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여기를 노릴 줄이야.”
처용이 하늘 위를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지금 하늘 위에는.
-쿠구! 쿠구구!
순식간에 새까만 먹구름이 스멀스멀 들어차며 나선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밝은 대낮이었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는 상황.
[이 사악한 것들이 감히!]
이변을 느낀 토르가 자리를 박차 일어서며 소리쳤다.
[태초신의 성역에 비프로스트의 입구를 떨굴 생각이다! 대비해야 한다!]
토르가 악신들의 의도를 파악하듯, 말을 이었다.
악신들은 배신자인 로키에 의해 비프로스트를 거머쥐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아스가르드와 헬리오폴리스 때처럼, 비프로스트를 이용해 이곳을 직접 공격할 생각인 듯 보였다.
“비프로스트의 입구를 이곳에 열지는 못합니다.”
처용은 토르의 말을 부정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룡전에 비프로스트의 입구를 직접 연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설사 열 수 있다고 해도, 처용과 황룡이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외부에서 쉽게 들어올 수도 없을뿐더러, 외부에서 접근해오는 사특한 기운을 차단해버리면 되니까.
이곳, 태룡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공간과 공간을 잇는 문을 열려면, 처용과 대신들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즉, 비프로스트의 입구를 떨구려 해도, 그 시도가 사전에 막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상황은……!]
토르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읊조렸다.
직접 태룡전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
그렇다면, 적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 동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제가 알기로, 비프로스트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힘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용이 토르의 읊조림에 답하듯 입을 열었다.
“그 힘으로, 저렇게 다른 세계의 입구를 소환할 수도 있겠죠.”
먼 곳을 응시하며 처용이 말을 잇자, 성좌들이 처용이 응시한 곳을 바라보며 감각을 넓혔다.
-후화아아!
먹구름이 들이친 곳은 하늘만이 아니었다.
태룡사의 주변 일대에도 검은 먹구름이 스멀스멀 솟아나고 있었다.
성지 외곽에 둘러진 거대한 호수를 경계선으로 그 주변 일대에 검은 안개가 생겨난 듯한 모습.
그리고.
-스스스!
태룡사의 입구, 호수를 가로지르는 거대하고 두꺼운 다리가 놓인 반대편에 검은 대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은은하게 걷히며 새로운 환경이 나타나는 듯한 모습.
[시스템의 규칙에 비프로스트의 힘을 더한 건가?]
아테나가 상황을 파악한 듯, 성지 일대 주변을 크게 둘러보며 말하자.
“태룡사를 향한 ‘성지쟁탈전’, 이게, 놈들이 준비하던 수단이었군요.”
처용이 아테나의 말에 긍정하며 답했다.
신들로 인해, 지상에 큰 영향이나 변화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시스템.
그 시스템의 규칙 중 하나가 바로 성지쟁탈전.
시스템의 공증 하에 서로의 성지를 걸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멸망한 세계에 세운 성지 하나를 통째로 끌어왔군?”
지금 태룡사 입구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검은 대지와 새까만 나무들, 건축물들이 보였다.
그곳은 악의 종주에게 정복당해 멸망한 세계였다.
처용에게 있어서, 회귀 전 지구를 연상케 하는 듯한 모습.
[제길! 나는 곧장 전선에 나가 병사들을 돕겠다!]
-파지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토르가 전신에 번개를 휘감고는 태룡사 입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헤르메스, 즉시 올림포스로 돌아가 신군을 소집해라.]
아테나 역시 자리를 박차 일어나며, 헤르메스를 향해 지원군을 불러오라 명령했다.
[주신의 뜻대로.]
-스르륵.
헤르메스가 아테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며 답하고는 즉시 사라졌다.
뒤이어.
[태초신의 성역과 성지는 절대로 넘길 수 없습니다.]
-탁. 화아!
미카엘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날개를 펼치고는 토르를 따라 태룡사 입구로 향했다.
그녀와 함께 온 다른 천사들도 미카엘의 뒤를 따랐고.
[서기관께 이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군을 불러오지요.]
-화아아!
가브리엘은 빛으로 자신을 감싸 사라지며 말했다.
대부분의 성좌들이 성운에 지원을 요청하러 움직이거나, 토르와 미카엘을 따라나섰다.
마지막으로 라와 오시리스 등, 헬리오폴리스의 신격들이 움직이려는 때.
“전선으로 향한 성좌들에게 조심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처용이 라를 향해 진지한 경고를 전했다.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은 ‘본신’ 상태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성좌는 본신 상태에서 치명상을 입으면 소멸한다.
처용은 그 부분을 지적하며, 적들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전한 것이었다.
그런 처용의 말에.
[이곳에 쳐들어오는 저 사악한 것들도 본신 상태라는 의미로군?]
