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화
염라(閻羅).
흔히 염라대왕이라고도 불리는 신격.
저승을 관리하는 대신급 성좌 중 하나였다.
하데스와 마찬가지로 그가 다스리는 저승 외에는 지상과 신계에 큰 관심이 없는 신격.
그나마 염라는 운장과 인연이 있어 가끔 무신전 성좌들과 해후를 갖는 모습을 보이던 이였다.
회귀 전에는, 바알의 함정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졌던 처용을 도와주었던 성좌였다.
그로 인해 연옥을 경험했고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지상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회귀 전, 염라가 말할 통로는 잘못된 길이었다.’
애초에 염라가 바른길을 알려 주었다면, 처용이 연옥에 갈 리가 없었다.
게다가 처용이 연옥을 나와 지상으로 귀환한 후에는 염라에게 이 일을 따질 수가 없었다.
처용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승의 신들이 모조리 몰살당한 이후였으니까.
소멸한 신격을 향해 따져 봤자,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 당시에 모든 저승의 신이 소멸한 게 아니었다면?’
시간이 되돌아온 지금, 처용은 그 당시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저승이 ‘파멸’했다.
이 소식은 올림포스의 정보의 신, 헤르메스와 아스가르드 감시의 신 헤임달이 전했던 소식이었다.
정보를 관장하는 두 신이 전한 말은 진실이라 봐도 무방했다.
저승이 악의 종주에게 쓸려 나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저승의 신이 소멸했는지, 처용이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저.
-하데스 님이, 마지막까지 항전하셨지만…….
하데스의 소식을 전한 헤르메스의 말에 추측한 것이 전부였다.
저승이 어떤 과정으로 파멸했는지.
악의 종주가 어떤 방법으로 저승에 발을 들였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없었다.
가능성이라면, 저승의 신격들 중 ‘순혈자’가 있거나.
아니면…….
“……이 자리에서 직접 언급하신 것을 보니, 나름 확실한 정황을 포착하신 것 같군요.”
처용이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보며 하데스와 아테나에게 물었다.
가장 최악이라고 할 법한 가정.
저승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대신급 성좌 중 하나가 순혈자다.
심지어 보통 순혈자도 아닌, ‘순혈 의회 일원’이다.
이것이 처용이 생각한 가장 최악의 상황임과 동시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정이었다.
막 생각한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회귀 전 저승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납득되었으니까.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는 처용의 말에.
[네가 전에 폭마의 화신체를 잡아다 준 덕분에, 우리 역시 검은 별들을 추적하여 몇 명을 잡아낼 수 있었다.]
하데스가 그간 있었던 일, 자신이 해 왔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전, 하데스는 처용에게 저승의 권한이 담긴 명패를 처용에게 주었었다.
처용은 검은 별의 신관 하나를 처치하고 그 안에 강림했던 검은 별, 폭마의 화신체를 봉인했었다.
화신체가 봉인된 명패를 전달받은 하데스는 곧장 저승의 감찰관들과 함께 검은 별들을 추적했었다.
그렇게 검은 별들의 흔적을 추적하며 저승을 샅샅이 조사하던 중, 그의 발걸음이 지옥에 닿았고.
[지옥에서…… 수상한 흔적을 추가로 찾아내었다.]
그곳에서 수상한 흔적을 찾아내었다.
[악한 영혼을 정화해야 할 형벌의 장이 몇몇 비어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저승의 신이 개입하지 않고는 발생할 수 없는 흔적들.
바로 형벌을 받고 있어야 할 사악한 영혼들이 무단으로 탈주한 흔적이었다.
지옥의 형벌을 받는 영혼이 스스로 탈주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지옥의 관리인들이 형벌을 받는 영혼을 꺼내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저승을 지배하는 대신급 성좌들도 지옥의 형벌을 받는 영혼에 함부로 손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저승의 신’이 개입한 흔적 또한 찾아내었다.]
명백하게 저승의 상위 신이 발휘할법한 신력의 흔적이 있었고 형벌의 방이 비어 있었다.
[검은 별…… 놈들이 비어 있는 형벌의 장에 있어야 할 영혼들이었다.]
형벌의 장에 있어야 할 이들은 바로 검은 별들이었다.
어떻게 형벌의 장에 손을 대 영혼을 빼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악한 영혼들을 어떻게 검은 별로 재탄생시켰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승의 상위 신 중 누군가가 그 사악한 존재에게 협력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법한 정황은 단 하나뿐이었다.
스스로가 부활한 태초신이라고 말하는 존재.
저승을 배신한 상위 신이 그의 도움을 받아 저지른 짓이다.
하데스는 이 가정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해서, 그 부분을 조사하고 계속 조사한 결과…….]
“유력한 용의자로 염라가 지목되었군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흐리는 하데스의 말에 처용이 말을 이었다.
하데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흐음.”
처용이 잠시 생각에 잠기며 침음을 흘렸다.
“무신전에는 이 소식을 전했습니까?”
짧게 생각하며 침묵한 처용이 하데스와 아테나를 바라보며 묻자.
[관철의 대신을 통해 운장에게 이미 소식을 전했다.]
