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화
판데모니움의 핵 전체를 뒤덮는 파멸의 파도.
거대하고 거세게 휘몰아치던 파도가 서서히 가라앉자.
“버텨 낸 것인가?”
악의 종주가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로 작은 감탄을 담아 말했다.
그가 내려다보는 곳에는.
“크허…… 으억……!”
-주르르.
처용이 입에서 피를 쏟아 내며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파사사……! 파사……!
항마의 화신은 반 이상이 부서져 있었고 주변을 지키던 천수는 모조리 사라졌다.
게다가.
-우웅……!
태극천체일도 역시 점점 빛을 잃어 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져 역천의 절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의 파편에게 도움을 받아 악의 종주와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종국에는 최후의 일격까지 가해, 그를 처치한 듯 보였다.
그러나 처용이 처치한 존재는 악의 종주가 따로 만들어 낸 분신이었을 뿐.
그의 본체가 나타나 단 한 번의 힘을 발휘한 결과.
“제, 젠…… 장!”
그 한 번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크. 크크…… 나는 이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분노의 파편이 처용을 향해 옅은 미소를 흘리며 말하자.
“닥쳐!”
-으드드!
처용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고 거친 욕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동시에.
-스르릉.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형체, 본신을 드러낸 악의 종주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느끼고 그 힘에 당해 무너졌음에도.
“아직…… 안 끝났어.”
투지를 잃지 않은 눈빛으로 악의 종주를 쏘아보며 강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우웅. 딸깍.
푸른빛이 일렁이는 물이 담긴, 심해의 농축 포션 세 개를 꺼내 빠르게 삼켰다.
순식간에 세 개의 포션을 들이켠 처용이 빈 포션 병을 내던지고는.
“후-.”
깊고 짧은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간 여러 능력을 흡수하고 성장한 선인의 육체가 지친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크루마의 백염과 세계수의 재생력, 방금 삼킨 심해의 농축 포션 등.
강렬하게 타오르는 생명 에너지들이 지친 처용의 육체를 빠르게 회복시키고 상처를 치유했다.
처용은 체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하고는.
-촤라라라!
반쯤 부서져 거의 사라지기 직전인 항마의 화신을 빠르게 복구시켰다.
항마의 화신이 다시 복구되자.
-화아아!
전부 사라졌던 천수 또한 하나둘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 정도 격차를 보였음에도, 포기하지 않는가?”
악의 종주가 다시 일어서는 처용을 응시하며 말했다.
거스를 수 없는 힘의 격차를 보였음에도.
그 힘에 짓눌려 주저앉아 쓰러졌음에도.
처용은 이를 악물고 투지를 보이며 다시 일어섰다.
“이해할 수가 없다.”
악의 종주가 처용을 바라보며 읊조리자.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스릉. 우우웅!
처용이 역천의 절에 신력을 집중해, 다시 태극천체일도를 형성하며 말했다.
“아니, 이해할 필요 따윈 없지. 우린 서로 다르니까!”
-지이잉!
태극천체일도의 칼끝이 악의 종주를 향해 칼날을 번뜩였다.
악의 종주가 처용의 투지 어린 눈빛을 마주하고는.
“……어디, 전력을 다해 봐라.”
희미한 미소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나를 넘어설 수 없겠지만…….”
한번 전력을 다해 보라는 악의 종주의 말.
그럼에도,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는 현실적이면서도 ‘진실’인 그 목소리에.
“……좋다!”
-쿠구구!
처용이 그 도발을 받아들인 듯, 거친 신력과 강기를 내뿜으며 소리쳤다.
“하아아-압!”
거친 기합을 내지른 처용이, 외부로 방출하던 신력과 강기를 끌어모으자.
-쏴아아!
주변에 퍼진 천 개의 손들이 금빛 물결처럼 처용에게 빨려 들어왔다.
정확히는 항마의 화신이 천수를 모두 흡수하고 있었다.
-화아아!
항마의 화신이 천수를 모두 흡수하고 찬란한 빛을 내뿜자.
“항마의 화신 – 강신(降神)의 상!”
-탁! 우우웅!
처용이 끌어모은 천수와 신력, 강기를 모두 방출하며 두 손을 합장했다.
-촤라라락!
상반신만 있던 항마의 화신 밑으로 밝은 빛과 함께 다리가 형성되었다.
상반신에 불과했던 항마의 화신이 완전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
이윽고.
-파아아! 화아!
주변에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는 50미터 크기의 거인, 완전한 형태인 항마의 화신이 나타났다.
“아직…… 아직이다아아!!”
완전한 형태로 변한 항마의 화신 머리, 정확히 이마 부분에 깃들어 있는 처용이 거친 기합을 지르며 힘을 모았다.
-화아! 콰화아아!
완전한 형태로 변한 항마의 화신에게서 더 거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에너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항마의 화신에게 깃든 순간.
“파마의 거신상!”
