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루나의 위에 나타난 항마의 화신.
갑작스럽게 나타난 항마의 화신이 만들어 낸, 황금빛의 게이트.
그 게이트 속에서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신법의 대신.
아니, 신계에 ‘혈선’이라는 악명으로 유명한 신격.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쿠구구!
여래가 짙은 신력을 내뿜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리며 나타났다.
[혀, 혈선……!]
[제길!]
악신의 화신체들이 여래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을 내비치며 한 걸음 물러났다.
특히, 여래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이들.
조제군과 검은 별들의 안면이 크게 일그러졌다.
[어째서 저 빌어먹을 하계종의 권능이 나타난 거냐?]
[저 변종이 또 무슨 변수를……!]
마르크를 도우러 강림한 다른 악신의 화신체들.
아레스와 아르테미스 역시 항마의 화신과 여래를 보며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도대체 무슨 수로!”
마르크 역시 크게 당황스러워하며 소리쳤다.
자신은 대악마들과의 계약을 통해 그들의 화신체를 블러드 쉬르 안에 강림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루나는?
그녀는 신의 신관도 아닐뿐더러, 그녀와 연결된 존재는 그나마 살아남은 뱀파이어들이 전부였다.
군주도 살아남긴 했지만, 지금의 그는 루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처용에 이어 대신급 성좌의 도움을 받는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서약자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루나가 당황스러워하는 마르크를 보며 미소를 담아 말하자.
“……서약자!?”
마르크의 안면이 와락 일그러졌다.
밤의 일족은 자신의 피를 걸고 타인과 서약을 맺을 수 있다.
대부분의 일족들은 고위 귀족들을 향해 ‘충성 맹세’를 하는 용도로 활용한다.
다만, 밤의 왕족인 블라디미르 가의 일원이 행하는 피의 서약은 평범한 일족들의 서약과는 좀 달랐다.
아니, ‘조금 특별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초대 뱀파이어 군주, ‘블라디미르’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밤의 왕족들은 특별한 이들이었으니까.
그들이 행하는 피의 서약은, 대표적으로 서약 대상에게 블라디미르의 힘을 내려주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블라디미르의 축복을 내려받은 존재는 밤의 왕족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루세핀이 체페슈에게 선택을 받아 블라디미르의 일원이 된 것처럼.
루나는 군주의 직계 혈족, 그런 그녀가 처용을 선택했고 피의 서약을 맺었다.
왕족의 세례를 받은 이는 그 왕족과 깊은 인연의 선(Line)이 생긴다.
그렇기에, 처용이 블러드 쉬르에 들어선 루나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밤의 왕족이 하등한 인간을 서약자로 들이다니!”
마르크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같잖은 콧대만이 전부인 네놈들보다 대단한 사람이니까.”
루나가 일그러진 마르크의 표정을 보고는 비웃음을 담아 말하자.
“블라디미르의 축복을 악용하다니! 네놈들을 모조리 없애고 내가 새로운 블라디미르가 될 것이다!”
-콰아아! 우드득!
마르크가 마기와 혈기를 모아 거대한 뼈의 손을 만들어 내며 소리쳤다.
바알이 어둠을 뭉쳐 만들어 보이던 그의 권능.
마르크는 바알의 힘을 내려받은 제나 후작을 잡아먹었기에,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단순한 뼈의 손을 만들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쩌저저적!
뼈의 손에 오염된 혈기를 뭉쳐 붉은빛이 일렁이는 검은 낫칼들을 생성했다.
-샤아악!
여섯 개까지 늘어난 검은 뼈의 손이 낫칼을 세우며 루나를 향해 쇄도했다.
[……상대가 혈선이라 해도 놈은 혼자다.]
조제군이 다른 악신들의 화신체를 향해 말하자.
-탓. 샤샥.
악신들이 서로 넓게 거리를 벌리며 여래를 향해 달려 나갔다.
[화염부 – 염화성벽.]
여래가 가장 앞서 달려드는 악신들을 저지하기 위해 네 장의 화염부를 날렸다.
-화륵! 파아아-!
화염부에 일렁이던 불꽃이 순식간에 덩치를 키우며 화염의 장벽을 만들어 내었다.
-쾅! 촤아아-!
조제군과 함께 가장 앞서 돌진하던 검은 별들이 화염 장벽을 향해 검은 칼날을 내질렀다.
[힘을 모아라! 돌파한다!]
조제군이 명령하듯 말하자.
