시 진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초신의 파편에 불과한 네가, 태초신과 가장 가까운 저놈을 무슨 수로 이기겠다고? 크크…….”

처용은 분노의 파편이 내비치는 진심을 비웃으며 말했다.

자신은 진심전력을 다해도 악의 종주를 이길 수 없었다.

그 진심전력 안에는, 분노의 파편도 포함되어 있었다.

분노의 파편 역시 진심으로 처용이 이기길 바랐고 전력으로 도와주었었으니까.

그럼에도 악의 종주를 이기지 못했다.

그 말인즉.

“파편 주제에 완전하다고 볼 수 있는 저놈을 어떻게 이기겠다는 거냐?”

분노의 파편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도, 악의 종주를 이길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 처용의 심정과 생각이 흘러나오자.

-난 파편 따위가 아니야!

분노의 파편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강하게 소리쳤다.

여유를 보이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노’가 일렁이는 모습.

-……계약을 하지.

진심 어린 분노를 내지른 분노의 파편이 진정한 듯, 잠시 침묵하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면, 놈을 이길 수 있다. 내 존재를 걸고 맹세하지.

분노의 파편은 처용과 자신이 온전한 하나가 된다면, 악의 종주를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네 의지가 주체가 될 것이고?”

처용이 분노의 파편을 똑바로 응시하며 묻자.

-아마도? 너보단 내 정신의 격이 더 높을 테니까.

그 말에 분노의 파편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두 정신이 섞이는 거다. 높은 확률로…… 너라는 주체는 사라질 것이다.

“크, 크크…… 죽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이어지는 분노의 파편의 말에 처용이 실소를 지었다.

정신은 사람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그 정신이 죽는다면, 사람이 죽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죽는 한이 있더라도, 놈과 싸우겠다며?

분노의 파편은 그런 처용의 실소 어린 말에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나? 이틀을 버티고 살아남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나?

“…….”

이어지는 분노의 파편의 말에, 처용이 침묵했다.

현실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분노의 파편이 한 제안은 지금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숨김없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도 확실했다.

이곳은 심상세계, 서로의 마음이 거짓 없이 전달되는 장소였으니까.

-이 우주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조크 녀석과는 다른 방법으로 말이야.

분노의 파편이 말을 이었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악의 종주가 이야기한 이 우주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처용은 그 말 역시,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완전해진 우리가 이 우주 자체를 단절시켜-.

분노의 파편이 처용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좋다.”

처용은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분노의 파편이 한 제안을 수락하듯 말했다.

분노의 파편이 하던 말을 끊고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내 조건은 하나다.”

처용의 말이 이어졌다.

“난,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같은 미래가 반복되지 않는 것.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그 비극이 반복되면, 이 계약은 끝이다.”

-……큭. 그런가?

그런 처용의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조건에 분노의 파편이 얼굴을 쓸며 실소를 지었다.

“……내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거야.”

처용은 분노의 파편을 보며 경고하듯 말을 이었다.

“네 계약대로 됐는데도 저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널 죽여 버릴 거다.”

-크, 크크크…… 기대하지.

이어지는 처용의 경고 어린 목소리에 분노의 파편이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너도…… 나도!

분노의 파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처용에게 손을 뻗었다.

-스륵.

처용 역시 분노의 파편을 향해 손을 뻗었고.

-화아아.

둘이 동시에 연기처럼 사그라지며 서로가 손을 뻗은 그 중심에 뭉쳐 들었다.

-콰화아아!

주변에 펼쳐진 처용의 심상세계 역시, 나선으로 뒤틀리며 중심지로 모여들었다.

처용, 분노의 파편, 심상세계, 그 모든 것들이 한 지점에 뭉치며 사라지자.

-스르르륵.

잿빛으로 변해 정지된 세계, 판데모니움의 중심이 다시 나타났다.

심상이 뭉치며 모여든 그 중심지에는 쓰러진 처용이 있었고.

-화아아아!

한 지점에 뭉친 그 에너지들이 처용에게 모두 깃들었다.

그 순간.

-피이이-!

주변에 퍼진 잿빛이 모두 사라지며 정지된 공간이 풀렸다.

그러자.

“그 어떤 수단을 쓴다 해도, 날 넘어설 순 없다. 계승자.”

쓰러진 채 판데모니움 중심지를 부유하는 처용을 보며 악의 종주가 말했다.

마치, 처용이 방금 심상세계에 있었단 사실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한 모습.

“네 녀석도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악의 종주가 처용에게 깃든 존재, 분노의 파편을 향해 말을 잇자.

“크, 크흐흐, 크하하하!”

처용에게서 환희 어린 웃음소리가 울렸다.