처용이 이마와 얼굴에 굵은 핏줄을 세운 채, 두 손을 합장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쿠구! 쿠구구구!
항마의 화신이 점점 더 크게 자라나며 더욱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그 크기가 순식간에, 100미터를 훌쩍 넘어섰고.
-쿠궁!
이내, 본신 상태인 악의 종주와 비슷한 크기로 자라났다.
-크…… 크흐흐! 이 무식한 녀석.
그 모습을 본 분노의 파편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아무리 네가 수명의 한계를 벗어났다 해도, 그리 생명력을 불태우면, 죽을 것이다.
지금 처용은 제 생명력을 불태우며 강제로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만큼.
-그렇게도 놈을 이기고 싶나?
처용에게서 악의 종주를 쓰러뜨리겠다는 집념과 투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분노의 파편의 말에 처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악의 종주에게 이글거리는 시선을 고정한 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가. 흐흐흐…….
분노의 파편은 처용의 대답을 듣지 않았음에도, 미소를 지으며 답하듯 말했다.
처용과 분노의 파편은 서로 연결된 존재.
서로가 서로에게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라 할 수 있었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처용의 심정과 강렬한 투지가 전해지고 있었다.
-좋다! 나 역시 전력으로 널 도와주마.
분노의 파편이 짙은 미소를 담아 강하게 말하자.
-콰아아아!
완전한 형태로 변한 항마의 화신 겉으로 검붉은 기운이 짙게 일렁였다.
“보면 볼수록 놀랍구나.”
악의 종주가 자신과 비슷한 크기로 변한 항마의 화신, 그 안에 깃든 처용을 응시하며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
“나조차도……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었다.”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된 과거를 생각하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허나, 녀석이 도와준다 해도, 나를 넘어설 순 없다.”
항마의 화신 겉에 흐르는 검붉은 기운을 차갑게 응시하며 말했다.
“어디 한번, 네 의지를 보여 봐라.”
악의 종주가 처용을 향해 손짓하며 덤비라는 듯한 모습을 취하자.
“의념기 – 태극천체일도!”
-위이잉!
완전한 형태로 변한 항마의 화신이 두 손을 모으며 태극천체일도를 소환했다.
이윽고.
“검성류 오의-!”
-우웅! 스릉!
태극천체일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는.
“단절!”
-사아아-!
악의 종주를 향해 돌진해 나아가며 칼날을 내리그었다.
-……콰아아!
검은 우주를 반으로 갈라 버린 듯한 황금빛의 선이 길게 그어졌다.
그 선을 따라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이 부드럽고 강렬하게 쏘아져 나갔다.
정확히 악의 종주의 머리, 그를 반으로 갈라 버릴 듯 보였다.
그러나.
-스르륵.
악의 종주가 순식간에 다가오는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을 보며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카카캉! 콰아아!
강렬한 황금빛을 내뿜는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이 악의 종주의 오른손에 허무하게 붙잡혔다.
검지만을 굽힌 채,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을 잡아챈 모습.
혼신의 공격을 담은 처용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혔지만.
-스르릉! 차캉!
처용은 즉시 태극천체일도의 칼날을 뒤로 빼 회수한 후.
“천마신공 – 오의! 개(改)!”
발도 자세를 취하며 태극천체일도를 강하게 쥐었다.
황금빛의 태극천체일도가 더 강렬한 황금빛과 검붉은 기운을 휘감으며 점멸한 순간.
“용귀야행(龍鬼夜行)!”
-우웅! 스르릉!
악의 종주를 향해 태극천체일도를 강하게 발도했다.
태극천체일도에서 점멸하던 황금빛과 검붉은 징벌자의 기운이 폭발하며 솟구쳤다.
-크롸아아!
-캬라라!
찬란한 황금빛이 뭉치며 모두 용의 형상으로 변했고 그 용들에게 검붉은 징벌자의 힘이 일렁였다.
태극천체일도에서 쏘아진 수백의 용들이 악의 종주에게 달려들며 폭풍처럼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수백의 용들이 만들어 내는 폭풍 속에 악의 종주가 갇혔다.
그 강렬한 힘이 악의 종주를 파괴할 듯 보였다.
하지만.
-후욱! 콰아아!
악의 종주가 오른손을 가볍게 휘두르며 파멸을 흩뿌리자.
-파사사사……!
강렬하게 휘몰아치던 용의 폭풍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그 순간.
“검성류 - 오의!”
-우우웅!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처용이 태극천체일도를 강하게 쥐며 악의 종주를 향해 돌진했고.
“극(極) - 단절!”
칼날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 아래로 강하게 내리쳤다.
그 모습을 본 악의 종주가 오른손을 들어 무언가를 쥐듯 손을 움켜쥐자.
-우웅! 지이잉!
파멸의 힘이 뭉치며 검붉은 기류가 일렁이는 새까만 검, 파멸의 검이 나타났다.
