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화
악의 종주가 넓게 흩뿌린 파멸의 파동.
그 힘이 잿빛 군도 전체를 뒤덮었을 때.
-스스스.
당연히 잿빛 군도 안에 있던 처용도 그 영향 범위 안에 있었다.
처용은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동화경에 집중하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메피스토조차도 처용을 감지하지 못한 상황.
이대로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다.
아니,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탁.
파멸의 파동이 몸을 숨긴 처용에게 닿은 순간.
-화아아아!
순식간에 처용을 휘감으며 주변을 포위했다.
이대로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파멸의 힘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나갈 터.
결국.
-파아아!
처용이 파마의 신력을 강하게 내뿜으며 주변을 휘감은 파멸의 힘을 걷어 냈다.
얇고 옅은 파멸의 기운이었기에,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지만.
“이런……!”
동화경이 완전히 풀려 숨기고 있던 제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다.
처용이 악의 종주에게 들통난 순간.
-주인님.
마공간 안에 있던 리치, 긴에게서 다급함이 일렁이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지시대로만 움직여라.’
처용이 침착한 목소리로 긴에게 지시하듯 전음을 보냈다.
‘네 정체는 들키지 않은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긴이 처용의 무사를 바라며 답했다.
긴이 지키고 있는 소환 마법진은 ‘최후의 보루’였다.
그곳이 들키지 않은 한, 아직 처용에게 희망은 있었다.
문제는……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냐는 것.
“도대체…… 도대체 무슨 수로-!?”
메피스토가 평소와는 다른, 크게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소리쳤다.
도대체 왜? 처용이 이곳에 있는 것인지.
무슨 수로 잿빛 군도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당황스러운 것은 메피스토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보안을 책임지는 두 고위 악마, 스탈크와 메르핀 역시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이윽고.
“……샤네.”
-스르릉. 우웅!
메피스토가 당황스러움을 지우고 곧장 샤네를 오른손에 쥐며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 순간.
“명환부 – 마멸(魔滅)의 광원.”
-촤라락! 화아아!
처용이 명환부 아홉 장을 소환해 왼손에 뭉치고는 빛의 구슬을 만들어 내었다.
동시에.
“날 공격하려고?”
메피스토를 향해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 처용의 손아귀에 일렁이는 빛의 구체.
“꼴에 군주라고 제 백성들을 아끼는 것 같던데 말이야?”
-키이이-!
강렬한 파마의 힘이 응축된 폭탄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요동치자.
“……!”
샤네를 내지르려던 메피스토가 멈칫했다.
처용은 메피스토가 보인 망설임을 본 순간.
“악마 새끼가 백성은 무슨-!”
-후욱! 콰지직!
파마의 신력이 응축된 구체를 바닥에 집어 던져 폭발시켰다.
-후우-!
깨진 빛의 구체에서 강렬한 파마의 힘이 해일처럼 퍼지려는 찰나.
“네가 뭘 안다고!”
-화아!
잿빛이 번쩍이며 나타난 메르핀이 처용의 앞에 나타나 두 팔을 뻗었다.
“전송!”
-휙! 후욱!
메르핀이 잿빛이 일렁이는 두 팔을 강하게 휘저으며 소리치자.
-핏-!
처용이 내던진 빛의 구체,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응축된 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스틸 크래셔(Steel Crusher)!”
-콰드득! 후-욱!
오른팔의 철갑을 키우며 주먹을 치켜든 스탈크가 처용을 향해 쇄도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절권 – 파권(破拳)!”
-우웅! 후우욱!
빠르게 쇄도해 오는 스탈크를 본 처용이 오른손 주먹에 강기를 응축해 강하게 내질렀다.
거인이라 봐도 무방한, 육중하고 두터운 스탈크의 주먹과 그에 비해 한참 작은 처용의 주먹이 충돌했고.
-콰콰쾅!
귀를 울리는 강렬한 굉음이 터지며 충격파가 퍼졌다.
겉으로 봐서는 덩치와 크기가 육중한 스탈크가 압도적인 듯 보였지만.
“크아악!?”
-콰지직!
