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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555화 (555/726)

#555화

징벌의 선고, 붉은 신력의 폭풍이 제르멜과 그의 근처에 있는 리치들을 휘감았고.

“어디 한번, 있는 대로 발버둥 쳐 봐라.”

처용 역시 징벌의 선고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콰아아아!

핏빛의 폭풍이 몰아치는 결계가 사방에 펼쳐지자.

“나를 아공간에 가두었다 하여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제르멜이 자신감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잘난 파마의 힘으로는 날 죽일 수 없다!”

-우웅! 촤라라락!

방대한 마나를 내뿜으며 소리친 제르멜의 주변으로 여덟 개의 고리가 나타났다.

그가 8서클에 도달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제르멜이 보이는 자신감은 비단 8서클의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리치로 다시 태어난 마법사들을 단번에 죽이는 파마의 신력.

어둠에 속한 리치에게 있어 실로 두려운 힘이었다.

그러나 단순 파마의 힘만으로는 불사에 도달한 자신이 죽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처용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고작 한두 가지 수단만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비록,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결계에 갇힌 듯 보였지만.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다.’

제르멜은 조심스럽게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왜? 마탑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아서 안심이 되나 봐?”

처용은 제르멜이 왜 자신감과 보이지 않는 안도를 보이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마탑에 축적된 방대한 에너지가 바닥나는 것보다, 내가 먼저 지칠 것 같나?”

“그…… 그 비밀을 무슨 수로!”

미소를 감추었던 제르멜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방대한 마나와 생명 에너지를 축적해 놓은 마탑.

그 마탑 자체가 바로 제르멜의 라이프 베슬이었다.

즉, 마탑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 제르멜은 죽지 않는다.

게다가, 여러 신들에게 도움과 지원을 받은 결과, 마탑 자체가 성지처럼 개조된 상태였다.

마탑을 일부분 부술 순 있어도, 그 기능을 완전히 정지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지금의 제르멜은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와 생명력을 가진 셈이었다.

그러나.

“한 번 해봐, 마탑의 에너지가 소진되나, 내가 지치나.”

처용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무슨 발버둥을 치든, 내 손바닥 안이다.

이러한 의미가 담긴 처용의 도발 어린 목소리에.

“……마나 오버 파워링.”

-지이잉! 쿠구구구!

제르멜이 여덟 개의 마나 서클을 맹렬하게 회전시키며 마나를 극한으로 끌어냈다.

칙칙한 마기와 드래곤 포스,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여 얻은 생명 에너지까지.

온갖 에너지가 뒤섞여 칙칙한 빛을 띠는 무거운 마나가 거칠게 솟구쳤다.

“블랙 데스 홀!”

-우득! 후우욱!

마나를 끌어모은 제르멜이 처용을 향해 손아귀를 뻗으며 강하게 쥐자.

-화아아! 콰아아아-!

제르멜이 퍼트린 마나가 나선으로 휘몰아치며 처용을 향해 모여들었다.

처용을 중심으로 새까만 블랙홀이 형성되는 듯한 모습.

무겁고 육중한 마나를 중첩시켜 한 곳에 모아 그 중심에 갇힌 이를 짓이기고 터트리는 마법이었다.

“마탑의 방대한 에너지가 다 떨어지기 전까진! 그 블랙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제르멜이 처용을 향해 양손을 뻗고 마법을 집중시키며 소리치자.

-우웅! 우우웅!

옆에 있던 리치들이 블랙홀에 마나를 보태며 제르멜을 도왔다.

처용은 냉정한 눈빛으로 제르멜이 만들어내는 블랙홀, 점점 거세게 압박해오는 주변의 마나를 훑어보고는.

“압제.”

-우웅. 파아아아!

압제의 파동을 퍼트렸다.

상대가 다루는 에너지를 흩어 버려 버프와 기술을 방해하고 해제하는 권능이었다.

핏빛 신력의 파동이 처용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며 블랙홀을 훑고 지나갔다.

7서클에 도달한 대마법사의 마나 조차도 흩어버리는 권능.

그러나.

-우웅! 파사사……!

압제의 파동이 퍼지고 있음에도, 제르멜과 리치들이 만들어 낸 블랙홀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려 징벌자의 신력이 담긴 압제임에도 불구하고 제르멜의 마나를 모두 흩어 버리지 못했다.

그저 블랙홀로 모여들던 마나가 조금씩 흩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뭉쳐 오는 마나의 양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압제가 통하지 않았음에도.

“역행하라. 역천.”

처용은 이 또한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여유를 보이며 다음 권능을 발동했다.

압제의 파동으로 인해, 블랙홀 사이사이에 발생한 작은 틈.

그 틈이 제르멜의 마나로 메꾸어지기 전.

“뒤집혀라. 역천.”

