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악의 종주가 구원이라는 말은 언급하자.
“구원은 무슨, 개소리!”
처용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악의 종주가 이 우주를 종말로 이끌든, 순환의 포식자가 우주를 먹어 치우든.
둘 다, 처용에겐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하는 결과였다.
처용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내 구원은 이 우주의 기록을 파괴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되돌릴 뿐.”
악의 종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한의 순환으로 인해,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기록이 말소된다.
이 우주에 있었던 모든 정보 기록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악의 종주가 이야기한 구원은 달랐다.
우주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을뿐더러.
“영겁의 세월이 걸리겠지만, 소중한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인연이 있는 이들끼리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주의 기록이 사라지지 않고 최초로 돌아간 형태.
즉, 기록된 정보대로 우주의 운명이 다시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우주를 파멸시켜 태초로 되돌리면, 순환의 포식자가 이 우주를 먹지 못한다 그 소리냐?”
처용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물었다.
악의 종주가 말하는 구원, 아니 파멸과 순환의 포식자가 행하는 파멸이 다르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악의 종주가 먼저 우주를 파멸시킨다면, 순환의 포식자는 이 우주를 잡아먹을 수 없는가?
프로토라는 존재들은 개입할 수 없게 되는가?
악의 종주조차도 경계하는 미지의 존재들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맞다.”
그런 처용의 물음에 악의 종주가 긍정했다.
“우주를 태초로 되돌리면, 그 수명 또한 되돌아가기 때문이지.”
악의 종주가 ‘구원’에 성공하면, 우주는 태초로 돌아간다.
거의 다 끝나가던 우주의 수명 또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놈들은 우주의 수명이 거의 끝나갈 때만, 개입할 수 있다.”
우주를 소멸시키고 재탄생시키는 우주의 법칙.
그 무한의 순환을 관리하는 이들은 수명이 남은 우주에 간섭할 수 없다.
즉, 이 우주가 태초로 돌아간 순간, 그들은 이 우주에 개입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처용은 악의 종주가 한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하고는.
“……이해했다.”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진지한 눈빛을 치켜뜨며 말했다.
지금껏.
-전대 우주의 생존자!
-수명이 다 된 우주는…….
-이 이상은 천기누설이 되는가?
엘리스, 미륵, 황룡 등에게서 얻었던 정보들.
이 우주의 비밀과 관련된, 하나하나 조각을 모으듯 얻었던 짧은 단서들.
그리고 지금, 악의 종주가 말해 준 ‘무한의 순환’까지.
그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작금 우주의 실태를 파악했다.
이 우주의 수명은 거의 끝나 가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순환의 포식자가 이 우주를 산산이 분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소멸한다.
악의 종주는 이 우주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 손으로 이 우주를 파멸시켜 태초로 되돌리려 한다.
태초로 돌아간 우주는 수명도 초기화되기에, 무한의 순환이 이어지지 않는다.
아니.
“네가, 네 손으로 새로운 ‘무한의 순환’을 만들려 한다는 것을.”
처용은 악의 종주가 생각하는 진짜 계획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순환의 포식자와 프로토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
이 우주의 ‘정보’를 남긴 채, 다시 순환시키는 것.
악의 종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무한의 순환’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악의 종주가 말하는 ‘진짜 구원’이었다.
처용이 악의 종주가 행하려는 이 우주의 구원.
아니, ‘새로운 무한의 순환’은 언급하자.
“정답이다. 계승자.”
-쩌저적.
악의 종주가 그림자 속에 일렁이는 입을 기괴하게 찢어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나를 도와라. 계승자.”
-스르륵.
처용을 향해 손을 내밀며 그를 회유하듯 말을 이었다.
지금껏 처용이 악의 종주를 수도 없이 곤란하게 만들었음에도.
“그렇다면 너 또한, 그들이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악의 종주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보였다.
오히려, 처용을 회유하는 잔잔한 목소리 속에는 호의적인 느낌도 일렁였다.
처용은 악의 종주가 내민 손을 보며.
-네가 마지막으로 살아남았구나.
-내 휘하에 들어와라. 계승자 한처용.
회귀 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도, 악의 종주는 지금처럼 처용을 회유하려 했었으니까.
처용은 짧게 침묵해 보이고는.
“새로운 구원, 좋다 이거야…… 그런데 말이야?”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악의 종주가 말한 ‘구원’에 대해서는 모두 파악했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 재탄생한 우주가 다시 수명의 끝을 맞이하면?”
처용은 악의 종주가 했었던 말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물었다.
악의 종주는 이 우주를 태초로 되돌려 끝에 달한 수명도 되돌리려 한다.
만약, 악의 종주가 이 우주를 ‘구원’했다 가정하고 태초로 되돌렸다 쳤을 때.
또다시 이 우주가 수명의 끝을 맞이한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물론, 처용은.
“그때 다시 네 손으로 우주를 파멸시키고 태초로 되돌리는 건가?”
그때가 되면, 악의 종주가 무엇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했다.
바로 이전처럼 이 우주를 직접 파멸로 이끌어 다시 한번 태초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무한의 순환과 다를 게 뭐지?”
