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화
가이아(Gaia).
올림포스 창세 신화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올림포스 성운에서 신명을 짊어진 선천적 신격들은, 모두 가이아의 자손들이었다.
[조모님께서 남기신 예언이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제우스는 성운의 주신 자리를 아테나에게 넘기고 잠적한 이유가 ‘가이아의 예언’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테나가 그런 제우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가이아의 진짜 정체는, 태초신을 돕던 우주의 관리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태초신을 돕던 관리자들이 모두 안식에 들 때, 같이 안식에 들었던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제우스에게 예언을 전했다?
그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우우웅……!
제우스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구슬.
은은한 빛을 내뿜던 태초의 조각이 몇 번 점멸하더니, 힘을 잃은 듯, 빛이 사그라졌다.
[뭐야, 왜 이래?]
갑작스럽게 기운이 약해진 태초의 조각을 본 제우스가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그 순간.
[……태초의 그릇 속에 잠들어 있던 조각인가?]
제우스와 그가 들고 있던 태초의 조각을 유심히 바라보던 황룡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우웅. 휙!
태초의 조각이 제우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황룡에게 향했다.
-우웅. 우우웅.
황룡의 앞에 도달한 태초의 조각이 옅은 파동을 퍼트렸고.
-우우웅.
그에 공명하듯, 미륵이 손에 든 태초의 심장과 황룡에게서 옅은 파동이 흘러나왔다.
황룡이 그 기운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짧게 침묵한 황룡이 눈을 뜨고는.
[그대가 따르던 가이아의 예언은, 태초신의 의지가 그대를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한 형체였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기록을 보고 읽듯 듯한 분위기로 말을 이었다.
잔잔한 황룡의 목소리가 울리자.
[……그 예언자라 불리는 꼬맹이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제우스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예언자’, 엘리스를 언급하며 말했다.
[판데모니움을 나가면, 예언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라더니…… 이런 의미였나. 참나.]
알 수 없는 의미가 담긴 제우스의 말이 이어지자.
[자세히 말해 주시죠.]
아테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물었다.
제우스는 그런 아테나를 보며 잠시 생각하고는.
[최후의 데미갓 프로젝트 실험 당시…….]
자신이 어쩌다 판데모니움으로 향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했다.
약 7년 전, 성운들과 세계 가문 연합이 주도한 데미갓 프로젝드.
각 성운의 주신급, 대신급 성좌들이 모여 태초의 그릇을 연구할 때.
-……제우스.
태초의 그릇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하고 오직 제우스만 들었던 목소리.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올림포스 성운의 시조(始祖), 가이아의 목소리였다.
그 당시 제우스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른 성좌들 몰래 태초의 그릇에 손을 대 봤었다.
그러자.
[다른 성운 몰래, 태초의 그릇과 접촉했을 때 그릇 안에서 태초의 조각 하나가 나와 내 손에 쥐어졌다.]
제우스의 손에 태초의 조각이 쥐어졌다.
그 직후 최후의 데미갓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실험이 잘못되었는지, 강렬한 폭발과 공간의 뒤틀림이 일어나며 시설 전체가 난장판이 되었다.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 대부분은 모두 죽거나, 소수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리고…… 태초의 그릇이 사라졌다.
그 후.
[가이아 님의 예언이 내게 들려왔지.]
현장에 있던 성좌들 중 유일하게 제우스만이 ‘예언’을 들었다.
[가이아 님의 목소리는 주기적으로 내게 들려왔고 예언을 따르지 않을 시, 파멸이 다가온다고 속삭였다.]
제우스의 말이 이어졌다.
예언의 내용은 제우스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시, 성운과 우주에 파멸이 도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예언이 흘러나온 원인인 태초의 그릇에 다시 손을 대 볼까 했지만…… 그때는 종적을 감추었었지.]
제우스는 계속 들려오는 예언에 속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함과 동시에 그 원인을 찾았다.
바로 예언이 담긴 태초의 조각이 담겨 있던 태초의 그릇.
그러나 태초의 그릇은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유독, 태초의 그릇에 집착했던 이유가…… 예언 때문이었나?’
처용이 제우스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며 속으로 읊조렸다.
-태초의 그릇은 어디로 빼돌린 거냐?
악몽 속, 과거에서 마주쳤던 제우스는 유독 태초의 그릇에 집착을 보였었다.