스탈크가 오른손 주먹 철갑에 금이 간 채, 뒤로 크게 밀려났다.
반면에, 처용은 조금만 밀려난 모습.
-쾅!
처용의 힘에 밀린 스탈크가 건물 벽에 등을 부딪혔고.
“아악! 내 예비 마공간이-!”
뒤로 물러난 메르핀이 곤란한 일이 일어난 듯,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둘 다 물러나라!”
-스릉!
메피스토가 샤네에 마기를 두르며 소리치고는.
-샤가각-!
칼날을 내지르며 처용에게 돌진했다.
-스르릉!
처용 역시 역천의 절을 뽑아 들며 돌진해 오는 메피스토를 경계했다.
-차카캉!
샤네와 역천의 절이 불꽃을 튀기며 충돌했고 처용과 메피스토의 힘 싸움이 벌어졌다.
본래라면, 처용이 메피스토의 힘을 정면으로 버틸 수 없었지만.
“……이곳이 파괴되는 게, 신경 쓰이나?”
처용은 메피스토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메피스토는 주변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마기를 낮추며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크나큰 힘과 힘이 격돌했는데도, 주변이 크게 파괴되지 않은 게 증거였다.
메피스토는 처용의 말에 인상을 찌푸려 보이고는.
-우웅. 까가강!
샤네를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때.
“이 이상의 소란은, 허락하지 않겠다. 계승자.”
-후욱!
처용과 메피스토의 위로 악의 종주가 나타나며 말했다.
“이-!”
-차캉! 샥!
순식간에 악의 종주가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자, 처용이 다급하게 칼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늦었다.”
-스륵.
악의 종주가 처용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고.
-촤라라라-!
이내, 처용과 악의 종주를 중심으로 주변 일대가 거울이 깨지듯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바로 근처에 있던 메피스토도.
잿빛 군도와 작금의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던 악마들도.
메피스토를 돕던 두 고위 악마, 스탈크와 메르핀도.
처용과 악의 종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의 모습이.
-차카캉! 촤락!
거울처럼 깨져 나가며 모두 사라졌다.
이윽고 나타난 공간은 빛 한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스르륵.
아주 희미한 붉은빛과 푸른빛의 기류가 천천히 일렁이는 공간이었다.
마치, 별이 사라진 우주 공간과 같은 모습.
“여긴……?”
처용이 주변을 둘러보고 사방을 경계하며 읊조리자.
“판데모니움의 진짜 중심.”
-우우웅.
악의 종주가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인간들의 언어로, 이 세계의 ‘핵(核)’이라 할 수 있겠군.”
시스템을 통하지 않은 선명한 악의 종주의 목소리에.
“……젠장.”
-스릉.
처용이 역천의 절을 치켜들며 긴장감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동시에.
‘긴, 내 말 들리나?’
은밀하게 정신을 집중하며 ‘긴’에게 전음을 보내 보았다.
그러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주인님.
곧장 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환 마법진에 문제가 없는지 관리하면서, 지시한 대로 행동해라.’
처용은 긴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전음을 끊었다.
긴과 전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보면, 이 장소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 아니었다.
악의 종주의 말대로, 판데모니움의 ‘진짜 중심’이 맞는 것 같았다.
처용은 지금 이 장소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아직, 희망은 있다.’
속으로 작은 미소를 지었다.
잿빛 군도에 준비해 놓은 소환 마법진.
그 소환 마법진은 이틀 뒤, 완벽하게 완성된다.
마법진이 완성된 순간, 태룡전의 신들이 처용을 소환할 것이다.
그렇다면, 처용은 즉시 판데모니움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눈앞에서 마주한 악의 종주.
심지어 거의 본신 상태, 회귀 전 보았었던 전성기에 가까운 악의 종주를 상대로.
무려 ‘이틀’의 시간을 버틸 수 있냐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악의 제전에서 삼천마와 대악마들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지금이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처용은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악의 종주를 상대로 이틀을 버텨 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처용이 가진 모든 수단을 생각하며 전투를 준비할 때.
“야드의 쓸데없는 안배도, 네놈이 만든 변수들도 이제 끝이다.”
