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계승자-605화 (605/726)

#605화

의학의 신이 소멸한 다음 날.

“…….”

-탁.

처용이 태룡사의 병원 입구 앞에 세워진 동상을 보며 짧게 묵념을 올렸다.

인자한 표정과 미소 어린 눈빛이 돋보이는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크기의 동상.

실제 사람과 같은 크기로 만들어진 화강암 동상은 다름 아닌 의학의 신을 형상화한 모습.

처용이 의학의 신을 기리기 위해 정교하게 만든 동상이었다.

성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처용을 도와준 것.

그에 따른 감사의 표시이자, 의학의 신을 잊지 말자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상의 앞에는 정교한 문자가 적힌 1미터 크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 비석 안에 적혀 있는 문자는 바로 ‘히포크라테스 선서’.

이 비석은 언문이 의학의 신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직접 권능으로 새겨 넣은 것이었다.

짧게 묵념을 마친 처용이 동상과 비석에 쓰인 선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저벅.

발걸음을 돌려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의학의 신이라는, 병원에 있어 거대한 인물이 사라졌음에도.

-응급처치는 여기서 끝내고 흉부외과 쪽으로 넘겨서 정밀 수술을…….

-아직 실명이라 확정하긴 이릅니다. 안과 전문의 출신 힐러에게…….

이종국의 병원은 평소와 같이 바쁘고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병원의 모든 직원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었다.

-저벅. 지이잉.

처용이 어제 찾았던 병원의 VIP 병동을 다시 찾았다.

바로 어제 해결하지 못한 태민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병실 문 근처로 처용이 다가가자.

“아, 오셨습니까?”

마침, 병실 밖에서 환자들의 차트를 살피던 이종국이 처용을 반기며 말했다.

그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병원을 찾은 환자를 위해 평소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처용은 이종국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아직, 아무 일도 없으시죠?”

진지한 목소리로 이종국에게 물었다.

“네, 아직은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이종국이 처용의 질문을 이해한 듯,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의학의 신이 소멸하기 직전, 그는 처용을 통해 의학의 신명을 이종국에게 넘겼었다.

하지만, 의학의 신명을 계승 받은 이종국은 당장 큰 변화가 없었다.

아직 이종국이 신명의 힘을 다룰 정도로 격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의학의 신명은 원장님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처용은 이종국에게 의학의 신과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밝히고 신명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의학의 신명을 각성하고 그 길을 따라 걷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동시에.

-의학의 신명이 버겁다면, 그 짊을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종국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가 추후 의학의 신명을 짊어지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처용은 이종국이 의학의 신명을 거부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그런 처용의 예상이 맞다는 듯.

-그분께서 저희와 병원을 위해 희생하신 것처럼, 저 역시 그분을 위해 의학의 이름을 이을 것입니다.

이종국은 강하게 다짐하듯 처용의 말에 대답했다.

-이건, 마지못해 짊어지는 게 아닌, 오롯이 제 ‘선택’입니다.

의학의 신처럼,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겠다는 이종국의 말에 처용이 미소를 지었었다.

“추후 신명이 각성하고 궁금하신 부분이 생긴다면, 언제든 물어보십시오.”

처용은 이종국을 향해 언제든 도와주겠다고 말하고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병상 위에는 어제 보았던 헌터들이 있었다.

하지만, 처용이 찾던 태민은 본래 그가 있던 자리인 맨 끝이 아니라.

“오셨습니까? 처용 님.”

병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오른쪽 첫 번째 침상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민머리에 다소 야윈 듯 보였지만, 어제보단 부상이 많이 회복된 듯한 모습이었다.

태민이 처용에게 인사를 건네자.

“여, 왔어? 이제 거의 다 나았다고!”

오른쪽 첫 번째 침상 위에 앉아 있는 환자.

진호가 처용을 향해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넸다.

처용은 인사를 건네는 태민과 진호에게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당신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태민의 병상 앞에 서 있는 여인.

아니, 머리에 네 잎 클로버 화관을 쓴 성좌.

행운의 여신, 티케를 향해 물었다.

왜 성좌인 그녀가 여기 병실에 찾아온 것인지, 의문이었으니까.

[나는 여기 오면 안 돼?]

티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되묻자.

“제 입장에선, 당신이 여기를 찾아올 이유가 딱히 없으니까요.”

처용이 의문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때.

“내 병문안으로 온 거야.”

진호가 처용의 의문에 답하듯 입을 열었다.

“이진호 헌터를요? 성좌인 행운의 여신이?”

처용이 고개를 기울이며 재차 의문을 표했다.

성좌인 티케가 이진호의 병문안을 왔다?

