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삼엄한 경비를 자랑했던 아스터 교단의 이단 심문소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안에 구금되어 있던 이들이 모두 풀려났고 사람들을 잡아갔던 이들은 모두 처단되었다.
그리고.
“일단, 구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구한 건가?”
처용이 구출된 이종족들을 쭉 둘러보며 읊조렸다.
지금 있는 장소는 에스라 대륙 서쪽 산맥, 처용과 이번 일에 자원한 사람들이 임시로 마련한 거점이었다.
구출된 이종족들을 임시로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장소이기도 했다.
게다가 구출된 이들은 아스터 교단의 인체 실험을 목적으로 붙잡혔던 이들.
그들 대부분이 모진 고문을 받았거나, 저주에 시달리는 등, 상태가 좋지 못했다.
상태가 심각했던 이들은 처용과 연아가 응급처치를 하고 엘프들이 정령을 불러내어 후속 조치를 진행 중이었다.
지금 임시 거점 내에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류즈 백작님!”
조금 전 습격한 이단 심문소에서 마지막 뒷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 중 하나.
세피아가 저주의 휴유증으로 몸을 추스르고 있던 류즈를 알아보며 다가갔다.
“세피아?”
익숙한 목소리에 류즈가 고개를 돌려 세피아를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아, 무사하셔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세피아가 류즈 앞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 안도를 드러내며 말했다.
류즈 백작은 흩어져 도망치던 이들을 위해 스스로 미끼를 자처했었던 이.
세피아는 그런 그녀가 자신들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다.
그랬기에, 살아남은 류즈를 다시 만나 마주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뻤다.
“……무사히 살아남아서 다행이야. 세피아 자작.”
진심 어린 안도를 표하는 세피아를 본 류즈가 미소를 내비치며 마주 안도를 전했다.
그때.
“세피아, 반역자들에 대한 다른 흔적은 없었나?”
임시 거점 내의 분위기를 살피던 처용이 세피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제나 후작과 그를 따르는 고위 귀족들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용님.”
세피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처용의 말에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으윽, 제나 후작……!”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류즈가 침음을 흘리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감사 인사가 늦었군요.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류즈가 다가온 처용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동쪽의 마신에게 도움을 받을 줄은…….”
이미 류마에게서 처용이 누구인지 대략적으로나마 들은 상황이었다.
에스라 대륙의 동쪽에 나타나 한 국가를 집어삼키고 이단국을 세운 존재.
아스터 제국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천사들과 신들도 짓밟아 버렸다는 소문이 무성한 존재.
그런 ‘동쪽의 마신’이라 불리는, 소문으로만 접한 존재를 직접 마주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그런 동쪽의 마신과 루나, 류마가 함께 있을 줄은 더더욱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루나 님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동쪽의 마신, 처용이 루나의 편에 섰다는 것.
뱀파이어들의 내전에 간섭하여 뱀파이어 군주가 이기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왕족 파벌을 따르는 뱀파이어들은 크나큰 위기에 처한 상황.
악마와 계약을 맺어 강력한 어둠을 발휘하는 인간들이 반역자들을 돕고 있었다.
아스터 제국 또한 반역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상황이었다.
밤의 마신, 대악마인 아스모데우스가 에스라 성운의 신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두 세력이 손을 잡고 실시간으로 왕족 파벌의 뱀파이어들을 압박해 오는 상황.
왕족 파벌의 분위기는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스터 교단을 홀로 쳐부술 수 있는 동쪽의 마신이 왕족 파벌을 돕는다?
처용의 지원은 가뭄으로 말라 죽기 직전의 땅에 쏟아지는 단비와 같았다.
아니, 동쪽의 마신이 정말 소문대로의 무력을 가진 존재라면, 단비가 아니라 홍수라 봐도 무방했다.
“다른 왕족 파벌의 뱀파이어들은, 이 근방엔 더 없는 건가?”
처용이 감사를 전하는 류즈에게 묻자.
“저희가…… 마지막 그룹이었습니다.”
류즈가 어두운 표정으로 처용의 말에 답했다.
밤의 성채를 나와 외부에서 활동하는 왕족 파벌의 뱀파이어들.