처용이 블랙홀의 빈틈 사이로 신력을 흘러 넣으며 역천을 발동했다.

제르멜의 마법은 거대한 마나를 뭉치고 중첩하여 인공적인 중력의 중심을 만들고 상대를 짓이기는 마법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거대한 마나를 휘감아 회전하는 블랙홀을 만드는 것.

그 블랙홀이 마나를 빨아들이고 회전을 계속할수록, 압박의 위력이 점점 더 거세지는 원리였다.

그런 제르멜의 마법에 역천을 사용하여 인과율을 조작한 결과.

-파스스스! 화아아!

제르멜이 만들어 낸 검은 블랙홀.

나선으로 휘몰아치는 검은 마나의 기류 사이사이로 새하얀 기운이 피어났다.

검은 블랙홀 속이었기에 유독 반짝이는 은하수처럼 돋보이는 새하얀 기류.

그 기류가 서로 뭉쳐 들더니, 검은 블랙홀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끼기기긱!

서로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가 충돌하며 파열음을 내듯, 블랙홀이 흔들리며 삐걱거리더니.

-콰지지직!

블랙홀에 검고 하얀 균열들이 번져 나가며 점점 부서지기 시작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려는 힘과 힘이 부딪힌 결과였다.

“8서클 대마법치고는 조작하는 게 어렵지 않은데?”

처용이 제르멜의 대마법을 가볍게 파훼해 버리자.

“인피니티 라이트닝 볼텍스!”

-우웅! 파지지직!

제르멜이 곧장 마나를 더 끌어 올리며, 손아귀에 강렬한 번개를 형성했다.

-파직! 파직! 쿠르릉!

주변에 일렁이는 8서클의 마나가 샛노랗게 변하며 벼락을 튀기는 먹구름으로 변했고.

-쿠르르릉! 쿠릉! 쿠릉!

이내 강렬한 벼락 줄기를 뻗어 나오며 처용을 향해 솟구쳤다.

마나가 완전히 바닥나지 않는 한, 절대로 멈추지 않는 무한의 벼락이었다.

제르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볼케이노 아마겟돈!”

-화륵! 화륵! 콰아아!

처용의 위로 화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또 다른 대마법을 발동했다.

화염의 소용돌이가 점점 거칠게 회전하며 그 아래로 화염이 압축된 불덩이들을 형성했고.

-콰아아! 쿠콰!

처용을 향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마탑의 마나를 전부 비워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웅! 우우웅!

제르멜이 추가로 대마법을 발현하려는 듯, 마법진들을 마구잡이로 생성하며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그간 꾸준히 모아 온 마탑의 모든 에너지를 다 써 버릴 듯 보였다.

방대한 마탑의 에너지를 다 소모하게 된다면 조금 아까울 것이다.

하지만.

“마신! 드래곤! 모두 내 완벽의 재료가 될 것이다!”

눈앞의 마신을 잡을 수만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라 하나를 순식간에 지워 버릴만한 위력의 폭발이 끝없이 터져 나갔다.

무한한 폭발 속에 휩싸인 처용인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그러나.

-쿠르릉! 쿠릉! 콰콰!

강렬하게 터지는 화염 폭발에도.

“…….”

번개와 화염이 번쩍이며 잠깐잠깐 드러난 처용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심지어, 폭발 속에서 아무런 피해조차 받지 않은 듯한 모습.

“이걸 무한히 유지한다라…… 그간 모아 둔 에너지가 상당히 많나 봐?”

처용이 작은 미소를 흩뿌리며 읊조렸다.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음에도, 너무나 평온한 목소리.

그때.

-우웅! 화아아……!

제르멜이 팔을 크게 휘저으며 시전 중인 대마법들을 모두 취소시켰다.

마법이 전부 걷어지자, 아무 피해도 받지 않은 멀쩡한 모습의 처용이 나타났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듯, 평온하게 서 있는 모습.

게다가.

-스스스.

마법이 취소되며 흩뿌려진 제르멜의 마나.

그 마나 중 일부가 처용에게 흡수되듯, 흘러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수로……!?”

제르멜이 그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자, 경악을 내뱉었다.

처용을 향해 무한히 쏟아지던 대마법을 모두 취소한 이유.

그가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아서?

아니었다.

마나를 모아 더 강력한 대마법을 쓰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었다.

제르멜이 마법을 취소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무슨 수로 8서클의 마나를! 마탑의 에너지를 강탈한 거냐!”

제르멜에게 복속된 마탑의 에너지.

그 에너지가 제르멜의 지배를 벗어나 처용에게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강렬한 대마법의 폭격 속에서 처용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용이 스스로를 보호해서가 아니었다.