악의 종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더는 ‘놈’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
누군가를 경계하는 듯한 악의 종주의 말에, 처용이 잠시 전투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는.
“……순환의 포식자.”
악의 종주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한 놈들이 순환의 포식자인가? 아니면…… 프로토인가?”
처용의 입에서, 다른 신들은 언급하기 힘든 존재들의 명칭이 흘러나오자.
“…….”
악의 종주의 갑옷 사이사이로 넘실거리는 그림자.
그 그림자가 찢어지며 나타난 눈동자들이 가늘어졌다.
“그놈들이…… 도대체 누구냐?”
처용은 악의 종주가 반응을 보이자,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악의 종주, 조크 – 크타니드.
이 우주에 종말을 불러오는 자.
이런 엄청난 존재가 경계하는 이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처용은 악의 종주가 대답해 주기를 바라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순환의 포식자는-.”
놀랍게도 악의 종주는 처용의 말에 대답해 주듯 입을 열었다.
“수명이 거의 다한 우주를 분해해 잡아먹는 존재들이다.”
“우주를…… 잡아먹는 존재라고?”
선뜻 말해 주는 악의 종주의 대답에 처용의 눈이 점점 커졌다.
순환의 포식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무언가를 잡아먹는 이들이라고 어렴풋이 눈치챘었다.
하지만, 이 우주 자체를 잡아먹은 존재들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순환의 포식자가 식사를 마치고 소화를 끝내면, 에테르를 토해 낸다.”
악의 종주의 말이 이어졌다.
“분해된 우주가 순수한 에너지로 변하면, 프로토들이 그 에너지로 새로운 우주의 기반을 만든다.”
순환의 포식자는 수명의 거의 다한 우주를 분해하며 잡아먹는 이들이다.
동시에, 분해한 우주를 순수한 에너지, 에테르(Ether)로 만든다.
그 에테르를 다뤄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 존재들이 바로 프로토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이렇게 우주가 멸망하고 재탄생하는 과정을.
“이것이 ‘무한의 순환’, 모든 우주에 적용되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악의 종주는 무한의 순환이라고 말했다.
처용은 악의 종주가 말해 준 우주의 비밀, 무한의 순환을 듣고 짧게 생각하고는.
“……네놈이 이 우주를 종말로 이끄나, 순환의 포식자가 이 우주를 잡아먹나, 나한테는 다를 바가 없는데?”
비틀린 미소를 지은 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악의 종주가 이 우주를 종말로 이끌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순환의 포식자가 이 우주를 분해해도 모든 것이 사라진다.
처용이 지키려는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한다.
어떠한 방식으로 이 우주가 멸망하든, 처용의 입장에선 둘 다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순환의 포식자에게 분해된 우주는…… 거의 모든 ‘정보’가 소멸한다.”
악의 종주는 처용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아끼는 존재들, 그들을 구성하는 육체, 정신, 기술, 기록, 다른 지성체들의 기억까지…… 모두 소멸한다.”
순환의 포식자가 우주를 분해하면, 그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소멸한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 문명, 기술 등, 모든 것들이 완전히 사라진다.
“미처, 분해되지 않은 잔여 정보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그래, 너희들의 언어로…….”
악의 종주의 말이 이어졌다.
순환의 포식자에게 분해된 우주의 정보가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처, 분해되지 못한 잔여물, 찌꺼기가 남는다.
그 잔해물들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그곳에 버려진다.
“악몽, 나이트메어(Nightmare) 던전이라고 불리는 곳에 버려진다.”
악의 종주가 말한 그 쓰레기통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악몽.
나이트메어 던전을 의미했다.
“……!”
처용이 악의 종주의 말을 듣고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다른 던전들에 비해서, 무언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던전.
동시에, 그 어떤 던전보다도 극도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던전.
그 나이트메어 던전의 정체는 다름 아닌.
멸망한 우주의 잔해들이 쌓여 있는 쓰레기통이었다.
갑작스럽게 알게 된 우주의 비밀에, 처용이 혼란스러운 심정을 삼킬 때.
“허나, 내가 이끄는 ‘구원’은 다르다.”
악의 종주가 처용을 똑바로 응시하며 진지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