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화
말파스의 첫 번째 성채에서 성공적으로 모든 보물을 털어 냈다.
처용은 이어서 바로 옆의 성채로 향했고 전과 같은 방법으로 입구를 통과해 들어섰다.
그러자.
-스르륵.
황금이 가득했던 이전 성채와는 다른, 허름하고 낡은 창고 같은 방이 나타났다.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방치된 듯, 습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나는 창고.
이전 성채에 비해 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럭키.”
-탁!
처용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것 중,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이 나왔으니까.
미소를 지은 처용이 바위 단상 위로 다가가, 그 위에 나열된 물건 하나를 집었다.
불길한 오오라를 내뿜는 검붉은 색의 뿌리 식물.
썩은 나무뿌리와 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 같았지만.
[천년악령삼(千年惡靈蔘)]
[등급 : 유니크+]
[삼(蔘)에 악령이 깃들어 천 년 동안 숙성된 마의 영약.]
[섣불리 섭취할 시, 삼에 깃든 악령에게 지배를 당합니다.]
그것은 무려 레전더리 등급에 가까운 영약이었다.
아니, 영약(靈藥)이 아닌, 섣불리 섭취하면 화를 부르는 마약(魔藥)이었다.
“적어도 오천 년짜리가 다섯 뿌리인가?”
처용은 자신이 집어 든 삼과 같은 수준의 삼들을 눈으로 관찰하며 읊조리고는.
“마혈 피양화, 피를 먹는 칡, 천년마수의 심장…….”
다른 단상 위에 나열된 것들을 살펴보며 읊조렸다.
동시에.
-촤라라락. 사각. 사가각.
목림부로 종이를 여러 장 만들고는 무언가를 써 내리며 약재 위에 붙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각 약재의 보관 방법과 취급 방법이 적힌 종이였다.
눈앞의 약재들을 보물전으로 집어넣으면 아타의 개미들이 관리한다.
하지만, 약재 중에는 아타의 개미들이 함부로 취급하기엔 위험한 것들도 있었다.
조금 전, 관찰했던 천년악령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년악령삼(萬年惡靈蔘)]
[등급 : 레전더리+]
[만 년간 원한과 악념을 축적해 온 악령이 잠들어 있습니다.]
[확인 불가.]
아주 위험한 것들도 눈에 보였으니까.
이 때문에 그것들을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을 따로 종이에 적어 붙였고.
“명환부 – 악령 구속.”
-화아! 스르륵.
명환부로 봉인해 놓는 등, 일시적인 조치를 취해 놓았다.
그리고.
‘쓸 만한 것들을 더 보내겠습니다.’
-우우웅.
니알라에게 소식을 전하며 눈앞의 약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말파스가 수집해 놓은 귀한 약재들이 대부분 태룡전의 열쇠 속으로 사라졌고.
-탁.
처음 확인한 천년악령삼 두 뿌리만 처용의 손에 쥐어졌다.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긴 처용은.
-샥!
다른 성채에 미련 따위는 가지지 않고 즉시 말파스의 성역을 빠져나왔다.
‘……당장, 큰 변화가 없는 거 보니, 말파스가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네.’
뒤를 돌아 잠시 말파스의 성역을 살핀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읊조리고는.
-탓. 스르륵.
동화경을 유지한 채, 원래 목표였던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
처용이 다섯 시간 정도를 북쪽을 향해 나아가자.
‘후, 별일 없이 도착했군.’
다행히, 원래 목표였던 잿빛 군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안도를 표하며 속으로 읊조린 처용이 앞을 바라보자, 검은 벽돌이 쌓여 만들어진 관문이 보였다.
마치, 에스라 대륙 나라들의 국경선 관문과 같은 모습.
그 관문 양옆에는 온몸에 갑주를 두른 상당한 덩치의 두 악마가 경비를 서듯 서 있었고.
-……!
-…….
그들 사이로 다양한 모습의 악마들이 무언가를 내밀며 지나가고 있었다.
시민들의 국경 출입을 관리하는 에스라 대륙의 관문과 아주 흡사한 광경이었다.
처용은 잿빛 군도의 입구인 관문을 멀리서 유심히 바라보고는.
-콱. 와드득. 우득-!
손에 쥐고 있던 천년악령삼 두 뿌리를 씹어먹었다.
그러자.
-스스스! 스스!
처용에게서 새까맣고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캬아아!
그 불길한 기운이 갈라지고 뭉치며 악령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천년악령삼에 깃든 악령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멋모르고 천년악령삼을 섭취한다면 그 악령에게 지배를 당한다.
하지만.
-우우웅.
처용에게서 스멀스멀 흘러나온 검붉은 신력이 악령을 뒤덮었고.
-캬아! 크아아!
악령이 내뿜는 불길한 기운들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동시에.
‘동화경 – 일심동체(一心同體).’
동화경의 힘을 끌어올리며 악령을 육체에 흡수시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화아악! 스스-.
