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화
검은 별들과 함께 옥황상제가 나타나자.
“옥황상제? 어떻게 여기에……!”
라가 당황스러움을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헬리오폴리스 성역의 중심이자 태양신의 성역.
허락을 받은 자 외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장소였다.
태양신과 가까운 직계의 신격들과 자격을 지닌 존재 외에는 자유로이 드나들 수조차 없는 성역.
옥황상제는 물론, 검은 별들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탁.
옥황상제 옆으로 검은 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타났고.
“왜…… 네가…… 거기에?”
그를 본 라의 눈동자가 커지며 충격과 의문을 드러냈다.
동시에.
“세트…… 네가 ‘순혈자’였구나.”
라가 옥황상제 옆에 선 신격, 자신을 배신한 듯 보이는 이를 향해 말했다.
“그 누구에게 언급한 적도 없고 순혈자임을 드러낸 적도 없으니까요.”
검은 매의 형상을 한 투구와 검은 깃털로 이루어진 망토를 두른 남자.
사풍(死風)의 신 세트가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순혈자라 해도 네가 왜…… 도대체 왜…….”
라가 배신감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세트를 향해 묻자.
“선택받은 고귀한 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세트가 감정 없는 일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부분의 배신자가 보이는 비열함이나 비웃음도 없는, 말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고귀함을 자처하는 네놈이! 배신을 하는 것이냐!”
호루스가 세트에게 창과 칼을 겨누며 분노한 듯 소리쳤다.
그러자.
“나는 선택받은 존재이기에, 그분께 이걸 다룰 권한도 부여받았지.”
세트가 작은 미소를 보이며 왼손을 들었다.
-화아아!
그의 손바닥 위로 밝은 은청색의 빛무리가 모여들었고.
-촤라라락.
은은한 달빛을 내뿜으며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청색의 펼쳐진 책이 나타났다.
“달의 서…… 네가 그걸 어떻게?”
라가 세트의 손에 나타난 달빛의 책.
헬리오폴리스의 신물 중 하나이자 주신만이 다룰 수 있는 신물.
달의 서를 바라보며 경악 어린 눈빛으로 읊조렸다.
동시에.
-화아아!
라가 오른손을 들어 태양 빛을 모으고는.
-촤라락.
청색의 달의 서와는 대비되는 붉은색의 태양 빛을 내뿜는 책.
태양의 서를 꺼내 들었다.
태양과 달,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헬리오폴리스의 두 신물.
태양의 서와 달의 서는 오직 헬리오폴리스의 주신, 태양신 라만 다룰 수 있는 신물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습니까? 태양신이시여, 저는 선택 받은 존재라고.”
-우웅!
세트가 라를 향해 자신감 어린 미소를 보이며 달빛을 퍼트리자.
-스스스!
놀랍게도 라의 손에 쥐어진 태양의 서가 뿜어내는 태양 빛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달의 서가 내뿜는 달빛에 밀려나는 듯한 모습.
게다가.
-쿠구! 쿠구구!
라가 태양의 성역에 펼친 결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바알의 공격에 의해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태양의 가호마저 사라지겠지요.”
세트가 달의 서로 성역의 결계를 약화시킨 것이었다.
“세트! 이 배신자가-!”
-콰화아아!
상황을 파악한 호루스가 칼날과 창에 붉은 바람을 휘감아 세트를 향해 내질렀고.
-쿠화아아!
세트가 오른손 위로 검푸른 바람을 일으켜 호루스를 향해 내뿜었다.
-콰콰! 푸화아-!
붉은 폭풍과 검푸른 폭풍이 충돌하며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마찰을 일으켰다.
“세트! 태양신께서는 과거의 네 잘못을 용서해 주셨다! 그런데도! 감히-!”
호루스가 세트를 향해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
과거, 헬리오폴리스 성운에서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던 세트.
태양신 라는 아픈 손가락이었던 세트를 용서해 주었고 그 뒤로 세트는 큰 사고 없이 조용히 지내 왔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순혈자였고 중요한 순간에 태양신을 배신한 상황.
그런 호루스의 분노에.
“난 선택받은 존재였으니, 용서받을 자격은 충분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세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호루스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는 듯, 뭐가 문제냐는 듯한 분위기였다.
순혈자는 신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고귀한 자들.
그들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받는 이들이었다.
“대신급 성좌들은 지금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 서두르는 것이 좋다.”
세트가 옥황상제와 검은 별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 헬리오폴리스의 대신급 성좌들.
라를 포함한 그녀의 첫 번째 자식들인 아누비스, 오시리스, 이시스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
-우우웅.
그들 모두가 이곳, 태양신의 성역에 펼쳐진 결계에 신력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계는 단순히 악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만이 아니었다.
태양신의 성역으로 대피한 헬리오폴리스의 주민들을 다른 장소로 탈출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외부의 악마들을 막고 피신한 주민들과 병사들을 대피시키는 일을 동시에 하는 중요한 순간에.
