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공간.
일렬로 나열된 로마식 신전 기둥의 일부만이 보일 정도로 캄캄한 복도.
-사라락.
그 복도를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아가는 여성.
그 발걸음을 따라 긴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쓸려 나가는 소리조차도 아주 희미하게 울렸다.
“실패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앞을 나아가는 여성, 아니 여신이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잔잔한 분노가 일렁이는 굳은 목소리임에도.
“쓸모없는 하계종 같으니라고.”
요염함이 깃든 높은 톤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군가를 강하게 탓하는 듯한 여신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탁.
소리 없는 여신의 발걸음이 복도 끝, 닫힌 문 사이로 푸른 빛이 비치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끼이이이!
닫힌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그러자,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화로들이 외곽에 나열된 공동이 드러났다.
푸른 화로의 불빛으로 인해, 어둠이 내려앉았던 복도에 빛이 들어왔고.
-스스스.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여신의 얼굴 또한 드러났다.
웨이브진 긴 금발을 늘어뜨린 핑크빛 눈동자의 아름다운 여인.
“칫, 성격 더러운 년의 실수를 내가 수습하게 만들다니.”
아프로디테가 붉은 립스틱이 짙게 칠해진 듯한 입으로 분노 서린 목소리를 쏟아 내었다.
그런 그녀가 바라보는 눈앞에는.
“…….”
누군가가 검은 철창에 갇혀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푸른 화로가 나열된 방 가운데에 있는 철창과 그 안에 갇힌 죄수.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존재를 가둔 감옥 같은 모습이었다.
“쯧”
아프로디테가 짜증이 일렁이는 듯, 혀를 차고는.
-스르륵.
공동 중앙의 감옥을 향해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감옥과 점점 가까워지자, 그 안에 갇힌 이의 모습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퀭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인 채, 긴 금발을 늘어뜨린 여자.
감옥 안에 갇힌 이는 바로 제니퍼 로스차일드.
올림포스의 배신자이자 순혈 의회 일원인 아르테미스의 신관이었다.
“이 미개한 하계종들이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감히 신을 번거롭게 만들어?”
아프로디테가 제니퍼 앞에 서서 그녀를 노려보며 분노 서린 말을 내뱉자.
“…….”
제니퍼가 고개를 들고 퀭한 눈빛을 보이며 아프로디테와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누굴 함부로 올려다보는 거냐?”
아프로디테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그리고.
“두 눈과 혀를 뽑고 바닥에 머리를 박아 자살하렴.”
-스스스.
미의 여신으로서 지닌 권능, 매료의 권능이 일렁이는 신력을 내뿜으며 요염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요사스러운 핑크빛의 신력이 감옥 내부로 흘러 들어가 제니퍼를 감쌌다.
그러자.
-스르륵.
제니퍼가 제 얼굴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아프로디테의 매혹에 당해 잔혹한 명령을 따르려는 듯한 모습.
아프로디테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제니퍼의 죽음을 지켜볼 때.
“……지랄한다. 이 씨발년이.”
-샥.
제니퍼가 얼굴로 향하던 제 오른손의 가운데 중지를 펴며 욕을 내뱉었다.
여전히 퀭한 눈빛의 제니퍼였지만, 그 동공 속에는 깊은 증오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을 버린 신을 향한 증오가 깊어진 듯한 모습.
게다가 아프로디테의 매료 또한 걸리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뭣!?”
그런 제니퍼의 모습에 아프로디테가 당황스러움을 토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지금 있는 장소는 올림포스 성역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특수 감옥이었다.
신계에 속해 있는 장소이니만큼, 지금 이곳에 찾아온 아프로디테는 본신 상태였다.
그런 본신 상태인 아프로디테가 발휘하는 권능이 제니퍼에게 통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 아프로디테가 인상을 찌푸릴 때.
-파지직. 화륵.
공동 기둥 위에 걸쳐져 타오르는 푸른 화로 아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 작은 벼락이 튀더니, 불꽃이 타올랐다.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작은 불꽃에 아프로디테가 고개를 휙 돌리며 그곳을 노려봤고.
“쓰읍-후~ 이거 아주 살벌하군. 안 그래?”
-타닷. 치이이-.
곰방대에서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으며 미소 짓는 제우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
어둠 속에서 제우스가 나타나자, 아프로디테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제우스는 경악을 드러내는 아프로디테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바라보고는.
“그래, 망할 우라노스 영감탱이의 순혈 의회 일원 자격이 어디로 넘어갔나 했었는데-.”
-탁.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서며 앞으로 한 발 걸어 나왔다.