-우우웅! 촤아아!
검은 별들이 조제군을 향해 자리를 박차며 화염 장벽을 향해 칼날을 내질렀다.
화염의 벽을 뚫기 위해 힘을 한곳으로 모은 결과.
-파아!
여래가 만들어 낸 화염의 벽이 갈라졌다.
그 순간.
[내가 직접 죽여 버리겠다!]
-탓! 쐐에에!
뒤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악신, 아레스가 방패와 검을 치켜들고 빠르게 돌진해 나갔다.
동시에.
-피이이! 피잉!
후방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고 있던 두 악신.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의 화살이 루나를 목표로 쇄도했다.
-스르릉.
여래는 가장 앞서 돌진해오는 아레스를 응시했음에도.
-화르륵! 화륵!
주변에 펼친 화염 성벽에 더 힘을 쏟으며 다른 악신들의 개입을 방해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죽여 주마!]
아레스의 검 끝이 여래의 지척에 다가왔을 때.
-후욱! 까강!
은빛의 넓은 방패가 여래의 앞에 나타나며 아레스의 검을 튕겨내 밀쳐냈고.
-스릉. 까강!
각진 창날이 루나의 옆으로 쇄도해오며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의 화살을 막아내 튕겨냈다.
여래의 앞에 나타나 아레스의 공격을 밀쳐내고 루나에게 가해지는 저격까지 막은 이.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그녀는 다름 아닌 올림포스의 주신, 아테나였다.
아테나가 다시 마주한 형제들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전하자.
[이……!]
[아테나!?]
두 번째 활시위를 걸던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이 여래 앞에 나타난 아테나를 보며 경악을 드러냈고.
[왜 네년이 여기에 나타난 것이냐! 도대체 무슨 수로!]
아레스 역시 눈앞에서 마주한 아테나를 보며 경악했다.
그때.
-촤자자작!
마르크가 만들어 낸 거대한 뼈의 손들.
그 손들이 날카로운 낫칼을 내세우며 루나의 위에서 쇄도했다.
그 순간.
[파도의 검 – 첫 번째 장.]
-슈르륵.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장군복을 입은 자.
해전무신이 환도에 파도를 휘감으며 루나의 위에 나타났다.
[들이치는 밀물!]
환도가 크게 휘둘러지자 파도의 칼날이 넓게 펼쳐지며 호선을 그렸고.
-쏴아아! 까가강!
새까만 낫칼들이 파도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이-!”
갑작스럽게 난입한 존재에 의해 공격이 가로막히자, 마르크가 마기를 더 끌어 올리며 칼날의 궤적을 틀었다.
-차카캉!
낫칼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해전무신을 피해 루나에게 쇄도했다.
그때.
[멈춰라.]
-우웅.
중후하고 낮은 목소리를 타고 신력의 파동이 퍼져 나갔고.
-우웅. 철컥!
검은 낫칼의 겉으로 신력이 둘러지더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동시에.
-파아아! 콰자자자-작!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파도의 브레스가 낫칼을 쥔 뼈의 손을 휩쓸어 모조리 부수었다.
[허허, 누가 감히 우리 아이를 건드는 것인가?]
-탁. 촤라락.
마르크의 낫칼이 다가오는 것을 저지한 이는 낡은 책을 펼친 채 나타난 언문.
[도와주러 왔다네.]
파도의 브레스를 내뿜어 낫칼을 모두 부순 이는 청룡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수로 이만한 신격들을……!”
해전무신에 이어 나타난 두 신격에 의해 마르크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혈선의 화신체가 블러드 쉬르에 강림한 것은 경악스러운 일이었지만, 납득은 되었다.
루나는 처용과 피의 서약을 맺었고 처용의 성좌가 혈선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신격들은 도대체 무슨 수로 강림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올림포스의 주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불가능해!]
악신들, 특히 배신한 전 올림포스 성좌들이 경악하는 이유.
한 성운의 주신급 성좌가 이곳에 강림한 상황이었다.
“힌트는 네놈이 줬잖아, 멍청한 새끼야.”
항마의 화신에게서 처용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마르크가 고개를 돌려 블러드 쉬르 밖을 보았다.
서쪽에는 작금의 상황을 지켜봄과 동시에, 은밀하게 철수 준비를 하는 마인들이 보였다.
동쪽 역시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는 무리들, 체페슈와 헌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우웅.
