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일주일…… 일주일이란 말이지?’
처용이 니알라가 전해 준 이야기를 다시 곱씹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판데모니움을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대략 7일.
그 시간 동안, 판데모니움에서 대악마를 피해 다니며 버텨야 했다.
처용은 숨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바로 근처에 있었던 아몬도, 처용을 감지해 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었으니까.
이대로 버티다가 판데모니움을 탈출한다면, 문제가 없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어디서 소환 마법진을 만들 준비를 해야 하나…….’
어디서 소환 준비를 해야 하냐는 점이었다.
소환 마법진은 한쪽에서만 준비한다고 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양쪽에서 문을 만들고 열어야만, 통로가 연결되고 소환되는 것이었다.
즉, 처용도 판데모니움에서 소환 마법진을 만들어야만 했다.
문제는 어디서 소환 마법진을 준비하고 만들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지금, 판데모니움 내에서는 처용을 찾기 위해 모든 대악마가 수색에 나선 상황.
그런 그들의 눈을 피할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즉, 대악마들에게 들키지 않을 법한 장소이면서 소환 마법진도 준비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는 것.
작금 상황에서 이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를 찾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악마 놈들이 내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절대로 예상할 수 없는 장소…….’
처용은 진지하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몇몇 후보지를 떠올렸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의미.
작금의 상황에 처한 처용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악마들은 처용에 대해 잘 모른다.
이는 무력이나 기술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었다.
반면에, 처용은 누구보다도 판데모니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었지만, 각 지역과 그 특성, 특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바로, 적들에 대한 지식과 경험.
처용은 그 지식을 이용해 지금 상황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악마들은 처용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틀어박혀 숨어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한 장소를 먼저 수색하느라, 악마들이 시간을 낭비할 때를 노려야 했다.
처용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악마들이 절대 예상할 수 없는 장소.
동시에, 마법진을 안전하게 형성할 수 있는 장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후보지를 고른 처용은.
‘……거기가 좋겠네.’
이내, 판데모니움의 영역 중 한 장소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가 딱 한 군데 있었으니까.
바로.
‘중립 구역…… 잿빛 군도로 가야겠군.’
판데모니움에서 ‘중립 구역’이라 불리는 장소.
혹은 ‘잿빛 군도’라고도 불리는 대악마의 영역.
그곳은 다름 아닌 삼천마, 메피스토가 다스리는 그의 영토였다.
갈 방향을 정한 처용은.
-스스스.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모래 속을 유영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처용은 검은 모래 산맥 안에 파고들어 몸을 숨긴 상태.
땅속을 헤엄치는 두더지처럼, 기척을 최대한으로 줄인 채 천천히 움직였다.
최대한 빠르게 안전지역을 찾아 소환 마법진을 준비해야 했지만,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이곳은 검은 모래뿐인 사막 한가운데.
몸을 숨길 은폐, 엄폐물이 없는 장소였다.
지금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은밀하고 안전하게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다섯 시간 정도, 모래 속을 유영하며 나아가자.
-스스스.
모래 산맥 중턱에서 조심스럽게 눈을 드러낸 처용이 앞을 바라보며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처용은 눈앞에는 지긋지긋했던 검은 모래 산맥의 끝이 보였다.
검은 모래 산맥의 끝에는 짙은 잿빛의 굳은 땅과 앙상한 나무들이 보였다.
마치, 흑색과 잿빛의 경계선이 나누어진 듯한 모습.
‘대충 감으로 북쪽을 향해 왔는데, 운이 좋았군.’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눈에 보이는 광경으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바알의 성지인 악의 제전은 정확히 판데모니움 중심부에 있었다.
그곳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처용은 바알의 영역 외부에 펼쳐진 검은 모래 산맥으로 떨어졌다.
처용은 산맥의 ‘북쪽’ 방향으로 나아갔고 다행히 길을 잘 찾은 것 같았다.
잿빛의 지형이 드러났다는 건, 메피스토의 영역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스르륵.
검은 모래 산맥을 빠져나온 처용이 동화경을 유지한 채, 잿빛의 땅을 밟았다.
굵고 앙상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며 계속 북쪽으로 나아가던 중.
-샥.
처용이 재빨리 나무뿌리 아래의 땅을 파고들어 몸을 숨겼다.
그 순간.
-휘이이!
거대한 두 쌍의 날개를 펄럭거리는 새까만 박쥐와 같은 마수들이 하늘 위를 날아갔다.
-꾸륵. 꾸륵.
몸통 중앙에 달린 거대한 외눈이 뒤룩거리며 주변을 탐색하는 듯한 모습.
‘야생 마수들을 조종해 나를 찾는 건가?’
나무 아래 땅에 몸을 숨긴 채, 마수들을 살핀 처용이 작은 조소를 흘렸다.