그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양반이 대악마한테 죽을 뻔한 거 내가 구해 줬거든.”

진호가 전쟁 당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아,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처용이 기억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지의 상황과 피해 상황을 살필 때, 그에 관한 보고를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기껏 죽을 뻔한 성좌 목숨 구해 주었는데, 병문안으로 퉁 치려고 하는 것 같거든?”

진호가 무언가 불만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티케를 눈짓하며 말하자.

[기껏 생각해서 와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티케가 역정 어린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럼 내가 틀린 말 했어요!?”

그런 티케의 말에 진호 역시 목소리를 높이며 반박하듯 말했다.

[이이! 내가 준 거 덕분에 대악마를 이겨 놓고…… 내가 준 거 다시 내놔!]

티케가 진호의 왼팔 어깨에 문신처럼 붙어 있는 네 잎 클로버 문양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미 내 몸에 완전히 이식돼서 다시 못 줍니다. 그리고 죽을 뻔한 댁 구해 준 건 나거든요?”

진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티케의 말에 반박하듯 받아쳤다.

성좌인 티케를 어려워하기는커녕, 되려 그녀를 향해 불만을 담아 따지는 모습.

결국.

“성좌로서 준 것도 없으면서, 줬다 뺏는 건 뭐 하는 인성질입니까?”

[성좌의 가호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줄 알아!? 누가 내 걸 받으랬어?]

“나라고 이런 허접한 가호를 받고 싶은 줄 아셨어요?”

[이게 진짜-!]

병실 내부에서 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말싸움이 길어졌다.

“저…… 병원 안에서 소란은 자제해 주십시오.”

옆에서 지켜보던 태민이 곤란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둘을 만류했다.

태민의 만류에 서로를 향해 씩씩거리던 진호와 티케가 말싸움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진호 헌터, 혹시 성좌의 가호가?”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처용이 진호를 향해 물었다.

“행운의 여신, 아무리 봐도, 이 양반이지?”

진호가 처용의 말에 즉답하며 왼손으로 옆에 있는 티케를 가리켰다.

평범한 사람이 헌터로 각성할 때, 그 사람은 다양한 성좌의 가호를 무작위로 부여받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좌의 가호가 시스템을 타고 ‘적합자’에게 깃드는 것이었다.

진호가 받은 가호는 다름 아닌 ‘행운의 여신’의 가호, 바로 티케였다.

[적합한 가호를 받고 각성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겨야지.]

진호의 말에 티케가 팔짱을 끼며 답하자.

“감사는 무슨!? 이 약해빠진 가호와 스킬을 받은 내가 유진이랑 백호 형 따라잡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진호가 진심 어린 짜증과 분노를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가호가 적합자에게 스며드는 건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런 진호의 분노와 불만이 가득한 외침에 티케 역시 다시끔 목소리가 높아졌다.

병실 내부에서 또다시 소란이 커지려 할 때.

-우우웅!

중앙의 텔레포트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마법진을 이용해 병실 내부로 찾아온 것.

-우웅! 화아아!

마법진에서 퍼진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난 이는.

[너도 여기에 있었을 줄은 몰랐구나.]

다름 아닌 아테나였다.

아테나가 처용을 바라보며 반가움을 표하자.

“아테나 님? 왜 여기에?”

[아니, 내가 왔는데 굳이…….]

처용이 의외라는 듯 의문을 읊조리며 물었고 티케도 당황스러움을 표했다.

[나의 친구를 구해 주었으니, 내가 직접 찾아와 감사를 전해야지.]

아테나가 처용과 티케의 말에 대답하듯 말하고는.

[티케를 구해 주었다 들었다. 정말 고맙구나.]

진호에게 다가오며 감사를 전하듯 말을 이었다.

“……올림포스 주신께서 직접 감사를 전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 바라는 것이 있느냐?]

얼떨결에 진호가 답하자, 아테나가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티케는 아테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구해 준 만큼, 보답을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뭘 막 요구하기가 좀 그렇지요?”

진호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읊조렸다.

조금 전, 티케에게 보이던 말투와 행동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

[같은 성좌인데, 나를 대할 때 하고는 태도가 좀 다르다?]

티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진호를 향해 묻자.

“성좌라는 자각이 있다면, 그 위엄에 걸맞는 태도를 보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행운의 여신님?”

진호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아, 혹시 올림포스에서 이걸 가공해 주실 수 있을까요?”

조금 전 아테나가 했었던 말에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웅.

진호가 옆에 있는 작은 큐브 형태의 아티팩트, 아공간 배낭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자.

-스르륵. 우웅!

