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화
판데모니움 악의 제전.
“이런 제길!”
-쿠구구!
바알이 분노를 담아 고함을 내지르자 악의 제전 내부에 강렬한 어둠이 퍼지며 흔들렸다.
‘또…… 또다시 ‘실패’하다니!’
-으드득! 으득!
강하게 이를 갈며 분노를 삼킨 바알이 속으로 읊조렸다.
또다시 실패했다.
이번 태초신의 성지 습격은 바알도, 다른 대악마들도, 악신들도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거대 성운 둘이 판데모니움의 전력을 막아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쓰러졌으니까.
태초신의 성역에 있는 이들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판데모니움의 모든 전력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이건, 있을 수 없는 결과로다.”
태초신의 성역으로 가기 위한 방어선, 태초신의 성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아니, 마지막 발악으로 성지 입구에 발을 들여 본 것이 고작이었다.
판데모니움의 압도적인 전력도.
두 순혈자를 이용한 내부의 배신도.
무려, 악의 종주가 직접 나섰음에도.
태초신의 성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계획에 실패해 버렸다.
“크으으음!”
-쿠구구구!
분노가 차오르는 바알은, 당장이라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전력을 보존하고 때를 기다린다.
악의 종주에게서 내려온 명령이 있었다.
또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단 말인가?
이번 태초신의 성지 습격을 계획한 이는 로키였다.
하지만 로키에게 책임을 물은 순 없었다.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 로키는 심지어 성지를 공격하는 역할도 아니었다.
태초신의 성지 공격을 주도한 이는 바로 악의 종주였다.
심지어, 자신을 포함한 삼천마 모두가 공격에 나섰다.
그럼에도 태초신의 성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 사태에 가장 책임이 큰 존재는 바로 공격에 앞장선 삼천마와 악의 종주였으니까.
“제……길!”
바알이 인상을 쓰며 침음을 흘릴 때.
“우리가 놈들을 너무 얕본 것인가?”
진지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던 메피스토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우리의 전력이 약했던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군.”
“승리감에 취해 놈들을 얕본 것이겠지. 크흐흐.”
실패에 대한 원인을 생각하는 듯한 메피스토의 말에 디아블로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놈들을 얕보고 방심한 것이다.”
“내가 방심했다고? 헛소리!”
이어지는 디아블로의 말에 메피스토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조금 높였다.
메피스토는 대부분의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성격.
아무리 인간들이 나약하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해도, 방심할 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악마들은 강하다. 특히 나, 메피스토, 바알, 우리 삼천마들은 더더욱.”
디아블로는 자신과 같은 삼천마, 메피스토와 바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대 성운이라고 자부하는 놈들이 우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전력을 반으로 나눴는데도 말이야.”
판데모니움의 세력은 막강하다.
그 증거는 전력을 반으로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성운 둘을 동시에 멸망시켰다는 것.
명실상부 판데모니움의 세력이 신계의 거대 성운보다 막강하다는 증거였다.
그렇기에.
“그런 우리가, 놈들을, 거대 성운보다 못하다고 판단하고 오만함을 부렸다.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나?”
디아블로는 거대 성운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오만한 심정을 지적했다.
그 말에.
“……딱 잘라 단정 지을 순 없군.”
메피스토는 디아블로의 지적을 순순히 인정하듯 말했다.
처음부터, 손해를 감수하고 모든 전력을 다해 적들의 방어선을 뚫어 냈다면?
전쟁 막바지에 벌어졌던 상황을 초기에 만들 수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펼쳐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바알 역시 인상을 찌푸려 보이기만 할 뿐, 디아블로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판데모니움의 거의 모든 전력이 총출동했었던 만큼, 반드시 이기리라 확신했었다.
아니 ‘방심’했었다.
놈들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승리를 확신한 건 사실이었다.
그때.
“아직,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상심하기엔 이릅니다.”
침묵을 지키던 로키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침, 하데스의 영역과 타르타로스를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로키와 같은 순혈 의회 일원이 하데스의 성역과 타르타로스를 점거했다.
반란 세력들과 타르타로스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저승을 하나둘 장악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로키는 짧은 희소식을 전하고는.
“계승자가…… 움직였다고 하는군요.”
낮은 목소리로 가장 중요한 소식을 이어 말했다.
그 말에, 불편한 심기를 보이던 바알의 인상이 조금 펴졌다.
방금 로키가 언급한 말은, 악의 종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계획의 일환이었으니까.
로키의 말에 바알이 짧고 굵은 침음을 흘리고는.
“로키, 비프로스트는 문제없나?”
분노 어린 마음을 가라앉힌 듯, 다소 잔잔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로키가 방금 언급한 계획의 핵심은 바로 비프로스트.
그러나 이번 태초신의 성지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인해, 비프로스트가 망가져 버린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작동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계획에 차질은 없습니다.”
로키는 그런 바알의 우려 어린 질문에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혹시 몰라서, 미리 준비를 마쳐 두길 다행이었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되었다.”
이어지는 로키의 대답에 바알이 답하고는.
“그분을 위해…… 이번만큼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후욱!
휘몰아치는 어둠과 함께 악의 제전에서 사라졌다.
-후욱! 후우욱-!
바알이 사라지자 대부분의 대악마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우.”
아직 악의 제전에서 나가지 않은 로키가 궁니르를 지팡이처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계획을 생각하며 몸을 풀 듯, 목을 돌리며 걸어 나가려는 때.
“로키.”
-샥.