그 집착의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받은 ‘가이아의 예언’ 때문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쩔 수 없이 예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제우스가 예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며 말을 잇자.
[왜 그것을 알리지 않았습니까?]
아테나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반박하듯 물었다.
성운의 ‘파멸’을 예언한 가이아의 목소리?
아무리 그 당시 제우스가 주신이라고 해도, 혼자서 고민하고 결정할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성운의 성좌들을 불러 모으고 이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사안이었다.
그런데 제우스는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테나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묻자.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
그 의문 어린 아테나의 질문에 답한 것은 황룡이었다.
[태초신의 의지가 전한 예언을 듣는 순간, 제약이 걸렸을 테니까.]
[맞소. 예언을 언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더군.]
황룡의 말이 맞다는 듯, 제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긍정하듯 말했다.
제우스는 자신이 들은 예언을 공표하고 성운의 대신들과 이를 의논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
예언에 대해 언급하려는 순간, 혹은 이에 관련된 말을 하려는 순간 입이 턱 막혔다.
글이나 문자로 남기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예언에 관한 내용을 쓰면 자신의 손은 전혀 다른 문자를 쓰고 있었으니까.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제우스는.
[조모님의 예언이 이끄는 대로, 이 조각의 인도에 따라 판데모니움으로 향했다.]
성운을 살리기 위해, 다가오는 파멸을 저지하기 위해 예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제우스의 이야기를 들은 아테나가 잠시 눈을 감으며 침묵하고는.
[왜 저입니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파멸이 예정된 예언을 막기 위해 제우스는 자취를 감추고 판데모니움으로 향했다.
그가 왜 사라졌는지는 나름대로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왜 어머님들을 제쳐두고 제게 주신의 자리를 넘긴 겁니까?]
어째서 자신에게 주신의 자격을 주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옅은 분노와 원망, 의문이 일렁이는 아테나의 물음에.
[……네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들었다.]
제우스가 미안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는 판데모니움에 있었지만, 알레인과 닥터가 전해주는 지상과 신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포세이돈의 폭주에 이어 아테나를 배신한 형제들이 대한 소식 등.
특히, 성운을 배신한 이들이 판데모니움에 나타났을 때는.
-이것들을……!
제우스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찾아가 때려눕히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었다.
동시에, 아테나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하게 느껴졌다.
아테나에게 무거운 주신의 의무를 강제로 지게 만든 것은 미안했다.
그러나.
[네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미안했다. 하지만,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구나.]
제우스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제우스로 인해 찾아온 혼란.
형제, 가족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견제하는 상황.
아테나는 그런 혼돈 속에서 흔들리던 올림포스를 바로잡고 우뚝 세웠다.
게다가 올림포스를 안정시키는 것에 넘어서, 거대 성운 중 최고의 반열에 들도록 만들었다.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게 증명됨 셈이지. 하하.]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며 미소를 짓는 제우스의 말에 아테나가 작게 인상을 쓸 때.
[자식의 노력을 네 선택 덕분이라고 포장하지 마라.]
그런 둘을 바라본 니알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제우스의 말에 답했다.
[뭐, 덕분에 그 무시무시한 놈들에게서 가까스로 살아 나오긴 했네.]
그래도, 제우스의 공로를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그간 제우스가 자신을 도운 일이 적지는 않았으니까.
마지막에 바알을 홀로 가로막은 것 역시, 판데모니움을 무사히 탈출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 셈이었다.
[무사히 나왔으니,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라네. 알레인.]
제우스는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 준 니알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와 함께 올림포스로 갑시다. 부인?]
[이 미친 새끼가, 내가 언제 그딴 약속을 했냐!?]
음흉함이 일렁이는 제우스의 미소에 니알라가 온몸으로 질색을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아테나의 눈빛이 확 싸늘해졌고.
[설마…… 예언을 따르는 건 둘째 치고 겸사겸사…….]
이내 의심이 일렁이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설마, 설마, 했는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어…….]
아테나와 같은 올림포스 소속의 두 성좌.
헤르메스가 이마를 탁! 치며 탄식을 흘렸고 티케가 창피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읊조렸다.
[설마…… 아니시죠?]
아테나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제우스에게 물었다.
올림포스의 전 주신 제우스.
하늘 벼락의 성좌.
거대 성운의 주신급 성좌 중 젊은 축에 속하는 능력 있는 주신.
