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파지직. 파직……!
주변을 거침없이 휩쓸어 버리던 새하얀 번개가 조금씩 사그라지자.
“이건 뭐…… 우리가 더 나설 필요도 없었네.”
연아가 완전히 파괴된 주변 일대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변을 포위하듯 감싸던 검은 성벽들은 거의 형체조차도 남지 않았다.
처용의 공격 단 한 번으로 작금의 상황이 완전히 끝난 듯 보였지만.
“……아직이다.”
하늘 위를 노려보던 처용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읊조렸다.
그 순간.
-……화아아!
하늘 위에서 뱀파이어들이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모두 반역을 일으킨 마르크 공작을 따르는 반역자들.
그런 그들의 중심에는.
“…….”
붉은 문양이 그려진 검은 망토와 두건을 쓴 뱀파이어가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잿빛의 수염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는 옅은 주름.
테두리가 붉은빛으로 빛나는 외눈 안경을 왼쪽 눈에 걸치고 있는 뱀파이어.
“제나 후작!”
류마가 반역자들의 중심에 있는 존재, 제나 후작을 알아보며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허허, 설마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소. 왕녀.”
제나 후작이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리며 말하자.
“제나 후작…… 감히 군주님을 배신하다니.”
루나가 차가운 눈빛을 치켜뜨며 읊조렸다.
분노가 서린 루나의 목소리에.
“마신을 배반한 건 군주와 너희 왕족들이지, 어리석은 왕녀여.”
제나 후작이 작은 코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때.
“개소리는 들어 봐야 도움이 안 돼.”
-탁!
처용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자.
-피핏! 화륵! 콰아아아!
튕긴 손가락에서 불똥이 튀겨지더니, 순식간에 화염 폭풍으로 번지며 주변을 휩쓸었다.
“크아-!”
“물러나라!”
-화르륵! 화륵!
점점 번져나가는 화염 폭풍에 제나 후작과 함께 있던 뱀파이어들이 얼굴을 가리며 물러났다.
그러나.
-파사사……!
그들 중 일부는 화염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가짜 마신 따위가……!”
제나 후작이 인상을 일그러뜨리고는 손을 앞으로 뻗자.
-우우웅!
질척이는 어둠이 휘몰아치며 제나 후작을 감쌌다.
동시에.
-콰드드득!
제나 후작을 중심으로 거대한 검은 뼈의 팔이 네 개 생성되었다.
불길한 어둠을 흩뿌리는 검은 팔들이 나타나자.
-스르륵. 스륵.
그 주변의 뱀파이어들에게서도, 제나 후작처럼 짙은 어둠이 흘러나왔다.
“마신을 배반한 왕족을 처단하라.”
제나 후작의 명령에.
“그만한 공격을 퍼부었으면!”
“놈도 지쳤을 것이다!”
-스륵! 스르륵!
허공과 지면에서 뱀파이어들이 추가로 나타나며 처용 일행들을 향해 쇄도했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가짜 마신, 처용이 강력한 공격을 두 번이나 사용한 상황.
반역자들은 같은 공격을 다시 못 하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저 병신들.”
연아는 그런 이들을 향해 조소를 흘려 보였다.
고작, 광역 공격 두 번으로 처용이 지쳤다?
“방금 같은 공격 백 번을 날려도 저 괴물이 지칠 리가 없는데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연아의 확신 어린 말이 울린 순간.
“라이트닝 저지먼트 헤븐.”
-파지지직! 화아아!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처용이 다시금 손아귀에 새하얀 번개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었다.
처용이 손아귀를 쥐어 번개의 폭풍을 터트리려는 순간.
“거대한 어둠이여!”
-후욱! 콰아아!
제나 후작이 검은 네 개의 팔을 앞으로 뻗으며 처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이! 콰아아!
터져 나가는 새하얀 번개 폭풍과 제나 후작이 뻗은 검은 뼈의 팔이 서로 충돌했다.
“흐음, 신관은 아니고…… 바알의 축복을 받은 건가?”
-파지지직!
처용이 손아귀에서 퍼져 나가는 새하얀 번개의 힘을 더욱 끌어내며 말하자.
“무슨…… 마신이라 불리는 놈이 빛의 힘을-!?”
-쿠구구!
표정을 거칠게 일그러뜨린 제나 후작이 뒤로 밀려나며 읊조렸다.
무려 판데모니움 최강의 대악마, 삼천마의 축복을 받아 발현한 어둠이었다.
다른 대악마의 선택을 받은 신관조차도 무릎을 꿇게 만드는 절대적인 힘.
그러나.
“고작, 축복에 불과한 힘으로 나를 잡겠다? 크크.”
-파지직! 파지지직!
눈앞의 처용은 그런 거대한 어둠의 힘을 정면으로 받아 밀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전력을 보이지도 않는 듯한 모습.
“공격해라!”
제나 후작이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처용을 붙잡는 동안, 밤의 왕족을 처단해야 했으니까.
