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원기둥 형태의 건물들이 불규칙적으로 나열된 조잡한 느낌의 도시.
그 건축물 사이사이, 비포장 도로와 같은 길에는 많은 악마가 거닐고 있었다.
다양한 크기, 다양한 모습, 약한 이들과 강한 이들 등, 온갖 악마들의 모습이 보였다.
본래 악마란, 서로 끊임없이 싸우며 전투를 일삼는 이들로 잘 알려져 있었다.
같은 종족, 같은 세력끼리도 싸움을 일삼는 존재들.
다른 종족과 다른 세력이 모이면 꼭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인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 내에서는.
-네놈 때문이다!
-죽고 싶은가?
험악한 분위기를 만드는 악마들은 종종 보여도, 그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는 일절 없었다.
주변을 배회하는 상당한 덩치의 악마들.
입구를 지키는 이들과 같은 악마들인 스틸 데몬들도 사소한 악마들의 마찰은 그냥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
혹시나 무슨 일이 발생하지는 않는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지나갔다.
그 눈빛을 받은 악마들은.
-제길.
-네놈은 밖에서 보자.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다 말고 서로 뒤를 돌아서 갈 길을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본 검은 로브를 쓴 리치 형태의 악마.
‘……신기하네.’
아니, 처용이 신기하다는 듯 속으로 읊조렸다.
처용에게 있어 악마란, 싸움에 미쳐 전투를 피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회귀 전부터, 주구장창 마주해 온 악마들은 모두 그런 존재들이었으니까.
물론, 약한 악마들은 다른 강한 악마에게 잡아먹힌다는, 판데모니움의 먹이사슬 구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약한 악마라 해도, 죽을 위기에 처하면 싸우고 죽지 그냥 죽지 않았다.
그만큼 투지가 강한 이들이 바로 악마들이었다.
그런 악마들이 서로 시비가 붙어도, 싸움 없이 서로 물러나는 장소가 바로 이곳, 잿빛 군도였다.
처용은 악마들이 거니는 길을 자연스럽게 나아가며 주변을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았다.
회귀 전 처용은, 잿빛 군도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잠입이 아니었다.
이 잿빛 군도를 정면으로 공격하여 ‘침략’했었다.
앞을 가로막는 성채와 악마들을 거침없이 학살하고 도시 안쪽까지 진입해 ‘목표’를 파괴했었다.
그 목표물은 다름 아닌, 아르테미스의 신전.
처용이 목표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순간.
-한처용! 네놈이 감히!
신계에서 신들과 싸우고 있던 메피스토가 즉각 귀환해 도망치는 처용을 미친 듯이 추적했었다.
처용은 그 당시 왜 메피스토가 그렇게 분노했는지.
자신의 성역인 잿빛 군도를 왜 이리 특이하게 만들어 놨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감히! 잿빛 군도를!
메피스토는 잿빛 군도를 침략하고 악마들을 죽인 처용에게 분노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밌네.’
회귀 전을 회상한 처용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 당시 분노를 표한 메피스토의 모습에 의문이 들긴 했지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메피스토의 손에 죽은 저항군 헌터들과 성좌들만 해도 수두룩했으니까.
서로 죽고 죽이는 잔혹한 전쟁 속에서 적의 사정은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즉, 메피스토와 잿빛 군도의 사정과 배경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조차도, 잿빛 군도 안의 모든 악마를 죽여 자신의 경험치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스르륵.
처용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를 거두고 계속 나아갔다.
지금 자신은 모든 대악마에게 추적당하는 입장.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될 상황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며 침착하게 앞으로 나아갈 때.
-탓.
처용이 발걸음을 멈추고 오른쪽을 돌아보며 나아갔다.
그 방향의 끝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오우거처럼 생긴 두 악마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마괴 꽃의 씨앗을 거래하지.”
오우거 악마에게 다가간 처용이 그들 앞에 있는 작은 화분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야생 데몬 리치라…… 아주, 보기 드문 악마가 들어왔어.”
두 오우거 악마 중 하나가 신기하다는 듯, 리치의 모습을 한 처용을 보며 읊조렸다.
그리고.
“대가는?”
처용을 보며 ‘대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처용은, 어둠이 일렁이는 손을 들어 보이고는.
-우웅. 차라랑.
어둠 속에서 자줏빛으로 빛나는 보석 세 개를 꺼내 내밀었다.
악마들 간의 거래는 기본적으로 물물교환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처럼 ‘화폐’로 취급되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적어도 중급 이상의 ‘마수정’들이군.”
처용이 내민 보석을 집어 든 악마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말했다.
마수정은 몬스터를 사냥하면 가끔 나오는 코어인 마정석과는 달랐다.
판데모니움의 마기가 가득 서려 있는 광물을 통합적으로 가리키는 말이 바로 마수정이었다.
그 형태와 크기, 어떤 광물에 마기가 깃들어 있느냐에 따라 등급과 가치가 천차만별이었지만.
