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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계승자-504화 (504/726)

#504화

서쪽의 이단 심문소들을 무너뜨리고 이종족들을 구출한 다음 날.

“……생각보다 실험체로 붙잡힌 이들이 많았군요.”

아나샤가 아라한 왕궁 광장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현장을 직접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날이 갈수록 놈들의 행보가 더 심해지는 것 같더군.”

처용이 아나샤의 말에 답하듯 말하고는 왕궁 광장 앞을 마주 바라봤다.

지금 넓은 잔디가 깔린 아라한 왕궁 광장 앞은.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은 모두 임시 센터로!

-회복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들은 모두 오른쪽으로 가라!

잔디에 펼쳐진 모포 위로 누인 부상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부상자들을 돌보는 이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각각, 팀을 나눠 처리한다! 모두 움직여!”

급하게 지원 요청을 받고 이곳에 당도한 이종국 병원장이었다.

새하얀 의사 가운을 흩날리는 그가 바삐 뛰어다니며 의사들과 힐러 클래스 헌터들을 지휘하자.

“힐러 클래스 헌터들은 저주가 해주 되었는지부터 확실하게 확인해!”

“외과 전문의들은 급한 환자들의 외상 수술부터 준비한다!”

“후속 조치 시작해!”

태룡사에 소속된 의사들과 힐러 클래스 헌터들이, 베테랑 종군의사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각각 소속, 전문 분야별로 팀을 나누고 환자를 맡아 신속하게 맡은 바 임무를 처리했다.

동시에 아라한 왕국의 인력들은 그런 헌터들과 의사들의 잡무를 도우며 일손을 보태고 있었다.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 와중에 서쪽에서의 이변이라니…….”

아나샤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미리 준비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당장 쳐들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항상 경계해야 하는 아스터 교단.

곧 이곳으로 이주해 자리 잡을 지구의 세력.

적으로 확정된 동방국, 천 제국에 대한 대비책 등.

준비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았다.

게다가, 이번에 처용이 맡은 뱀파이어들의 내전 문제와 이종족 납치 실험 문제까지.

처용을 돕기 위해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리 일국의 여왕이라 해도, 혼자서 이 모든 문제를 대비하고 준비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미리 이곳에 오길 잘했네.”

세계 헌터 회의에 끝까지 남지 않고 마키나와 함께 에스라 대륙으로 돌아온 커맨더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각 길드들의 에스라 대륙 진출은 결정된 상황이었다.

커맨더는 길드들과 함께 팀을 이뤄 움직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지금 에스라 대륙은 어떤 문제가 갑작스럽게 터질지 모르는 상황.

혹시라도 에스라 성운이 또 대격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대신급 성좌가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여러 상황에 대처하고 미리 대비하기 위해, 커맨더는 미리 이곳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커맨더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이번 일, 내가 한 손 보태도 될까?”

처용을 바라보며 돕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커맨더가 도와준다면야, 환영이죠.”

커맨더의 말에 처용이 환영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거 많은 이종족들을 구했었던 커맨더이니만큼, 그는 이번 일에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

“이런 광경을 보고도…… 내가 구경만 할 리가 없잖아.”

커맨더가 광장 앞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는 이종족에 대한 아픈 기억과 트라우마를 가졌던 이였기에, 차마 작금의 상황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에스라 대륙에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은 처용에게 전달받은 정보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마주한 현실은 정보를 전해 듣거나 보는 것과는 달랐다.

그랬기에, 지금 처용이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나서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쪽 산맥이라고 했지? 그쪽 부근에 ‘벙커 센터’를 구축해 놓지.”

커맨더가 작금 처용이 맡은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벙커 센터는, 안드로이드와 건축 로봇을 이용해 건설하는 방어용 요새였다.

그리고.

“벙커 센터를 구축해 놓고 그 중앙에 내 게이트를 놓으면 작전을 수행하기 편할 거야.”

커맨더가 벙커 센터 내부에 게이트를 설치하겠다며 말을 이었다.