처용이 점점 인상을 찌푸리며 부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악의 종주가 말하는 구원은, 같은 우주, 같은 세계, 같은 역사가 무한히 반복되고 멸망하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뫼비우스의 띠라고 말할 수 있었다.
최초의 우주가 다시 시작되고.
지구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에스라 대륙을 포함한 다른 세계의 역사도 반복되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그대로 반복된다.
그리고 다시 우주의 수명이 끝을 향해 가면.
악의 종주가 이 우주를 파멸시켜 다시 최초의 형태로 되돌린다.
그런 후, 다시 같은 역사가 반복된다.
이것이 바로, 악의 종주가 순환의 포식자와 프로토로부터 이 우주를 지키는 방법.
그가 말하는 ‘구원’의 진짜 모습이었다.
“내가 볼 땐 말이야…… 네 방식은 구원이 아니라-.”
처용의 입에서 부정적인 느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악의 종주가 말한 구원은…… 절대 구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우주를 무한히 가둬 놓고 끊임없이 반복시키는 ‘시간의 감옥’이다.”
바로 끊임없이 역사가 반복되는 거대한 감옥이자, 형벌로 느껴졌다.
악의 종주가 왜 이 우주를 파멸시키려는 행동을 구원이라 말하는지는 이해했다.
머지않아 이 우주에 벌어질 일을 생각한다면, 구원이 틀린 말은 또 아니었으니까.
다가오는 파멸의 운명을 비트는 것.
악의 종주는 처용과 같은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딴 일에 내가 동참할 리가…….”
처용이 확신 어린 목소리와 눈빛으로 읊조렸다.
조금 전, 악의 종주가 내민 제안을 거절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처용은 악의 종주에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를 질문했다.
“왜, 이런 복잡한 짓거리를 하는 거냐?”
악의 종주가 벌이는 구원.
처용은 이 구원이 너무나도 조잡스럽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굳이…… 왜 이런 방식으로 우주를 구원하려 하는 것인가?
이런, 번거로운 방법으로 이 우주를 ‘보호’하려 하는 것인가?
이런 복잡한 방법보다.
“순환의 포식자와 프로토를 ‘파멸’시키면 간단한 것을.”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으니까.
바로, 이 우주를 소멸시키려는 존재들을 없애 버리면 간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악의 종주는 그 어떤 무엇이라도 파멸시킬 수 있는 자였다.
악의 종주가 왜 그들에게 맞서려고 하지 않는지 처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처용의 질문이 울리자.
“…….”
-스르륵.
악의 종주가 그림자 안에서 넘실거리는 입과 눈들을 조금 비틀어 보이며 반응을 보였다.
마치, 실소를 짓는 듯한 모습.
“……죽음을 죽이는 것이 가능한가?”
짧게 침묵한 악의 종주가 입을 열었다.
죽음을 죽이는 것이 가능하냐는 악의 종주의 말에 처용이 인상을 찌푸려 보이자.
“놈들은 생명체가 아니라 ‘법칙’이자 ‘현상’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악의 종주가 말을 이었다.
“죽음과 소멸, 파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이들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순환의 포식자와 프로토는 죽일 수 없다는 것.
그들을 없애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놈들은…… ‘천칭’에 속한 이들이니까.”
악의 종주의 입에서 마지막 말이 흘러나온 순간.
-쿵! 쿠궁! 쿠구구!
판데모니움의 중심 전체가 강하게 흔들렸다.
“…….”
처용이 그 진동을 느끼며 차분한 눈빛을 보였다.
방금의 진동은 힘에 의한 충격과는 달랐다.
이 세계, 우주 전체가 울리는 듯한 진동.
마치, 엘리스와 미륵이 언급해서는 안 될 존재들을 언급했을 때, 일어났던 현상과 같은 현상이었다.
판데모니움을 뒤흔들던 진동이 멎자.
“……그래, 죽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들이란 말이지?”
처용이 희미한 미소와 헛웃음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 말이 울리자.
“…….”
악의 종주, 그림자에서 넘실거리는 눈동자들이 가늘어지며 침묵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했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악의 종주가 입을 열었다.
“내가 파멸로 태어난 이유가, 놈들을 ‘파멸’시키기 위해서였으니까.”
조금 전, 처용이 한 말에 동의하는 듯한 분위기.
악의 종주가 파멸의 힘을 지닌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우주를 소멸시키려는 존재들을 파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악의 종주의 입에서 부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한의 순환을 관장하는 절대자들을 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죽음과 파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이 때문에.
“내가 이끄는 구원만이, 이 우주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악의 종주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바로 새로운 무한의 순환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악의 종주의 말에.
“크크…….”
처용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한 번 실패했다고 꼬리를 만 건가?”
악의 종주조차도 파멸시키는 게 불가능한 절대자들.
처용은 그런 절대자들을 향해.
“파멸시킬 수 없으면, 놈들을 파멸시킬 때까지 쳐부순다. 죽일 수 없다면, 죽일 때까지 죽여 본다! 그리고 방법을 찾는다!”
강렬한 적의와 살의를 담아 소리쳤다.
“난, 굽힐 생각 따윈 없어.”