지금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박쥐 형태의 A급 마수.
모두 대악마의 명령을 받고 처용을 찾아다니는 판데모니움의 야생 마수들이었다.
게다가.
-후우우!
그런 마수들의 위로, 거대하고 검은 새의 형체가 부유하고 있었다.
마수들을 지휘하는 듯 보이는 두 쌍의 날개를 크게 펼친 거대한 검은 새.
그 새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주시(注視)의 대악마, 말파스.’
판데모니움 서열 39위, 주시의 대악마 말파스였다.
악의 제전에서 잠깐 봤었던, 사람보다 조금 큰 크기의 새 모습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괴수의 모습.
지금 하늘 위를 유영하는 말파스는 본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파스의 성역은, 바알과 메피스토의 영역 사이,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때문에, 말파스가 직접 마수들과 휘하 악마들을 지휘하며 주변 일대를 수색하는 듯 보였다.
“……서쪽으로 이동한다.”
-쿠우우.
주변을 수색하던 말파스에게서 무거운 울림이 퍼짐과 동시에, 목소리가 퍼졌고.
-후욱! 후우욱!
하늘 위에서 주변을 수색하던 마수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서쪽으로 향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말파스 역시.
-후우-욱! 파아-!
거대한 두 쌍의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서쪽으로 날아갔다.
처용은 점차 사라지는 말파스의 뒷모습을 관찰하고는.
-스르륵.
땅속에서 나와 다시 북쪽, 메피스토의 영역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다가 잠시 멈칫하고는.
‘잠깐, 저 녀석이 본모습으로 변해 나를 찾기 위해 성역을 나갔다면?’
말파스가 사라진 방향, 서쪽으로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이내 그 반대쪽, 동쪽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은 처용이 잠시 생각을 이었다.
짧게 생각을 마치고는.
‘마침, 잘 되었군.’
-스르륵.
짙어진 미소를 지으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발걸음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
처용이 동쪽으로 쭉 나아가자.
-스스스.
푸른 안개가 은은하게 펼쳐진 짙은 흑색의 성이 나타났다.
흑색의 성 곳곳에는.
-번쩍. 번쩍.
루비와 에메랄드, 사파이어 등의 보석들이 곳곳에 박혀 형형색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마왕이 살 법한 고성에 온갖 보석을 박아 치장한 듯한 모습.
그 성은 다름 아닌, 조금 전 보았었던 대악마, 말파스의 성역이었다.
대악마의 성역이라기엔 너무나도 화려한 모습.
그 이유는 말파스의 또 다른 이명과 그의 취향 때문이었다.
보물(寶物)의 대악마, 말파스.
온갖 금은보화(金銀寶貨)와 재보(財寶)를 모으는 악마.
주시의 대악마, 말파스의 또 다른 이명이자 그의 취향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서열 39위, 중간에 자리한 서열의 대악마치고는 너무나도 화려한 그의 성역.
보다 서열이 높은 대악마가 말파스의 보물을 뺏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는 일절 없었다.
보물의 대악마, 말파스는 바알을 따르는 그의 창고지기이자, 재고 관리인이었으니까.
말파스는 바알의 물건도 관리해 주는 대악마.
이 때문에, 상위 서열의 대악마들도 말파스의 성역만큼은 함부로 들어설 수 없었다.
말파스의 보물에 욕심을 냈다간, 바알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었으니까.
대악마들에게 있어서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장소를.
-스르륵.
처용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거침없이 나아갔다.
주변에 퍼진 푸른 안개와 번쩍이는 빛을 내는 보석들.
그 안개와 형형색색의 빛에 닿으면, 즉시 함정이 발동하고 말파스가 곧장 알아차린다.
즉, 성역을 지키는 감시 장치이자, 방어 장치인 셈.
그러나 처용은 그 함정과 감시 장치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회귀 전, 말파스의 성역을 동화경으로 잠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용은 성역 주변에 즐비한 안개와 빛에 닿고 있음에도.
-스르륵. 스륵.
몸이 반투명해지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며 나아갔다.
말파스가 함정으로 펼친 환경 그 자체에 동화되어 나아가는 듯한 모습.
동화경만 있었다면, 아주 천천히 나아가야만 했었다.
회귀 전에도, 말파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동화경을 섬세하게 다루며 나아갔었으니까.
하지만, 신명을 깨우친 지금의 처용은 달랐다.
‘비틀어라, 역천.’
인과율을 비틀고 조작할 수 있는 역천의 권능이 있었으니까.
회귀 전의 경험과 새로 얻은 신명인 멸천의 힘 덕분에, 빠르게 함정을 통과해 나갈 수 있었다.
결국.
-탁.