처용이 태룡전의 열쇠로 여기저기 자유롭게 오갈 수 있듯이, 커맨더도 게이트를 생성하는 스킬이 있었다.

그러나 커맨더의 게이트는 무구를 소환하거나 군단을 부르는 것 사용하는 데에 제약이 있었다.

커맨더의 게이트는 무기고 출구에 가까운 개념인 스킬, 생명체가 오갈 수 없는 게이트였다.

다만, 시간을 들여 서로 다른 지역에 관문을 구축하면, 양쪽을 오갈 수 있는 게이트를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이전 마인들에게서 얻은 게이트 발생 장치를 연구하여, 독자적으로 구축한 커맨더만의 기술이었다.

비교하자면, 에스라 대륙에 있는 게이트웨이와 비슷했다.

게이트웨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빠르고 신속하게 오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지금처럼, 소수 정예로 움직이며 작전을 수행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보며 커맨더처럼 이번 일에 자원하는 이들은 또 있었다.

“저도 함께할게요.”

현아가 처용과 커맨더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아라한 왕국의 방위를 돕고 있었다.

언제 아스터 교단이 개수작을 부리러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

현아처럼 한국의 정예 헌터들 중 일부는 이곳에 남아 체류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새로 사귄 파트너와 호흡도 맞춰 봐야 하니까요.”

이번 일에 자원한 현아가 옆을 바라보며 말하자.

“……나도 끌고 갈 생각?”

머리에 난 두 개의 뿔과 등 뒤의 날개, 붉은 머리가 돋보이는 어린 여성.

폴리모프한 어린 레드 드래곤, 마티네아가 거부감을 드러내듯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마티, 나하고 한 약속은?”

현아가 친근한 목소리로 어린 레드 드래곤, 마티네아를 향해 애칭을 부르듯 짧게 부르며 말하자.

“……칫, 왜 이 인간하고 그런 내기를 해서……!”

마티네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이랑 신수의 계약을 맺으려고요?”

그런 둘의 모습을 본 처용이 작금의 상황을 짐작해보며 현아를 향해 물었다.

“히히, 마티랑 제가 작은 내기를 해서 제가 이겼거든요.”

현아가 고개를 획 돌린 마티네아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 끌며 말하자.

“……아직 네가 이긴 건 아니다. 인간.”

그 말에 마티네아가 작게 인상을 쓰고는 호승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친근하게 구는 현아를 향해 짜증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딱히 밀어내지는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 열심히 꼬드기고 있어요.”

현아가 그런 마티네아를 보며 미소를 짓고는 처용을 향해 말하자.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처용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는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갓 어덜트에 들어선 마티네아는 레드 드래곤.

현아는 ‘플레임 워록’이라는 유니크 전투 마법사 클래스를 가진 헌터였다.

둘 다 화 속성 계열, 서로 서로가 힘을 증폭시켜줄 수 있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신수의 계약은 서로가 서로에게 굳은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맺는 계약입니다.”

처용은 현아와 마티네아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조언하듯 말했다.

신수의 계약은 계약자와 신수가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맺는 파트너 계약.

간단하게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다.

계약을 맺은 파트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게 신뢰와 애정이 있어야 했다.

“네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인지 잘 생각하고 고민해본 후 결정해라.”

처용이 마지막으로 마티네아를 바라보며 조언했다.

현아는 처용이 볼 때, 어린 레드 드래곤의 파트너로서는 제격이 맞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처용이 제3자의 시선과 경험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신수의 계약은 당사자들의 의견과 생각이 가장 중요한 법.

“내 인정을 받는 게 쉽진 않을 거야.”

처용의 조언에 마티네아가 새침한 목소리로 답하자.

“하지만, 첫 번째 내기는 내가 이겼으니, 나랑 같이 가야겠지. 마티?”

현아가 마티네아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마티네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뭐, 별문제는 없겠군.’

그 모습을 본 처용이 속으로 읊조렸다.

어린 레드 드래곤은 현아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짜증 난 눈치였지만, 딱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마티네아가 정말로 현아를 싫어했다면, 그냥 도망가거나 진심 어린 짜증을 내질렀을 테니까.

