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처용이 서쪽의 성채, 반역자들이 자리한 곳으로 간 지 약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도 지난 시점.
“으음,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돌아온다고 했는데…….”
동쪽, 군주의 세력이 자리한 성채 외곽에 선 연아가 서쪽을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잠깐, 간만 보고 온다.
처용이 서쪽으로 향하기 전에 했었던 말.
그는 서쪽 성채의 상황을 확인하고 반역자들의 세력을 줄일 겸, 적진을 향해 홀로 쳐들어갔었다.
적들의 칙령을 역이용한 처용은 이 세계에서 공격받지 않는다는 특수한 버프에 걸리기까지 한 상황.
어지간한 상황에선 위험에 처하지 않는 처용이 ‘무적’ 상태까지 되어버렸으니,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다만.
“내 기억이 맞다면 저 검은 화염은…….”
연아가 서쪽에서 드높게 솟구쳐 오른 검은 화염 기둥을 바라보며 읊조리자.
“삼천마, 디아블로의 권능이야.”
디아블로와 마주쳤던 경험이 있는 연화가 연아의 말에 답하듯 말했다.
서쪽에서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오른 새까만 화염 기둥.
화염 기둥에서 퍼져 나오는 열기가 동쪽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그 검은 화염의 열기 속에서 느껴지는 짙고 강렬한 마기.
연화의 기억 속에서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적.
대악마 중에서가 가장 강력하다 알려진 삼천마.
그중 하나인 무한한 공포의 대악마, 디아블로가 확실했다.
“마르크를 돕는 대악마 중에 삼천마가 있을 줄은……!”
연화와 마찬가지로 디아블로와 마주쳤었던 이들 중 하나.
루나가 서쪽 방향을 응시하며 침음을 흘렸다.
하늘 높게 솟구친 화염 기둥은 아마도 지구에서 봤었던 디아블로의 권능으로 보였다.
그런 강력한 대악마가 상대라면, 아무리 무적 상태의 처용이라 해도 하루 정도 고전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문제는.
-캬아아아!
처용이 소환해놓은 듯 보이는, 여덟 개의 머리가 달린 거대한 드래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아마, 서쪽에 자리 잡은 모든 세력.
대악마, 마인, 반역자 뱀파이어들 모두가 힘을 합쳐 그 괴물을 토벌하는 듯 보였다.
이윽고.
-크아아!
-캬아아!
여덟 개의 머리들이 하나둘 땅 위로 쓰러지더니.
-콰콰쾅! 파사사……!
이내 모든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처용이 소환한 괴수가 쓰러진 순간.
-쿠구구!
밤의 성채 전체가 한 번 크게 진동하며 울렸다.
마치, 대악마와 마르크에 의해 ‘칙령’이 선포될 때와 같은 현상.
그때.
“크윽!?”
서쪽을 경계하듯 노려보던 뱀파이어 군주, 체페슈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에요?”
루세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휴전의 칙령이 사라졌다.”
고통 섞인 침음을 흘리던 체페슈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하늘 위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불과 하루 전, 선포되었던 휴전의 칙령.
서쪽과 동쪽에 자리한 양 진형은 3일 동안 서로를 공격할 수 없는 규칙이 세워졌었다.
물론, 처용이 멸천의 권능을 이용해 칙령의 일부를 부수고 이를 악용했다.
무적 상태가 된 처용은 서쪽을 공격하러 나섰고 하루가 지난 상황.
그리고 처용이 소환한 괴수가 쓰러진 순간, 서쪽의 반역자들과 대악마들이 선포한 칙령이 사라졌다.
“마르크, 이 어리석은 자가 스스로 더 큰 피해를 감당하고도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체페슈가 반역자들의 수장, 마르크 공작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3일 동안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는 칙령.
칙령의 시간이 다 지나지 않고 이를 취소하면, 성지의 주인에게 부작용이 가해진다.
휴전을 선포한 이는 다름 아닌 마르크와 대악마들.
당연히 체페슈보다 휴전을 선포한 마르크가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이 리스크를 감당하고도 마르크는 칙령을 취소했다.
체페슈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의문을 읊조린 것이었다.
“……그 무식한 짓거리를 저지른 이유를 알 것 같은데요?”
연화가 체페슈의 말에 답하듯, 서쪽 부근을 노려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런 연화의 말이 끝난 순간.
-……쿠구구!
조금 전, 칙령의 무효화로 인해 느껴졌던 진동이 다시금 울려왔다.
연화의 말과 동시에 진동이 울리자 모두가 진동이 울려오는 방향, 서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렇군, 마르크 네놈은 칙령을 취소한 것이 아니었구나.”
체페슈가 무언가를 알아챘다는 듯, 진지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 끝장을 보고자 하는구나!”
분노가 서린 체페슈의 말이 이어지자.
-서, 서쪽의 성채가?
-저, 점점 가까워진다!