모든 함정을 타파한 처용이 말파스의 성 바로 앞에 도달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처용은.
‘어느 탑을 털어야 하나.’
눈앞에 보이는 성채를 빠르게 둘러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말파스의 성은 여러 개의 탑이 모여 서로 연결된 듯한 모습이었다.
단순히 말파스의 보물을 털려는 것이라기엔,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파스의 재보를 터는 건 겸사겸사였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바로 소환 마법진 생성에 도움이 되는 재료들을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쓸 만한 재료들을 발견한다면, 소환 마법진을 만드는 확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어느 성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
회귀 전, 처용이 말파스의 성역을 한번 털었다 해도, 그 당시를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당장 필요 없는 것들이야. 모두 버려.
그 당시 처용은 말파스의 재보 중 하나인 금은보화를 그냥 버려두고 나왔다.
세계가 차례대로 멸망하는 그 상황에서 금은보화는 쓸모가 없었으니까.
당장 도움이 되는 몇몇 무구와 재료, 아티팩트만 털었었다.
‘기회는 두 번.’
처용이 성채를 하나하나 노려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눈앞의 성채를 모두 털기란 불가능했다.
안전을 위해선, 성채 두 개만 털고 나가는 것이 현명했다.
추가로 주의해야 할 점은 또 있었다.
바로, 바알의 물건이 보관된 장소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점.
그곳은 말파스가 펼쳐 놓은 함정과 결계와는 수준이 다를 정도로 보안이 삼엄했기 때문이었다.
무려 바알이 직접 펼쳐 놓은 결계와 함정이 즐비한 장소.
그 장소는 관리를 허락받은 말파스 외에는 드나들 수 없는 장소였다.
바알의 창고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다행인 점은.
‘……저기군.’
바알의 물건이 보관된 창고가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는 점.
바로 중앙에 있는 가장 거대한 성채, 그곳일 가능성이 컸다.
성채를 둘러보며 짧게 생각을 마친 처용은.
-스르륵.
우선, 가장 가까운 서쪽의 성채에 발을 들였다.
말파스의 성채에는 ‘문’이 없었고 입구가 개방되어 있는 형태였다.
대신, 개방된 입구 앞에는 반투명한 검은 결계가 쳐져 있었다.
말파스에게 허락받지 못한 자는 입구에서부터 발을 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뒤집어라. 역천.’
-우우웅.
처용이 어둠 속성 마나를 내뿜으며 역천을 발휘하자.
-사아아……!
말파스가 친 결계에 검붉은 기류가 섞이며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결계가 완전히 변질되었고.
-스르륵.
처용은 자연스럽게 결계를 통과해 성채 내부로 발을 들였다.
허가받지 않은 존재인 처용이 허가받은 존재인 듯, 자연스럽게 문을 통과한 모습.
-저벅.
처용이 성채 안으로 들어서자.
“……나쁘지 않네.”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지금 처용의 눈앞에는.
-화아아!
두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황금빛을 내뿜는 엄청난 양의 황금 더미가 보였다.
그 주변에는 황금만이 아닌, 찬란한 빛을 내뿜는 최상급의 보석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리고.
“이건 최상급 마강수정, 이건 흑요악석, 이건 압축된 판테라움…….”
외곽, 선반에 잘 정리되어 있는 온갖 희귀한 광물들까지.
처용이 잠입한 성채는 바로 말파스의 보석함이자 광석 창고인 것 같았다.
-니알라 님, 지금 제가 보내는 것들을 활용해 주십시오.
처용은 니알라를 향해 현재의 상황을 전하고는.
-우웅. 화아아!
태룡전의 열쇠를 꺼내 성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과 보석을 절반 이상 털었을 때.
“……뭐야. 이건?”
처용이 황금 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며 의문을 표했다.
황금 더미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시체였다.
의문을 표한 처용이 시체에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미라처럼 삐쩍 비틀어진 얼굴과 낡고 해진 신관복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시체에서 익숙하고도 어두운 마기가 느껴졌다.
그 기운과 시체의 모습을 자세히 살핀 처용은.
“……추기경!?”
이윽고 그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채곤 눈을 크게 떴다.
성자가 이끄는 빛의 교단의 2인자였던 인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성자를 배신하고 대악마들과 손을 잡은 타락자.
눈앞의 시체, 아니 영혼이 사라져 육체만 남은 리치의 정체는 바로 빅터 추기경이었다.
‘빅터의 영혼을 없앤 바알이 놈의 육체를 말파스에게 보관하라 명한 건가?’
처용은 왜 추기경의 육체가 이곳에 있는지 생각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동시에, 육체만 덩그러니 남은 리치의 시체를 보며.
‘어쩌면…… 쓸 데가 있을지도?’
진지하게 활용할 방법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