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616화 (616/726)

#616화

“이동.”

-화아아.

공간을 정원처럼 꾸민 처용이 잠시 밖으로 나오고는.

“…….”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침묵하며 잠시 서 있었다.

그 순간.

“자, 잠시만!”

-화아아!

처용의 앞에 잿빛이 번쩍이더니, 설계자가 나타나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속으로 미소를 감추고는.

“할 말이라도?”

리치 특유의 뚝뚝 끊어지고 옅게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 그게…….”

다급함을 보였던 설계자가 잠시 말을 끊으며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이내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해서…… 혹시 필요한 건 없는지 싶어서?”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처용은.

“정원의 ‘꽃’이 시들면 안 되니, 비료를 구해야 한다.”

속으로 미소를 감추며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용이 ‘꽃’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대답하자.

“……!”

설계자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찰나의 순간 보였던 번뜩임이었지만, 처용은 그 순간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정원의 꽃은 민감하다. 작은 자극만으로도 전부 시들어 버릴 정도로…….”

처용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마치, 자신이 가꾼 정원이 소중하다는 듯, 계속 돌봐야 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마공간 안에 형성한 정원이 한순간에 망가진다고 말했다.

사실……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처용이 직접 어둠을 주입해 형성한 그 정원은 어지간하면 죽지 않는다.

하지만, 악마들은 마괴 꽃의 희귀함은 알고 있어도 그 생태는 잘 모르는 상황.

그랬기에.

“정원에 함부로 손을 대는 순간, 모든 마기가 사라지고 정원은 죽는다.”

처용은 정원의 중요함과 예민함을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이 계속될수록.

“…….”

설계자가 점차 자신의 표정과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진지함을 드러냈다.

“정원을 감시하는 건 상관없지만, 손은 대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그 어떤 경우에도, 정원에 손대지 않겠다. 설계자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다만-.”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설계자가 답하고는.

“마괴 꽃이 완전히 피어나면…… 다른 이가 아니라, 우리에게 거래할 순 없나?”

진지한 목소리로 가장 중요한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 진지한 목소리와 눈빛 안에는 간절함까지 담겨 있었다.

‘……간절하다고?’

그 모습을 본 처용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작은 의문을 표하다가.

“정원의 가치를 귀하게 여겨 주는 자라면, 환영이다.”

이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설계자의 말에 답했다.

마괴 꽃을 설계자와 거래해 신뢰를 쌓는 것이 처용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설계자가 마괴 꽃을 ‘절실히’ 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눈가리개용 정원을 만들자마자, 이렇게 부리나케 뛰어온 것이 그 증거.

게다가 단도직입적으로 간절함을 담아 처용에게 거래를 신청했다.

처용은 더 큰 이득을 취하기 위해 한 번 튕길 수도 있었지만.

“마괴 꽃이 무사히, 온전하게 피어난다면, 그대와 거래하지.”

설계자의 부탁 어린, 거래 제안을 수락했다.

지금 처용은 이득을 남기기 위한 장사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곳에 숨어 있다가,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의를 보이는 상대에게 맞춰 주며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두게 만드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처용이 거래 제안을 수락하자.

“마공간의 대여 일자를 1년 추가해 주지! 완전한 꽃을 받기만 한다면! 영구 대여도 고려하겠다.”

설계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화아아!

번쩍이는 잿빛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일단은 성공인가.’

-스르륵.

설계자의 호의 어린 태도를 본 처용이 속으로 미소를 짓고는, 발걸음을 돌려 거리로 나아갔다.

***

중립 구역, 잿빛 군도의 중심부.

그 중심부에는 다소 낡은 듯한 외형인 넓고 거대한 성이 자리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영지를 거느린 대귀족의 영주성과 같은 모습.

영주성을 관리하는 하인과 경비 악마들이 많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성의 정문을 지키는 스틸 데몬은 고작 둘.

넓은 성 내부에도 소수의 악마만 보일 뿐, 허전한 분위기가 일렁였다.

그런, 넓고 웅장하지만 허전한 성채의 중심 내부.

별다른 장식도, 바닥의 카펫도 없는 허름한 대전의 옥좌 위에는.

“…….”

잿빛 군도의 주인이자, 삼천마 중 하나인 메피스토가 앉아 있었다.

점점 망해 가는 영주성 안에 홀로 남은 영주 같은 모습.

삼천마의 성역이라기엔, 너무나도 허름한 모습이었지만,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었다.

바로 메피스토가 앉아 있는 옥좌의 긴 등받이 끝.

그 등받이 꼭대기에는 메피스토의 상반신과 같은 크기인 사자의 두개골이 걸려 있었다.

날카롭게 돋아난 엄니와 잘린 목 주변에 아직 붙어 있는 두껍고 긴 갈기.