그들의 주 역할은 흩어진 일족들의 수색과 구출이었다.
물론, 그 역할을 맡았던 이들 대부분이 아스터 교단과 반역자들에게 맹렬한 추적과 공격을 받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류즈마저 붙잡혔지만, 전멸의 위기에서 예상치 못한 구원을 받았다.
“흩어진 왕족 파벌 일족들이 몇몇 더 있긴 합니다. 그들의 집결 지점을 류마 님께 알려 주었습니다.”
류즈가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 그간 일들을 이야기해 준 류마는 왕족 파벌에 대한 정보를 듣고 그들을 찾으러 나선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은인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덕분에 이분도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류즈가 한 번 더 처용에게 감사를 전하며 옆에 있는 화려한 관을 응시하며 말하자.
“음, 살아남은 뱀파이어 왕족이라…… 이건 열지 못하는 건가?”
처용 역시 류즈가 바라보는 관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게…… 제가 열 수는 있습니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류즈가 처용의 말에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반역자들이 더러운 수작질을 해놓는 바람에……!”
손을 들고 관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관이 아닌.
-철크럭.
관 위에 감싸진 검은 사슬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이게 없었던 것 같은데……?”
처용이 류즈가 가리킨 사슬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분명, 류즈를 구할 당시에 잠시 확인했던 화려한 문양의 관.
그 당시 관 위에는 검은 사슬이 감겨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관을 열려고 할 때 나타난 건가?”
류즈가 관을 열려고 시도하려 할 때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놈들은…… 저주에 잠식된 제가 관을 열면, 이분도 같이 잠식시킬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검은 사슬을 노려본 류즈가 말을 이었다.
“제가 급하게 손을 떼서 저 사악한 것이 멈췄지만…… 더 건드릴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흐음, 대악마의 성물, 손을 댄 자의 저주를 옮기고 그 힘을 증폭시키는 능력인가?”
류즈의 말에 처용이 통찰의 눈으로 검은 사슬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그때.
-스르륵. 스륵.
처용의 뒤로 어둠이 일렁이더니.
“흩어진 이들을 모두 찾아냈어.”
루나가 나타나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류마를 포함한 다른 뱀파이어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류즈가 전해 준 정보를 따라 흩어진 왕족 파벌 뱀파이어들을 찾아 나섰던 이들이었다.
다행히, 피신한 왕족 파벌 뱀파이어들을 모두 찾아내었고 그들을 데려왔다.
“잘했어.”
처용이 루나를 향해 말하고는 검은 사슬이 감긴 관 앞으로 다가갔다.
“이것 때문에, 열지 못하고 있었구나.”
작금의 상황을 파악한 루나가 처용에게 말하자.
“맞아.”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은 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밤의 마신이 반역자들에게 하사한 사악한 성물입니다. 손대면 저주를 받-!”
그 모습을 본 류즈가 처용을 만류하듯 다급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검은 사슬 위로 스멀스멀 일렁이는 불길한 오라.
그 기운은 자신을 잠식하던 마신의 저주보다도 더 사악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직접 사슬에 손을 대 만진다면, 분명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스모데우스의 신물도 아닌 고작 성물 따위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촥! 으드드!
처용은 망설임 없이 관을 감싸고 있던 사슬을 잡아채 강하게 쥐었다.
-스르륵. 스륵.
강한 저주가 일렁이는 어두운 기운이 처용의 손과 팔을 타고 흘러갔지만.
“먹어 치워라.”
-우웅. 으드드!
처용에게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 포확의 힘이 사슬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저주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쩌적. 쩌저적!
검은 사슬에 점점 금이 가며 부서져 갔고.
-우득! 으드드!
사슬이 약해진 것을 파악한 처용이 힘을 강하게 주어 잡아 뜯었다.
-콰직! 콰드드득!
점점 금이 번져 나가던 사슬이 크게 부수어지며 통째로 뜯겨 나갔다.
“흐음, 판테라움을 합금한 금속인가? 가공해서 활용할 수 있겠네.”
-우우웅.
대악마의 성물을 가볍게 부순 처용이 손에 들린 사슬을 보며 읊조리고는 아공간 속에 집어넣었다.
“자, 이제 열 수 있겠지?”
