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화
악의 제전에서 일어난 두 번의 거대한 폭발.
첫 번째 폭발은, 모든 악을 몰아내고 파괴하는 파마의 신력.
그 신력이 한가득 응축된 항마의 화신과 천수 – 태극천체장을 최후의 희생으로 자폭시켰다.
그 폭발의 여파로 인해, 바알의 성역인 악의 제전이 일부분 무너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어서 터지는 두 번째 폭발.
무려 파멸의 힘이 응축된 극도로 불안전한 폭탄인 재앙옥.
그 재앙옥 여덟 개로 만들어진 폭발 진법과 처용 스스로를 미끼로 한 하나의 폭탄.
도합 아홉 개의 재앙옥이 동시에 터져 나갔다.
어지간한 성역은 한 방에 초토화할 법한 폭발이 두 번 연달아 터진 결과.
-쿠구구! 쿠구……!
정갈하고 장엄한 위엄이 일렁이던 악의 제전 내부가 완전히 쑥대밭으로 변했다.
대악마들이 자리했던 좌석들은 모두 형체 없이 날아가 버렸다.
깔끔하게 나열되었던 검은 기둥과 지면도 모두 파괴되었다.
폭발의 여파가 가라앉을수록, 그 처참한 광경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이런……!”
“이 정도였을 줄이야!”
-후두두! 후두!
거의 폐허로 변한 잔해 속에서 하나둘 나타나는 대악마들.
악의 제전에서 처용을 포위했던 대악마 중 소멸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크으으으음-!”
바알은 무사히 잔해를 헤쳐 나오는 대악마들을 보며 불편한 심기가 가득 담긴 침음을 흘리고는.
“당장! 그 빌어먹을 잡것을 잡아라!!”
-쿠구구구! 파아-!
강렬한 어둠의 파동을 드넓게 방출하며 무거운 고함을 내질렀다.
바알의 분노 가득한 고함이 크게 울리자.
-샥!
-타탓!
어기적거리며 잔해를 헤쳐 나오던 대악마들이 서둘러 악의 제전을 빠져나갔다.
바알의 명령대로 처용을 잡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쿠구구-!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바알의 분노를 당장 피하기 위함인 듯 보였다.
거의 모든 대악마가 악의 제전을 나가 처용을 추적할 때.
“나도 놈을 찾아야겠군.”
-화르륵.
지금까지 방관만 하던 디아블로가 투지를 끌어 올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와서?”
그 모습을 본 메피스토가 작게 인상을 쓰며 디아블로에게 묻자.
“난 대악마들이 자존심 없이 한 명에게 단체로 덤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메피스토.”
잠시 발걸음을 멈춘 디아블로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하듯 말했다.
“내가 먼저 찾아낸다면, 놈은 오롯이 내 차지다. 방해하는 놈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우드득. 저벅.
할 말을 마친 디아블로가 몸을 풀 듯, 고개를 꺾으며 악의 제전 밖으로 나갔다.
메피스토는 그런 디아블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잠시 노려보고는.
“……바알, 그분께서는?”
바알을 바라보며 물었다.
처용을 판데모니움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상황.
메피스토는 처용을 잡는 건 시간문제라 판단했다.
이제 중요한 건, 처용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악의 종주.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메피스토가 ‘악의 종주’에 대한 행방을 묻자.
“……아직, 침묵하고 계신다.”
분노를 곱씹던 바알이 메피스토의 말에 답하자.
“일단, 당장 해야 할 일을 우선해야겠군.”
-샥!
메피스토가 바알의 말에 답하듯 말하고는 처용을 찾기 위해 악의 제전 밖으로 나섰다.
***
악의 제전에서 조금 떨어진 알 수 없는 장소.
검은 모래만이 가득한 모래 산 아래, 짙은 그림자가 진 부분.
-스르륵.
그곳에 바람이 한 번 지나가자, 모래가 조금 걷히며 지푸라기 인형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먼 곳에서 날아와 검은 모래 산맥에 처박힌 모습.
지푸라기 인형의 머리 부분이 바람에 의해 조금 더 드러났을 때.
-파사사삭.
지푸라기 인형이 부풀며 볏짚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쿠드드드득!
팽팽하게 펴지던 지푸라기가 탄력의 한계를 맞이했는지, 한 가닥 한 가닥 끊어졌다.
이윽고.
“……후, 천만다행이군.”
-파사삭!
팽창하며 끊어지던 지푸라기 인형의 머리 안에서 처용의 얼굴이 나타났다.
처용의 얼굴을 시작으로.
-파삭! 파사삭!
가닥, 가닥 볏짚이 끊어지던 허수아비 인형 속에서 처용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지푸라기 인형 속에 숨어 있다가 볏짚을 끊어 헤치며 나타난 듯한 모습.