마나가 처용을 공격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상대와의 마나 장악력과 지배력이 압도적으로 차이 나는 경우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1서클의 하급 마법사가 발현한 공격 마법을 6서클의 상급 마법사가 강탈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그러나 제르멜은 하급 마법사가 아닌 8서클의 대마법사.

심지어 그가 지배하는 마나량만 따지면, 거의 9서클이라 봐도 무방했다.

제르멜의 마나 지배력은 결코 약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

그런 제르멜의 지배하에 있던 마나가…… 통제를 벗어나 처용에게 스며들었다.

처용은 무한한 마나 폭격에 공격당하는 척, 제르멜의 마나를 모조리 흡수하고 있었다.

“네게 조종당하는 마나들이 네가 싫다고 나한테 오는데, 뭐 어쩌겠어?”

짧은 비웃음을 흘린 처용이 손아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우우웅.

제르멜에게서 벗어난 마탑의 마나가 처용의 손아귀 위로 뭉치며 회전했다.

동시에.

“덕분에, 배부르게 잘 먹었다.”

[팔괘축기가 포화 상태에 이릅니다.]

[선인의 육체가 팔괘축기의 세 번째 층을 생성합니다.]

[팔괘축기의 중심, 환원(還元)의 심(心)에 에너지가 가득 찼습니다.]

[다 저장하지 못한 에너지를 경험치로 환산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제르멜이 경악 어린 목소리로 이를 갈며 읊조렸다.

동시에 눈을 감고 자신과 연결된 마탑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 결과.

“마, 마탑에…… 마탑에 무언가가 침입을?”

이변을 눈치챈, 제르멜이 눈을 뜨고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탑 심부(深部)에 침입한 것을 파악했다.

마치, 살아 있는 바이러스가 침입하여 내부를 마구잡이로 헤집는 느낌이었다.

처용을 처치하기 위해 대마법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었다.

게다가 더 경악스러운 것은.

마탑 심부에 침입한 바이러스가, 마탑에 저장된 에너지의 지배권을 강탈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제르멜이 경악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성지나 다름없는 마탑에 바이러스를 침투시킨 것도 경악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바이러스를 심은 것도 모자라, 그것을 조작해 마탑에 저장된 에너지의 소유권을 빼앗고 있었다.

마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용은 제르멜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비웃음을 흘리고는.

“신기한 거 보여줄까?”

-짝!

두 손을 맞부딪혀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그러자.

-스스스.

제르멜에게 뿜어져 나오던 짙은 마나가 확 줄어들었고.

-콰아아!

반면에 처용에게서 강렬한 에너지가 솟구쳤다.

본래 제르멜에게만 전송되어야 하는 마탑의 에너지.

그것이 처용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무슨 수로 나의 마탑을-!”

마탑의 지배권을 강탈당한 상황.

그 현실을 부정하듯 제르멜이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마탑? 지랄한다.”

그 말을 들은 처용의 입에서 싸늘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남의 것을 훔쳐 쓰기밖에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새끼가.”

마탑을 세우고 마법사들의 권위를 아스터 교단의 성기사와 사제 못지않게 만든 이.

에스라 대륙의 마법을 발전시키고 게이트웨이를 발명했다 알려진 존재.

사람들은 그것이 모두 제1마탑주 제르멜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제르멜은 스스로 연구하고 고뇌하여 대마법사에 오르고 마탑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아스터 교단에 의해 강제로 마탑에 봉사하게 된 이.

바로 루비아가 찾아내고 발명한 것들을 강탈한 것에 불과했다.

“주워 먹어도 제대로 못 쓰는 병신새끼.”

“이이……!”

처용의 비웃음에 이어, 마탑에 문제까지 생기자, 제르멜이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분노와 당황스러움이 일렁이는 모습.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찰의 대악마시여.”

제르멜의 일그러진 표정이 조금 풀어지고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동시에, 그 말을 똑똑히 들은 처용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우우웅! 쿠구구!

제르멜에게서 마나가 아닌, 대악마의 마기가 솟구쳐 올라왔고.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알겠느냐?]

-스르륵.

마기에서 제르멜의 성좌.

판데모니움 서열 24위, 감찰의 대악마 나베리우스의 형상이 나타났다.

-탁!

나베리우스가 손가락을 강하게 튕기자.

-파아아아……!

주변을 감싼 붉은 신력, 징벌의 선고가 해제되었다.

그러자 난장판이 된 마탑의 꼭대기 위에 처용과 제르멜이 나타났다.

-콰콰! 쿠콰콰!

마탑의 주변에는 아직도 리치들과 헌터들, 드래곤들의 전투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양측이 팽팽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고.

-캬아아!

-크어……!

마탑의 리치들과 마법사들, 데스 드래곤들이 거의 정리되기 직전이었다.

“덕분에, 마탑을 수월하게 장악했어.”