처음의 희미했던 그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하하하하!”

-콰아아아!

이내 강렬한 기운을 방출하는 광소가 되었다.

몸 여기저기에 새겨졌던 자잘한 상처들과 부상까지 모두 회복된 모습.

“드디어…… 드디어 손에 넣었다.”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 처용이 웃음을 멈추고는.

“계승자를!”

-지이잉!

붉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치켜뜨며 미소를 담아 강하게 읊조렸다.

그때.

-후우우!

악의 종주가 처용을 움켜쥘 듯 손을 뻗으며 다가왔다.

그러자.

-우웅!

처용 역시 검붉은 신력을 내뿜으며 왼손을 뻗었고.

-촤라라라!

왼손 위로 신력이 뭉치며 검붉은 거인의 손이 나타났다.

악의 종주가 뻗어 오는 손과 같은 크기의 손이 팔을 굽히고는.

-콰아앙!

크게 후려치듯 휘둘러지며 악의 종주가 뻗어 오는 손을 밀쳐냈다.

“감히 누구한테 손을 뻗는 거냐?”

처용이 악의 종주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무엇이냐?”

악의 종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문을 읊조렸다.

지금,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본래 그의 기운이 아니었다.

황금빛이 완전히 사라진 검붉은 기운.

얼핏 보면, 분노의 파편이 처용을 완전히 집어삼킨 듯 보였지만.

“분노? 아니다. 너는 누구냐?”

악의 종주의 눈에는 처용도, 분노의 파편도 아닌 다른 새로운 존재로 보였다.

그런 악의 종주의 의문에.

“나는 한처용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처용이 답해 주듯 입을 열었다.

스스로를 처용이자 처용이 아니기도 하다는 말.

변화한 처용은 자신의 정체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나는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라 지칭했다.

“……그래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콰아아! 후욱!

인상을 살짝 찌푸린 악의 종주가 파멸의 힘을 강하게 내뿜으며 다시 손을 뻗자.

-콰아아! 콰쾅!

처용 역시 강렬한 검붉은 기운을 불태우듯, 강하게 내뿜으며 손을 뻗었다.

악의 종주의 손아귀와 처용 위에 형성된 거인의 팔이 다시 충돌했고.

-콰아아아! 파아-!

강렬한 충격파가 터지며 악의 종주와 처용이 동시에 물러났다.

처용이 진심전력을 발휘했을 때조차도, 전혀 밀리지 않았던 악의 종주가 밀려난 상황.

악의 종주가 의문 어린 눈빛을 보일 때.

“격노의 화신.”

-콰아아아!

처용이 주변에 검붉은 신력을 거칠게 휘감으며 읊조렸다.

-촤라라-!

강렬한 에너지들이 서로 단단하게 뭉쳤고 처용을 감싸며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악의 종주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느낌이 가득한 검붉은 갑주.

갑주와 갑주 사이에서 넘실넘실 뿜어져 나오는 핏빛의 기운.

악의 종주와 비슷한 크기의 거신이 형성되자, 처용이 그 안에 깃들었다.

처용이 항마의 화신을 소환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

마치, 타락한 항마의 화신을 소환한 듯한 모습이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콰아아! 지잉!

그 모습을 본 악의 종주가 파멸의 힘을 손아귀에 모아 파멸의 검을 만들어 내자.

“과연 그럴까?”

처용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듯 말했다.

-콰아아! 우웅!

그런 처용을 지키는 거신, 격노의 화신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힘을 방출하자.

“태극천체일도 – 격화(激化).”

-스르릉!

핏빛의 기류가 넘실거리는 검붉은 도가 나타났다.

이윽고.

-우웅!

검은 기운이 더 짙은 검붉은 검, 파멸의 검이 처용, 격노의 화신에게 쇄도했고.

-스르릉!

핏빛의 기운이 더 짙은 검붉은 도.

검붉은 빛으로 변질된 처용의 태극천체일도가 위에서 아래로, 사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강렬한 기운을 휘감은 두 칼날이 강하게 충돌하자.

-콰아! 파아아-!

그 충돌에 의한 폭발이 터지며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한번 크게 충돌한 악의 종주와 처용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고.

-까강.

악의 종주의 왼쪽 어깨 갑옷이 그어지며 칼자국이 새겨졌다.

그림자 속에 일렁이는 눈동자들이 그 자상을 보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첫 번째 힘 싸움의 결과는 놀랍게도 처용이 우세를 보인 것.

악의 종주가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처용을 응시했고.

“아직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나? 조크.”

-스릉.

처용은 그런 악의 종주를 향해 태극천체일도를 겨누며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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