진호의 손아귀에 길고 납작한 형태의 검은 무언가가 나타났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잘려 나간 어떤 생물의 뿔과 같은 모습.

뿔의 겉에는 은은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고.

-우우웅!

그 빛이 뿔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을 막아 주는 듯 보였다.

“……이거 푸르카스의 뿔?”

처용이 진호가 꺼내 보인 뿔을 살펴보며 말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진호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대악마 뿔.

수확의 대악마 푸르카스의 잘려 나간 왼쪽 뿔이었다.

“어, 내가 이 상처와 맞바꿔서 얻은 전리품이지.”

진호가 처용의 말에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펴며 말했다.

전쟁 막바지에 태룡사로 침입하여 최후의 공격을 벌인 악마들.

진호는 그런 악마들 중, 대악마인 푸르카스와 대치했었다.

무려 본신 상태의 대악마를 상대했기에, 며칠 입원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던 것.

하지만, 진호 역시 푸르카스에게서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선사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뿔.

“루돌프 아저씨한테 맡겨 볼까도 생각해 봤는데, 이게 좀 위험해 보여서 말이야.”

진호가 푸르카스의 뿔을 보며 말을 이었다.

본래는, 대악마의 뿔을 이용해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악마의 뿔은 그냥 놔두기만 해도, 짙은 마기를 스멀스멀 내뿜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진호는 성녀가 만든 성수에 강기까지 섞어 뿔에 둘러 보관하고 있던 상황.

마기에 내성이 없는 이들에게 뿔을 맡기기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임시로 보관만 해 두고 어찌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테나 님이 좋은 제안을 해 주셨네요.”

처용이 진호의 말을 잇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올림포스의 저력을 이용해 그것을 무구로 바꾸고 싶다는 의미인가?]

아테나가 진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채며 물었다.

“네, 가능하면 상대에게 잘 보여 줄 수 있는 방어구 쪽으로요.”

진호가 자신의 어깨와 팔꿈치 쪽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는 태초의 조각을 가공하여 만든 쌍검이 있기에, 다른 무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굳이 가진 무구 중 보충할 것이 있다면, 방어구와 보조장비 쪽이었다.

“다음에 놈을 만나면, ‘이번엔 네놈의 머리를 수확해 주마!’라고 선전포고를 하고 싶거든요.”

[대악마를 사냥하는 사냥꾼(Hunter)다운 포부로구나.]

이어지는 진호의 말에 아테나가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우우웅. 탓.

신력으로 푸르카스의 뿔을 감싸며 들어 올렸다.

[내가 책임지고 올림포스 최고의 대장장이에게 직접 부탁하마.]

“기대하겠습니다. 아테나 님.”

진호가 아테나의 말에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으음?]

아테나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받은 듯,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그…… 그게 무슨.]

돌연, 아테나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침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감지한 처용이 아테나에게 묻자.

[……헤르메스, 이쪽으로 와라.]

-우우웅.

아테나가 손을 앞으로 뻗고 신력을 옅게 흘리며 말했다.

그러자.

-우웅. 파아-!

허공에서 공간이 열리더니, 헤르메스가 나타났다.

[아, 너도 여기에 있었구나.]

헤르메스가 아테나의 옆에 있던 처용을 보며 말하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처용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헤르메스는 다급한 표정과 더불어,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무언가…… 진심으로 심각한 일이 벌어진 듯한 분위기였다.

처용의 물음에 헤르메스가 아테나를 바라보았고 아테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올림포스에서 관할하는 저승의 성역이…… 악신들에게 점령되었다.]

헤르메스가 침음을 삼키며, 조금 전 들어온 소식을 전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처용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헤르메스에게 물었다.

“저승은 승기를 잡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태룡사가 악신들과 악마들에게 습격을 받을 당시.

저승 역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배신자로 확정된 염라가 더 쓸데없는 짓을 벌이기 전에 잡아야 했으니까.

이 때문에, 올림포스 저승의 신인 하데스와 헬리오폴리스 저승의 신인 아누비스가 나섰었다.

저승을 관장하는 두 대신이 직접 움직였기에, 염라는 구석에 몰리듯 추적당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데스와 아누비스가 전했던 소식은.

-곧 염라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배신자인 염라를 곧 잡아낼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전황이 유리하던 와중에, 올림포스 저승의 성역이 적들에게 함락되었다?

처용은 헤르메스가 하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헤르메스는 그런 충격적인 소식조차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했다.

그리고.

[하데스 님이…… 소멸하셨어.]

이어지는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자.

“……뭐라고 하셨습니까?”

인상이 와락 일그러진 처용은 충격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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