-스스스.
세트가 달의 서를 이용해 훼방을 놓기까지 하는 상황.
“제길……!”
“집중해라, 결계가 풀리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아누비스와 이시스, 오시리스는 나서고 싶어도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상태였다.
-샥!
-샤삭!
검은 별들이 새까만 칼날들을 형성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고.
“놈들을 저지한다!”
이모우시스와 호루스를 포함한 성좌들이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태양신, 결계를 풀어라.”
-저벅.
옥황상제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라를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태양신 라는 순혈 의장, 악의 종주를 따르는 이였으니까.
그러나.
“…….”
라는 그런 옥황상제를 노려보며 태양의 서에 신력을 더할 뿐이었다.
명백한 거절 의사를 표한 것.
“……역시, 네년은 그분을 배신했구나.”
그 모습을 본 옥황상제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와는 별개로 옥황상제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옥황상제의 상반된 표정과 목소리에.
“그자는 어차피 날 죽일 생각이었겠지.”
라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먼저 날 배신한 건, 조크 – 크타니드다. 천황.”
“어리석은 년!”
악의 종주의 진명을 언급하는 라의 말에, 옥황상제의 인상이 확 일그러지며 소리쳤다.
“위대한 존재를 거스르다니, 스스로 종말을 자초하는구나!”
“자칭 위대한 자를 모욕하니, 충견으로서 분노가 차오르나?”
옥황상제의 분노에 라가 조소를 흘렸다.
“그대는 천황이 아니라 천견(天犬)이었나 보군.”
이어지는 라의 조롱 어린 말에 옥황상제가 안면을 무섭게 일그러뜨리고는.
“……허허.”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드러냈다.
“언제까지 그 오만한 발악을 부리는지 함 보자꾸나!”
-파직. 파직. 쿠릉!
옥황상제가 손아귀에 천벌을 모으며 소리쳤다.
본래 천벌은 새하얀 백색의 벼락.
그러나 악의 종주가 지닌 힘을 옥황상제가 받아들인 결과.
-파지직! 쿠르릉!
새하얀 벼락 다발에 칠흑처럼 새까만 벼락이 섞여 있었다.
겉보기에도 불길함이 확 전해질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일렁이는 흑백의 번개.
“오늘부로 내가! 새로운 세상의 첫 번째 하늘이 되리라!”
-쿠르릉! 쿠콰콰콰-!
사악한 기운이 가득 응축된 흑백의 천벌이 라를 향해 쇄도했다.
라는 피할 수도, 천벌을 막을 수도 없는 상황.
하지만 위기의 순간임에도, 라와 그 주변에 있는 대신들은 표정만 굳힐 뿐,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대신급 신격 중,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신격.
-저벅.
헬리오폴리스 성운 소속의 신격이 아닌 대신급 성좌.
자비의 대신, 보살이 두 손을 합장한 채, 라를 보호하듯 그녀 앞에 섰다.
“선법 - 만트라.”
-탓. 우우웅.
미리 합장하고 있던 보살의 두 손을 중심으로 신력이 은은하게 피어올랐고.
“오행련진(五行蓮陳).”
합장하던 두 손이 떨어지며, 미리 준비하고 있던 선술이 발동되었다.
-파아아!
그녀의 두 손에서 모여들며 압축된 신력이 환한 빛을 내뿜으며 퍼져 나갔고.
-스르륵. 스륵. 스륵.
다섯 가지 빛으로 일렁이는 반투명한 연꽃이 크게 피어나며 보살과 뒤에 있는 대신들을 감쌌다.
각각 붉은색, 푸른색, 녹색, 은색, 흙색으로 빛나는 연꽃잎들.
-파지지직! 파직! 쿠르릉!
옥황상제가 쏘아 보낸 천벌이 보살 앞에 피어난 반투명한 연꽃잎들과 충돌하며 뇌전을 튀겼다.
-파사사! 파사……!
강렬한 불꽃을 튀기는 천벌에 의해 연꽃잎이 반 정도 타 버렸지만.
-우웅. 스르륵. 스륵.
불타 버린 연꽃잎들이 빠르게 재생되며 보살의 앞을 감쌌다.
보살이 만들어낸 연꽃, 오행련진은 옥황상제의 천벌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스르륵. 스륵.
다섯 가지 기운, 오행(五行)의 기운을 은은하게 퍼트리며 검은 별들과 싸우는 이들에게 깃들었다.
붉은 연꽃잎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세트와 싸우던 호루스에게 스며들자.
-스스스. 우웅!
세트에게 입었던 호루스의 자잘한 상처가 아물고 그의 신력이 증폭되었다.
“……감사합니다. 자비의 대신이시여.”
-후욱! 콰화아아!
호루스가 보살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손아귀에 붉은 바람을 모아 세트에게 내뿜었다.
-푸화아아!
세트 역시 검푸른 바람을 내뿜으며 호루스의 공격에 맞섰다.