“미리 시험 삼아 만들어 두지 않았다면, 이번에 정말 죽었을지도…….”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처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조금 전, 무려 판데모니움의 모든 대악마에게 포위되었던 상황.
전성기의 처용이었다고 해도, 벗어나기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처용은 정말…… 정말, 운이 좋아서 그 상황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300레벨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재앙옥을 틈틈이 만들어 두지 않았다면?
시간이 날 때마다 스스로를 단련하지 않았다면?
멸천의 권능에 조금이라도 서툴렀다면?
제니퍼에게서 아르테미스의 신관 자격을 얻지 못했다면?
그 자격을 이용해 아르테미스의 권능, ‘달그림자 꼭두각시’를 온전히 흉내 내지 못했다면?
이 중 하나라도 소홀했거나, 하지 않았었다면?
처용은 그 위기 상황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했었기에.
그간, 철저한 준비와 자기 단련을 꾸준히 이어 왔기에,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처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를 때.
“……!”
이곳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파팟!
모래 속을 파고들어 몸을 숨겼다.
-스르륵.
처용이 파고들어 자국이 생긴 모래가 절로 움직이며 그 위를 덮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런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
위험한 기척을 느낀 처용이 모래 속에 몸을 숨기고 동화경을 최대치로 발휘하자.
-샥! 쿠쿵!
처용이 몸을 숨긴 모래 산맥 꼭대기에,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도대체 어디로 도망친 것이냐.”
-화르륵.
모래 산맥 위에 나타난 존재는 화염이 이글거리는 검붉은 비늘이 빼곡한 늑대인간.
판데모니움 서열 7위, 염수의 대악마 아몬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주변의 검은 모래에 불이 붙으며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처용은 바로 근처에 아몬이 나타났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
숨조차도 쉬지 않은 채, 동화경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주변 환경에 완전히 동화된 처용의 기척은 주변에 펼쳐진 환경, 모래와 다름없었다.
-흐읍. 킁.
아몬은 코를 씰룩이며 주변의 냄새를 맡듯, 처용을 찾는 모습을 보였다.
3분 정도, 모래 산맥 꼭대기에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쭉 살피고는.
-탓! 샤샥!
이내,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듯 발을 박차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몬의 모습이 사라지고 기척마저 완전히 사라지자.
“……후-.”
처용이 가늘고 길게, 조용히 숨을 내쉬며 안도를 표했다.
단 한 명의 대악마일지라도, 지금 마주쳐서는 좋을 게 없었다.
걸리는 순간, 모든 대악마가 처용이 있는 곳으로 달려올 테니까.
게다가 지금 처용은.
‘컨디션이 회복되려면…… 멀었군.’
조금 전,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었던 상황.
지쳤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반나절 정도는 쉬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처용은 얇고 깊은숨을 몰아쉬며 숨을 고르고는.
‘검은 모래 산맥…… 바알의 영역 끝자락인가?’
지금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유추해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추정하기로는 바알의 성지, 악의 제전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 같았다.
정확히는 바알의 영역으로 선포된 지역의 외곽 부분으로 추정되었다.
작금의 장소가 어디인지 파악한 처용은 당장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판단했다.
지친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적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처용은, 어두운 등잔 밑에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방금의 아몬처럼, 대악마들이 판데모니움 전역으로 넓게 퍼지며 수색하는 것 같았다.
대악마들은 처용이 악의 제전에서 되도록 멀리 달아났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렇다면, 적들의 생각을 역이용해, 바알의 영역에서 잠자코 숨어 있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스스스.
처용은 검은 모래 속에 깊게 몸을 숨기고는.
‘……스승님.’
정신을 집중하며 여래를 불러 보았다.
본래라면, 여래의 목소리가 즉각 들려 와야 했지만.
-…….
아무런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그때.
[……앗, 아? 된 건가? 내 말 들리니?]
처용의 머릿속으로 여래의 목소리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종종 태룡전과의 연결을 통해 처용과 대화하던 보살, 카투라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짧게 생각한 처용은.
‘니알라 님?’
이내, 머릿속으로 들려 온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는 듯 응답했다.
[아, 다행이야. 내 목소리는 들리나 보네.]
‘다른 분들과의 연결은 희미합니다. 그런데 왜 니알라 님만?’
[아마, 내가 판데모니움의 대악마라서 그런 게 아닐까?]
니알라 – 크타니드는 본래 태초의 마수.
하지만, 그녀는 소멸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대악마로 다시 태어나는 선택을 했다.
지금 그녀는 태초의 마수임과 동시에 대악마이기도 한 존재였다.