“그걸, 네게 넘겼을 줄이야. 아프로디테.”
올림포스의 초대 주신이자 올림포스 최초의 순혈 의회 일원이었던 우라노스.
제우스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지닌 비밀을 언급하며 걸어 나오자.
“……제우스.”
아프로디테가 제우스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야, 이젠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않는구나? 이 패륜아 녀석들이?”
그 말에, 제우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패륜을 누구한테서 배웠을까요?”
아프로디테가 조금씩,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뒷걸음을 치며 말했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
제우스는 진심이 전해지는 아프로디테의 말에 고개를 젓고는.
“도망치려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전하듯 말을 이었다.
그런 제우스의 말에, 아프로디테가 한쪽 눈썹을 순간 찌푸리며 반응을 보이자.
“후, 이 빌어먹을 딸아. 내가 여기서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제우스가 많은 감정이 일렁이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올림포스의 ‘안주인’들이 그냥 보내줄 것 같았느냐?”
그의 말이 끝난 순간.
-화륵! 화륵! 화륵! 콰아아!
기둥에 걸린 화로들이 일제히 불꽃의 크기를 키우더니, 주변을 감싸며 타올랐다.
동시에.
-화륵! 스르륵.
주변 일대를 포위한 불꽃이 일부분 걷어지더니.
“아프로디테.”
-화르륵!
양손에 성화(聖火)가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신.
올림포스의 대신급 성좌 중 하나이자, 불과 화로의 여신인 헤스티아가 나타났다.
그리고 앞서 나온 헤스티아의 뒤로.
-저벅.
녹색 빛이 일렁이는 갈색 웨이브 머리의 여신
땅과 농업의 여신이자 대신급 성좌인 데메테르와.
-탓.
아주 짙은 금발을 묶어 올린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신.
제우스의 첫 번째 아내이자 군림(君臨)의 여신, 헤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 여신을 시작으로.
-화륵! 화륵! 저벅.
성화의 벽이 일부분 걷어지며, 다른 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올림포스에 속해 있는 신들.
그중에는.
“어째서……! ”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의 남신.
아프로디테와 유사한 외모가 돋보이는 그는 사랑의 신인 에로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십시오!”
아프로디테의 자식이기도 한 에로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아프로디테가 거칠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함정…… 이었다고?”
제우스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리고.
-……우우웅! 쿠구구!
새까만 기류가 일렁이는 핑크빛의 신력을 내뿜었다.
본래 그녀가 지닌 신력이 아닌, 사악한 무언가가 뒤섞인 듯한 기운.
“……파멸의 권능.”
“잘도 이런 타락한 기운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있었구나!”
헤스티아와 헤라가 그 사악한 기운, 악의 종주의 힘을 알아보며 소리쳤다.
“……확실히, 그 무시무시한 놈의 힘이 맞네.”
제우스가 허망함이 일렁이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제 자식의 배신과 타락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상황.
결국.
“……스퀴테.”
-우웅. 스르릉!
제우스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스퀴테를 불러내 손에 쥐었다.
***
태룡사 상단에 침투한 헬레나가 완전히 무력화되자.
[……그대의 계획이 실패한 것 같군?]
성지의 상단을 짧게 응시한 황룡이 입을 열었다.
그조차도, 조금 전까지 태룡사 상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 황룡은 악의 종주가 직접 나서지 못하게 그를 저지하고 있는 상황.
다른 곳을 신경 써서 감시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태초룡인 유리아가 직접 나서기 전까지, 태룡사 상단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침입자를 눈치챈 유리아가 나서 준 덕분에, 상황이 잘 마무리된 듯 보였다.
그 증거로.
[…….]
-쿠구! 쿠구구!
악의 종주에게서 흘러나오는 파멸의 신력이 진동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한 모습.
게다가.
-쿠구! 쿠구구!
-콰콰-!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태룡사 하단도 점점 전선이 교착화되고 있었다.
어느 한쪽의 세력이 크게 우세를 점하지도, 열세를 점하지도 않는 모습.
교착화된 전선의 상황은 악의 종주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태초신의 성지, 야드의 안배를 부숴 버리는 것.
이것이 그가 원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과 대천사를 이용한 배신도.
태룡사 상단에 잠입한 헬레나와 아프로디테의 계획도 모두 저지된 상황이었다.
결국.
[……이리 발악한다고 하여, 정해진 종말을 거스를 순 없다.]
침묵하고 있던 악의 종주가 입을 열었다.
-쿠구구!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직접 나서려는 듯, 황룡의 저지를 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대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우우웅!