동쪽의 성채를 지키던 뱀파이어들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진이 이어지는 듯, 지면에 울려 퍼지는 진동과 소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쿠구구구!
서쪽의 성채에 바퀴가 달려 달려오는 듯, 동쪽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쪽의 성채가 세워진 인근 땅 전체가, 동쪽 땅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늘! 이 마르크가 진정한 밤의 군주가 되느니라!
점점 가까워지는 서쪽 성채의 성벽.
그 위에 선, 입가에 피를 토해낸 듯 보이는 마르크가 광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소리쳤다.
“네 이놈!”
체페슈가 분노를 내지르고는 동쪽의 성채 성벽 위에 섰다.
동시에.
“전투를 준비하라.”
휘하 뱀파이어들을 향해 전투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예, 군주님.”
체페슈의 측근인 스테판 후작이 고개를 숙이며 즉답했고.
-샥. 샤샥!
곧장 경계를 서던 뱀파이어들이 군주의 양옆으로 나열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스륵. 스르륵.
점점 가까워지는 서쪽의 성벽 역시 반역에 가담한 뱀파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화아아! 콰아아!
뱀파이어들 사이에 강렬한 마기가 뭉치며 인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악신들의 화신체들.
그 숫자만 무려 스무 명이 넘었다.
[감히 신의 앞을 가로막다니! 당장 무릎을 꿇어라! 이 하계종들아!]
-우우웅!
소환된 악신의 화신체 중 하나, 아레스가 고함을 내지르며 마기를 퍼트리자.
-크윽……!
-시, 신이 적으로…….
체페슈의 곁에 선 뱀파이어들이 움츠러들며 침음을 흘렸다.
“당황하지 마라.”
다수의 악신들을 마주했음에도, 체페슈는 진지한 목소리로 휘하 뱀파이어들을 향해 격려하듯 말했다.
동시에.
“기다려라.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점점 다가오는 서쪽의 성채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이윽고 서쪽의 성채와 동쪽의 성채의 거리가 100미터로 좁혀진 순간.
-파사사사삭!
두 성채의 성벽이 동시에 허물어지며 무너져 내렸다.
성지와 성지 간의 격돌, 본격적인 성지쟁탈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서쪽의 성벽이 완전히 무너지자.
-전력은 우리가 압도적이다!
-모조리 죽여라!
휘하 마인들을 지휘하는 상급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소리쳤고.
-캬아아!
-크아아!
그들의 뒤에는 마수 실험으로 탄생한 괴물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하하! 가짜 마신을 보냈다 해서, 우리 전력이 약화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마르크가 체페슈를 향해 광기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처용에 의해 나름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밤의 성채를 차지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수단 중 하나.
악신들에게서 받은 ‘군단’을 무려 1/4이나 소모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크게 상관없었다.
대악마와 악신의 화신체들.
그들을 따르는 타락한 인간들.
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사악한 병기들.
여기에 자신을 따르는 휘하 밤의 일족들까지.
“밤의 왕좌는 나의 것이다. 체페슈!”
마르크는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가 봐도 전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으니까.
“네놈의 나약한 군대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마르크의 입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외침이 울리자.
“나약한 군대라…… 과연 그럴까?”
무너지는 성벽을 타고 지상에 자연스럽게 착지한 체페슈가 뒤를 턱짓하며 말했다.
그러자, 성벽이 무너져 내린 여파로 인해 일어난 흙먼지 속.
“지구에서 사라진 벌레들이 다 여기에 모여 있었군요.”
-저벅.
그 흙먼지를 헤치고 나타난 커맨더가 체페슈의 옆에 서며 말했다.
“커맨더!?”
“저,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상급 마인들이 단체로 경악을 내질렀다.
비단 상급 마인들 뿐만 아니라.
“도대체 무슨 수로……!”
릴을 포함한 S급 마인들 역시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한처용 헌터를 저지하면, 네놈들이 확실하게 이긴 줄 알았나 봐?”
체페슈의 옆에 선 커맨더가 전방의 적들을 쭉 둘러보며 말함과 동시에.
-스륵. 탓. 타탓.
커맨더의 곁에 진호와 백호를 시작으로 헌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전원 스피릿 팀에 소속된 최상위 헌터들.
상급 마인 서넛이 단 한 명에 붙어도 이길 수 없는 강자들이었다.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무너진 성벽으로 인해 퍼졌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철컥. 철컥.
방패와 마나 건(Mana Gun)을 치켜든 안드로이드들.
포구를 서쪽을 향해 겨누며 대기하고 있는 포격 전차들까지.
미리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 커맨더의 ‘군단’이 오와 열을 유지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화아아!
드높은 밤의 성채의 하늘, 검은 밤하늘 구름을 해치며 커맨더의 성지, 마키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멍한 표정으로 하늘 위에서 나타난 마키나를 본 마르크가 체페슈를 향해 소리쳤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초 거대 함선.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건 상당한 격의 신격이었다.
“마르크, 네놈이 대악마의 힘을 받아 신전을 세웠듯, 나 또한 외신의 신전이 들어오는 것을 허가했다.”