하지만,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아 툭툭거리지만 할 뿐, 현아를 크게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현아와 어린 레드 드래곤이 이번 일에 자원했을 때.

“나도 도울게.”

커맨더와 같이 에스라 대륙으로 넘어온 연화 역시 뱀파이어 일을 돕겠다 자처했고.

“저희들도 돕죠.”

“태룡사 식구들의 문제라면, 기꺼이 도와야죠.”

에스라 대륙에 체류하고 있던 헌터들 몇몇도 이번 일에 자원했다.

그들은 모두 정훈처럼 이종족을 파트너로 둔 스피릿 팀이 일원들.

파트너인 이종족들과 연관된 문제이기에, 나서기로 한 것이었다.

“좋습니다. 하루 정비를 마치고 내일 같이 가시죠.”

처용이 커맨더를 포함한, 이번 일에 자원한 이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같은 시간, 아라한 왕궁의 2층.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루나가 길고 길었던 말을 끝마친 듯, 짧고 굵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마쳤다.

그녀가 한 말은 밤의 성채를 빠져나가고 나서 있었던 일들.

그런 루나가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말을 끝마치자.

“네가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도록 만들었구나.”

루나의 맞은편에 앉은, 그녀와 자매로 보일 정도로 닮은 여성이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뱀파이어 여왕 루세핀.

루나와 거의 비슷한 나이 때로 보이는 그녀는 놀랍게도 루나의 모친이었다.

“모두…… 우리 왕족 어른들의 잘못이다.”

루세핀이 참담한 심정이 일렁이는 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딸인 루나가 가족들과 헤어지고 원치 않은 거친 싸움을 이어왔으니까.

자신을 탓하는 듯한 루세핀의 말에.

“저와 계약을 맺은 서약자가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

루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루세핀의 말에 답하듯 입을 열었다.

-나는 사고를 당한 피해자를 웬만해선 건들지 않아. 그 사고를 만든 새끼를 조지는 편이지.

처용이 종종 내뱉었던 말.

대표적으로는 에블린을 노리고 수작을 부리던 아마테라스와 뤼장첸을 처치하며 했었던 말이었다.

사고가 발생하면 서로 책임을 논하기보다는 수습부터 하는 것이 현명하다.

다만, 수습이 끝난 다음에는 그 사고를 만든 원인 제공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한 처용의 마음가짐이었다.

루나는 그런 처용의 행동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함께 했었던 이.

“피해자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 모든 잘못은 작금의 사달을 일으킨 마르크 공작의 죄입니다.”

처용의 행동과 말을 생각하며 루나가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들에게 비극이 닥친 이유는 마르크 공작의 욕망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 한 아스모데우스의 잘못이고요.”

그런 마르크 공작의 욕망을 부추기고 뜻대로 부리는 이들.

밤의 마신인 아스모데우스와 그녀와 같은 악신들, 그들이 이 비극을 만든 원흉들이었다.

대악마이자 밤의 마신이라 불리는 존재의 이름을 루나가 정확하게 언급하자 루세핀이 흠칫했다.

루나의 진지한 목소리와 눈빛 속에는, 밤의 마신에 대한 두려움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

루세핀은 그런 딸의 단호한 모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동쪽의 마신.”

누가 루나를 이렇게 변화시켰는지 깨달으며 읊조렸다.

“아니, 한처용이라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으련?”

루세핀이 처용에 대해 궁금해하며 루나에게 묻자.

“……내 서약자.”

잠시 생각한 루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고…… 나를 선택해 준 사람.”

루나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자.

“…….”

루세핀이 그런 루나의 희미한 미소에 작은 놀라움을 드러내듯 눈이 조금 커졌다.

그때.

“본격적인 작전은 내일부터 다시 진행하기로 했다. 루나.”

-탓,

처용이 왕궁 2층에 발을 들이며 나타났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루나의 옆에 앉아 루세핀을 마주했다.

루세핀은 그런 처용을 잠시 바라보고는.

“…….”

루나와 처용을 번갈아 보며 흥미로운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홀로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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