로키의 뒤로 누군가가 타나가 그를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감찰관 나으리?”
로키가 아직 악의 제전에서 나가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온 대악마, 나베리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나베리우스가 로키를 노려보며 물었다.
의심, 불신 등 로키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듯한 분위기와 감정이 가득한 눈빛.
그런 감정을 숨기지 않는 나베리우스의 말에.
“이 정도로 노력했는데…… 감찰관 나으리의 신임을 얻기엔 부족했나 봅니다?”
로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난 배반을 저지른 자는 믿지 않는다.”
“뭐, 이해합니다. 제 신명이 배반이기도 하고 상위 대악마 중에서도 배신자가 나왔으니…….”
로키는 마치, 나베리우스가 왜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배신에는 이유와 명분이 있습니다. 감찰관.”
미소를 지운 채,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누구를 위해 성운을 배신했는지, 또 그 목적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
나베리우스는 의미심장한 로키의 말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는.
“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냐.”
가장 이상적인 정답을 이야기했다.
배신자들이 배신을 저지르는 이유?
모두 자신의 안위와 욕망을 위해서였다.
판데모니움을 배신한 이들도, 성운을 배신한 악신들도, 눈앞의 로키도.
모두 자신을 위해서 배신한 이들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로군요. 감찰관.”
로키는 나베리우스의 답에 작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동시에, 눈을 돌려 건너편의 먼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
무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는 안드로말리우스와.
“…….”
그런 안드로말리우스의 이야기를 작은 미소를 띠며 듣고 있는 디아블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
“……흐흐.”
로키와 미소를 짓는 디아블로가 찰나의 순간 눈을 마주쳤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고 생각하십시오. 제가 감찰관께 할 말은 이것 외엔 없는 것 같습니다.”
디아블로를 향한 시선을 거둔 로키가 뒤를 돌아 나아가며 나베리우스를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나베리우스는 로키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스르륵.
어둠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
소리조차도 울리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끼이이. 후우!
귀를 긁는 쇳소리와 함께 옅은 푸른빛이 피어 나왔다.
마치 어둠만이 가득한 방 안에서 문이 열리며 푸른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모습.
-저벅.
푸른 빛과 함께 발걸음 소리가 울리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짙은 갈색의 긴 웨이브 머리에 중간중간 검은빛이 돋보이는 브릿지.
검은 그리스식 드레스를 입은 여신.
올림포스 소속 저승의 안주인이자 하데스의 반려, 페르세포네가 푸른 빛을 등지며 나타났다.
-저벅.
어둠 속으로 나아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자.
“……나조차도 깜빡 속았어.”
-스르륵.
어둠을 몰아내며 퍼지는 옅은 푸른 빛에 의해, 사슬에 묶여 있는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염라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흐트러진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검은 사슬에 묶여 있는 여신.
그녀는 올림포스 소속 미의 여신.
아니, 타르타로스에 수감된 순혈 의회 일원인 Ⅷ, 아프로디테였다.
-탁!
잠시 아프로디테를 내려다보던 페르세포네가 손가락을 튕기자.
-철컥! 철크럭! 차카캉!
아프로디테를 구속하던 검은 사슬들이 저절로 끊어지며 모두 풀어졌다.
“칫, 완전 엉망이네.”
-스르륵.
구속에서 풀린 아프로디테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불만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자신을 풀어 준 페르세포네를 향해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지상에서 준비 중인 계획이 있다. 우린 그 계획을 돕기 위해, 성운의 시선을 이곳으로 집중시켜야 한다.”
페르세포네가 아프로디테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순혈 의회 일원인 로키가 세운 계획 중 하나.
에스라 대륙, 지상에서 벌이는 아주 중요한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을 성공해 내기 위해, 성운들의 시선을 저승에 붙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가장 성가셨던 하데스를 처리한 이상, 놈들도 우리를 쉽게 몰아내지는 못하겠지.”
페르세포네가 자신이 직접 소멸시킨 그녀의 정인, 하데스를 언급하며 말했다.
자신의 정인을 제 손으로 죽였음에도, 죄책감 등의 감정은 일절 없어 보였다.
그런 페르세포네를 본 아프로디테는.
“후후, 그거 알아? 하데스는 네게 진심이었다는 거.”
많은 의미가 함축된 미소를 섞어 말했다.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그녀는 타인의 감정 중 사랑에 관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가끔 올림포스 성지에 모습을 드러내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페르세포네를 대하는 하데스의 태도와 마음은 ‘진심 어린 사랑’이었다.
그런 진실을 이야기하는 아프로디테의 말에.
“날 강제로 취한 남자가?”
페르세포네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남자의 마음 따위,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아.”
아프로디테가 전한 ‘진실’ 따위 아무런 상관도, 관심도 없다는 듯한 모습.
“우라노스나 크로노스나, 제우스나, 그 형제 자식들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다.”
페르세포네가 잔잔한 증오를 담아 말을 잇자.
“그 형제 자식들의 일원인 네가 그리 말할 자격은 있고?”
아프로디테가 재밌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 말에 페르세포네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는.
“우린 올림포스의 피가 아닌, 고귀한 피로 선택받은 이들이다.”
자신은 올림포스의 일원이 아닌, 고귀한 ‘순혈자’임을 강조하며 답했다.
그리고.
-저벅.
아프로디테가 갇혀 있던 타르타로스 감옥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 페르세포네의 뒷모습을 본 아프로디테는.
“재밌네, 후후…….”
재밌다는 듯 미소를 흘리며 페르세포네를 따라 나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