제압당한 악령이 반투명한 보자기처럼 변하며 처용의 육체 겉을 감싸며 스며들었다.
악령이 완전히 처용에게 흡수됨과 동시에 동화(同化)되었다.
처용은 악령이 완전히 흡수된 것을 확인하고는.
‘암영부 – 마령화(魔靈化).’
암영부 한 장을 자신의 가슴에 붙이며 두 손을 합장했다.
-화아아.
처용의 몸이 검게 일렁이더니 점점 반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짙은 기운이 흘러나와 머리와 등을 감싸며 로브와 같은 형상을 취했고.
-스스스……!
이내, 처용의 모습이 불길한 기운을 스멀스멀 내뿜는 악령의 모습으로 변했다.
동시에.
-콰드드득.
얼굴이 가려진 검은 로브 위로 하나의 검은 뿔이 돋아났다.
마치, 악령이 진화하여 악마가 된 듯한 모습.
흔히, 판데모니움에서 가끔 나타나는 데몬 리치와 같은 모습이었다.
‘처음 시도한 것치곤, 나쁘지 않네.’
자신의 모습을 다시 점검하며 작게 미소 지은 처용은.
-스르르륵.
유령처럼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판데모니움에서 잿빛 군도라 불리는 장소.
혹은 ‘중립 구역’이라고도 불리는 곳.
그곳의 입구를 상징하는 아치형 문이 달린 잿빛 성벽 앞에는.
-쿵!
7미터에 달할 법한 우락부락한 덩치의 악마들이 입구를 지키며 서 있었다.
검은색과 잿빛이 섞인 두꺼운 갑옷을 겹겹이 입은 듯한 모습.
몸통과 다리에 비해, 장대를 쥔 팔이 유독 거대하고 더 두꺼운 형태였다.
마치, 장대를 들고 있는 전사의 석상과 같은 모습의 악마들이었다.
잿빛 군도의 입구를 지키는 악마들.
그들은 상위 악마족인 스틸(Steel) 데몬, 잿빛 군도의 주인인 메피스토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경비를 서는 스틸 데몬들에게 다가간 작은 악마 하나가 무언가를 내밀고며 뭐라 말하자.
“……통과.”
스틸 데몬의 입에서 지나가도 좋다는 목소리가 무겁고 굵게 울려 퍼졌다.
잿빛 군도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악마들이 스톤 데몬들 앞에 서며 차례를 기다릴 때.
-우웅! 스스스.
돌연, 관문을 향해 반투명한 검은 무언가가 다가오며 불길한 기운을 흩뿌렸다.
-스르륵. 스륵.
그 기운을 넘실넘실 내뿜는 검은 악령과도 같은 존재, 데몬 리치가 관문으로 다가오자.
-탓. 타탓.
관문 앞에 모여든 악마들이 저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서며 인상을 찌푸렸다.
판데모니움의 악마들조차도 가까이 가기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
-스륵.
관문에 다가온 리치가 고개를 기울이고는 다시 앞으로 한 발 나설 때.
“네놈은 뭐냐?”
-쿵!
누군가가 육중한 발걸음으로 악령의 앞에 나타나 입을 열었다.
입구를 지키는 스틸 데몬들보다도 짙은 색과 두꺼워 보이는 갑각이 두드러져 보이는 스틸 데몬.
그가 관문에 다가오는 리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스탈크.”
악령, 검은 로브 아래로 살짝 보이는 새파랗고 창백한 입에서 옅게 울리는 목소리가 퍼졌다.
마치, 메아리가 작게 섞여 울리는 듯한 목소리, 유령이나 악령이 낼 법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나를 알고 있다?”
잿빛 군도의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이자, 스틸 데몬의 우두머리.
메피스토를 따르는 고위 악마, 스탈크가 리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고위 악마가 내뿜는 기세와 위압감이 치리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라고 하던데?”
-스르륵.
리치는 스탈크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 듯 손을 들며 말했다.
-우우웅.
창백하고 앙상한 손 위로 어둠이 피어났고.
-화아! 화아아!
그 어둠 속에서 찬란한 빛을 내뿜는 금괴들과 보석들이 우수수 나타났다.
-탁.
스탈크는 리치가 내민 금괴를 받아내고는 그중 하나를 집어 자세히 보더니.
“이건 어디서 구한 것이냐?”
리치를 내려다보며 다시금 물었다.
그러자.
“나를, 먹으려던…… 놈들.”
리치가 스탈크의 말에 대답했다.
스탈크는 리치의 모습, 특히 머리 위에 돋아난 뿔을 유심히 보고는.
“……이곳에 온 목적은?”
진지한 목소리로 왜 이곳에 왔는지를 물었다.
“내가 공격받지 않는다.”
그 말에 리치가 답하자.
“그렇군. 이곳의 규칙은 알고 있나?”
스탈크가 인상을 조금 펴며 다시 물었다.
“어기면…… 삼천마의 분노…….”
“으음.”
