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메피스토가 처용에게 당하기 전.
[밤의 성채는 얼마나 장악했느냐?]
은밀하게 마기를 모으던 아스모데우스가 바닥에 쓰러진 마르크를 향해 물었다.
“으, 으어…… 서, 성채의 파, 80%를 장악했습니다. 마신…… 이시여.”
바닥을 기던 마르크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답했다.
본래, 이 세계의 주인인 체페슈에게서 강탈한 영향력.
마르크는 악신들의 도움을 받은 결과 그 영향력을 상당히 빼앗아 올 수 있었다.
곧 모든 영향력을 강탈하고 진정한 군주로 거듭나나 싶을 때, 삼천마가 강림해 버렸다.
모으던 힘을 강제로 빼앗겼고 체페슈에게서 강탈하던 지배력이 확 더뎌진 상황이었다.
“지, 지금도…… 조 조금씩 영향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거면 충분하다.]
마르크의 말에 아스모데우스가 잠시 생각하고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순간.
-촤아아아!
메피스토가 처용의 태극천체일도에 베이며 화신체가 사라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
그 모습을 본 아스모데우스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질렀다.
대악마들 중에서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세 명의 대악마.
그런 삼천마 중 하나가 인간에게 당했다.
비단, 아스모데우스만이 아닌, 모든 악신들이 경악을 내비치고 있었다.
동시에 짙은 낭패감을 보였다.
악신들에게 가장 강력한 전력이 되어 주던 존재가 바로 메피스토였으니까.
메피스토가 당한 이상,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네놈을 군주로 만들어 주마, 그러니 네가 모은 지배력을 나에게 넘기거라.]
아스모데우스가 당황스러움을 억누르고는 마르크를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자.
“드, 드디어 내가…… 군주가-!”
-스르륵.
마르크는 망설임 없이, 아스모데우스에게 새까만 혈기를 흘려보냈다.
-몽환의 이름을 걸고 네놈을 군주로 만들어 주마.
아스모데우스는 신격의 맹세, 몽환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었다.
때문에, 마르크는 아스모데우스가 약속을 지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의 명령에 충직하게 따른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스르르륵.
지금껏 체페슈에게서 강탈한 밤의 성체의 지배력이 담긴 검은 혈기가 아스모데우스에게 흡수되었다.
그러자.
[……드디어.]
-쿠구구!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길게 찢어 보이며 환희를 드러냈다.
마르크의 혈기를 흡수한 아스모데우스의 마기가 두 배, 세 배로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온전한 몽환을 거머쥐게 되었구나.]
-화아아!
아스모데우스가 혈기 속에 일렁이는 권능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 기다림과 계획 끝에 거머쥔 힘.
아스모데우스가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야, 약속을…… 지켜주시오.”
겨우 버티던 마르크가 힘겨운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남은 마기와 혈기로 버티고 있던 상황.
남은 힘마저 아스모데우스에게 넘겼기에, 더는 버티기가 힘겨운 듯 보였다.
약속을 지키라는 마르크의 말이 울리자.
[……버러지 같은 것, 몽환은 본래 나의 신명이 아니니라.]
-화아아! 우드드득! 우득!
아스모데우스가 마기를 뭉쳐 검은 촉수들을 만들어 내고는 마르크를 휘감았다.
[이제야 나의 신명이 되었지만.]
“무, 무슨-?”
마르크가 의문을 다 드러내기도 전에.
-까각! 까각!
검은 촉수에 이빨들이 돋아나더니, 마르크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크헤에에-엑!? 어, 어째서?”
마르크가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고.
[네 덕분에…… 내가 온전한 밤의 마신, 몽환의 주인이 되었구나!]
아스모데우스가 환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윽고.
-우드득! 콰득!
마르크가 검은 촉수들에게서 돋아난 이빨에 물어뜯기며 게걸스럽게 잡아먹혔다.
검은 촉수에 의해 마르크가 완전히 잡아먹혀 사라지자.
-콰아아!
아스모데우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더욱 짙어졌고 거대해졌다.
[이제, 이 몽환의 세계가 완전히 나의 것이 되었도다!]
-화아아!
아스모데우스가 넘치는 마기와 혈기를 사방으로 내뿜으며 소리쳤다.
-쿠구구……!
짙은 마기가 퍼지자, 밤의 세계 전체에 검은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밤의 성채 전체에 이변이 발생하자.
[우리의 역할은 끝이다.]
-스르륵.
조제군이 뒤로 크게 물러나며 읊조리고는 화신체를 해제하며 사라졌다.
-스륵. 샤라락.
다른 검은 별들 역시 조제군을 따라 물러나 화신체를 해제하며 물러났다.
[……우리 일은 여기까지다.]
아르테미스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러나며 말했고.
[제길.]