호루스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이곳의 여러분들과 비슷합니다. 본신 상태이면서 시스템의 제약을 일부분 받는 상태일 겁니다.”
처용이 명확하게 답하듯 말하자.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저 사악한 놈들을 완전히 박멸시켜 버릴 수 있겠구나!]
호루스가 투지 어린 미소를 짓고는.
-후욱! 파아아!
열기가 일렁이는 붉은 모래바람으로 변하며 태룡사 입구로 향했다.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네 할 일을 하거라.]
라를 포함한 다른 신격들도 각각 투지를 다지며 태룡사 입구 부근으로 향했다.
처용은 각기 전선으로 향하는 신격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어차피 저도 이번엔, 최전선에서 같이 싸울 겁니다.”
점차 어둡게 변해가는 태룡사 주변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처용이 맡은 역할은 다름 아닌, 가장 최전선에서 적들과 맞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선, 눈앞에 닥친 일에 집중하자꾸나.]
-샥.
여래가 처용을 바라보며 말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지며 최전선으로 향했고.
[망할 순혈자 놈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대비책은 충분하니.]
미륵 역시 처용에게 전음으로 말을 전하며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파지직!
처용 역시 최전선에서 악신들을 짓밟아버리기 위해, 태룡사 입구 부근으로 향했다.
***
-……모두 절차에 따라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우우웅!
묵직한 마나의 울림을 타고 경고 어린 목소리가 태룡사 입구에 퍼졌다.
헌터 협회에서 퍼트린 비상 사이렌이었다.
-뭐, 뭐야?
-어서 가자!
태룡시에 거주하던 힘 없는 사람들이나 레벨이 낮은 헌터들은 절차에 따라 대피를 시작했고.
“도시 외곽의 방어를 활성화하고! 수비팀을 제외한 나머지는 입구로 가라!”
“어서 움직여!”
진호를 포함한 정예 스피릿 팀의 헌터들이 협회 소속 헌터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움직였다.
대표적으로.
“도시 방어를 부탁한다.”
한국 헌터 협회의 헌터들 중 가장 강한 진호가 헌터들을 이끌며 전방으로 향했고.
“맡겨주세요!”
현아는 수비를 맡은 헌터들과 태룡시 인근의 방어선을 담당했다.
그리고.
-우리 길드는 싸우겠다!
-우리 역시도!
태룡시에 머물고 있던 헌터들 중 반 이상이 이번 비상사태에 자원하듯 나섰다.
그들 모두가 태룡시에서 많은 혜택을 누렸던 이들.
태룡시를 지키기 위해, 이번 싸움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A급 헌터들은 이쪽으로…….
-99레벨 이하의 헌터들은 후방을 지원합니다.
-레벨 상관없이, 힐러 클래스들은 모두 중앙 병원으로 모이십시오!
협회의 관계자들이 자원해온 헌터들을 분류하며, 그 자리에서 전력으로 가용했다.
“진짜로 여길 직접 공격할 줄이야……!”
현장에 직접 나온 한국 헌터 협회 태룡사 지부의 책임자.
태민이 하늘과 태룡사 주변에 들이친 검은 안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놈들이 이곳을 직접 공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처용에게 미리 전해 들었던 경고.
악신들이 태룡사를 직접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였다.
태민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대비를 갖추면서, 속으로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그런 처용의 경고가 현실로 닥쳐온 상황.
다행히 철저한 대비를 갖춘 덕분에, 적습에 대한 방어 준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작전대로 된다면, 태룡사의 방어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
태민은 하늘 위를 바라보며 옅게 인상을 찌푸려 보인 채 읊조렸다.
무언가…… 무언가 ‘탐정’으로서의 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적들이 그저 정면 돌파만을 선택했을까?
무언가 다른 비열한 수단을 강구해 놓은 것은 아닌가?
태민의 머릿속에 자꾸 불안한 생각들이 맴돌았다.
그때.
-화아아!
나선으로 휘몰아치는 하늘 위 먹구름이 단번에 걷어지고는.
-스르르!
금빛의 빛이 햇살처럼 내려앉았다.
-크롸아아!
먹구름을 해치고 금빛과 함께 나타난 거대한 황룡.
천찰의 대신이 크게 포효를 내지르자.
-후우우!
하늘 위에서 내리쬐는 금빛의 빛들이 태룡사 곳곳으로 퍼지며 스며들었다.
마치, 태룡사 일대 전체가 금빛의 가루가 반짝이는 모습.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증폭됩니다.]
[성지, 태룡사의 땅 위에 선 이들의 모든 스텟이 20% 증가합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막아주는 보호막이 상시 적용됩니다. 단, 강력한 공격으로 인해 파괴될 수 있습니다.]
황룡의 포효와 함께 성지 전체에 축복이 내렸다.
-좋아!
-이거라면!
헌터들이 시스템 메시지로 버프를 확인하며 환호했고.
