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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593화 (593/726)

#593화

순혈자를 모욕하는 말이 태민에게서 쏟아진 순간.

-스스스!

헬레나가 보인 태도는 다름 아닌 분노였다.

억울함이나 누명으로 인한 역정 어린 분노가 아니었다.

바로 순혈자들을 모욕한 태민에게 살의가 쏟아지는 ‘진심 어린 분노’였다.

순혈자들을 맹신하는 광신도 집단.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광신도들이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아니길 바라기도 했는데, 그럴 리가 없지…….”

태민은 불길한 자신의 감이 맞은 상황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탁. 탁. 탁탁탁.

조심스럽게 왼쪽 엄지를 움직여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

협회 이사진 전용의 헌터 라이센스를 다섯 번 두들겼다.

두 번은 시간 차를 두고, 그 뒤에 세 번은 빠르게 두들겨 보낸 신호.

비상사태를 알리는 암호 코드였다.

그러나.

“……제길.”

태민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라이센스를 눈짓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올림포스 보안 시설도 마비시킨 권능이다. 네놈들의 쓰레기 같은 기술력 따위는…….”

그런 태민을 본 헬레나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하고는.

-끼이. 스스스!

미리 열어 두었던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더 짙은 기운을 뽑아내었다.

헬레나는 태민에게 은신을 들켜 당황한 와중, 미리 판도라의 상자를 조금 열어 두었었다.

은신이 들킨 것은 자신의 실수였지만, 그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

바로.

‘저 안에…… 저 안에 있구나!’

그녀가 이곳에 잠입한 진짜 이유.

태초신의 성역과 이어지는 입구가 느껴지는 장소.

그곳이 바로 눈앞에 있는 전각 안이었다.

분명, 태초신의 성역과 이어지는 입구가 한 번 이상 열렸거나 오랜 시간 열려 있었다는 증거.

주목표를 찾은 이상, 거슬리는 이들을 치워 버리고 해야 할 일을 하면 되었다.

게다가.

“김태민, 그 변종을 돕는 하계종.”

눈앞에서 자신의 은신을 간파한 남자는 한국 헌터 협회 태룡사 지부의 책임자였다.

태민은 헬레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정확히는 순혈 신도의 일원들에게 잘 알려진 자였다.

처용에게 협력하는 인간.

순혈자들에게 있어 거슬리는 인간.

기회가 되면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이 중 하나였다.

심지어, 태민은 순혈자들이 선별한 거슬리는 인간 중, 가장 약하다고 분류된 존재.

눈앞에 있는 이가, 백호나 진호 등 최상위 A급 헌터라면 상당히 성가신 상황이었지만.

“제대로 된 공격 스킬조차 없는 쓰레기가 뭘 할 수 있을까?”

태민은 비전투 클래스 헌터.

그는 직접적인 전투와는 거리가 먼 헌터였다.

태민은 군사와 책사로서 뛰어난 인물일 뿐, 장수는 아니었으니까.

“고귀한 분들의 위대한 대업을 위해, 지옥으로 떨어져라.”

-우우웅!

헬레나가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신성력을 스멀스멀 내뿜으며 말했다.

“니들 샷.”

-슈르르륵!

요사스러운 기운이 일렁이는 핑크빛의 신성력이 실처럼 변하며 서로 뭉쳐 들었고.

-촤자자작!

이내 수십 개의 바늘로 변하며 태민을 향해 쏟아졌다.

-탁. 우우웅!

태민은 즉시 왼손의 팔찌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해 보호막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탓. 촤아악!

옆으로 재빠르게 굴러 바늘을 피해 내었다.

순식간에 쇄도해 온 바늘을 전부 피한 것은 아니었지만.

-치직! 치지직!

레전더리 등급의 아티팩트 팔찌, 악몽을 부수는 자에서 발동된 보호막이 막아 주었다.

‘피하지 않았으면…… 위험했다!’

태민은 보호막의 절반을 뚫고 들어온 핑크빛의 바늘들을 보며 속으로 침음을 흘리고는.

‘적은 전투 마법사 클래스 헌터, 직접 공격에 당하는 것은 좋지 않다.’

침착하게 헬레나의 스킬과 전투 방식을 분석했다.

하지만 탐정으로서 본능적으로 상대를 분석한다고 해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비전투 클래스,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에 상대는 신의 힘을 내려받은 신관이면서 자신보다 레벨이 높아 보였다.

게다가.

‘디버프와 결계를 사용할 가능성도 크다.’

헬레나의 손에 들린 작은 상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판도라의 상자를 노려보며 긴장감 어린 침음을 흘렸다.

태민이 헬레나를 노려보며 긴장감과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지 고민할 때.

“으음, 저 약해 빠진 하계종 따위가, 저렇게 날쌜 리가 없는데…….”

헬레나 역시 의문 어린 목소리로 침음을 읊조렸다.

태민은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여 바늘을 피해 내는 것이 아니었다.

바늘이 가장 적게 쇄도해 오는 부분을 재빠르게 간파해 그 방향으로 구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바늘을 피하고 소수의 바늘이 몸에 닿는다고 해도.

