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화
클레이먼 백작이 루나를 죽이려 시도했고, 그 시도가 막혀 루나에게 처형되었다.
-파사사……!
머리가 잘려 처형된 클레이먼 백작이 잿가루가 되며 사그라져 가자.
“이……!”
“…….”
작금의 상황을 목도한 귀족들이 뒤로 물러나며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바, 반역자로 확인되었다 하여 함부로 귀족을 처단하다니!”
“이건 규율에 어긋나는 행위요!”
몇몇 귀족들은 클레이먼 백작을 처단한 루나를 향해 질책하듯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이야~ 뱀파이어들에게는 반역자를 옹호하는 규율이 있나 봐?”
그런 귀족들의 반응에 처용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딴 규율이 있을 리가.”
비웃음 서린 처용의 말에 루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귀족들을 쏘아보며 답하듯 말했다.
다시금 루나와 처용이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외부인이 밤의 일족에 개입하는 건-!”
몇몇 귀족들이 체페슈를 향해 항의하듯 소리쳤다.
체페슈는 그런 귀족들의 호소를 들음과 동시에.
“…….”
“…….”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여왕, 루세핀과 시선을 마주쳤다.
서로 무언으로 대화를 나누듯, 잠시 침묵을 지키고는.
“왕녀가 이리 단호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 같소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처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배신자만큼은 확실하게 색출하고 조지는 성격이다 보니…….”
처용은 그런 체페슈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듯 말했다.
체페슈는 그런 처용을 보며 짧게 침묵했고.
“……그대의 눈에, 배신자로 보이는 자가 또 있소?”
진지한 목소리로 처용을 향해 질문했다.
“…….”
뱀파이어 군주의 말에 처용이 눈에 신력을 모아 집중하고는 주변을 쏘아봤다.
처용의 시선이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귀족들을 쭉 훑어보고는.
“명환부 – 파마의 손아귀.”
오른손에 세 개의 명환부를 소환했다.
-우웅! 화아악!
처용의 손아귀에서 빛과 파마의 신력이 합쳐져 만들어진 빛의 손 세 개가 나타나 주변으로 날아갔다.
-콱! 우드드!
그 빛의 손이 귀족들에게로 날아가 각기 떨어져 있던 세 명의 귀족을 잡아챘다.
빛의 손이 귀족들을 잡아챈 순간.
-촤라라락! 촤락!
빛의 사슬이 추가로 뻗어 나와 붙잡은 귀족을 휘감았고.
-촤라락!
“흐읍!”
“읍-!”
입에 재갈을 물리듯, 입과 머리를 한 바퀴 휘감았다.
“방금 뒤진 클레이먼인가 뭔가 하는 새끼처럼 냄새가 나는데-.”
처용이 붙잡은 이들을 노려보며 읊조리고는 오른손을 강하게 잡아채자.
-촤라락! 후욱!
붙잡힌 귀족들이 처용의 앞으로 끌려왔다.
동시에.
-피이! 푹!
얇은 빛의 선 하나가 붙잡은 귀족들의 입으로 향했고 무언가를 뽑아냈다.
“그 새끼처럼 아가리에 폭탄을 숨겨 놨으니, 이리 냄새가 나지.”
-탁.
처용이 구속된 귀족들의 입에서 뽑아낸, 작고 검은 구슬을 손에 쥐어 보이며 말했다.
“확인해 보시죠.”
-탁.
구슬을 쥐고 잠시 관찰한 처용이 체페슈를 향해 구슬을 튕기며 넘기자.
-탁.
“흐음.”
체페슈가 처용이 건넨 구슬을 잡아채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리고.
-우웅! 화르륵!
손아귀에 혈기를 끌어 올려 붉게 타오르는 핏빛의 화염을 만들어 내었다.
-타닷. 타닷. 파아아!
체페슈가 만들어 낸 혈기의 화염이 검은 구슬을 태우자, 온갖 저주가 섞인 어둠이 그 안에서 타올랐다.
“……클레이먼이 터트리려던 어둠과 같은…… 대악마의 어둠이군.”
검은 구슬, 저주의 폭탄을 감정해 본 체페슈가 차가운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화륵! 파아아!
손아귀에 타오르는 핏빛의 화염을 강하게 쥐어, 저주의 구슬을 부숴 버렸다.
“밤의 성채를 찾아온 ‘손님’의 손을 더럽힐 순 없지.”
-탁. 우웅!
체페슈가 자리에서 일어나 혈기를 일으키며 읊조리고는.
“네놈들을 처형한다.”
-슈르륵! 촤악!
혈기로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어 내어 처용에게 붙잡힌 귀족들의 머리를 쳤다.
군주가 직접 배반한 귀족들을 처형해 버리자.
“…….”
“…….”
항의를 내뱉던 귀족들과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 모두가 입을 다물며 침묵했다.
좌중에 무거운 분위기가 흐를 때.
“군주님, 본 왕녀는 밤의 성채로 돌아오느라 많이 피로하니, 이만 알현을 끝내고 물러나 보겠습니다.”