황룡 역시, 그런 악의 종주를 저지하려는 듯, 더 짙은 신력을 내뿜으며 말했다.
[알고 있음에도, 나를 방해하려는 것인가?]
악의 종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낮은 목소리로 묻자.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세.]
황룡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포기하고 돌아가게. 이번에도 자네가 졌으니.]
-우우웅!
오른손에 쥔 여의주에 금빛의 파동이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쿵! 쿠구구!
악신들의 진영 한가운데 박혀 있는 새하얀 기둥.
로키가 지키고 있던 비프로스트가.
-쿠구구!
금빛에 휩싸인 채, 허공 위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뭣-!?]
-스릉. 우우웅!
비프로스트를 지키던 로키가 순간 당황스러움을 드러내며 궁니르로 저지하려 했지만.
-우우웅! 파아-!
금빛이 일렁이는 기운이, 로키의 검녹색 신력을 튕겨 냈다.
허공을 부양하던 비프로스트가 향하던 곳은 다름 아닌, 황룡이 있는 방향이었다.
[어딜.]
-후욱! 우우웅!
그 모습을 본 악의 종주가 허공을 부양하는 비프로스트를 향해 손을 뻗으며 파멸의 힘을 내뿜었다.
금빛이 일렁이는 비프로스트 위에 검붉은 기운이 뒤섞였고.
-파직! 파직! 파지지직!
서로 마찰음을 내며 전류를 튀기기 시작했다.
마치, 황룡과 악의 종주가 비프로스트를 놓고 힘 싸움을 벌이는 듯한 모습.
[그대처럼, 나 역시 야드의 권한을 지닌 존재. 비프로스트에 간섭할 자격이 있지.]
황룡이 비프로스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태초신의 성지, 이곳에서만큼은, 새로운 관리자인 내가 자네의 권한보다 우위일세.]
확신 어린 황룡의 목소리가 울리자.
-스스스!
비프로스트를 감싼 두 기운 중 금빛의 기운이 검붉은 기운을 조금씩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실패할 바엔, 차라리-.]
-쿠구구!
그 모습을 본 악의 종주가, 비프로스트를 향해 뻗은 손아귀를 강하게 쥐며 읊조렸다.
그러자.
-쿠구구! 파직! 파지지직!
비프로스트가 거침없이 진동하며 전류를 내뿜기 시작했다.
마치, 에너지가 과부하되어 터지려는 듯한 모습.
[이 우주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생각인가?]
비프로스트의 상태를 차분하게 바라본 황룡이 입을 열었다.
[그건 자네의 ‘목적’이 아닐 텐데?]
악의 종주에게 ‘목적’을 묻는 황룡의 말에.
-……!
돌연, 악의 종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파멸의 신력이 꿈틀거리며 망설임을 드러냈다.
-파지직! 파직! 파직!
비프로스트가 불안정한 전류를 내뿜으며 계속 진동을 일으켰고.
-우웅!
-쿠구구!
황룡과 악의 종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이 서로 충돌하며 마찰을 일으키는 상황.
당장이라고 무슨 일이 벌어질 듯, 주변 일대가 흔들리며 점점 심하게 요동쳤다.
그 순간.
-삑.
맑고 짧은 울음소리가 비프로스트 근처에서 들려왔다.
서로를 노려보던 황룡과 악의 종주의 시선이 일순간 비프로스트로 향했고.
-삐, 삐익?
거대한 두 존재의 시선을 받은 유리아가 멈칫하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앙증맞은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비프로스트에 손을 대려는 듯한 모습.
장난을 치려다가 어른들에게 발각당한 아이처럼, 애매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
악의 종주가 유리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눈동자를 가늘게 떴고.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 말해 주고 싶다.]
황룡이 작금 유리아가 보인 행동을 보고 생각을 읽은 듯 읊조리며 말했다.
-스륵. 스륵.
유리아는 오드아이를 좌·우로 움직이며 황룡과 악의 종주를 번갈아 응시했고.
-……툭.
오른손 손가락을 뻗어 비프로스트를 가볍게 툭 터치했다.
[……!]
[……!]
그 모습을 본 황룡과 악의 종주가 짧은 순간 동시에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비프로스트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
여기서 잘못 건드렸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파지직. 파직. 파직.
비프로스트는 큰 변화가 없다는 듯,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전류를 내뿜고 있었다.
[…….]
[…….]
“…….”
몇 초간,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너는-.]
악의 종주가 입을 열며 유리아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
-쩌적!
비프로스트의 겉면이 갈라지며 금이 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