이전에는 호루스가 세트에게 밀리고 있었지만.
-콰아! 쿠구구!
보살이 펼친 진법에서 기운을 전해 받은 덕분에, 세트에게 더 힘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검은 별들에게 밀려나던 다른 헬리오폴리스 신격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현……!”
옥황상제가 앞으로 나선 보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별들과 세트 역시, 갑자기 강해진 적들을 보며 표정을 굳히고 보살을 노려봤다.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자비의 대신은 다른 이를 치료하고 보듬어주는 권능 외에는 공격 능력이 전무하다고 들었으니까.
그러나.
“선술의 창시자는 신법의 대신이라고 잘 알려져 있지요.”
보살이 평소와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술(仙術).
자연의 기운을 조화롭게 다루고 지배하는 기술이자 처용과 여래를 상징하는 능력.
먼 과거, 인간들이 신을 넘본다는 이유로 신들에 의해 이단으로 여겨졌던 기술이었다.
대부분의 신들은 선술의 시작점을, 여래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지만, 선술의 시초(始初)는 그가 아닙니다.”
여래가 선술을 완성할 수 있도록, 그를 도운 존재는 따로 있었다.
자연의 기운을 다루는 방법을 여래에게 가르쳐 주었던 그의 스승.
선천적으로 자연의 선한 기운을 타고났었던 인간이자, 그 기운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덕을 쌓았던 최초의 선인.
끝내, 신으로 승천하여 자비라는 신명을 얻은 대신급 신격.
“내가 그저 허수아비로 보였습니까? 천황.”
자신감이 일렁이는 옅은 미소를 보인 보살이 옥황상제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옥황상제는 헬리오폴리스의 대신들을 보호하는 보살을 보며 작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크흐흐…….”
이내, 탐욕이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이며 미소를 드러냈다.
인간은 오로지 신을 위해 소모될 뿐인 하등한 존재들이다.
선천적 신격들 중, 신에 대한 우월주의가 극심한 이들이 지닌 이념이자 신념.
옥황상제는 선천적 신격들 중 그런 이념이 유독 짙은 존재였다.
그랬기에.
“네년이 가진 모든 것은! 바로 나만을 위한 것이다.”
옥황상제가 탐욕과 욕망을 숨기지 않고 읊조리며 말했다.
최초로 신이 되어 대신급 성좌가 된 가장 특별한 인간.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가장 특별한 힘을 지닌 신의 소모품.
그런 자비의 대신이 지닌 가치와 능력은 당연히.
“네년을 잡으면, 그 잘못된 자비의 방향부터 바로잡아 주겠노라.”
가장 드높은 신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집착을 넘어 광기까지 일렁이는 옥황상제의 말에 보살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계승자가 이리 전해달라더군요.”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이렇게 말해주면, 아마 그 늙다리가 빡쳐서 눈이 돌아갈 겁니다.
처용에게서 전해 들은 말.
“실패밖에 할 줄 모르는 ‘가장 무능한 꼰대’.”
보살이 그 말을 옥황상제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보현?”
그 말에 바로 뒤에 있던 라가 짐짓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라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비의 대신과 인연을 이어왔었다.
그 광활한 시간 동안, 자비의 대신이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저주하는 말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녀가 괜히 ‘자비의 대신’이 아니었으니까.
신법재판소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도, 그저 심적 고통만 내비쳤을 뿐, 그 누구도 저주하지 않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온 라조차도.
“노망이 날 정도로 나이를 쳐…… 먹었으면, 더 민폐 끼치지 말고 제 발로 무덤 속에 기어가라.”
자비의 대신이 누군가를 향해 조롱하듯 도발하는 광경은 처음 보았다.
“이리 전해달랍니다?”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보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처용이 전해 달라는 말을 그대로 전해 버렸다.
그녀가 지은 미소 속에는 나름 후련함도 일렁이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라가 멍한 분위기를 보였다.
그리고 보살이 처용의 말을 전하며 도발한 당사자.
“이 하등한 하계종 년이-!”
-파지지직!
옥황상제에게서 격렬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 버르장머리를 당장 고쳐 주마!”
-쿠르릉! 쿠릉!!
강렬한 흑백의 뇌전, 천벌이 보살을 향해 쏟아졌고.
-파지직! 파직! 파아아-!
보살 앞에 피어난 연꽃잎들이 천벌에 맞아 부수어지고 다시 생성되는 것을 반복했다.
분노한 옥황상제가, 보살을 향해 천벌을 무수히 쏟아내고 연꽃잎들이 천벌을 저지할 때.
“태양신,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있습니다.”
보살이 뒤에 있는 라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들리지 않도록, 입 모양으로만 이어지는 보살의 말이 라에게 전해지자.
“……백성들의 대피는 거의 다 끝났습니다. 보현.”
라가 침착하게 현재 상황을 다시 파악하며 말했다.
동시에.
“계승자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십시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준 처용에게 감사를 대신 전해 달라 말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