아폴론은 그런 아르테미스의 말에 침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스트라페.]
-파지지직!
아테나가 자리를 박차며 아스트라페를 내질렀다.
아스트라페의 각진 창칼이 번개처럼 쇄도하며 나아갔고.
[크아악!?]
-콰직! 파지직!
루나를 압박하던 아레스의 가슴을 꿰뚫으며 샛노란 뇌전을 흩뿌렸다.
-후욱! 쾅!
아테나는 아레스를 꿰뚫은 아스트라페를 하늘에 반원을 그리며 크게 휘두르고는.
-콰쾅! 콰콰-!
창날을 땅에 박아넣으며 뇌전을 터트렸다.
그 결과, 창날에 꿰뚫린 아레스가 그대로 휩쓸려 땅에 처박혔고 뇌전의 폭발에 휩쓸렸다.
-파사사……!
치명상을 입은 아레스의 화신체가 핏빛 모래로 변하며 사그라졌다.
[……찾을 것이다.]
아레스를 끝장낸 아테나가 도망치려는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찾아내서, 내 손으로 너희들을 끝장낼 것이다.]
아테나의 입에서 옅은 분노가 일렁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용을 통해 올림포스를 배신한 형제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들이 누구에게 가담했고 어떤 일을 돕고 있는지를 들었었다.
말로 전해 듣는 것에 불과했지만, 아테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형제들이 성운을 배신한 이유는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단순히 아테나가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당연히 아테나가 주신의 자리에 앉은 것을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아테나의 입장에서는 나름 억울한 부분도 있었다.
그녀는 주신의 자리를 원해서 앉은 것이 아니라, 강제로 주신의 자격을 양도받았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테나를 시기하는 이들은 많았다.
바로 올림포스를 배신한 그녀의 형제들처럼.
그랬기에 아테나는 같잖은 이유로 어리석은 선택을 한 형제들에게 분노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대악마의 노예를 자처하는 네놈들을…… 내가 직접 처단할 것이다.]
그저 소식을 전해 듣는 것과 배신자들의 행동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악마들의 충직한 노예가 되어 그들의 명령을 따르는 형제들.
그 꼴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잔잔하고 차가웠던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직접 찾아오길 기대하지. 아테나.]
그런 아테나의 분노에 아르테미스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머저리 같은 숙부랑 같은 꼴을 당하겠지만.]
-파아아……!
아르테미스가 자신이 죽인 포세이돈을 언급하며 말하고는 화신체를 해제하며 사라졌다.
아폴론 역시 그런 아르테미스를 따라 화신체를 해제하며 이 자리를 벗어났다.
모든 악신들이 사라지자.
[하하하!]
환희를 내지르는 아스모데우스만이 남았다.
모두가 도망치고 홀로 남았는데도,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짓는 모습.
-스르륵.
그런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에 붉은빛이 감돌며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살짝 불투명했던 화신체가 점점 선명한 빛을 띠었다.
“……본신으로 강림한 것인가?”
아스모데우스의 상태를 본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조금 전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정도로 짙게 퍼지는 마기.
아스모데우스 주변으로 넘실거리는 요사스러운 핑크빛 기운.
지금 그녀는 단순한 화신체 상태가 아닌, 본신 상태로 이 자리에 다시 강림한 것이었다.
‘마르크를 잡아먹고 이 성역의 지배력을 강탈했군.’
처용은 통찰의 눈으로 아스모데우스와 하늘을 관찰하고는 상황을 파악한 듯 읊조렸다.
마르크가 체페슈에게서 빼앗은 영향력.
아스모데우스는 마르크를 잡아먹는 것으로 그가 가진 모든 걸 빼앗은 듯 보였다.
지금 처용의 눈에는.
-쩌저저적!
아스모데우스의 마기가 이 세계 전체를 뒤덮는 것이 보였다.
이 주변을 제외하고 밤의 성채 전체가 검은 안개에 휩싸이는 것도 그 영향이었다.
[본래는 이 버러지와 체페슈를 동시에 잡아먹을 생각이었거늘.]
본신으로 현신한 아스모데우스가 요사스러운 기운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르크를 이용해 체페슈가 지닌 권한과 영향력을 강탈한다.
군주의 자리에 욕망이 있던 마르크는 아스모데우스의 손을 잡았고 반역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애초에 마르크를 밤의 군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마르크가 체페슈에게서 강탈한 영향력,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다.
지금, 그 목적을 이룬 상황.
그로 인해, 반쪽에 불과했던 몽환의 신명을 완전히 거머쥐고 이 세계를 지배하는 진정한 신이 될 수 있었다.
본신으로 이 자리에 강림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 아스모데우스는 밤의 성채 내에서 전지전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 힘으로 가장 먼저 할 것은 바로 군주를 포함한 밤의 일족들을 모두 흡수하는 것이었다.