-콰아아앙!
태극천체일도와 파멸의 검과 충돌했고 강렬한 굉음을 퍼트리며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하아아아-압!”
처용이 파멸의 검과 악의 종주를 동시에 베어 버릴 기세로 기합을 지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쩌저적!
태극천체일도에 검은 금이 그어지며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파창! 차카캉!
이내, 무참히 깨지며 칼날 파편이 흩날렸다.
태극천체일도가 파괴되자.
-까가강!
처용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역천의 절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리고.
-우웅.
악의 종주가 처용을 베어 버릴 듯, 파멸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극 이기어술-!”
부러진 역천의 절을 돌려보낸 처용이 흩날리는 칼날 파편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차카카캉!
깨진 태극천체일도의 파편들이 서로 뭉치고 늘어나며 창과 검 등의 무구들을 형성했다.
순식간에 악의 종주 근처에 백 개가 넘는 무구들이 생겨났고.
“천체극섬!”
-촤자자자-!
악의 종주를 향해 일제히 칼날을 겨누며 쇄도했다.
그러나 수백의 무구들이 악의 종주에게 닿는 순간.
-파사사……!
악의 종주에게서 짙게 흘러나오는 파멸의 힘을 뚫어 내지 못하고 모두 부서졌다.
처용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히자.
-스르릉!
악의 종주가 치켜든 파멸의 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반탄장 - 오의!”
-우웅. 화아아!
그 모습을 본 처용은 앞으로 뻗었던 왼손에 신력을 강하게 압축시켜 곧게 펴고는.
“평정!”
-후우욱!
팔을 부드럽게 회전시키며 태극을 그렸다.
항마의 화신이 휘두른 왼손과 파멸의 검이 닿자.
-데에에-엥!
묵직한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짙은 파동이 퍼져 나갔다.
-우웅. 우우웅!
항마의 화신 왼손에 압축된 검붉은 기운, 징벌자의 기운이 파동에 섞이며 퍼져 나갔다.
강하게 진동하는 그 힘이 파멸의 검을 잠시 저지하며 악의 종주를 밀어내나 싶었지만.
-끼긱! 파창! 차창!
이내, 파멸의 검이 자신을 저지하는 짙은 파동을 모두 부수었고.
-콰자자작!
항마의 화신 왼손과 팔을 베어 냈다.
그 순간.
“절권 - 오의!”
-우드드드!
처용이 몸을 오른쪽으로 틂과 동시에 오른손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강하게 쥔 항마의 화신의 오른 주먹에서 강렬한 빛이 내뿜어졌고.
“제천!”
이내, 강렬하게 빛나던 에너지가 확 잔잔해졌다.
동시에.
-후우욱.
악의 종주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칼날을 크게 내질러 생긴 악의 종주의 빈틈.
그 빈틈을 공략한 처용의 주먹이, 정확하게 악의 종주의 가슴에 직격했다.
-피이! 콰아아아아!
극한으로 압축되었던 에너지가 터지며, 강렬한 황금빛이 폭발했다.
왼팔을 희생하고 적의 심장을 노린 일격.
그 일격에 당한 악의 종주가 황금빛 폭발 속에 휘감기며 점점 사그라져 갔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인가?”
-파아아!
악의 종주가 파멸의 힘을 강하게 흩뿌려 주변을 휘감는 황금빛을 단번에 없애 버렸다.
처용이 내지른 회심의 일격조차 통하지 않은 상황.
지금까지 처용의 공격들을 모두 받아 냈음에도.
“나조차도 파멸시키지 못하는구나.”
악의 종주는 상처 하나 없었다.
“너는 결코 그들을 파멸시킬 수 없다.”
처용이 모든 전력을 발휘했음에도, 악의 종주를 이기지 못했다.
그렇기에, 처용은 악의 종주보다도 더 드높은 존재들.
무한의 순환을 관장하는 존재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게 네 운명이다.”
악의 종주는 냉정한 진실을 읊조리고는.
-스릉. 콰지지직!
파멸의 검을 강하게 내질러 항마의 화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파사사……!
치명상을 입은 항마의 화신이 내부에서 퍼져 나가는 파멸의 힘에 의해 빠르게 부서졌다.
“커……!”
처용 역시 한순간 정신을 잃은 듯, 침음과 피를 토해 내며 쓰러졌다.
“너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악의 종주가 검은 우주 위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처용을 향해 읊조리듯 말하자.
“웃…… 기지…… 마라.”
처용이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는 이를 갈며 목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피이이!
처용을 중심으로 짙은 회색빛이 퍼져 나가며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아니, 처용을 시작으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회색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처용도, 악의 종주도 모두 회색빛으로 변했고.
“…….”
“…….”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둘 다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대로는 안 되겠군.
멈춰 버린 세상 속에서 분노의 파편의 목소리가 짙게 울려 퍼졌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