-샥! 샤샥!
처용 일행보다 두, 세 배는 많은 수의 뱀파이어들이 사방에서 몰아치듯 달려들었다.
“모조리 섬멸해라.”
눈빛을 차갑게 빛낸 루나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자.
“반역자들을 살려두지 마라.”
-샥!
류마를 포함한 뱀파이어들이 사방에서 덮쳐오는 반역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스륵! 샥!
틈을 노린 세 명의 반역자들이 루세핀의 위에 나타나 어둠의 칼날을 내질렀다.
루세핀은 가장 우선적으로 노려야 하는 대상이니만큼, 난전을 틈탄 기습 공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때.
-쏴아아!
“어딜, 여왕님한테 손을 대나?”
연아가 물줄기를 휘감으며 루세핀의 위에 나타나 적들을 가로막았고.
“들이치는 밀물.”
-촤악! 촤아아!
연화가 환도로 지면을 내리그으며 그림자 속에서 기습해 오는 적들을 저지했다.
“곧 쓰러질 군주처럼! 네놈들 역시 무너지리라!”
-우우웅!
그 모습을 본 제나 후작이 조소를 머금으며 소리쳤다.
아무리 처용이 강하다 해도,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
마신을 붙잡는 동안 대악마의 힘을 받은 이들이 왕녀와 왕비를 처단하고 남은 이들도 처단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아 그래? 네 부하들 상태 좀 똑바로 확인하지 그러냐?”
처용이 그런 제나 후작으로 역으로 비웃으며 말한 순간.
“크아-!”
“커으!”
주변에서 여럿이 내지르는 비명이 울렸다.
수적으로 열세인 왕족 파벌의 뱀파이어들이 당해 비명을 지르는 것인가 싶었지만.
“이…… 무슨?”
제나 후작이 잠시 눈을 돌려 상황을 확인하자, 눈을 키우며 경악을 드러냈다.
“약하군, 너무나도 약하다.”
-피이이! 촤아악!
류마가 그와 같은 백작급 뱀파이어 셋을 상대로 그들의 육체를 조각내며 손쉽게 승기를 거머쥐었고.
-촤아! 촤아악!
그와 같이 왕족의 편에 선 뱀파이어들이 반역을 일으킨 뱀파이어들을 거침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귀족 계급도 아닌, 대부분이 서민 계급의 뱀파이어들.
그런 그들이 자신보다 계급이 높고 다수인 이들을 힘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혈옥 – 블러드 웨펀(Blood Weapon).”
루나가 혈기를 끌어 올리자.
-슈르륵. 슈륵.
그녀의 주변으로 핏빛의 검과 창, 할버드 등의 무기들이 형성되어 떠올랐다.
“웨펀 웨이브(Weapon Wave).”
루나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명령을 내린 순간.
-쐐에에! 쐐엑! 촤아!
핏빛의 무구들이 반역자들을 향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촤아!
“캬아아!”
가장 앞질러 나간 세 개의 검이 반역자 뱀파이어들을 단번에 베어 버리며 지나갔고.
-스르릉! 스릉! 촤아!
창과 도끼 등, 각각의 개성 있는 무구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휩쓸며 나아갔다.
루나가 다루는 무구가 난전 속을 헤집으며 지나가면.
“크아!”
“캬아악!”
-촤아아!
그 검격이 아군을 피해 반역자들만을 정확하게 베어 갈랐다.
처용의 결전기인 팔괘 – 태극천체진.
그 결전기를 이용한 공격 기술인, 이기어술의 묘리가 담긴 천체극섬.
핏빛의 무구들은, 루나가 처용에게서 배운 기술의 묘리를 혈기로 구현한 것이었다.
“루나리스…… 저 어린 왕녀가 어찌!”
혈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루나를 본 제나 후작이 인상을 거칠게 일그러뜨렸다.
루나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그녀는 백작급 뱀파이어와 비슷한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혈기의 짙은 기운이, 피부로 확 전해질 정도였으니까.
제나 후작이 예상을 웃도는 적의 전력에 경악할 때.
“재롱은 다 부렸냐?”
-우웅! 쿠구구!
처용이 손아귀에서 내뿜는 새하얀 번개에 신력을 섞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압도하라, 파천.”
-우웅! 파지지-! 파직!
멸천의 권능을 받은 새하얀 번개가 두 배, 세 배로 거대해지며 그 힘을 거칠게 분출하자.
“크으으으읍!”
제나 후작이 관자놀이에 핏발을 세우고는 어둠을 더 끌어 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대악마의 축복을 받은 어둠의 힘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저항했지만.
-쩌적! 쩌저적!
검은 네 개의 팔에 점차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드득! 우득! 파창-창!
대악마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검은 손들이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동시에.
“절권 – 백뢰(白雷)!”
오른손 주먹을 강하게 쥐어 앞으로 내질렀다.
소룡의 권법인 절권과 작금 만들어 낸 새하얀 번개의 힘을 더해 내지른 공격.