체페슈가 당황스러움을 드러내는 마르크를 향해 작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가 말한 외신의 신전은 격이 높은 신의 성지, 마키나를 뜻했다.
“가짜 마신도 모자라 외신을 끌어들이다니! 밤의 긍지는 내던진 것이냐? 체페슈!”
“……대악마와 손을 잡은 네놈만 할까.”
질책을 담아 소리치는 마르크의 말에 체페슈가 강한 경멸을 담아 읊조리듯 답했다.
그때.
“머저리들하고 말싸움해 봐야 입만 아픕니다. 밤의 군주님.”
옆에 있던 커맨더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고는.
“어디, 이 바퀴벌레들한테 뉴 클리어부터 한 발 날리고 시작할까?”
-우우웅.
짙은 신성력을 내뿜으며 선전포고하듯 말을 이었다.
커맨더의 입에서 그의 결전기, ‘뉴 클리어’라는 말이 나오자.
“이……!”
“제, 제길!”
마인들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하며 주춤거렸다.
지구를 점령하려던 마인들이 유독 한국에서 함부로 활개 치지 못했던 이유.
그 구체적인 이유는 처용과 처용의 성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용이 나타나기 전에도 마인들은 한국에서의 활동을 조심스러워했다.
나라 하나를 없애 버려, 세계 지도를 바꿔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닌 헌터가 한국인이었으니까.
지금 헌터들 중 최강자는 바로 역천군주, 처용이었다.
그러나 처용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헌터들 중 최강자로 언급되는 존재가 바로 커맨더였다.
특정 단체에 소속된 이가 아닌 개인에 불과한데도, 거대 길드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존재.
커맨더 역시 처용만큼이나 마인들에게 있어 위험한 인물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군대와 군대가 격돌하는 대규모 전투에서만큼은 정말 위협적이었다.
마인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하락한 순간.
-촤라라락.
커맨더가 왼손에 낡은 책자를 폄과 동시에.
“일제 포격을 시작해라!”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며 명령하듯 소리쳤다.
그러자.
-위이잉! 콰콰쾅! 쾅! 콰콰-!
커맨더가 소환한 ‘포격 전차’들이 일제히 불꽃을 내뿜었다.
폭발력을 응축한 마나 포탄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서쪽을 향해 쏘아졌다.
-콰콰쾅! 쾅! 쿠구구!
커맨더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서쪽 성채 곳곳에 폭발이 일어났다.
마인들이 다급하게 방어막을 펼치며 허둥지둥한 모습을 보일 때.
“정신 차려! 커맨더는 뉴 클리어를 쓸 수 없다!”
-우우웅.
릴이 핑크빛이 일렁이는 마기를 담아 함성을 내질렀다.
커맨더는 며칠 전, 아스터 제국의 수도에 뉴 클리어를 날려 해당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강력한 결전기는 연속으로 쓸 수 없다고 알려진 스킬.
아직 결전기의 쿨타임이 끝나지 않았기에, 커맨더는 뉴 클리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릴은 그 사실을 마인들에게 상기시킴과 동시에.
-우우웅.
감정을 고양하고 투지를 강제로 끌어내는, 세뇌에 가까운 버프를 발동했다.
릴의 함성을 타고 요사스러운 빛이 일렁이는 파동이 퍼지며 마인들을 휘감고 지나가자.
“……진형을 갖춰라!”
“마기를 전방으로 집중해라!”
마인들의 소란이 사라지고 상급 마인들이 휘하 마인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촤르륵. 우웅.
그 모습을 본 커맨더가 왼손에 든 낡은 책.
처용에게서 건네받은 유물 아티팩트, ‘대국의 병법서’를 한 장 넘기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길(吉)]
커맨더가 병법서 위에 떠오른 ‘길(吉)’이라는 문자를 보자.
“윤아야.”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응시하며 윤아를 불렀다.
“……예고합니다.”
커맨더의 부름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름다운 밤의 성지 위로 거친 소나기가 쏟아지고 물이 범람할 예정이니 주의 바랍니다.”
하늘 위로 손을 뻗으며 그녀의 시그니처 스킬, ‘일기예고’를 발동했다.
청룡을 모시는 신관, 신룡만신의 목소리가 하늘 위로 울려 퍼진 순간.
-……쏴아아아!
하늘 위에서 거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가자!”
-탓!
커맨더의 옆에 있던 이진호가 호쾌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전방으로 달려나갔고.
-탓! 타탓!
커맨더를 제외한 다른 헌터들도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밤의 성채를 놓고 싸우는 성지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여기까지는 네가 예상한 범위 안이다. 한처용.”
커맨더가 고개를 들고 왼쪽 위를 바라보며 작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화르륵! 화륵! 콰아아!
거센 소나기 속에서도 활활 타오르는 검은 화염 기둥.
처용과 디아블로가 갇혀 있는 결계가 자리해 있었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