두개골의 머리 위에 돋아난, 반쯤 잘려 나간 굵고 긴 두 쌍의 뿔.

생전,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악마의 머리처럼 보였다.

상당한 크기의 악마 두개골이 걸려 있는 옥좌.

그 옥좌 위에 앉아 있는 메피스토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복잡한 눈빛을 지어 보이며 침묵할 때.

-번쩍!

돌연, 그의 앞에 잿빛이 번쩍이더니.

“메피스토 님!”

-후욱. 탓.

설계자가 나타나 메피스토를 향해 반쯤 무릎을 꿇고 부복하며 그를 불렀다.

“……무슨 호들갑이냐? 메르핀.”

메피스토가 고요한 침묵을 깬 설계자, 메르핀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

악의 제전에서 주로 보이는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아닌, 작은 친근함이 일렁이는 목소리.

그런 메피스토의 부름에.

“찾았어요. 자줏빛 마괴 꽃을!”

설계자, 메르핀이 상기된 목소리로 메피스토를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

메피스토의 눈이 점점 크게 떠지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사실이냐?”

“제가 직접 확인했어요.”

사실을 확인하는 메피스토의 말에 메르핀이 직접 확인했다 답하자.

“그 변종을 수색하는 일 때문에 여건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찾았느냐?”

메피스토가 놀라운 심정을 잠시 억누르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판데모니움의 악마들은 한 명의 인간, 처용을 수색하는 상황이었다.

메피스토가 다스리는 영토인 잿빛 군도의 세력 역시, 외부로 나가 처용을 수색 중이었다.

잿빛 군도를 지키는 최소한의 악마들을 제외하고 모두 외부로 나간 상황이었다.

“놈을 수색하다가 찾은 건가?”

“아니에요. 저희가 찾았다기보단, 제 발로 굴러 들어왔다고 해야 하나…….”

메르핀이 메피스토의 말에 답하고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이야기했다.

잿빛 군도에 방문한 야생 데몬 리치가 마공간을 대여하러 온 일.

그 공간을 감시하다가, 리치가 마괴 꽃을 피워 내는 모습을 목격한 일을 보고했다.

“마괴 꽃을 피우게 만들 수 있는 데몬 리치라고?”

메르핀의 말에 메피스토가 놀라움을 표하고는.

“내가 직접 녀석을 만나-.”

방금 들은 데몬 리치를 직접 만나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때.

“자, 잠시만요. 이 일, 제게 맡겨 주세요.”

메르핀이 그런 메피스토를 만류하듯,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메르핀의 말에 메피스토가 그녀를 바라보자.

“삼천마께서 직접 나서시면, 그 리치가 겁을 먹고 몸을 사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메르핀은 차분한 목소리로 왜 메피스토를 만류했는지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리치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무엇을 거래하고 약속했는지를 이야기하며 말을 이었다.

“……해서, 완전히 피어난 꽃을 얻을 때까지만, 제게 맡겨 주십시오.”

“확실히…… 확실하게 ‘자줏빛’ 마괴 꽃이었느냐?”

메피스토가 메르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확실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저 일반적인 마괴 꽃이 아니었다.

가장 귀하다고 여겨지는 ‘자줏빛 마괴 꽃’이었다.

그런 메피스토의 물음에.

“여기요.”

-스르륵. 슥.

메르핀은 손 위로 잿빛의 직사각형 판을 만들어 메피스토에게 내밀었다.

잿빛의 작은 사각형 판을 메피스토가 받아 지긋이 들여다보자.

-스르르륵.

리치가 만든 정원, 꽃봉오리가 피어난 정원의 풍경이 나타났다.

그리고 정원 중앙에 피어난, 선명한 자줏빛 광원을 내뿜는 가장 거대한 꽃봉오리.

“……하, 너무나도 선명한 자줏빛이군.”

그 꽃을 본 메피스토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삼천마인 메피스토조차도, 살면서 단 한 번만 보았었던 희귀한 꽃.

메피스토는 과거의 희미했던 기억이 다시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자줏빛 마괴 꽃이…… 확실하다.”

정원 속에서 빛나는 꽃이, 그토록 찾던 자줏빛 마괴 꽃임을 확신했다.

동시에.

“메르핀, 이 일은 네게 모두 일임하겠다. 필요하다면, 내 이름을 써도 좋다.”

메르핀의 요구대로 그녀에게 이번 일, 자줏빛 마괴 꽃을 확보하기 위한 일의 적임자로 일임했다.

자신의 이름까지 써도 좋다는 메피스토의 말.

그 말은 즉, 이 잿빛 군도에서 쓸 수 있는 인력, 재력 등 모든 것들을 써도 좋다는 의미였다.

“바쁜데도, 신경 써 주어서 고맙구나.”