루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체페슈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볼일을 마쳤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다는 말.
그런 루나의 무심한 태도와 말에, 체페슈가 복잡한 눈빛을 띠며 침묵했다.
그때.
“…….”
처용이 체페슈를 눈짓하고는 소리 없이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돌아가 쉬거라, 내 곧 별궁으로 직접 찾아갈 테니.”
체페슈가 침묵을 깨고는 루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군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휙.
루나가 즉시 고개를 돌려 밖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처용과 류마 등 일행들이 뒤따랐고.
“…….”
마지막으로 루세핀이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체페슈를 바라보고는 루나의 뒤를 따라 나갔다.
-끼이이- 쿵!
루나와 처용을 포함한 일행들이 문밖으로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
“카이덴 왕자, 스테판 후작, 레이몬드 백작…….”
옆에 서 있는 카이덴 왕자와 근처에 서 있던 귀족들 중 몇몇을 불렀다.
군주의 호명을 받은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응답했고.
“이들 외엔 모두 물러나라.”
호명을 받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군주가 모두 물러날 것을 명했다.
-스르륵. 스륵.
공동을 채우던 대부분의 귀족들이 어둠 속에 스며들며 사라졌고 호명을 받은 이들만이 남았다.
군주인 체페슈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왕녀가…… 너무나도 많이 변했습니다. 군주님.”
군주의 곁에 남아 있는 이들 중 하나.
짧고 짙은, 새하얀 수염이 돋보이는 나이 많은 인상의 남성, 스테판 후작이 입을 열었다.
복잡한 심정이 일렁이는 스테판 후작의 말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루나리스가 반역자들에게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카이덴 왕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답하듯 말했다.
그리고.
“군주님, 동쪽의 마신이 왕녀와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그는 위험합니다.”
조금 전, 마주했었던 처용을 떠올리며 경각심을 담아 체페슈를 향해 말을 이었다.
우려가 담긴 카이덴 왕자의 말에.
“군주님, 그자의 무력이…… 어느 정도입니까?”
스테판 후작이 처용을 떠올리고는 체페슈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악마의 저주 서린 어둠을 폭발시키려던 클레이먼 백작을 손쉽게 저지한 모습.
뒤이어 배신자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그들을 사로잡은 모습까지.
처용이 짧게나마 드러냈던 무력만으로는 그 경지와 강함을 전부 추측하기란 불가능했다.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귀족 전부가 그에게 덤벼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걱정과 심각함이 담긴 스테판 후작의 말이 울리자.
“……지금의 나는 그자를 이길 수 없다.”
체페슈가 왼쪽 가슴 부근을 쓸며 답했다.
그 말에, 군주의 곁에 선 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뱀파이어 군주가 적들에게 입은 부상.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밤의 일족 내에서도 극소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뿐이었다.
그런데, 처용은 체페슈를 마주하자마자, 그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왕비가 라인을 통해 전해 준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온전한 힘을 발휘해도 그를 이길 수 없다.”
루세핀이 전달해 주었던 처용에 대한 말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결론은, 뱀파이어 군주인 체페슈조차 처용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
그만큼 처용이 강한 무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저런 위험한 자가……!”
카이덴 왕자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처용이 잠깐 내보인 무력으로 판단할 때, 그는 이곳의 모두를 압도할 만한 힘이 있었다.
군주인 체페슈 역시, 처용을 이길 수 없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했다.
문제는 루나가 그런 위험한 존재와 피의 서약을 맺었다는 것.
“어찌 그런 경솔한 짓을…….”
루나는 밤의 왕족, 왕족 당사자인 그녀가 왕족이 맺는 피의 서약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루나가 어째서 위험한 존재와 피의 서약을 맺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이덴 왕자가 처용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칠 때.
“그가 위험한 자라는 생각엔 동의합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옵니다.”
스테판 후작은 카이덴 왕자와는 다른 의견을 이야기했다.
“마르크의 거점 중 하나가 갑자기 무너진 이유가 동쪽의 마신 때문이었습니다.”
밤의 성채로 돌아온 루나 때문에, 귀족들이 모두 모이기 전.
-그게 사실인가?
밤의 성채를 압박해오던 반역자들의 거점.
그 거점 중 하나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거점을 무너뜨린 당사자가, 루나와 함께 밤의 성채를 방문한 존재.
동쪽의 마신이라 불리는 처용으로 확인되었다.
“왕녀의 서약자인 그가 정말로 우리를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우리에겐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왕비는, 루세핀은 동쪽의 마신이 우리가 내전에서 이기길 원한다고 말했었다.”
스테판 후작의 말에 체페슈가 말을 이었다.
-저는 루나리스가 선택한 사람을 믿습니다.
체페슈는 루세핀이 전해 주었던 말들을 다시금 떠올리고는.
“내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겠다.”
루나가 나아간 방향, 밤의 성채의 별궁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
붉은색과 검은색 벽돌이 어우러진 넓은 공동.
뱀파이어 군주가 거주하는 성채의 중심부처럼 길고 넓은 레드 카펫이 깔려 있는 공간.