본래는 블러드 쉬르에 갇힌 마르크와 체페슈를 가장 먼저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체페슈에게 남은 밤의 성채 지배력까지 모두 강탈해야 했으니까.
그가 블러드 쉬르에 있었다면, 작금의 일이 손쉽게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 계획과는 다른 상황이 생겼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본신으로 강림하는 데 성공한 이상, 그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지금 보니 네년을 먼저 잡아먹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구나.]
루나를 바라본 아스모데우스가 입맛을 다시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동시에.
-탁.
손가락을 튕기며 주변에 일렁이는 요사스러운 마기를 흩뿌렸다.
그러자.
-쿠우! 파아아!
주변에 펼쳐진 붉은 혈기의 폭풍.
블러드 쉬르가 크게 부풀더니,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스르륵.
핏빛의 폭풍이었던 블러드 쉬르의 잔해가 새까맣게 변질되었다.
터진 블러드 쉬르가 검은 파동이 되어 퍼진 순간.
“크허억!?”
“크윽!”
모든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고.
-스스스.
쓰러진 뱀파이어들의 피부가 점점 검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허, 허락할 수 없다!”
-우우웅!
체페슈가 작금의 상황을 막기 위해 혈기를 끌어 올리며 지면에 손을 짚었다.
“내가 순순히! 우리 일족이 잡아먹히는 것을 허락할 것 같은가!”
-주르륵.
혈기를 끌어올리며 피를 토해낸 체페슈가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보며 소리치자.
[피조물 따위가 나 몽환의 종주를 거스르려 하느냐.]
-스르륵.
아스모데우스가 마기를 더 끌어 올리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 결과.
“으아악!”
“크흑!”
뱀파이어들이 내뱉는 고통 어린 외침이 더 커졌다.
“저항할 수가…….”
-탁.
루나 역시 영향을 받은 듯, 피부에 검은 얼룩이 번지며 쓰러졌다.
게다가 다른 뱀파이어들보다 더 지독한 마기에 잠식되는 듯 보였다.
루나는 블러드 쉬르 안에 있던 유일한 뱀파이어.
아스모데우스가 퍼트린 마기에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장 많은 마기에 노출된 영향이었다.
[체페슈를 잡아먹기 전에, 식전 디저트로 나쁘지 않겠구나.]
아스모데우스가 그런 루나에게 손을 겨누자, 루나를 뒤덮는 검은 반점이 더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때.
[화염부 – 염제룡의 포효]
-화륵! 크르르-!
여래가 열 장의 화염부를 한곳에 뭉쳐 불타오르는 거대한 용의 머리를 만들어 내었다.
-콰아아아-!!
세상을 불태워 버릴 듯,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화염의 브레스가 아스모데우스를 향했다.
화염의 브레스가 아스모데우스를 휩쓸며 지나갔고.
[들이치는 밀물!]
[대양의 숨결.]
-쏴아아!
-콰아아!
해전무신이 환도로 만들어 낸 파도와 청룡의 브레스가 아스모데우스를 강타했다.
[하하하, 나는 지금 네놈들과는 달리 본신 상태다!]
-우웅! 파아아……!
아스모데우스가 몸을 보호하듯 마기를 둘러 공격을 막아내며 미소를 질렀다.
여래를 포함한 태룡전의 신격들이 아스모데우스에게 공격을 퍼부을 때.
-탓. 우우웅!
처용이 신력을 내뿜으며 루나에게 달려 나갔고 루나의 이마를 짚으며 신력을 흘려보냈다.
동시에, 주변에 쓰러져 몸부림치는 뱀파이어들을 응시했다.
루나와 류마를 포함한, 선인의 훈련을 받은 이들조차,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침식을 저지할 수 없다.’
처용이 루나와 주변 뱀파이어들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읊조렸다.
아스모데우스의 수중에 떨어진 밤의 성채가 뱀파이어들을 흡수하려 하고 있다.
작금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체페슈가 반항하며 버티고는 있지만, 그는 이미 지친 상태.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무언가라도 서둘러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처용이 빠르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때.
[에너지 펄스 레인.]
하늘에 떠 있는 함선, 마키나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목소리가 울렸고.
-타닥. 쏴아아……!
은빛과 초록빛이 일렁이는 비가 쏟아졌다.
맑은 비가 쏟아지며 지면을 적시자.
-스스스.
뱀파이어들을 잠식하던 검은 얼룩이 꿈틀거리며 침식 속도가 느려졌다.
“이건…… 보살님?”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의문을 표하며 보살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내리는 비, 에너지 펄스 레인 속에서 빛나는 초록빛의 신력.
빗방울 하나하나에는 자비의 손길이 깃들어 있었다.
[시간을 벌겠습니다. 계승자.]