“어리석은…….”
확신과 살의가 일렁이는 처용의 말에 악의 종주가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나름 기대했것만,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겠군.”
-우웅! 쿠구구구!
악의 종주에게서 짙은 파멸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주변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찬가지다!”
-탁! 화아아아!
처용 역시 두 손을 합장하고 파마의 신력을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주변 일대를 넓게 잠식하며 퍼지는 파멸의 힘과 파마의 신력이 서로 격돌했다.
하지만, 힘 싸움을 벌이는 건 잠시였을 뿐.
-파사사……!
이내, 파마의 신력이 모래성처럼 부서지며 흩어졌다.
악의 종주가 발현하는 파멸의 힘을 밀어내지 못한 것.
결국.
“항마의 화신 – 결전기.”
-우우웅! 화아아!
처용이 신력을 더 끌어올리며 항마의 화신을 불러냈고.
“천수 – 태극천체장.”
-화아! 촤라라라-!
그 주변을 감싸는 천 개의 손을 불러내었다.
“천수 - 반탄신장!”
-스르르륵! 화아아!
천 개의 손이 처용 앞에 벽처럼 나열되더니 일제히 앞으로 돌진하며 나아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파멸의 신력과 반탄신장으로 이루어진 금빛의 벽이 충돌했고.
-콰콰쾅! 파아-!
강렬한 폭발과 충격음이 퍼져나갔다.
천 개에 달하는 반탄신장이 절반 이상 부서지며 사그라졌지만.
-후우우……!
악의 종주가 내뿜는 파멸의 기운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저지되며 뒤로 밀려났다.
그러자.
“고작, 그 정도의 힘으로 놈들과 맞서겠다는 것인가?”
악의 종주가 처용을 향해 오른손을 뻗어 검지를 겨누더니.
-우웅. 지이잉-!
파멸의 힘이 압축된 광선을 쏘아 보냈다.
검붉은 기류가 일렁이는 새까만 광선이 쇄도해 오자.
“다중 명계금강문!”
-쿠구구!
처용은 급하게 자신의 앞에 거대한 명계금강문 열 개를 소환해 나열하고.
“반탄신장 - 금강관건!”
-후우욱! 쿠구! 쾅!
아직 남아 있는 손들을 명계금강문 뒤에 붙여 전방을 방어했다.
이윽고.
-콰콰쾅-!
파멸의 광선이 가장 앞에 있는 명계금강문에 작렬했다.
어지간한 상위 신격의 공격쯤은 거뜬히 막아 낼 수 있는 명계금강문이었지만.
-파사사사!
파멸의 광선을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며 사그라졌다.
그 뒤를 받치고 있던 반탄신장들 역시 마찬가지.
-파사삭! 파사사-!
악의 종주가 발휘하는 파멸의 힘을 전혀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조차도.
-후욱! 후우욱!
사방에서 파멸의 광선을 막기 위해, 수백의 손들이 달려들고 있었지만.
-파삭! 파사-!
파멸의 광선과 닿은 즉시, 모두 파괴되었다.
이내, 파멸의 광선이 순식간에 처용의 지척에 도달했고.
“크흡!”
-파지직!
처용은 뢰신보의 속도를 최대치로 발현하여 가까스로 파멸의 광선을 피해 냈다.
하지만.
-콰자자작!
항마의 화신의 왼쪽 어깨와 팔이 부서졌다.
“젠장!”
-우우웅!
처용이 파마의 신력을 끌어올리며 부서진 항마의 화신을 복구하고.
-촤라라락. 촤락.
망가진 천 개의 손들도 복구하기 시작했다.
그때.
-샥!
악의 종주가 처용의 왼쪽에 나타났다.
처용이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끝이다. 계승자.”
-쿠구구! 콰드드득!
파멸의 신력이 뭉치며 거대한 손아귀를 형성했고.
-콰자자작!
복구 중인 항마의 화신 왼팔을 부수며 처용에게 쇄도했다.
파멸의 손아귀가 처용을 움켜쥐기 직전.
-우웅! 콰아아!
돌연, 처용에게서 검붉은 신력이 요동치며 흘러나오더니.
-탕! 콰콰쾅!
악의 종주가 내뻗은 팔과 비슷한 형상의 검붉은 손아귀가 형성되며 파멸의 손아귀를 후려쳐 튕겨 냈다.
동시에.
-콰쾅! 콰아아!
점점 접근해 오는 악의 종주를 향해 강렬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를 뒤로 밀어냈다.
마치, 악의 종주에게서 처용을 보호하려는 듯한 모습.
그리고.
-손대지 마라.
요동치며 흘러나오는 검붉은 신력에서 중성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어째서냐…….”
악의 종주가 넘실거리는 그림자를 꿈틀거리며 읊조렸다.
처용에게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기운과 그 기운에서 흘러나오는 중성적인 목소리.
“어째서…… 어째서, 계승자에게 네가 깃들어 있는 것이냐?”
그 목소리를 향해 당황스러운 듯한 반응을 보이자.
-크흐흐.
처용에게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신력의 주체.
분노의 파편이 짙은 미소를 흘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