메피스토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메르핀에게 감사를 전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메르핀은 솔직한 메피스토의 감사에 미소를 마주 미소를 짓고는.

“그럼, 잿빛 군도의 설계자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메피스토 님.”

-화아아!

잿빛이 번쩍이며 사라졌다.

중요한 소식을 전하러 왔던 메르핀이 다시 돌아가자.

“모든 게 끝나기 전에, 말 한마디라도 다시 나눠 봤으면…….”

메피스토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항상 증오로 이글거렸던 그의 눈동자 속 검은 불길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금 누그러졌다.

***

설계자, 메르핀과의 거래를 약속한 처용은 잿빛 군도를 잠깐만 돌아본 뒤.

“이동.”

-화아아!

대여받은 마공간 속으로 들어왔다.

넓게 깔린 어둠 속에서 돋아난 나무뿌리와 그 위에 자라난 꽃대들.

그 꽃대들 위로 점점 환하게 피어나고 있는 꽃봉오리들까지.

마공간 속은, 점점 몽환적인 분위기를 그려 내는 어둠의 숲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갔다.

처용은 자연스럽게 공간의 중심에 앉고는.

-우우웅.

어둠을 끌어 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짙은 어둠이 처용의 위에 덧씌워진 순간.

‘암영부 – 그림자 꼭두각시.’

처용은 자신의 분신을 만드는 암영부의 기술을 발동함과 동시에.

‘꼭두각시 바꿔치기.’

-스르륵.

자신은 그림자로 변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정원 중심에 앉아 있는 처용이 분신으로 바뀌고 본체는 어둠 속에 스며든 상황.

이곳을 감시하는 이들도 처용이 분신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바꿔치기였다.

-푸욱. 꾸르르.

짙은 늪지대 같은 어둠 속에 스며든 처용이 눈을 뜨자, 반투명한 어둠의 공간이 눈에 보였다.

눈을 돌려 위를 응시하면, 앉아 있는 처용의 분신과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늪지대의 물속에 들어와 수면 위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

종이처럼 얇게 깔린 어둠 속에 들어왔다기엔, 공간학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소환 마법진을 만들기엔 충분하겠네.”

처용은 자신이 어둠 속에 만들어 낸, 추가 확장 공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여받은 마공간 속에, 확장된 압축 공간을 진법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어둠 위에 피어난 마괴 꽃의 정원은 눈속임용.

그 누구도 모르게 소환 마법진을 만들기 위한 공간이 바로 이 어둠 속의 추가 공간이었다.

게다가.

-그 어떤 경우에도, 정원에 손대지 않겠다.

정원에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는, 설계자의 약속도 받아 냈다.

약속까지 한 이상, 그녀가 이곳을 감시하긴 해도, 직접 들어올 가능성은 적었다.

그리고.

-정원에 함부로 손을 대는 순간, 모든 마기가 사라지고 정원은 죽는다.

정원을 잘못 건들면, 모든 마괴 꽃이 죽는다고 경고까지 한 상황.

설계자가 그런 처용의 경고를 무시할 가능성도 현저히 적었다.

“팔괘암영진, 팔괘명환진.”

처용은 각각 여덟 장의 암영부와 명환부를 소환해 진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명환부의 빛이 환하게 빛났지만, 어둠으로 만들어진 이 공간의 외부로 빛이 새어 나가지는 않았다.

-우웅. 우우웅.

명환부와 암영부들이 계속 만들어졌고 여덟 장씩 뭉치며 팔괘의 진법들을 계속 만들어 내었다.

만들어진 팔괘의 진법들이 서로 이어 붙으며 서로 연결되었다.

팔각형의 흑백 진법 아홉 개가 정사각형을 그리며 서로 연결되었을 때.

-우웅. 촤라락.

처용은 팔각형과 팔각형 사이에 만들어진 마름모 모양의 공간 위에 보석들을 쏟아 내었다.

바로 말파스의 보물창고에서 털어 온, 마기가 가득한 최상급 마수정들이었다.

“기초 공사는 이 정도면 되었고…….”

처용이 진법을 만드는 것을 잠깐 멈추며 읊조렸다.

소환 마법진은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태룡전에서 소환 마법진을 만들고 있을 니알라와 서로 의견도 주고받아야 했다.

다음 작업은, 니알라와 의견을 주고받은 다음에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우미를 한 명 써야겠어.”

처용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좋겠다며 읊조리고는.

-우웅. 딸그락.

어둠 속에서 시체를 한 구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로, 바알에게 영혼을 파괴당해 빈 껍데기만 남은 리치, 추기경의 시체였다.

“식신부 – 생령 부여.”

처용은 추기경의 시체 위로 식신부 한 장을 소환해 붙이고는.

“이제, 노예가 되어서 개처럼 일할 시간이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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