그녀는 판데모니움에 속한 대악마였기에 판데모니움의 장막을 넘어 처용과 대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군요. S급 마인들이 대악마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과 같은 원리로군요.’
처용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모두 알고 계십니까?’
가장 중요한 본론을 물었다.
작금의 상황을, 태룡전의 신들에게 전해야만 했으니까.
[모두 옆에 있어, 나를 통해서 네 말을 전해 듣고 있거든.]
‘그렇군요.’
이어지는 니알라의 말에 처용이 안도를 표하고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전했다.
처용은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다른 신들에게, 스승인 여래에게조차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달랐다.
처용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판데모니움을 빠져나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니알라 님을 소환하기 위해, 만들었던 소환진을 준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다고. 네 스승이 전해 달란다.]
이어지는 처용의 말에 니알라가 다른 신들의 말을 대신 전해 주었다.
판데모니움에 갇힌 니알라를 탈출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소환 마법진.
처용은 그 마법진을 이용해 다시 한번 태룡사와 판데모니움을 연결하고 여길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좋은 소식은, 마법진을 만드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린다는 거야.]
니알라가 조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주일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니알라를 소환하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이었다.
니알라는 대악마이고 판데모니움에 속해 있었기에, 그 준비가 오래 걸렸던 것.
반면에, 처용은 판데모니움의 악마가 아닌, 인간이었다.
게다가, 아직 태룡전과의 연결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기에, 니알라보다 탈출 준비가 수월한 것이었다.
‘일주일이라…… 작정하고 버텨 보겠습니다.’
처용은 니알라의 말에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처용이 에스라 대륙의 동쪽, 천 제국으로 향했을 때.
“역천군주가 저 결계의 근원을 해결할 때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올림포스 길드가 주둔하는 주둔지 중심에 선 제시카가 멀리 보이는 결계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러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역천군주가 직접 갔습니다. 소식을 기다려 보죠.”
“그래, 순식간에 처리하고 돌아올 거야.”
그녀의 옆에 있던 성자와 메리가 답하듯 말했다.
그들은 최전방에서 방어에 집중하며 처용이 결계를 해제하길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스터 제국을 지키는 결계가 해제되는 즉시, 지긋지긋했던 방어를 관두고 공격에 들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처용을 기다리고 있을 때.
-후우욱.
돌연, 제시카의 앞에 어둠이 일렁이더니, 검은 로브를 쓴 두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리고.
“제시카 로스차일드.”
검은 로브 아래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여성이 제시카의 이름을 불렀다.
기척도 없이 순식간에 나타난 두 인영에 제시카를 포함한 이들이 당황하며, 경계하듯 한 발 물러섰고.
“……마인!?”
-우우웅!
성자가 검은 로브를 쓴 두 사람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느끼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진실의 마나를 통해, 두 사람에게서 아주 강력한 마기가 느껴졌으니까.
성자의 말에,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순식간에 제시카 근처로 모이며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그 순간.
“잠시만요.”
제시카가 공세를 취하려는 성자와 헌터들을 만류하듯 손을 올리며 말하고는.
“닥터 화이트, 그리고 당신은……!”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 듯 목소리를 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앞에 있는 마인.
검은 로브 아래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여성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아본 것 같네.”
-훅.
그런 제시카의 반응에, 붉은 머리카락의 마인이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머리 위에 씌워졌던 검은 로브가 뒤로 벗겨지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레나 르블랑…….”
레나의 얼굴을 본 제시카가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자.
“누구입니까?”
아직, 경계를 거두지 않은 성자가 제시카를 향해 물었다.
눈앞의 마인들은 아직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제시카가 두 마인을 알아보며 공격하지 말아 달라 요청까지 한 상황.
성자가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두 마인의 정체를 물은 것이었다.
그 말에 제시카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 갑작스레 다시 마주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레나의 정체는,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때.
“무엇을 고민하지? ‘예언자’라고 말해 주면 되잖아?”
레나가 고민하는 제시카를 향해 작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제 정체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레나의 말에 제시카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고.
“……뭐?”
“……예언자라고!?”
성자와 메리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주변에서 그 말을 들은 다른 헌터들도 같은 반응을 드러냈다.
레나는 놀라움을 드러내는 성자와 헌터들의 반응은 무시하고.
“한처용은 어디로 갔어?”
제시카를 바라보며 처용의 행방을 물었다.
“조금 전에 천 제국으로…….”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제시카가 침착한 목소리로 답하자.
“이런.”
“경고를 전해 주기엔 이미…… 늦었군요.”
레나와 그녀의 뒤에 있던 하워드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하아, 지금부터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한숨을 내쉰 레나가 제시카와 성자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고는.
“저 녀석이 제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면, 그대로 모든 게 끝장날 테니까.”
동쪽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전하듯 말을 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