[소식을 들은 태무신이 생각보다 침착해 보이더구나, 마치…… 예상한 것처럼.]
아테나가 대답했고 하데스가 말을 이었다.
하데스는 염라의 소식에 침착함을 보였던 태무신을 떠올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그 말에.
“곧 무신이 되셨을지도 모를 영혼이 타락한 모습으로 저와 마주쳤었습니다.”
처용은 이전, 던전 최심부에 위치한 마인들의 아지트에서 마녀와 마주했을 때를 이야기했다.
무신전의 무신들과 안면이 있는 영혼.
심지어 그 영혼은 성좌가 되기 위해 연옥의 시련을 수행하던 영혼이었다.
처용은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렇군, 그게 검은 별의 프로토타입이었나?’
그 당시 마주쳤었던 영혼, ‘전위’를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잠식하던 사악한 기운에 저항하며 자신을 죽여 달라 소리치던 영혼.
아마도, 그 과정에서 영혼을 잠식하는 사악한 힘의 정체는 악의 종주의 신력인 듯 보였다.
“그 힘에 굴복하거나 그를 받아들이면 검은 별이 되는 것 같습니다.”
[흐음…….]
처용이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자 하데스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페르세포네와 아테나 역시 눈이 가늘어지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이전에 준 저승의 보패를 보여주겠느냐?]
생각을 잇던 하데스가 처용을 보며 입을 열자.
“여기 있습니다.”
-탁.
처용이 하데스 앞으로 각 모서리가 둥글게 깎인 직사각형의 보패를 내밀었다.
이전, 하데스에게 받았던 저승 관리자의 인장이자 권한이 담긴 보패.
폭마의 화신체가 담긴 보패를 전해 주고 새로 다시 받은 것이었다.
“화신체가 아닌 본체도 몇 명 소멸시켰으니, 그 정보가 이 안에 담겨 있을 겁니다.”
처용이 하데스가 왜 보패를 달라 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말하자.
[어디…….]
-우우웅.
하데스가 처용이 내민 보패를 받고 신력을 은은하게 끌어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잠시, 눈을 감고 보패에 담긴 정보를 읽은 하데스는.
[고맙구나, 덕분에 놈들을 더 추적할 수단이 생겼구나.]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처용에게 감사를 전했다.
[미리 저승의 관리자들을 지옥 입구에 파견해 놓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하던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의 말을 잇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테나 님.”
-스륵.
하데스에게 보패를 내민 처용은 아테나를 향해 무언가를 하나 더 내밀었다.
바로 하얀 문자가 새겨진 명환부 한 장.
-탁.
아테나는 처용이 내민 명환부 한 장을 받아 자세히 바라보고는.
[아르테미스의 신관이 갇혀있는 기물이구나.]
처용이 내민 것이 무엇인지, 명환부 안에 누가 갇혀 있는지 알아챘다는 듯 말했다.
“낚시를 하기엔 최적의 미끼겠지요?”
기대감 어린 미소를 담은 처용의 말에.
[……아주 훌륭한 미끼로구나. 네 덕에 대어를 잡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아테나가 처용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바로 알아채고는 마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용이 이곳에 방문하기 전, 신관인 제시카를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었다.
아르테미스가 더 이상 신관을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도.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지금 처용이 내민 명환부 속에 갇혀 있는 인간.
아르테미스의 신관인 제니퍼와 처용 때문이었다.
[신관을 산 채로 잡아 봉인 같은 것을 한 건가?]
“멸천의 권능을 이용해 제니퍼와 거래를 했습니다. 제가 받은 건 신관의 계약이었구요.”
이어지는 아테나의 물음에 처용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제니퍼가 살아 있는 한, 아르테미스는 신관을 선출할 수 없습니다.”
처용이 가장 중요한 정보를 말해주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이들의 눈이 가늘어졌고.
“이 정보는 숨기는 것보단, 낚시를 위한 떡밥으로 푸는 게 좋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며 침묵한 제시카가 아테나를 향해 의견을 제시했다.
이미 처용이 제니퍼를 산 채로 잡아 왔다는 사실이 적과 아군에게 모두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이 상황에서 처용이 왜 악신의 신관을 살려서 잡아 왔는지 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용은 적을 깔끔하게 처리하면 처리했지, 적에게 온정을 베푸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무언가 ‘의도’가 있기에 제니퍼를 살렸다.
이는 모두가 떠올릴 법한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테미스의 신관 임명을 봉인하는 조건이 제니퍼의 생존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또한 충분히 떠올릴 법했다.
처용은 모두의 앞에서 아르테미스가 두 번 다시 신관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듯 말했었으니까.
제시카는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지상과 신계에 은밀하게 소문을 퍼트리면, 숨어 있는 간자들을 자극할 겁니다.”
숨어 있는 간자들이 움직이도록, 그들을 자극하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아테나는 자신의 신관이 말한 의견을 들으며 잠시 생각하고는.
[우리 성운과 길드에 순혈자와 순혈신도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진지한 목소리로 제시카를 향해 물었다.
제시카는 아테나의 물음에.