“그게 무슨 소리야!”
-쾅!
그 공동 끝, 열 계단 위에 자리한 화려하고 위엄을 과시하는 왕좌 위.
그 위에 앉은 남자가 자리를 박차 일어나며 소리쳤다.
“전진 거점이 무너졌다고!?”
가장 직위가 높아 보이는 자의 호통에, 그 밑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움츠러든 표정을 지었다.
“제, 제나 후작께서 적을 함정에 빠뜨렸는데…….”
“그 괴물이 역으로 거점을 모두 부수었습니다. 군주님.”
왕좌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두 뱀파이어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왕좌에 앉은 이를 향해 ‘군주’라 불렀지만, 그는 뱀파이어 군주, 체페슈가 아니었다.
체페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
그는 밤의 성채에서 반역을 일으킨 고위 귀족, 마르크 공작이었다.
아직 군주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휘하 일족들에게 ‘군주’라 불렸다.
물론, 마르크가 휘하 일족들에게 자신을 군주라 칭하도록 명령한 이유도 있었다.
“제나 후작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마르크가 인상을 일그러뜨리고는 제나 후작의 행방을 묻자.
“제, 제나 후작은 부상을 추스르는 중입니다.”
휘하 귀족 중 하나가 보고하듯 답했다.
마르크는 그런 귀족의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거칠게 찌푸리고는.
“네놈들은 거점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느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금의 상황을 구경하듯, 서 있는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르크 공작의 시선이 닿은 이들은 밤의 일족, 뱀파이어들이 아니었다.
검은 로브를 쓰고 있는 이들.
그들은 다름 아닌 마르크를 돕는 인간들, 대악마의 병사들인 마인들이었다.
“그곳을 지켜야 할 네놈은 왜 도망친 것이냐!?”
마르크가 그런 마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이.
노출이 심한 검은 가죽옷을 입은 여성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그런 마르크의 말에.
“미안한데, 그 미친 괴물을 거점으로 끌고 온 제나 후작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인들 중 가장 직위가 높인 이, 대악마 아스모데우스의 신관, 릴이 입을 열었다.
“성좌들도 감당할 수 없는 그 괴물을 막다가 나보고 죽으라고? 난 그러기 싫었거든.”
릴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나름 진지한 분위기로 말했다.
“성좌들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
“역천군주 한처용, 내가 말한 적 있었을 거다. 지금은…… 동쪽의 마신이라 불린다지?”
마르크가 한쪽 눈썹을 크게 올리며 묻자, 릴이 답하며 말을 이었다.
“역천군주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아무리 지금의 네놈이라고 해도…… 힘들 거다.”
릴이 나름 처용과 눈앞에 있는 마르크를 진지하게 비교하며 말을 잇자.
“헛소리!”
마르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거친 목소리로 부정했다.
“그 어떤 건방진 인간 따위가! 감히 밤의 군주인 나를 막을 수 있단 말이냐?”
“……그 건방진 인간에게, 대악마께서도 당한 전적이 있다.”
릴이 마르크의 말에 눈빛을 차갑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오만 떨지 마라, 네놈이 군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 누구 덕분인지.”
진지하면서도 나름 경고가 서린 릴의 목소리에.
“크음……!”
마르크가 인상을 거칠게 일그러뜨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는 뱀파이어 귀족들 중 인간을 하찮게 보는 성향이 가장 심한 부류였다.
당연히 눈앞에서 건방지게 구는 대악마의 심복들,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특히, 릴처럼 인간들을 이끄는 인간들, 그들은 악신을 모시는 신관들이다.
게다가 릴은 밤의 마신인 아스모데우스를 모시는 신관.
아무리 군주로 발탁된 자신이라 해도, 밤의 마신을 모시는 신관에게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그 건방진 인간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방법은 있는가?”
침음을 삼킨 마르크가 문제를 일으킨 동쪽의 마신, 처용을 언급하며 물었다.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야……. 그놈이 나타나기 전에 밤의 성채를 장악했어야 했는데…….”
릴이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읊조렸다.
그때.
“릴, 마르크, 그 계획은 아직인가?”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의회주.
등 뒤에 검은 도끼를 짊어진, 검은 복면을 쓴 남자.
디아블로의 신관인 집행자가 릴과 마르크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릴이 집행자의 말에 답했다.
그런 릴의 대답에 집행자가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하고는.
“……역천군주가 이변을 알아차리고 나서면, 내가 직접 시간을 벌겠다.”
생각을 마친 듯, 눈을 뜨며 말했다.
“네놈 혼자서 무슨 수로?”
무려 처용을 상대로 혼자서 시간을 벌겠다는 집행자의 말에, 릴이 의문을 표하자.
“……시간을 끄는 정도라면, 가능하다.”
집행자가 오른손을 들어 강하게 쥐어 보이며 답했다.
은은한 마기가 일렁이는 집행자의 손아귀가 강하게 쥐어지자.
-화르륵. 파아!
그의 손에서 강렬한 힘이 응축된 검은 불꽃이 한 번 크게 타올랐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