“하나만 써도 하급 악마가 족히 5년은 버티겠어.”
악마는 처용이 내민 마수정이 나름 괜찮은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하나도 아닌, 세 개나 내민 상황.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골라 가라. 어차피 꽃을 피우지는 못할 테지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악마는 옆에 놓은 화분, 검은 흙이 가득 채워진 화분을 눈짓하며 말했다.
“……이것.”
처용이 창백한 손을 드러내며 손가락으로 화분 중 하나를 가리켰고.
-우우웅. 휙.
그 화분에 어둠이 휩싸이며 처용의 손아귀로 날아들었다.
거래를 통해 원하는 물건을 얻은 처용이 뒤를 돌아가던 길을 나아가려 하자.
“조용한 거점을 구할 생각이라면, 북쪽으로 가라.”
악마가 처용의 뒷모습을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고하지.”
그 말에 답한 처용이 갈 길을 마저 나아갔다.
더 좋은 대가를 받은 악마가 선심을 쓰듯 말했던, 북쪽으로 가라는 말.
처용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잿빛의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거닐던 처용이 북쪽으로 쭉 나아가자.
‘찾았다.’
잿빛의 거대한 직육면체가 나타났다.
마치, 거대한 조각품을 조각하기 전, 네모난 석고상을 가져다 놓은 듯한 모습.
겉으로 봐서는 입구도, 창문도 없는 말 그대로 정육면체로 조각해 놓은 바위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간 처용이 손바닥을 대자.
-스르륵.
처용의 모습이 희미하게 사라지며 직육면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방이 잿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넓게 펼쳐졌고.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찾아온 건가?”
낮고 여린 톤의 목소리가 울리며 누군가가 처용의 앞에 나타났다.
잿빛 단발과 검은자위 안에 일렁이는 잿빛 눈동자.
머리 위로 크지 않은 두 개의 뿔이 돋아난 여성형 인간 형태의 악마.
로브처럼 보이는 검은 천 옷을 걸치고 단상 뒤에 앉아 있는 모습.
갑작스레 나타난 잿빛 여성형의 악마가 퀭한 눈빛으로 처용을 바라보며 묻자.
“알고 있다.”
처용이 그 물음에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때.
-스르륵.
허공에 어둠이 일렁이며 뿔 달린 인간 형태의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여기 있습니다. ‘설계자’ 님.”
그 그림자 형태의 악마가 잿빛 여성형 악마를 설계자라 부르며 양피지 뭉치를 내밀었다.
잿빛 여성형 악마, 설계자가 그 양피지를 받아 안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읽고는.
“……하아, 뭐 이런 녀석이 다 들어왔어?”
-촤락.
작은 한숨을 내쉬며 양피지를 내리고는 처용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뭐야? 어떻게 된 놈이, 아무 기록도 나오지 않을 수가 있지?”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가득한 설계자의 물음이 울리자.
“……모른다.”
처용은 그 말에 모른다고 답했다.
“모른다고? 그럼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나를 잡아먹으려던 놈들이…… 알고 있었다.”
이어지는 설계자에 답에도 처용이 아무 감정 없는 잔잔한 목소리로 답하자.
“목적은?”
잠시 생각에 잠긴 설계자가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밀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띵~.
단상 위에 놓인 장식, 작고 검은 종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검은 종이 짧고 경쾌한 소리를 울리며 잿빛의 공간을 잔잔하게 울렸다.
처용은 그 종과 주변에 퍼지는 울림을 느끼며 잠시 생각하고는.
“……생존. 그리고 시간.”
설계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용의 대답이 울렸음에도, 설계자는 입을 열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자.
“……으음, 그래? 그러면 대가는?”
설계자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대가를 말하는 설계자의 말에.
“충분한가?”
-우웅. 촤라락-.
처용은 설계자가 앉은 단상으로 다가가 그녀 앞에 보석, 마수정들을 쏟아 냈다.
“어…….”
형형색색으로 빛내 쌓인 마수정들을 본 설계자가 멍한 목소리로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스르륵.
그녀의 옆에 있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악마가 설계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비밀스럽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한 모습.
그 모습을 본 처용은.
-스스.
은밀하게 어둠을 끌어 올리며 감각을 넓혔다.
그러자.
-야생 데몬 리치치고는 상당한 녀석입니다. 차라리 저희가 붙잡아 가진 걸 빼앗고 종으로 부리는 게-.
그림자 악마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처용을 붙잡아 가진 걸 모두 빼앗자는, 참으로 악마다운 생각과 조언.
수하 악마의 조언에 설계자가 고민하는 듯한 눈빛을 내비쳤다.
단상 앞에 놓은 보석들을 보며 ‘욕망’이 일렁이는 눈빛 또한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는 메피스토 님이 정하신 ‘규칙’에 따른다.”