리치에게서 ‘삼천마의 분노’라는 말을 들은 스탈크는, 경계심을 거둔 듯 누그러진 목소리를 내었다.
눈앞의 존재는 악령이 자아를 얻고 악마로 진화한 야생 리치인 듯 보였다.
간혹 판데모니움에서 출몰하는 보기 드문 악마의 일종인 데몬 리치.
그런 존재가 잿빛 군도를 알고 찾아왔다는 점이 조금 의아했지만.
“통과.”
스탈크는 더 생각하지 않고 통과라고 말하며 길을 비켜 주었다.
이곳은 판데모니움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온갖 다양한 종족이 찾아오는 장소.
어느 날 갑자기 대악마가 찾아온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대악마라 해도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장소였다.
잿빛 군도 안에서는 허락 없이 싸울 수 없었으니까.
대악마라고 해도 이 규칙을 어기는 순간.
잿빛 군도의 주인, 메피스토가 직접 ‘심판’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악령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또 ‘대가’까지 넉넉하게 바친 상황.
스탈크는 이곳을 지키는 수문장으로서 부여받은 의무대로 할 뿐이었다.
“가기 전에 사기를 낮춰라. 군도 안에서 피해가 생기지 않게 하도록.”
“……그렇군.”
이어지는 스탈크의 말에 리치가 대답하자.
-스스스.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기운이 확 누그러졌다.
“대가는 한 달에 한 번씩이다. 명심하도록.”
“알겠다.”
스탈크의 말에 답한 리치가 잿빛 군도의 관문 입구로 막 발을 들였을 때.
-한처용!!
-쿠구구구!
돌연, 판데모니움 전체가 크게 울리며 강렬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관문에 모여든 대부분의 악마가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공포’에 질린 듯한 모습.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
스탈크가 인상을 강하게 찌푸리며 읊조렸다.
판데모니움 전체를 강하게 울리는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디아블로였다.
-나와 맞서 싸우거라! 나와 싸워 네놈이 이긴다면-!
디아블로의 거대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 무한한 공포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너를 이곳에서 나가게 해 주겠다!
자신과 맞서 싸워 이긴다면, 판데모니움을 나가게 해 주겠다는 디아블로의 강한 외침.
그 말이 끝난 순간.
-이 미친놈이! 무슨 짓을!
-쿠구구!
잿빛 군도 안에서 강렬한 목소리가 크게 울리며 판데모니움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주군?”
스탈크가 잿빛 군도의 중심부를 바라보며 놀란 듯 말했다.
디아블로의 외침에 대답하듯 고함을 내지른 이는 다름 아닌 잿빛 군도의 주인.
끝없는 증오의 대악마, 메피스토였다.
메피스토의 고함이 울려 퍼지자.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냐!?
-쿠콰콰-!
앞서 두 삼천마의 고함보다도 더 강렬하고 무겁게 울리는 고함이 이어졌다.
마지막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거대한 어둠의 대악마 바알이었다.
처용을 겨냥한 디아블로의 제안에 분노의 고함을 지른 메피스토와 바알.
판데모니움에서 가장 강력한 세 대악마의 고함에.
-으……!
-으윽.
관문에 모여든 거의 대부분의 악마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공포를 드러냈다.
그리고.
-스르륵.
조금 전, 스탈크에게 잿빛 군도의 입성을 허락받은 리치가 도망치듯, 잿빛 군도 안으로 들어섰다.
***
‘……진짜 무슨 생각이냐? 디아블로.’
잿빛 군도 관문 안으로 들어선 데몬 리치.
아니, 리치로 변장한 처용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속으로 디아블로에게 물으며 읊조렸다.
신들이 제 신명을 걸고 어길 수 없는 맹세와 진실을 언급하는 것처럼.
신격을 지닌 최상위 악마들 역시, 제 이명과 명예를 걸고 약속을 할 수 있었다.
디아블로가 자신의 상징인 ‘무한한 공포’를 걸고 약속했다면, 방금 한 말은 사실일 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처용은 그런 디아블로의 돌발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귀 전과는 다른 변수와 행동을 보이는 유일한 삼천마.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부터 되짚어 보면.
디아블로는 니알라의 정체를 파악해 놓고 그 사실을 악의 종주에게 고하지 않았다.
게다가.
-네가 내 형제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조차도 숨기고 있었어. 네 비밀도…….
니알라가 처용에게 알려 주었던 또 다른 사실.
중국에서 디아블로와 처음 마주했을 당시.
-크하하! 바알! 네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구나!
디아블로는 처용의 안에 죄악의 파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태초의 마수와 처용이 함께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었다.
처용이 카투라의 초월기, 종말의 백야를 사용했었으니까.
그런데 디아블로는 악의 종주가 찾고 있을 카투라의 행방을 알리지 않았다.
처용의 비밀 역시 알리지 않았다.
아니, ‘고의적’으로 숨겼다.
게다가 작금의 상황까지.
디아블로의 알 수 없는 행동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지만.
‘……서둘러야겠어.’
처용은 그런 디아블로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