“신과 함께 싸우는 전쟁이라…….”
태민 역시 하늘 위, 황룡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조금 전부터 계속 경종을 울려오는 불길한 느낌을 되새기며 속으로 읊조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태민은.
‘……전체적으로 점검만 하고 오자.’
-탓.
태룡사의 상단 부분, 적들이 절대로 침입할 수 없다고 장담한 장소를 향해 뛰어나갔다.
***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인가?]
태룡사의 하늘 위에 강림한 황룡이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향해 말하듯 읊조리자.
-콰직!
황룡의 앞, 금빛이 일렁이는 태룡사의 경계선 부근.
검은 안개가 들이친 장소 상공의 하늘 틈이 검붉게 갈라졌다.
갈라진 틈이 점점 실금이 길어지며 균열이 더 번지더니.
-콰차창! 차창!
검고 날카로운 느낌의 갑주가 둘러진 검은 손이, 갈라진 허공을 뚫고 튀어나왔다.
-콰직! 콰직!
두 개의 검은 손이 갈라진 틈을 비집고 움켜쥐고는.
-콰자자작!
균열의 틈을 강제로 벌리듯, 하늘을 좌·우로 찢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갈라진 틈 사이로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지이잉!
하나의 동공에 붉은 눈동자가 여럿 박힌 기괴한 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꾸륵. 꾸륵.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기괴한 눈들이 뒤룩거리더니.
-드르륵!
일제히 황룡을 응시했다.
그리고.
-콰지지직! 콰직! 콰직!
공간을 찢고 튀어나온 손이 공간을 더 찢으며 그 틈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검은 갑주가 둘러진 손과 팔을 시작으로, 어깨, 상체, 다리가 순서대로 나타났다.
검붉은 가시가 군데군데 박혀 있는 검은 갑옷과 갑옷 사이사이로 일렁이는 어둠.
그 일렁이는 어둠 속에는.
-지이잉!
공간 속, 칠흑 속에서 번들거렸던 눈동자들이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모습.
악의 종주, 조크 크타니드.
그가 직접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음에도, 비프로스트를 이용해 강제로 강림한 것인가?]
악의 종주를 지긋이 바라본 황룡이 입을 열었다.
강제로 차원의 틈을 찢어 강림한 악의 종주의 형태.
그 기괴한 모습이, 온전하지 않다는 황룡의 말이 울리자.
[상관없다.]
악의 종주가 부정하지 않는 듯, 잔잔하고 무거운 목소리를 울렸다.
[야드의 마지막 안배를 부순다면, 이 지겨운 싸움도 끝이니라.]
차기 태초신의 성역인 태룡전.
그곳을 부수면 모든 싸움이 끝난다는 말에.
[이곳을 그리 간단하게 거머쥘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황룡이 부정하지 않는 듯,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직접 나선 이상, 반드시 실현되리라.]
-쿠구! 콰아아아!
악의 종주가 파멸의 권능을 내뿜으며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그의 발걸음에 따라 파멸의 신력이 태룡전을 향해 점점 전진했고.
-파사사……!
금빛의 기류들을 갉아먹으며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찌 장기(將棋)전에서 왕(王)이 함부로 움직인단 말인가?]
-우웅.
황룡은 직접 나서려는 악의 종주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신력을 내뿜고는.
[각 진영의 왕은, 전세가 완전히 기울기 전까지, 움직일 수 없다네.]
-우웅! 화아아!
그의 손에 쥔 여의주, 태초의 심장에서 짙은 황금빛이 퍼져 나갔다.
그러자.
-쿠구!
악의 종주의 발걸음이 턱 막히며 그 자리에 고정되었다.
그 결과, 점점 전진하던 파멸의 신력 역시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내가…… 시스템이 만든 규칙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나?]
-쿠구! 쿠구구!
악의 종주가 자신을 구속하려는 시스템의 힘을 강제로 풀려는 듯, 짙은 신력을 내뿜으며 읊조렸다.
[따라야, 할 수밖에 없을 걸세.]
-우우웅!
황룡이 태초의 심장에 신력을 더 불어넣으며 잔잔한 목소리를 내었다.
악의 종주, 칠흑처럼 어두운 갑주 사이에 일렁이는 어둠의 눈동자들.
그 눈동자가 작금의 상황이 거슬린다는 듯, 가늘어졌다.
그리고.
[시작하라.]
누군가를 향해 명령하듯, 악의 종주가 목소리를 내었다.
-쾅! 쿠구구!
태룡사를 포위하듯 감싼 어두운 안개.
그중 성지 입구와 가까운 곳에.
-쾅! 화아아!
새하얀 기둥이 하늘에서 내리치듯 나타나 땅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위대한 존재의 부르심에 응답하나이다!]
땅에 박힌 새하얀 기둥, 비프로스트와 함께 로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