-탓.

헌터들과 드래곤들을 돕던 루비아가 처용의 옆에 나타났다.

그런 그녀의 어깨 위에는.

-캬아!

푸른 마나가 뭉쳐져 만들어진 거미 형태의 무언가.

마탑을 장악한 바이러스, 마나로 육체를 형성한 디바우러가 부유하고 있었다.

“네년이 감히 나의 마탑을……!”

제르멜이 마탑을 강탈한 원흉, 루비아를 향해 분노를 담아 읊조리자.

“뺏을 줄만 알던 늙은이가 자기 것을 뺏기니 분한가 봐?”

루비아가 입꼬리를 비틀어 보이며 도발하듯 대답했다.

그 말에, 제르멜이 이를 아득바득 갈며 소리 없는 분노를 드러내고는.

“……내가 완벽해지는 대로 네년과 네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파사사삭…….

지푸라기 인형으로 변하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처용을 마주해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는 이유 중 하나.

바로 다른 신의 신관이 은밀하게 자신을 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즉각 신의 권능을 발동하여 위기를 빠져나오면 되었으니까.

“내가 판데모니움에서 완벽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

-바사삭……!

후일을 기약하는 제르멜의 말이 이어지며, 이내 머리를 제외한 육체가 지푸라기 인형으로 변한 순간.

-후욱! 파아악!

처용이 제르멜의 앞에 순식간에 나타나 목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드디어!”

-지잉.

마치,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핏빛으로 변한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읊조렸다.

사실, 처용이 필요 이상의 전력을 발휘하면, 혼자서 마탑과 제르멜을 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처용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다.

마탑의 습격, 제르멜의 사살은 ‘진짜 목표물’을 잡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처용이 제르멜의 목을 움켜쥐자.

-우웅! 파삭! 파삭!

제르멜이 처용의 신력에 휩싸이며 지푸라기로 변하는 것이 잠시 멈추었다.

“무슨 짓을-?”

붙잡힌 제르멜이 당황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고.

“루비아, 네 원한을 갚을 시간이다.”

처용은 뒤에 있는 루비아를 눈짓하며 말했다.

“뒤는 맡겨.”

루비아가 처용의 말에 답한 순간.

“뒤집어라. 역천.”

-우우웅!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신력을 내뿜었고 역천의 권능을 발동했다.

인과율의 힘이 제르멜과 처용을 감쌌고.

-파사사삭.

지푸라기로 변해가던 제르멜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파사사삭!

처용의 몸이 지푸라기 인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르멜이 도망치기 위해 준비한 수단을, 처용이 빼앗아 사용하는 듯한 모습.

이윽고.

-파사사삭……!

처용이 지푸라기 인형으로 변하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마탑과 조금 동떨어진, 에스라 대륙의 서북쪽.

그곳에 세워진 아스터 교단의 신전 지하.

“칫, 언제까지 이 무능한 놈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거야.”

신전의 중앙 제단 위에 누워있던 금발 머리의 벽안 여성.

제니퍼가 몸을 일으키며 불만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가 아스터 교단의 신전들을 은밀하게 이동해 다니는 이유.

자신의 성좌,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서 받은 명령 때문이었다.

-저 나약한 신관 놈들이 죽을 것 같으면, 네가 도와라.

아르테미스는 악의 종주에게 세례를 받았다.

덕분에 그녀가 가진 권능과 힘이 더욱 강해졌다.

성좌가 강해진 만큼, 제니퍼 역시 스킬과 권능이 강화되었다.

본래, 자신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인 ‘사냥 군주의 더미’.

그 스킬을 다른 이에게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힘을 이용해, 처용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중요한 이들을 살리는 것.

이것이 제니퍼가 부여받은 임무였다.

물론.

“신전을 옮기는 대로…… 이 역겨운 일도 끝이다.”

제니퍼의 성격상, 이런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성좌인 아르테미스 역시, 타인을 돕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둘이 다른 성좌와 신관을 돕는 이유는 오롯이 거래 때문이었다.

“내가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 하나 봐라.”

-저벅.

제단에서 내려온 제니퍼가 다짐하듯, 읊조리며 앞으로 나아간 순간.

“두 번 다시는, 네가 남을 구할 일이 없을 거야.”

-스륵.

제니퍼의 뒤에서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차가운 목소리가 제니퍼의 귓가에 울렸고.

“……아니야.”

제니퍼가 저도 모르게 공포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잘못 들었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이런 마음의 소리가 수백 번 울렸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 면상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제니퍼 로스차일드.”

-지잉.

핏빛의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절대로, 가까이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존재.

아니, 절대로 가까이 마주해서는 안 되는 존재.

“아, 아, 아니…… 아니야…….”

처용의 모습을 확인한 제니퍼가 입술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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