“이런!”
-우웅!
제나 후작이 급하게 어둠을 끌어모아 보호막을 펼쳤지만.
-촹! 파창! 창!
새하얀 뇌전이 휘감긴 처용의 주먹이 제나 후작의 보호막을 부수고 그의 왼쪽 가슴을 꿰뚫었다.
제나 후작이 처용에게 당한 듯 보였지만.
“……걸렸구나. 가짜 마신이여.”
제나 후작이 조소를 흘리며 읊조렸다.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네놈을 상대했으리라 생각했나? 크흐흐-.”
심장이 꿰뚫렸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도 알아 이 새끼야.”
처용은 그런 제나 후작의 여유로운 모습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망 무효 권능에, 강제 송환이라?”
제나 후작이 왜 여유를 부리는지, 그가 왜 아무렇지 않은지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빨리 네놈들 본거지로 안내해라. 이 멍청한 새끼야.”
-스르륵.
처용이 제나 후작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어둠의 마법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오만이 화를 부를 것이다!”
제나 후작은 그런 처용을 향해 인상을 거칠게 일그러뜨리고는.
“지쳐 버린 네놈이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화아! 파아아!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강제 송환’ 마법에 힘을 더하며 소리쳤다.
이윽고 주변에 모여든 어둠이 보랏빛을 띠며 발광한 순간.
“갔다 온다.”
-파아아! 피빗!
처용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나 후작과 처용이 보랏빛 어둠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제나 후작과 처용이 사라지자.
-파아……!
반역을 일으킨 뱀파이어들에게 힘을 보태주던 대악마의 어둠이 사그라졌다.
“젠장!”
“후퇴한다!”
제나 후작이 사라진 것을 알아챈 반역자들이 뒤로 물러나며 후퇴했지만.
“도망칠 수 없다.”
-피이! 촤아아!
류마가 그들의 퇴로를 가로막고는 자신의 뒤에 검은 철선을 펼치며 긴 철조망을 세웠다.
동시에.
“블러드 비스트.”
-크와아! 콰직!
루나가 혈기로 만들어 낸 괴물이 반역자들의 뒤를 기습하며 나타났고.
“고작, 이게 전부인가?”
“생각보다 너무 약한데?”
-스륵. 샥!
그 주변으로 루나를 따르는 뱀파이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들과 싸웠던 반역자들은, 이미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반역자들은 대부분 처치당한 것에 비해, 루나를 따르는 뱀파이어들은 큰 부상을 당한 이들이 없었다.
게다가, 처음과는 다르게 이제는 역으로 반역자들이 포위를 당한 상황.
“살려 둘 필요는 없다. 모조리 처치해라.”
루나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명령하듯 말하자.
-크아아!
-스릉. 스르릉!
혈기로 만들어진 괴수와 무구들이 반역자들을 향해 쇄도했고.
-샥! 촤악!
류마를 포함한 뱀파이어들도 남은 반역자들을 향해 쇄도했다.
수적인 우위가 있었을 때도 힘으로 밀렸었기에.
“크악!”
“커-!”
반역자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전멸했다.
상황이 완전히 일단락되자.
“……루나리스.”
연화와 연아에게 호위를 받아 무사했던 루세핀이 루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주변 사람들과 루나를 보며 잠시 멍해 있었지만.
“네 서약자가 제나 후작의 포탈 속으로 끌려갔는데……!”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금 전, 제나 후작의 포탈 마법으로 사라진 처용을 걱정하듯 말했다.
그러자.
“아무 문제 없습니다. 어머니.”
루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아니, 처용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나 후작이 제 무덤을 팠군요.”
주변 정리를 마친 류마가 루나와 루세핀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그 역시 처용을 걱정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처용과 함께 사라진 제나 후작에게 유감을 드러냈다.
그런 루나와 류마 뿐 아니라.
“조금만 기다리면 오시겠죠.”
“금방 다시 나타나실 겁니다.”
다른 이들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
처용을 걱정하는 듯한 이들은 루세핀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런 이들의 반응을 보며 루세핀이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
“보시면 압니다. 어머니.”
루나가 먼 곳을 바라보듯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콰아아아!!
루나가 바라보는 먼 방향.
반역자들이 장악한 적진의 한복판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강렬한 불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어서.
-파지직! 파직! 쿠르릉!
샛노란 번개 수백 줄기가 지상으로 내리쳤고.
-피이! 콰아아아!
백야가 들이닥친 듯, 새하얀 섬광이 터지며 빛의 폭발이 터져 나갔다.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온갖 재앙들이 벌어질 때.
“멍청한 놈들이네, 아무리 함정을 팠다지만…….”
“저 괴물을 자기들 본거지로 잡아가냐. 쯧쯧.”
-쿠구! 쿠구구!
연화와 연아가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적의 진형을 구경하며 번갈아 말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구나.”
루세핀은 이제야 루나를 포함한 이들의 반응이 이해가 된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나 홀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