-팅! 끼긱!

그 바늘들은 태민을 두른 보호막을 깨지 못하고 박혀들 뿐이었다.

“……고귀한 분들을 위해 죽어라.”

-우웅. 촤자자-작!

헬레나가 다시 신성력을 모아 태민을 향해 바늘을 쏘아 보내자.

“악신의 졸개 따위가 고귀함은 무슨…….”

-샥! 타탓!

태민이 다시 한번 바닥을 구르며 대부분의 바늘을 피해 내고 일부는 보호막으로 막아 내었다.

그 모습을 본 헬레나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 천박한 하계종 따위가.”

-웅! 우우웅! 촤자작!

분노 어린 낮은 목소리를 흘리며, 조금 전보다도 많은 수의 바늘을 쏘아 보냈다.

“축지!”

-탓! 촤아악!

태민이 경각심 어린 표정을 짓고는 수련탑에서 익힌 보법 중 하나, 축지를 사용하며 재빠르게 피해냈다.

눈으로는 쇄도해 오는 바늘들을 응시하고 가장 바늘이 적게 날아오는 부분을 향해 축지로 몸을 피한다.

이상적인 판단과 행동을 보였지만.

“큭……!”

-주륵.

태민의 허벅지와 어깨, 뺨에 얇고 붉은 선이 그어지며 핏물이 흘러내렸다.

모든 바늘을 온전히 회피하지 못한 것.

거기에 더해 바늘의 위력이 더 올라갔는지, 보호막을 뚫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이사님! 이사님도 이 안으로-!”

대웅전 안에서 작금의 상황을 본 연수가 태민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나오지 마십시오!”

태민은 걱정을 내비치는 연수를 향해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절대로…… 거기서 나오면 안 됩니다.”

“…….”

명령에 가까운 단호한 외침에 연수가 입구에서 한 발 멀어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작금의 상황 속에서 일반인인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어도, 나서면 태민의 방해만 될 뿐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서 나오지 마십시오.”

태민은 헬레나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대웅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를 이었다.

대웅전은 그저 평범한 구 종교 사찰 건축물이 아니었다.

태룡사가 성지로 변하고 그에 따라 영향을 받은 사찰이었다.

대웅전 안에는 이 성지를 대표하는 세 대신의 신상이 모셔진 장소.

태룡사에서 흐르는 신성한 힘이 모여드는 장소 중 하나였고 그 힘이 사찰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촤자자작!

태민을 죽이기 위해 신성력을 뭉쳐 만든 바늘을 마구잡이로 쏘아 보내는 헬레나의 스킬.

신성력의 바늘들이 태민을 지나쳐 대웅전 정문과 기둥에 닿았음에도.

-까강! 파파팟!

바늘은 대웅전의 기둥과 문에 박히기만 할 뿐 뚫지는 못하고 있었다.

열려 있는 정문을 향해 날아간 바늘도,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튕겨 나갔다.

무형의 기운이 대웅전 전체를 보호하는 듯 보였다.

태민 역시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그 기운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계속 공격을 받으면 위험하다.’

태민은 대웅전에 둘러진 보호막이 무적은 아니라 판단했다.

계속 공격을 받으면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대웅전의 보호막이 깨지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안에서 보호를 받는 이들은 모두 일반인들.

헬레나의 손짓 한 번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연약한 이들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특별 보호 대상’, 연수까지 있는 상황.

지금은, 헬레나의 공격을 자신에게 유도하고 피해 내며 시간을 끄는 것이 나았다.

분명, 작금의 이변을 알아차리고 누군가가 와 줄 것이라 믿었으니까.

“축복조차 받지 않은 벌레들을 보호하려 애쓰는 건가?”

헬레나가 자신의 공격을 또 한 번 피해 낸 태민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태민이 뒤에 있는 일반인들을 지키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 행동을 비웃는 것.

그런 헬레나의 비웃음에.

“헌터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다.”

태민이 혐오스러움을 가득 담아 읊조리며 답하고는.

-딸깍. 주르륵.

허리춤에 채워진 아공간 주머니에서 재빨리 회복 포션을 꺼내 상처 부위에 뿌렸다.

굳이 마시지 않고 뿌리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치유하는, 태룡사에서 자체 제작한 포션.

태민은 가진 도구와 수단을 전부 활용하여 끈질기게 버틸 생각이었다.

“신의 병사로 선택받았으면, 마땅히 신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법이다!”

-우우웅!

헬레나가 더 짙은 신성력을 스멀스멀 내뿜으며 말하자.

“나를 각성시켜 준 신께서 이 자리에 있으셨다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스륵. 철컥!

태민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드워프들이 만든 양산형 한 손 방패를 꺼내 쥐며 입을 열었다.

탐구자의 가호.

태민이 신의 가호를 받고 각성했을 때, 직접 확인했었던 이명이었다.

그리고 태민은 자신을 각성하게 해 준 성좌, ‘탐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하하.