처용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류즈를 바라보며 말하자.
“……아? 아, 네.”
류즈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관 앞으로 다가갔다.
“일어나십시오. 루세핀 님.”
-우웅. 스르륵.
류즈가 손가락에 어둠을 끌어올리고는 관 위로 알 수 없는 문자를 쓰며 말했다.
류마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가 루나를 깨우기 위해 했던 행동과 같은 모습이었다.
류즈가 ‘루세핀’이라는 왕족을 깨우기 위해 봉인을 풀 때.
“흠, 생각보다 수가 많군.”
처용이 임시 거점 안에 꽉 들어찬 이종족들을 둘러보며 읊조렸다.
이단 심문소에 구금되어 있던 이종족들은 그 수가 꽤 많았다.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이종족은 다름 아닌 엘프.
항구도시에서부터 두 곳의 이단 심문소를 연달아 격파한 결과.
“구해낸 동족들의 수만 백 명이 넘어갑니다.”
그곳에서 구해 낸 엘프들만 해도 백 명이 넘어갔다.
어느새 처용에게 다가온 테시아가 엘프들의 수를 언급하자.
“인어와 오크들도 수십 명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상태가…….”
세이렌인 프시케가 다가와 엘프를 제외한 다른 이종족들의 수와 상태를 이야기했다.
구출되어 임시 거점으로 온 이종족들의 전체적인 수는, 거의 삼백 명에 달했다.
“응급처치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해 낸 이종족들은 모두 실험체로 붙잡혔던 이들.
간단하게 응급처치는 끝냈지만, 응급처치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완전히 치료하려면, 성자, 성녀 언니나 이종국 원장님한테 데려가야 할 것 같아.”
이번엔, 다친 이종족들의 응급처치를 마치고 돌아온 연아가 처용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은 처용과 연아가 완치에 가깝게 치료할 순 있었다.
하지만, 그 수가 많은 만큼, 그들을 하나하나 돌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지금 있는 장소인 임시 거점은 말 그대로 임시 거점일 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관리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장 해야 할 일이 앞으로도 많은 상황.
이곳에서 죽치고 앉아 사람들을 돌봐주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대대적으로 한 번 정비할 필요가 있겠어.”
처용이 임시 거점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구출한 부상자들을 한 번 아라한 왕국으로 옮기고 다시 작전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중요한 정보를 가진 류즈와 루세핀이라는 밤의 왕족도 구한 상황.
한 번 정비를 마치고 다시 준비를 갖춘 상황에서 뱀파이어들의 내전에 개입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때.
-스르륵. 우웅!
류즈가 봉인을 해제한 듯, 관에서 어둠이 한 번 퍼져 나가더니.
-끼익.
관뚜껑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관이 완전히 열리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뱀파이어 왕족.
-스르륵.
루세핀이라는 이름의 왕족이 상체를 일으키며 핏빛 눈동자를 떴다.
겉모습은 루나와 같은 긴 머리의 흑발이 돋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루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인상, 마치 루나의 자매로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긴……?”
눈을 뜬, 루세핀이라는 이름의 뱀파이어 왕족이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 때.
-탁.
루나가 관에서 몸을 일으킨 루세핀을 향해 다가가 그녀에게 안겨 들었다.
“루나…… 리스?”
말없이 안겨 든 루나를 보며 잠시 당황한 루세핀은.
“……무사했구나.”
안겨든 루나를 마주 안아주며 안도를 표하듯 말을 이었다.
“가족을 다시 마주해서 다행이야.”
그 모습을 바라본 처용이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루나를 향해 말하자.
“응, ‘어머니’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루나가 안도감 어린 목소리로 처용의 말에 답하듯 말했다.
그 말에 처용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멈칫하고는.
“……네 형제들 중 하나라 생각했었는데-.”
루나와 루세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친자매로 보일 정도로 서로 닮은 긴 흑발의 두 여성.
둘의 사이는 자매지간, 혹은 친인척 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와 딸, 모녀지간(母女之間)이었다.
즉.
“뱀파이어 여왕이었어?”
이번에 구출한 뱀파이어 왕족, 루세핀은 그저 평범한 왕족이 아닌 뱀파이어 여왕이었다.
나 홀로 계승자