제우스를 지칭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신계, 지상에서 그를 칭하는 더 유명한 말이 있었다.
바로 신들 중 최강의 바람둥이라는 것.
원하는 이성들을 찾기 위해, 지옥도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는 소문이 자자한 남자였다.
올림포스에 속해 있는 성좌들과 신계의 주민들은 물론, 타 성운의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테나는 그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고는 혹시나 싶어 물은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제우스가 그쪽(?)으로 유명하다고 해도.
‘아니겠지.’
아테나는 속으로 제우스가 예언보다도 그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진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성운과 우주의 파멸을 막기 위해 예언을 따랐다고 했으니까.
그런 제우스가 예언을 따르는 건 겸사겸사였고 사실 새로운 연애 상대를 찾는 게, 주목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 곧 네 새로운 어머니가 될 분이다.]
그런 아테나의 바람을 저버리듯, 제우스가 알레인을 가리키며 ‘새로운 어머니’라고 소개하듯 말했다.
그 순간.
-뜩!
아테나의 입에서 짧고 굵게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마치…… 아슬아슬하고 팽팽하게 당겨지던 끈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
그리고.
[그러니까…… 내게 주신의 자리를 강제로 넘기고 잠적한 진짜 이유가…….]
-스스스!
붙잡고 있던 이성과 인내의 끈이 끊어진 아테나에게서 무겁고 거친 신력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억누르던 인내의 벽이 터지고 그녀 안에 잠재되어 있던 울분이 쏟아지는 듯.
[새로운 어머니를 데려오기 위함이였다?]
-쿠구구구!
스멀스멀 흘러나오던 신력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에휴.”
그런 아테나의 모습을 본 처용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녀가 왜 감정이 터지듯, 분노를 드러내는지 이해가 되었으니까.
회귀 전,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남몰래 얼마나 분노와 울분을 삭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테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상처가 많았다.
아테나가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은 원인은 바로 그녀에게 무거운 짊을 짊어지게 만든 제우스였다.
그런데 다시 마주한 제우스는, 그런 그녀가 잘 버틴 것이, 자신이 선택을 잘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니알라를 새로운 어머니라고 소개하는 망발까지 내뱉었다.
처용은 인내심이 강한 아테나가 왜 분노하지 이유를 충분히 공감하고는.
“……특별 수련 결계를 가동한다.”
지면에 신력을 흘려보내며 읊조렸다.
그러자.
-피이이이!
제우스와 아테나를 중심으로 지면에 황금빛이 퍼지며 그 둘을 감싸기 시작했다.
지금 있는 장소는 바로 수련탑의 지하에 마련된 특별 수련장.
이곳은 수련탑의 기능이 적용되는 장소였다.
처용은 수련탑의 기능을 활용해 ‘대련 장소’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다름 아닌, 아테나가 제우스를 상대로 분노를 풀 수 있도록 만든 것.
“지속 시간은 30분입니다. 아테나 님.”
처용이 아테나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자.
[고맙…… 구나.]
-철컥!
아테나가 처용의 의도를 파악하며 그 말에 답하고는. 오른손에 아스트라페를 소환해 굳게 쥐었다.
[서, 설마 아버지를 때릴 생각은 아니겠-.]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제우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촤라락!
수련탑의 황금빛 결계가 둘의 모습을 감싸며 사라졌다.
그리고.
-……콰콰콰쾅!!
강렬한 굉음이 울리며 수련탑의 결계가 크게 흔들렸다.
-쿠구! 쿠구구……!
결계 속에서 크게 울린 한 번의 충격음을 시작으로 여러 번의 자잘한 충격들이 울려 퍼질 때.
“아테나 님이 진심으로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처용 옆으로 다가온 연아가 격렬한 진동을 퍼트리는 황금빛 결계를 응시하며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 ‘인사해 새엄마야’, 라면서 몽마를 데려오면 어떨 것 같아?”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한 처용이 적절한 예시를 들며 답했다.
“아하?”
연아가 이해했다는 듯,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고.
“예시가 좀 그렇긴 한데, 아테나 님이 왜 화가 났는지는 알 것 같아.”
그 옆에 있던 연화는 아테나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자, 작전 종료.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짝. 짝.
처용이 박수를 치며 이번 작전의 종료를 선언했고 일을 마무리하듯 말했다.
그 말에 헌터들이 눈치껏 주변을 수습하며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