그 성좌와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살아생전, 한반도의 왕 중 가장 위대한 왕, 대왕(大王)으로 역사에 기록된 존재.

이제는 신이 되어 후손들과 함께 악신들과 맞서 싸우는 성좌.

“지랄하고…… 자빠졌네!”

태민이 언문을 떠올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바퀴벌레 같은 놈이, 더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겠다.”

헬레나는 끈질기게 버티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태민이 거슬린다는 듯, 읊조리고는.

-끼이익. 스스스!

판도라의 상자를 조금 더 열며, 안에 저장된 기운을 밖으로 흘려보냈다.

온갖 색들이 뒤섞여 칙칙한 빛이 일렁이는 기운.

그중에는.

-우우웅!

다른 색의 기운들을 압도할 정도로 불길함과 불쾌함이 느껴지는 검붉은 기운이 섞여 있었다.

피부에 난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사악하고 소름이 끼치는 기운.

‘악의 종주…… 그 존재가 하사한 힘일 가능성이 크다.’

태민은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식은땀을 훔치며, 상자 속의 기운을 분석했다.

조금 전, 태룡사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악의 종주, 조크 – 크타니드.

그가 내뿜는 사악한 기운과 아주 유사한 기운이, 헬레나가 든 상자에서 느껴졌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차올랐지만.

“……하는 수 없군.”

태민은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머리를 차분하게 식혔다.

동시에.

“한국 헌터 협회의 책임자인 나를…… 우습게 봤다간 큰코다칠 거다.”

-스르륵. 탓.

오른손에 만년필을 소환해 쥐었다.

그를 각성시켜 준 성좌, 언문이 선물이라며 전해 주었던 신물.

창시자의 만년필이었다.

태민은 오른손에 창시자의 만년필을 굳게 쥐고는.

“탐정의 서고 – 기록 용지.”

-촤라라락.

왼손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더미를 소환해 쥐었다.

“그깟 종이 더미로 뭘 하겠다는 거냐!”

어느 정도 기운을 뽑아 낸 헬레나가 판도라의 상자를 닫고는 태민을 향해 손을 뻗자.

-우웅! 촤라라락!

판도라의 상자에서 흘러나온 기운과 헬레나의 신성력이 뭉쳐져 날카롭게 벼려졌다.

이전, 그녀가 만들어 내던 바늘의 다섯 배는 많아진 숫자.

게다가 그 크기 또한 두 배는 커졌다.

날카로운 바늘 끝은 불길함이 확 전해지는 검붉은 기운까지 일렁이는 상황.

“죽어라!”

-촤자자자-자작!

헬레나가 태민을 향해 더욱 많아지고 위력이 강해진 바늘들을 쏘아 보내자.

-사가각!

태민은 재빨리 만년필로 왼손의 종이 더미 위에 문자를 휘갈긴 후.

“서류 복제!”

-촤라라락!

왼손에 들린 서류 더미를 앞으로 내던졌다.

날카롭게 쇄도해 오는 바늘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듯, 휘날리는 종이 더미들.

당연히 얇은 종이가 길고 날카로운 바늘을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탁! 찌지직!

날카로운 바늘이 한 장의 종이에 닿자, 둔탁한 소리를 내며 힘겹게 관통해 나갔고.

-탁! 푸북!

두 번째 종이의 절반만을 뚫어 낸 채, 저지되었다.

다른 바늘들 역시 마찬가지.

-탁! 찌직! 찌지직! 푹! 푸푹!

태민이 흩날린 종이를 두 장 이상 뚫어 내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무슨 수로!?”

그 모습을 본 헬레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경악을 드러내고는.

“……막아라?”

바닥에 떨어진 종이 중 하나에 쓰여 있는 문자를 읽으며 읊조렸다.

“네가 들고 있는 그것처럼, 이것 역시 ‘신물(神物)’이다.”

태민은 당황스러워하는 헬레나를 향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마나의 소모가 빠르다.’

겉으로만 여유 있는 척할 뿐, 속으로는 식은땀을 숨기고 있었다.

만년필로 종이에 ‘막아라’라는 문자를 쓰면, A급 헌터의 공격도 너끈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런 신물의 권능이 지닌 힘이 부여된 종이가, 바늘을 막지 못하고 꿰뚫렸다.

만약, 바늘에 직접 공격을 당한다면, 몸이 꿰뚫려 나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바로 마나 소모였다.

방금 방어한 것만으로도 가진 마나의 1/3이 날아가 버렸으니까.

마나를 회복하는 포션을 몇 개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숫자는 한정적.

태민은 이대로 가다간, 얼마 버티지 못 하리라 판단했다.

결국.

‘……어쩔 수 없군.’

-샥. 촤라락!

속으로 침음을 삼킨 태민이 다시 왼손에 서류 더미를 불러내고는.

‘약속을 어겨서 미안합니다. 한처용 헌터.’

왼손에 쥔 종이 뭉치 중, 가장 마지막 장에.

-사가각.

신물을 이용해 함부로 써서는 안 될, ‘위험한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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