“저는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적들을 추적하며 위화감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적들이 길드의 움직임을 훤히 꿰차고 있는 듯 보일 때가 있었으니까.
이전 처용이 신속하게 세운 마인 토벌 계획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인들은 미리 정보를 전해 들은 듯, 이미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제시카는 이런 위화감을 잊지 않고 계속 내부의 배신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잡아낼 마땅한 방법 또한 없는 상황.
그런 답답한 와중에.
“이번 기회에, 간자들을 색출해야 합니다.”
처용이 최고의 미끼를 선물해 준 상황.
제시카는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림포스에 아직도 순혈자가 남아있는 건…… 맞을 거다.]
아테나가 제시카의 말에 동의하듯 말했다.
그녀 역시 제시카와 같은 위화감을 종종 느끼곤 했으니까.
[안 그래도 올림포스가 어수선한 와중에 바쁜 헤르메스가 더 바빠지겠구나.]
아테나가 이후 계획을 생각하며 읊조리듯 말하자.
“전 주신이 돌아온 것 때문인가요?”
처용은 왜 올림포스가 어수선해졌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며 말했다.
안개의 대악마 알레인, 제 정체를 숨기고 있던 태초의 마수 니알라 – 크타니드.
그녀를 판데모니움에서 탈출시키며 함께 탈출했었던 신격은 다름 아닌 실종되었던 제우스였다.
태초의 조각에 담긴 가이아의 예언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판데모니움에 갔었던 이.
이 부분만 보면, 제우스는 우주를 위해 중요한 선택을 한 용기 있는 인물로 보이겠지만.
“판데모니움에 죽치고 앉아 있던 이유가 니알라 님을 새로운 부인으로 들이기 위해서였다니.”
제우스는 예언을 따르는 건 겸사겸사였고 진짜 목적은 니알라였다.
적어도 처용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용의 말이 끝난 순간.
-파직.
[나는 억울하-!]
아테나의 옆에서 작은 전류가 튀기더니,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다 울리기도 전에.
[어디서 먼지가 떠다니는구나.]
-탁.
아테나가 옆에 튀어 오른 전류를 왼손으로 가볍게 흐트러뜨리며 그 희미한 목소리를 끊어버렸다.
[전 주신은 내가 꽁꽁 묶어 어머님들께 선물로 던져두었으니, 네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지은 아테나가 처용에게 제우스의 근황을 말해주었다.
“그렇군요.”
처용이 아테나의 말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솔직히 조금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제우스는 아테나 바로 전 세대의 올림포스를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신.
올림포스 내에서도 그런 제우스를 추종하고 따르는 성좌들이 많았다.
제우스가 돌아온 이상, 아테나와 마찰을 일으키거나 올림포스가 다시 분열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괜한 걱정이었군.’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휘둘리거나 동요하는 모습이 일절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제우스가 끌려 온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지.]
하데스가 제우스를 끌고 올림포스 성역에 나타난 아테나를 떠올리며 말했다.
올림포스 내에서도 막강한 힘과 권위를 상징했었던 제우스.
그런 그가.
-집 나간 아버지를 잡아 왔습니다.
차가운 표정을 내비치는 아테나에게 제압되어 올림포스 성역으로 질질 끌려왔다.
아테나는 올림포스의 대신급 성좌들, 특히 제우스의 부인들인 여신들에게.
-아버지가 ‘새로운 어머니’를 들이시려는 것만큼은 막았습니다.
상황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며, 제우스의 신병을 넘겼다.
아테나의 말이 울리자, 작금의 상황에 놀란 듯 보였던 여신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고생이 많았구나. 이후는 우리에게 맡기거라.
제우스의 첫 번째 부인, 올림포스의 안주인인 헤라가 아테나에게 감사를 전하며 제우스를 끌고 갔다.
그 모습을 다른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멍한 표정으로 목격했었고.
[그 제우스가 맞고 끌려왔는데, 감히 누가 딴지를 걸까.]
제우스를 추종하고 그리워하던 이들조차도 아테나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작은 헛웃음을 머금은 하데스의 말이 끝나자.
[전 주신이 우리의 싸움에 방해가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그리 만들 터이니.]
아테나가 각오 어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작금의 전쟁에서 제우스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방지하겠다는 것.
“든든하군요.”
처용이 그런 아테나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때.
[제자야……!]
돌연, 여래에게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회귀 전에도 몇 번 들어보지 못했던 여래의 다급한 목소리에 처용이 잠시 당황했다.
동시에.
“설…… 마?”
왜 여래가 다급하게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를 짐작한 듯, 눈이 점점 커지며 읊조렸다.
지금 상황에서 여래가 다급한 목소리를 낼 법한 상황은 하나뿐이었으니까.
‘……헬리오폴리스?’
처용이 단 한 마디, 헬리오폴리스 성운을 언급하자.
[태양신의 성역이 습격받았다. 이미 절반이 함락된 상태다.]
여래가 짧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짧은 말 안에 담긴 내용은 충격적이면서 강렬했다.
“예!?”
-쿵!
그 말을 들은 처용이 자리를 박차 일어나며 당황한 듯 소리쳤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