처용의 머릿속으로 보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마도, 마키나 안에서 보살이 강림했고 작금의 상황에 도움을 주는 듯 보였다.
보살 덕분에 시간을 조금 벌자, 처용이 작금의 상황을 다시 면밀하게 파악했다.
본신으로 강림한 아스모데우스는 여래를 포함한 신격들이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보살 덕분에 침식은 느려졌지만, 완전히 저지할 순 없다.
-스르륵. 우웅.
지금조차도 처용이 루나에게 멸쳔의 권능을 사용하며 신력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침식을 역천으로 저지해 보려 했지만.
-스스스.
침식을 완전히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마지막 방법을 쓰게 되는군.”
작금의 상황을 다시 파악하고 생각을 마친 처용이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처용이 생각한 방법은 이곳, 밤의 성채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이 밤의 성채를 통해 본신으로 강림했고 지닌 마기까지 증폭시키고 있었으니까.
멸천의 힘을 한곳에 모으고 태극천체일도를 사용한다면 충분히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밤의 성채와 체페슈의 연결고리를 끊을 여유 따윈 없다는 것.
즉, 체페슈를 희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처용이 체페슈를 바라보자.
“부탁이오…….”
체페슈는 작금의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간절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그 말을 들은 처용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역천의 절을 쥐며 일어서려 했다.
그 순간.
-우웅.
루나에게서 작은 파동이 퍼져 나와 처용에게 닿았다.
“음?”
그 파동을 느낀 처용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루나를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루나가 아닌, 루나의 안에 잠들어 있던 존재.
-우우웅.
무형의 의지를 담아 처용에게 파동을 흩뿌린 존재는 다름 아닌 드래곤의 알이었다.
드래곤의 알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처용에게 파동을 흩뿌렸지만.
‘네 투정을 들을 시간이 없다.’
처용은 긴급한 상황 속에서 드래곤의 알이 전한 의지를 무시하려 했다.
그러자.
-우웅! 우우웅!
드래곤의 알이 더 강한 파동을 흩뿌리며 제 의지를 전했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처용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드래곤의 알이 무슨 말을 전했는지 신수의 격을 통해 읽어냈으니까.
모두를 구하고 작금의 상황을 역전시킬 방법이 있다.
루나의 안에 잠들어 있던 알이 깨어나며 전달한 의지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웅. 우우웅.
“아스모데우스를 소멸시킬 방법이 있다고?”
작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원흉.
아스모데우스를 완전히 소멸시킬 방법이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 드래곤의 알이 전한 목소리에 처용이 의문을 드러냈고.
-우우웅.
드래곤의 알이 그 방법을 이야기하듯 재차 파동을 흩뿌렸다.
처용이 드래곤의 알에서 전해진 의지를 읽고는 루나를 바라봤다.
“커, 할…… 수 있어.”
루나가 처용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고통 어린 침음을 내며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드래곤의 알이 전한 의지는 알을 품은 루나에게도 전달되었다.
작금의 상황을 역전시킬 방법의 주체는 바로 루나였으니까.
“내가…… 죽는다고 해도 일족들만큼은-.”
다만, 드래곤의 알이 말한 방법은 루나에게 위험을 동반했다.
그 사실을 자각한 루나가 위험을 감수한 듯, 의지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단 한 명도 죽지 마라.”
-스릉.
처용은 죽음을 각오하는 루나의 말을 자르며 역천의 절을 들어 올렸다.
단 한 명도 죽지 마라.
위험한 전투와 전장 속에서 처용이 동료들을 향해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회귀 전에는 위험한 전장 속에서 동료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었고.
지금은 회귀 전처럼 허무하게 동료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마음가짐이었다.
루나를 향해 죽지 말라는 말을 한 처용은.
-우우웅.
신력과 강기를 끌어 올리며 역천의 절에 부여했다.
-키이이-!
압축된 강기와 신력이 날카로운 칼날을 타고 흐르며 예리한 빛을 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식구에게 죽음 따위를 허락하지 않아.”
처용이 단호한 목소리로 루나를 향해 말을 잇고는.
-촤아!
역천의 절로 왼손바닥을 베었다.
강기와 신력이 일렁이는 칼날이 금강불괴의 피부를 뚫고 파고들자.
-주르륵.
처용의 손바닥에서 황금빛의 기류가 일렁이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베인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처용의 피가 중력을 따라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용의 피가 떨어진 곳은 다름 아닌.
-툭. 후두둑.
루나의 입속이었다.
신력에 이어 신명까지 각성해낸 인간의 피.
이전에는 루나가 처용의 힘을 감당하기엔 너무 약했었기에 거부했었던 피였다.
그런 강렬한 힘과 정수가 응축된 피가 루나의 입에 고이기 시작했고.
“……!”
루나는 눈을 감고 각오를 다지며 그 피를 모두 삼켰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