설계자는 눈을 딱 감고는 악마의 조언을 거절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너! 운 좋은 줄 알아. 다른 악마였으면, 네놈에게 복종의 낙인을 찍고 노예로 부렸을 테니까.”
처용을 향해 명심하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눈앞의 데몬 리치가 다른 대악마의 영역으로 갔었다면?
분명, 상위 악마들이 리치를 붙잡아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노예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크흠, 이 양이면, 여기 마(魔)공간을 2년 동안 대여할 수 있다.”
헛기침을 한번 내뱉은 설계자가 말을 이었다.
처용이 바친 ‘대가’를, 진지하게 계산한 결과를 이야기한 것.
그 말에.
‘2년? 이건 너무 긴…….’
처용은 잠시 멈칫하며 생각을 잇고는.
“……그렇게 하지.”
이내, 설계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설계자는 처용의 대답에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좋아! 넉넉한 대가를 바쳤으니, 내 특별히 좋은 공간을 내주도록 하지.”
-탁. 스윽.
처용 앞에 밋밋한 검은 팔찌를 내밀며 말했다.
그 팔찌를 처용이 손으로 집어 들자.
“사용 방법은, 팔찌를 차는 순간 절로 알게 될 거야.”
-탁!
설계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고.
-스르르륵.
이내, 공간이 뒤틀리며 잿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처용이 다시 나타난 곳은, 잿빛의 거대한 직육면체 앞이었다.
‘나름 순조롭네.’
원하는 것을 얻은 처용이 손에 쥐어진 팔찌를 왼손에 차며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이동.”
이동이라는 말을 읊조리자.
-화아아!
처용의 주변에 잿빛이 피어나며 주변을 감싸더니, 이내 처용과 함께 사라졌다.
***
-화아악!
사라진 처용이 다시 나타난 곳은, 잿빛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조금 전, 설계자와 마주쳤을 때와 같은 공간.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었던, 설계자의 공간과는 다르게.
‘대략 30미터 정도인가?’
가로세로 넓이 30미터, 높이 10미터 정도로 제한된 잿빛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감시하고 있군.’
-스스.
처용은 은밀하게 감각을 끌어 올리며 주변을 살피자, 자신을 지켜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아마, 조금 전에 마주쳤던 설계자와 그녀를 따르는 악마들의 감시인 것 같았다.
처용은 감시 어린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공간 중앙에 자리해 앉고는.
-우우웅.
바닥에 넓게 어둠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넓게 퍼지는 어둠은 바닥으로만 퍼질 뿐, 벽을 타고 오르지 않았다.
마치, 잿빛의 넓은 방에 검은 장판을 깐 듯한 모습.
바닥에 어둠이 깔리자.
-툭.
처용은 오우거 악마에게서 거래를 통해 얻은 작은 화분, 마괴 꽃의 씨앗을 꺼내 앞에 놓았다.
-쩌적. 파사삭.
화분이 깨지고 그 안에 담겨 있던 검은 흙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듯, 스며들었다.
그러고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쿠구. 쿠구구.
어둠 속에서 자줏빛의 나무뿌리와 진한 녹색의 잎사귀들이 나타났다.
마치, 검은 늪 속에서 작은 규모의 맹그로브 군락이 자라나는 듯한 모습.
마괴(魔槐) 꽃.
판데모니움의 고유 식물 중 하나로 콩나무와 칡의 특징이 섞인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판데모니움의 대표 식물 중 하나였지만, 중요한 특징이 더 있었다.
바로, 꽃을 피우게 만드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점이었다.
마괴 꽃은 깊은 농도의 마기를 품은 꽃으로 그 가치가 적어도 마수정의 3배였다.
그리고 ‘자줏빛’에 가까운 꽃일수록 그 가치가 더욱 상승하는 꽃이었다.
-콰드득. 화아!
나뭇잎이 돋아난 뿌리 나무 곳곳에 꽃대가 올라오더니, 꽃봉오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화아.
꽃봉오리가 조금씩 열리며 푸른 빛이 일렁이는 푸른색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구의 꽃인 진달래꽃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눈가리개는 이 정도로 됐고.’
대여받은 공간의 인테리어를 작업한 처용이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때.
-화아아!
돌연, 근처의 꽃 중 하나가 밝은 자줏빛을 빛내더니.
-스르륵. 화악!
선명한 자줏빛을 발광하는 마괴 꽃으로 변했다.
주변의 다른 꽃보다도 크기가 크고 눈에 확 띄는 은은한 자줏빛을 흩뿌리는 마괴 꽃.
‘아니, 대충했는데…….’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이러면, 너무 시선을 끌게 되는데…….’
주변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이곳은 적들에게 감시를 받는 공간.
분명, 자신을 감시하는 이가 자줏빛의 마괴꽃을 봤을 가능성이 컸다.
악마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밑 작업이 되려 이목을 끌어 버린 상황.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한 처용은.
‘아니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