가부좌를 튼 채, 두 손을 모아 신력을 내뿜고 있는 처용의 모습이 보였다.
마르크가 처용의 모습을 확인하자.
“네놈은 특정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니라, 바알과 크타니드를 통해 판데모니움 전체와 연결되어 있더군?”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들썩였고 그 목소리가 항마의 화신을 통해 흘러나왔다.
마르크가 다수의 악신들을 불러낼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마르크가 특정 악마하고만 계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판데모니움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대악마와 그런 대악마 위에 군림하는 존재에게 힘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부린 꼼수를 우리 역시 못 쓸 것 같았나?”
“고작 인간 따위가 다수의 신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헛소리!”
마르크가 처용의 말에 반박하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치자.
“나와 연결된 건 하나의 성좌가 아니라, ‘성역’이다.”
그런 마르크의 반응에 처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용과 연결된 이는 여래만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승자 한처용’은 성역 ‘태룡전’과 연결된 존재였다.
처용은 태룡전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즉, 루나는 블러드 쉬르에서 피의 서약자인 처용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금 그녀에게 소환된 항마의 화신이 그 증거.
게다가 처용은 태룡전이라는 태초신의 성역과 연결된 존재였다.
그 연결을 통해, 태룡전에 거주하는 성좌들의 화신체를 블러드 쉬르로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아테나의 경우도 같은 방법으로 이곳에 소환된 것이었다.
-그대의 형제들이 계승자와 맞서고 있다더군.
신관인 제시카와 함께 태룡사에 있던 아테나가 미륵에게 전해 들었던 말이었다.
미륵이 작금 일어나는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자.
-……제가 직접 가지요.
아테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미륵을 따라 태룡전으로 향했다.
성운을 배신한 형제들.
우주의 멸망을 앞당기려는 존재들의 앞잡이가 된 이들.
아테나는 성운의 주신으로서 그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직접 온 것이었다.
[네놈들은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파지직! 파직!
아스트라페에 번개를 휘감은 아테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용서를 바라지 마라.]
[용서!? 웃기지 마라!]
-스릉!
아레스가 아테나의 말에 검을 치켜들고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네년이 감히 무슨 자격이 있다고 감히 용서를 말하는 거냐! 주신의 자리는! 본래 네 것이 아니었다!]
[……내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방적인 증오가 일렁이는 아레스의 외침에 아테나가 눈빛을 차갑게 빛내며 말했다.
[나는 내가 짊어진 책임을 다할 뿐이다.]
아테나의 단호한 목소리에 아레스를 포함한 올림포스의 배신자들이 안면을 구겼다.
머릿수로는 마르크를 돕는 악신들이 우세였다.
그러나 머릿수로 우세하다 하여 작금의 상황이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처용을 돕는 신격들은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무력을 자랑하는 이들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대신급 성좌 중 가장 기피 해야 할 대상인 혈선이 이곳에 직접 강림했다.
게다가 올림포스의 배신자들을 잡기 위해 아테나까지 나타난 상황.
작금의 상황은 결코 유리하다고 볼 수 없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로 네놈이 졌다고 말하지 않았나?”
루나가 마르크를 향해 도발하듯 말하자.
“이대로…… 이대로 실패할 수는……!”
상황을 파악한 마르크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읊조렸다.
겨우 만들어 낸 기회를 이렇게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다.
그때.
-푸슈우우우!
마르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잿빛의 안개를 피워 내더니.
-화아아! 화아!
바람처럼 휘몰아친 뒤, 마르크의 앞에 공처럼 뭉쳐 들었다.
“으허어억……!”
-슈우우……!
갑작스럽게 힘이 빠져나가자, 마르크의 안색이 핼쑥해지며 주저앉았다.
[이런 멍청한 것들.]
마르크의 앞에 뭉쳐 든 어두운 잿빛의 폭풍 속에서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파아아! 스스스…….
폭풍이 걷어지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잿빛 피부와 새하얗게 흩날리고 있는 긴 머리카락.
이마에 돋아난 거대한 두 개의 검은 뿔.
검은 불길이 일렁이는 눈동자를 가진 미남 형태의 대악마.
[이대로 구경만 하다간, 이 일을 모조리 말아먹겠구나.]
폭풍이 사라지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삼천마 중 하나.
끝없는 증오의 대악마 메피스토였다.
“메피스토……!”
갑작스럽게 나타난 삼천마에 의해 처용의 눈빛에 긴장감이 일렁였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